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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장르포]이상한 섬 ‘강정마을’ 사람들
  • 김현정 정치부장

[김현정 부장:현장르포]어떤 이들에겐 ‘활동가’로 불리고 또 누군가에겐 ‘종북 좌익 세력’으로 불리게 된 강정마을 사람들...

 

평화를 바라면서 유혈 투쟁을 몇 개월이 넘게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누구인가? 그 이상한 나라는 어디인가?

 

2012년 가장 봄이 먼저 온다는 세계7대 자연경관으로 선정된 대한민국 최남단의 섬 제주도에서도 가장 남쪽에 위치한 강정마을이다.

 

 

지난 6일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날이었다.

 

강정에서 제주 해군기지 반대 활동을 벌여온 문정현 신부님이 이날 부활절을 앞두고 11시부터 진행된 미사와 십자가의 길 14처를 강정천부터 강정포구까지 이어가다 강정 포구 진입을 막으려는 해경에 떠밀려 포구에 쌓아둔 삼발이 밑으로 추락한 날이다.

 

문 신부님은 추락한 지 한 시간이 지나 구조돼 서귀포 의료원으로 옮겨졌다. 의식을 되찾고 머리와 다리의 골절로 전치 6개월 판정을 받기까지...함께 미사에 참여 했던 사람들은 충격에서 쉽게 헤어 나 오지 못했다. 그 여진도 겪어 보지 않은 자들은 감히 안다고, 이해한다고 쉽게 말하지 못했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문 신부님이 의식을 되찾고 주변인들과 몇 마디 말을 주고받고, 정밀 진단을 위해 제주시에 위치한 큰 병원으로 옮겨졌을 때, 또 하나의 예수 부활이었다고...

 

강정에는 문정현 신부 외에 외지에서 온 상주 활동가들과 강정 토착민 30여명은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제 19대 총선을 닷새 앞두고 강정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한반도 육지에서는 각종 흑색선전과 과열된 선거 운동으로 혼탁해질 때로 혼탁해질 때 늦은 밤 기자가 강정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이유는 평화의 섬이라 공언하고 평화의 섬에 잃어버린 평화를 되찾기 위해 맨 몸으로 유혈 투쟁을 이어가는 그들이 그토록 바라는 평화를 보고,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였다. 정책결정권자들이 추후에라도 복기하면서 다시는 이러한 일들이, 다시는 무의 상태에 불과한 이들에게 이념과 투쟁, 갈등을 불어 넣어 아비귀환으로 만드는 정책들을 너무나 쉽게 결정해버리는 경솔한 판단 앞에 겸손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기자가 6일 밤늦게 강정에 도착했을 때 투쟁가들은 늘 그렇듯 강정 코사마트와 나들가게 사거리 옆에 위치한 컨테이너로 급조해 만든 평화의 집에서 촛불 문화제를 이어가고 있었다.

 

 

서울은 아직 추워서 꽃봉오리가 겨우 움트는 지역이 한 두 군데였지만, 봄이 가장 빠른 이곳 강정은 벌써 벚꽃이 만개해 꽃잎이 흩날리고 있었다. 만월에 조금 못 미치는 달이 휘영청 밝았다.

 

봄은 왔지만, 바람 많은 제주도의 밤은 추웠다.

 

그곳 평화의 집에서 30여명은 기타도 치고, 애써 분위기를 띄워가며 늘 그렇듯 문화제를 끝까지 이어갔다. 평화의 집안 가운데 놓인 석유난로에서 나오는 훈기에 바람의 찬기운을 몰아내고 있었다.

 

이 날은 환경연합에서 열 명이 넘는 활동가들이 참석해 노래로 낮에 있었던 신부님 사고로 마음이 무거운 사람들을 위로 하려 애썼다. 사람들은 웃으면서도 슬펐다. 요즘 유행하는 은어 ‘웃프다’는 말의 뜻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생활을 잃어 버린 사람들, 그곳의 일상 ...

