한국 사람은 노래를 좋아한다. 한 통계에 따르면 길모퉁이마다 성업 중인 노래방에서 매일 190만 명이 마이크를 잡는 곳이 한국이다. 그런데 요즘에는 방송사들 간에 이른바 써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 경쟁이 뜨겁다.
▲ 저자 황정미
환풍기 수리를 하던 젊은이가 일약 스타 가수로 탄생하면서 이른바 대박을 터뜨린 한 프로그램의 경우 전국 예선 참가자가 100만명을 훌쩍 넘어선다. 이런 `열풍`을 바라보는 시선도 다양하다.
써바이벌 오디션의 인기몰이는 대형 기획사가 만들어낸 아이돌 일변도의 가요계에 약이 되는 안티테제라고 지지자들은 주장한다. 외모는 `루저`급이라도 노래실력과 음악에 대한 열정만으로 스타가 될 수 있다는 메씨지는 분명 신선하다. 일부 언론은 한술 더 떠서 `공정사회`를 외친다.
학연과 지연으로 점철된 기성사회에 대한 반발심리로 사람들이 공개오디션을 찾아오며, 경쟁에서 진 참가자를 탈락시키는 게임의 규칙이 엄격하게 지켜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정사회 축소판인가 무한경쟁 각축장인가
그런데 과연 대중투표로 순위를 매기는 써바이벌 게임을 통해 `보통 영웅`이 탄생한다고 해서 공정사회 실현이 앞당겨질까? 프로그램 기획 차원에서는 매우 훌륭한 논리지만, 써바이벌 오디션이 우리 사회를 정의롭게 만들어줄 것이라 기대하는 순진한 사람들이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더 적극적인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무한경쟁 코드를 오락 프로그램 안에 심어놓고 승자독식을 자연스레 수용하도록 만드는 효과는 결국 신자유주의 식의 기획이 아니냐는 것이다.
약간 변형을 주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아메리칸 아이돌`이나 `브리튼스 갓 탤런트`로 널리 알려진 글로벌 콘텐츠의 틀을 수입했다는 점도 신자유주의 비판론에 설득력을 더한다.
적나라한 점수와 순위 공개, 심사위원의 독설, 탈락의 좌절과 합격을 위한 혹독한 연습 등 화면에 비친 출연자의 모습에는 요즘 청년들의 고단한 세상살이가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하지만 공정사회론이나 신자유주의 비판론이 놓치는 것이 있다. 우리에게 친숙한 원조 노래자랑 프로그램이 시들해진 이즈음, 써바이벌 오디션이 새삼스레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문화적 맥락을 들추어봐야 한다.
1980년 12월 시작된 장수 프로그램 `전국노래자랑`은 말 그대로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신명나는 노래판을 벌인다. 평범한 이웃들의 때로는 멋진, 때로는 망가지는 모습을 보며 함께 웃고, 한국인의 전형적인 공동체 정서를 확인하는 놀이문화가 바탕에 있다. 여기에서 노래는 공동체의 정을 확인하기 위한 매체 노릇을 한다.
`전국노래자랑`에서 진화한 놀이문화
그런데 요즘 써바이벌 오디션은 한층 진화한 모습이다. 예선 분위기는 `전국노래자랑`과 별반 다르지 않지만 일단 열명 내외의 본선 진출자가 가려지면 그때부터는 전혀 새로운 판이 벌어진다.
`18번 노래를 잘 뽑아내는`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매회 이른바 `미션`으로 주어지는 새로운 곡을 소화해야 하며 까다로운 과제 때문에 실수를 연발하기도 한다. 기성 가수 역시 다른 가수의 히트곡을 새로운 스타일로 표현하는 모험을 감수해야 한다.
`전국노래자랑` 외에도 다양한 형식의 가요순위 프로그램, 심야시간대의 콘서트 프로그램 등이 있었지만 이번 경우는 좀 더 새롭다. 가수가 자기 히트곡을 부르거나 익숙한 레퍼토리를 반복하는 틀에서 벗어나, 매번 선곡-편곡-새로운 스타일의 연출이라는 일련의 과정이 쇼의 중심으로 부각된다.
무대에 서는 것은 출연자 개인처럼 보이지만 이들이 보여주는 공연의 콘텐츠는 기획자, 편곡자, 보컬 코치, 반주를 담당하는 밴드와 악기연주자를 아우르는 하나의 큰 씨스템에 의해 좌우된다.
또 하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오디션이 연출하는 다양한 무대를 보고 감동할 준비가 되어 있는 대중의 취향이다. 누구는 선곡을 잘못 했다느니, 누구는 리듬감이 뛰어나다느니, 누구는 계속 같은 스타일의 노래만 부른다느니 하는 나름의 비평을 주고받으며 재미를 느끼는 익명의 청중은 써바이벌 오디션 열풍의 숨은 주역이다.
문화생태계를 풍요롭게 가꾸려면
`아이를 키우는 데 마을 전체가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써바이벌 오디션의 스타 탄생은 취향을 길러주고 재능을 인정해주는 대중문화 생태계가 있기에 가능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문화생태계 안에는 생산자와 수용자, 자본과 권력을 거머줜 대형 기획사부터 가난한 인디 뮤지션, 짬짬이 갈고닦은 실력으로 동호인 밴드를 결성하거나 자기 연주 장면을 동영상으로 찍어 공유싸이트에 올리는 프로슈머(prosumer, 생산자+소비자)까지 다양한 구성원들이 공생한다.
문화생태계의 생명력은 다양성과 개방성에서 나온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고 획일적인 자기증식은 곧 한계를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엇비슷한 아이돌의 난립, 이른바 중독성 강한 후렴구의 무한반복, 어느 가난한 인디 가수의 쓸쓸한 죽음 등은 대중문화 생태계의 위기를 알리는 적신호다.
써바이벌 오디션에서 엿보이는 다양한 음악 스타일과 개성, 그에 호응하는 청중의 취향이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녹색신호가 되기를 바란다.
문화생태계의 개방성과 다양성을 키우는 데 필수불가결한 것이 바로 문화권(cultural rights)이다. 문화권이란 누구나 문화에 접근하고 문화를 향유할 기회, 다양한 문화적 표현을 보장받을 권리를 말한다.
문화권의 위력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베네수엘라의 청소년 오케스트라 운동 `엘 씨스테마`다. 가난을 물려받은 아동과 청소년들이 무기나 마약 대신 악기를 손에 잡고 오케스트라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이들의 삶을 바꾸려는 운동은 1975년 허름한 창고에서 불과 11명의 청소년으로 출발했다.
그 후 무려 30만 명의 청소년이 이 프로그램을 거쳐 갔다. 현재 베네수엘라에는 500개의 오케스트라가 조직되어 있으며 이제 국제적 운동으로 확산되고 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오케스트라 프로그램을 정부가 지원하겠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엘 씨스테마`는 단지 글로벌 트렌드나 히트상품이 아니라 문화권 보장을 위한 사회운동이자 정책 인프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운동을 처음 시작한 아브레우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전국에 오케스트라의 씨를 뿌리면서 우리는 베네수엘라의 모든 지역에서 누구든 문화와 음악을 즐길 수 있도록 문화 접근권을 민주화했다."
경제적·사회적 약자 위해 문화 접근권 보장해야
최근 취업난으로 어려움을 겪는 젊은이들을 인터뷰하면서 경제적으로 어렵고 사회적으로 고립된 사람들의 문화적 목마름이 무척 크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내가 만난 많은 젊은이들은 취업 면접에서 계속 고배를 마시고 88만원에도 훨씬 못 미치는 아르바이트 수입으로 어렵게 생활하면서도 자기 나름의 문화에 대한 열정을 품고 있다.
구립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보거나 틈틈이 자기만의 이야기를 글로 쓰는가 하면, 아르바이트가 없는 날이면 집안 곳곳에 페인트칠을 하는 사람도 있다. 가난한 어린이, 청년 실업자, 은퇴한 노인, 그리고 인생의 고비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누구에게나 문화는 자신의 인간다움을 확인해주는 소중한 체험이기 때문이다.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쪼개어 피아노와 작곡을 배운다는 이야기를 비밀처럼 털어 놓던 서른 즈음의 한 청년이 기억난다. "열심히 연습해서 `슈퍼스타 K`에 나가보세요." 내 격려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 정도는 못되고요, 그냥 나중에 직장인밴드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써바이벌 오디션의 극적인 스타 탄생보다, 어느 청년실업자의 소박한 꿈이 내게는 훨씬 더 소중하고 아름답게 보였다. <창비주간논평>
저자 소개
황정미(黃晶美) 연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사회학과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음. 서울대 여성연구소 선임연구원 역임. 현재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HK연구교수. 저서 『우리 안의 이분법』(공저), 역서 『현대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공역)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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