 

생업을 팽개치고 이곳 강정에서 두 달 넘게 생활하고 있는 40대 이모씨는 촛불 문화제 참석률이 저조하다며 괜한 짜증 섞인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들은 말 한다 ‘문정현 신부님은 이곳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였다’고...

 

사람들의 행색은 말도 못하게 초췌했고, 군색했고, 꼬질꼬질했다.

 

다들 몇 날 며칠 제대로 씻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고, 바닷바람과 햇살에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기미까지 까맣게 낀 얼굴이었다. 기자를 안내하던 30살 여성 활동가는 지난 주말에 유치장에 잡혀갈 때 입은 옷 그대로 그 때까지 입고 있었다.

 

옷에서 퀴퀴한 냄새까지 났다. 누구보다 미용에 신경 쓰고, 꾸미는 거 좋아하는 자신이 이곳 강정에서는 너무 건조해 핸드크림을 피부에 바를 정도라고 했다. 그도 세수도 제대로 못한 얼굴에 바르는 날이 더 많았다고 한다.

 

어떤 여성은 월남치마에 실내화 운동화 차림이었고 월남치마 안쪽에는 두꺼운 기모 레깅스 차림이었다. 그 위에 알록달록한 수면양말을 덧신은 모습을 보니 흡사 장날에 판 벌인 엿장수와 같았다.

 

마을 회관 한쪽에는 때가 낀 매트와 이불이 천장까지 쌓여있었다.

 

팔과 다리에 깁스를 한 부상자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진짜 전쟁터였다.

 

한쪽 벽에 패널이 보였다.

 

패널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구럼비(살리기)평화직접행동단 모집

조건 -경찰에 연행됨을 전제로 합니다.

-최소 3일의 신변정리

-일단 행동이 시작되면 선별 현행을 거부,

모두 연행되려 애써야(?)합니다.

 

특전 -구럼비에서 3일을 버티면 구럼비를 느낄 수 있습니다.

(유치장 투어로 대신할 수도 있습니다)

 

의의 - 부당한 공권력 무지몽매한 공권력을 평화로운 몸으로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1차 결행 -------4월 14일

 

신청 - 평화센터에 상단 관계자 그의 누구에게든 알려주세요.

 

- 1000명 동시 구럼비 진입해서 버티면 이 싸움 끝낼 수 있습니다.」

 

풀 메이크업에 향수 냄새를 풍기고 간 기자의 향기로움이 부끄러웠고 죄스러웠다.

 

밤 9시 30분 즈음 문화제가 끝나자 마을 주민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고 상주 활동가들은 의례회관에 짐을 푼 이들은 의례회관으로, 마을 회관 숙소에 짐을 푼 이들은 마을회관으로, 컨테이너 박스에 짐을 푼 이들은 컨테이너 박스로 발길을 재촉했다.

 

날짜를 헤아리기 힘든 날들을 이곳 강정이 고향 같다던 한 여성 활동가가 발길을 옮기며 “향수 냄새 좋다. 분 냄새를 언제 맡아 봤냐”라는 말에 가슴이 뜨끔했다.

 

월차를 내고 왔다, 하루 열 네 번의 폭발 소리를 듣고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회사에서 사용할 수 있는 연차와 휴가를 모조리 쓰고 이주 째 머물고 있는 30대 남성은 “내가 군대 와 있는 거 같아. 한 여자의 분 냄새가 이렇게 강렬하게 느껴지기는 군대시절 이후 처음이야...”라고 했다.

 

 

여기가 전쟁터였다.

 

몇 몇은 낮 시간에 벌어진 문 신부님 사고의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마을 회관에서 가까운 황제치킨 집에서 치킨과 노가리, 맥주한 잔을 곁들였다. 말없이 술잔을 비우거나, 담배만 뻐끔뻐끔 피워대는 이들이 많았다.

 

기자를 안내하던 30대 권모씨는 기자에게 말했다.

 

“많이 먹어요. 여기선 끼니때가 없어. 먹을 수 있을 때 많이 먹어야해. 어떤 날은 한 끼도 못 먹어요.”

 

튀김 닭을 뜯으며 그들의 무거운 분위기에 동참했다.

 

권모씨는 또 말했다.

 

“아까 평화의 집 맞은편에 있던 나들가게는 해군기지 찬성 가게라 사람들이 안가고, 대각선으로 있는 강정 코사마트는 반대 가게라 다들 그쪽으로 가요. 오다 보면 대나무에 노란 깃발 꽂은 집들이 있을 거예요. 그 집들이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집이에요.”

 

 

마을 주민 천여명이 살아가는 곳에서도 절반 정도만이 적극적으로 반대를 표하고, 나머지 절반은 의사를 표현 하지 않거나 찬성입장이라고 한다.

 

찬성입장은 주로 해녀들이라고 한다. 해녀들은 보상은 보상대로 받고 또 해군기지 건설 이후에도 해녀를 다시 할 수 있다고 한다.

 

자정 가까운 시간에 올레 7길을 따라 강정천까지 가보았다.

 

강정 포구에 갈 예정이었지만, 안내하던 활동가가 낮에 있었던 포구에서 문 신부님 추락사건 때문에 가기가 좀 꺼려진다고 했다.

 

기자를 안내하던 30대 권모씨와 김모씨는 신부님 떨어질 때 옆에 있었다고 한다. 다른 40대 남성은 자신이 신부님 뒤에 있었으면서 잡지 못했다고 한 참을 울었다고 한다.

 

 

올레 7길을 따라 강정 포구에 가는 동안에도 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포구 근처에 다다르자, 건설 현장을 둘러쳐놓은 펜스가 바다를 가로 막고 있었다.

 

전경을 태운 소위 말하는 닭장차가 늘어져 있었고, 차에서 쏟아져 나오는 불빛 속의 전경들은 쪽잠을 청하고 있었다.

 

강정천을 갔을 때 40대 남자 활동가는 설명했다.

 

“이곳 강정천 물은 일급수에요. 그냥 먹어도 되는 물이고. 구럼비 바위 안에서 샘솟는 물들이 있는데, 이제 그것들은 거의 볼 수 없어요. 발파 되고 난 후부터는...」

 

마음이 계속 무거웠다. 발걸음도 무거웠다.

 

누구를 위한 승리인가...

 

아름다워서 더 반대가 심한 곳 강정이었다. 그대로 아름다워서 유혈 사태가 벌어지는 곳.

 

30여명이 돌아가면서 한두 명씩은 유치장에 끌려가고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올랐던 엔지 젤터까지 유치장 신세를 졌다 추방당하고, 수단을 차려 입은 신부님이 유치장엘 풀 방구리 쥐 드나들 듯 드나드는 곳. 강정이었다.

 

새벽 두시가 넘은 시간 잠을 청하려 임시 숙소인 컨테이너 박스에 이부자리를 깔았지만, 전기장판 온도를 최대로 높였는데도 불구하고 도저히 냉기를 이길 수 없어, 공기라도 따뜻한 평화의 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평화의 집 한 구석에 몸을 누이니 따뜻한 온기에 살만했다. 비록 석유 냄새가 날 지언정. 매트 위에서 잠을 청하고, 새벽 7시 즈음 되었을까. 이곳 마을의 예쁨이자 활동가들의 귀염둥이 강아지 해피가 먼저 잠이 깨서 돌아다니고 해피의 어머니 40대 여성이 잠에서 깼다.

 

이 여성은 이미 경찰들의 방패에 맞고 강정 포구에 추락해 팔, 다리에 깁스한 지 오래였다.

 

적극 반대 주민이 아침부터 평화의 집에 들렀다.

 

전날 벌어진 문 신부님 사고 이야기다.

 

“어제 조현오 왔다고 보여준 다고 이것들이 더 난리라. 우리는 무기가 없으니까 이것들이 아주, 더 난리야. 선거 며칠 앞두니까 오늘은 조금 덜 할긴데. 아마 선거 끝나면 더 지독하게 나올 거다.”

 

“그래서 내가 우리도 하나 뭐 잡자고 생각해봤는데. 큰 바늘 이거 어때? 그것들이 때리면 바늘로 콱 찌르는 기야.”

 

1948년 제주 4.3사태 때 총칼과 죽창이 방패와 방망이, 큰 바늘로 진화하는 건가...

 

“이건 난 진다고 생각하진 않아. 이길 거야. 끝까지 버티느냐, 언제까지 버티느냐의 문제지, 난 진다고 생각하지 않아.”

 

전날에도 그랬다. 여긴 취재기자도 없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경찰들이 반대활동가들 끌려 갈 때 저항하는 여자들 가슴 만지고 성취행 하는 건 다반사라고.

 

기자는 단 하룻밤 만에 진 싸움이라고 깨달았는데, 열패감으로 희망이 들어찰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는데 이들은 어딜 보고 무얼 보고 “이긴다”는 희망을 다잡고 있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벌써, 구럼비 발파는 시작된 지 오래인데. 바다위에 떠 있는 공사 크래이너가 보이지 않는 것일까?

 

이 날은 아침부터 바빴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마을 의례회관 앞마당에서 열릴 ‘2012년 찾아가는 현장 위령제 강정마을 4.3 해원사생굿’때문이다.

 

4.3 피해자들을 위로하는 굿이었다.

 

전날 밤에도 뭔가를 뚜닥뚜닥 준비하더니 굿 준비였던 가보다.

 

의례회관 한쪽에서는 부녀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굿에 쓰일 음식과 참석자들을 대접할 점심 준비 때문이었다.

 

돼지 머리고기를 삶고, 제주 특산물 귤과 한라봉을 준비하고...식당 한쪽에 마련 된 방에서는 몇 몇 활동가들이 늘어진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크게 아픈 남자 활동가를 간호하는 어떤이...한쪽 구석에 죽 늘어져 있는 약병들.

 

이 정도면 비극을 넘어 희극이다.

 

굿이 시작되기 전까지, 평화의집 한쪽에 세워진 자전거를 타고 포구까지 나가 보았다.

 

포구 입구부터 늘어진 경찰들. 들어가려고 하니 방패를 든 경찰이 기자를 막아섰다.

 

“반대 활동하러 오셨습니까?”

 

“아니오. 그냥 왔는데요.”

 

“자전거에 써 있는데요.”

 

자전거에 강정 해군기지 반대라는 이름표가 앙증맞게(?) 써 있었다.

 

"빌린 건데요."

 

경찰이 높은 사람으로 보이는 경찰에게 가서 보고한다.

 

 

높은 사람이 들여보내라고 한다.

 

“이렇게 자전거 타고 여자 혼자 오는 경우는 괜찮아. 카약 실어 나르는 사람들만 아니면...”

 

카약을 타고 바다로 진입해 공사를 막는 활동가들을 막기 위해서였다.

 

포구에서 본 강정 해안가 구럼비 폭파 현장...고요하면서 조용한 천공기 소리가 먼 곳에서부터 울려 퍼졌다.

 

정말 꼭 해야 하나? 꼭 강정마을이어야 하나?

 

참여정부 말에 급작스럽게 선정되어 이 정부 들어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진행되는 군사기지.

 

참여정부의 한 축을 담당했던 유시민 통합진보당 공동대표는 언젠가 국회에서 기자들을 만나 이러한 의견을 피력했다.

 

“강정 해군기지 건설은 세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어요. 새로운 군사 기지가 필요한지, 2007년에는 새로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과 그 때는 상황이 변했잖아요. 세계적인 경제 공황이 있었고. 월가가 무너졌잖아요. 신자유주의의 몰락. 이것만 해도 큰 변화거든. 이 변화 요소 고려와 공사 기지 적합도, 그리고 주민들의 의사 수렴. 주민들이 반대하고, 그 기지가 지리적으로 적합하지 않다면 정책을 제고해야죠. 주민들을 설득할 때까지 설득하다 안 되면 말아야죠. 아무리 전 정권에서 결정했다고 그 이유를 대고 밀어 붙이는 게 옳은가요? 우리가 책상물림 서생도 아니고 정치인인데...”

 

전정권 탓 현정권 탓 혹은 세계적인 흐름의 변화, 마을 주민의 반대 할 게 아니라 겸손과 경솔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결정되기 전에 마을 주민의 의견수렴이 선행되었으면 어떨까? 기자가 포구를 나올 때 즈음 한쪽에서 경찰 한무리가 바다 쪽을 향해 돌을 던지면서 물수재비를 뜨고 있었다.

 

포구에서 다시 자전거를 타고 돌아와 의례회관에서 벌어지는 본격적인 굿판을 보는데, 지나가던 올레길 트래킹족과 하이킹 여행 족이 발길을 멈추고 굿판을 지켜보고 사진에 담는다.

 

 

이 기록이 추억의 아닌 역사로 남을 수 있을까?

 

다행히 이 날은 사이렌 소리가 안 울렸지만, 선거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밤이고 낮이고 울려댈 사이렌 소리에 뛰어 나가는 활동가들. 그 전쟁의 후폭풍으로 늘어나는 부상자들.

 

이들은 4.11 선거에 맞춰 집으로 갔다 투표한 뒤 다시 이곳 강정으로 올 거라 한다.

 

그 중에서는 다시 올 수 있을까를 믿지 못하는 이들도 많다.

 

그들은 타인을 믿지 못하는 것일까, 다시 오지 않으려는 자신의 마음을 믿지 못하는 것일까.

 

“투표 끝나고 안 올까봐 걱정이야. 나도 오늘은 올라가야 하는데, 신부님 때문에 가지도 못하고...”

 

40대 남성의 말에 30대 남성이 받는다.

 

“가려면 오전에 빨리 가세요. 저 가던 날 폭발 14번 해서 도저히 발걸음 안 떨어지더라고요.”

 

기자는 알 수 없는 죄책감과 혼란스러움을 가득 담고 평화를 위해 유혈 충돌을 이어가는 그 이상한 섬을 빠져 나왔다.

 

나오며 떠올렸다. 언젠가 읽었던 소설가 김 훈의 ‘공무도하’와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남쪽으로 튀어’를. ‘공무도하’는 해군기지 건설해 폐허가 된 제주도 한 마을에서 군사 훈련의 잔해가 남아 있는 바닷속 고철 따위를 주어다 팔아먹고 사는 베트남 출신 해녀와 한 남자의 이야기다.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시집온 불행한 여성이 바닷속에서 해삼이나 멍개 따위가 아닌 폭격기의 잔해를 주어 오고, 작은 통통배를 몰며 해녀를 물속으로 끌고 나가는 과거 노동운동가 출신의 남자. 노동운동의 패배가 인생의 패배로 이어진 남자. 그 남자가 베트남 여성의 이를테면 몸값을 대신 지불해주기 위해 장기매매를 한 내용의 소설.

 

그리고 ‘남쪽으로 튀어’는 과거 민주화 운동의 추억을 가지고 사는 무기력한 가장과 그 식구들이 남쪽 오키나와 섬에서 또 다른 군사기지 건설을 위해 마을을 철거하려는 공권력에 맞서게 되는 과정을 그린 소설.

 

그들 모두는 처절하게 졌다.

 

승리로 기록되지 않았다.

 

 

비극은 기록되지 않는다...단지, 기억 될 뿐이지만, 그 기억도 잊혀진다.

 

그러나 현실의 강정 마을에 사는 해군기지 반대 주민들과 활동가들은 말한다.

 

“이길 것이라고...진다고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고...

 

어떤 게 이기는 것이고 어떤게 지는 것일까.

 

이미 공사는 진행되고 있었다. 구럼비는 이미 폭파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알까?

 

강정마을은 점점 잊혀져 가고 있다는 걸.

 

굿판을 뒤로 하고 강정을 떠나오는 기자의 귓가에 울리는 노랫가락이 오랫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한 숨이랑 저 산에 던져두고 눈물일랑 저 바다에 던져두고 한송이 들꽃으로 살아 모두 모두 여기네 오십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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