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공세에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라는 게 있다!
▲ 정치부 김현정기자
흔히들 말한다. 정치에서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고...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꼭 정답은 아니다.
독재의 상징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도 차지철 중앙정보부 장관이 있었고,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도 복심 장세동이 있었고,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만든 육사 11기동기 모임인 ‘하나회’가 있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도 영원한 동지인 ‘상도동계’ 최측근들이 존재했고, 故 김대중 전 대통령도 군사독재 시절 가택 연금과 숱한 탄압 속에서도 ‘선생님’으로 부르며 목숨 걸고 따르던 ‘동교동계’가 있었다.
민주화의 봄이라고 하는 87년 이후에는 미국에서 재미교포 협회 회장을 맡았던 가발공장 사장 출신 박지원 현 민주당 최고위원이 있었다. 박 최고위원의 김대중 전 대통령 사랑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그 스스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원한 비서실장으로 불리기를 원하고 가장 그 직함을 좋아한다.
김 전 대통령을 만난 이후에는 옥살이 하던 4년 가까운 세월을 제외하고는 김 전 대통령의 대통령 퇴임 후에도 매일 같이 아침 문안 인사를 드린 것으로 유명하다.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하신 후에도 영부인 이희호 여사를 매일 같이 찾아뵙고, 박 최고위원의 부인은 이희호 여사와 밤샘 기도를 다닐 정도로 깍듯하게 보필하고 있다.
물론, 권력의 특성상 권력을 가진 자 주변에는 권력을 향유하기 위해 부나비처럼 날아드는 것은 만고의 이치라고 하지만 충심으로 그 사람을 보고 끝까지 곁에 남아 있는 진실 된 ‘충신’이 존재하기도 한다.
故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도 흔히 ‘친노’인사라고 불리는 이해찬 전 국무총리와 한명숙 전 총리, 노무현의 정치적 비서실장 유시민 통합진보당 대표 ‘좌희정 우광재’라고 불린 안희정 충남도지사와 이광재 전 강원도지사가 있다.
때로는 자신들이 모시는 ‘주군’을 위해 감옥행도 불사하는 모습도 종종 보인다.
장세동 전 비서실장이 전두환 전 대통령 대신해서 감옥살이 했던 사실도 유명하다.
안희정 충남도지사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만든 직후 대선자금 수사와 연관 돼 손에 수갑을 차고 감옥으로 향했던 모습이 방송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 됐던 때가 불과 9년 전 일이다. 노 전 대통령을 주군으로 만들고 그 충신들은 한 자리씩 했지만 그는 그 영광을 누리지 못했다. 이후에도 한 동안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하기 전까지 전 창신섬유 강금원 회장으로부터 불법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악의적인 의혹제기에 맘고생 꽤나 했었다.
그래도 그는 노 전 대통령을 단 한번 원망한 적 없었다.
왜 이런 이야기를 앞에서 길게 설명 했는가 하면, 박지원 최고위원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주군을 함께 모시면서 느꼈던 영광의 순간들은 함께 추억하고, 상처들은 감싸줬어야 했다. 감싸주지 못할 것이라면 최소한 잊어주기라도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동지다”
또 아무리 권력을 두고 다투는 피도 눈물도 없는 정치판이라고는 하지만 최소한의 금도는 지켜주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박지원 최고위원도 대북송금 특검으로 인해 양 손목에 수갑을 차고 검찰에 연행 당하던 게 불과 10년도 채 되지 않았다.
3~4년의 옥살이를 하고 옥살이 와중에 눈에 녹내장이 심하게 와서 한 쪽 눈 수술을 받기도 했다. 그 수술의 후유증으로 지금도 박 최고위원의 한쪽 눈은 어색하다.
박 최고위원 역시 감옥살이를 했지만 주군을 한 번도 원망하지 않았다.
박 최고위원은 최초로 정권교체를 이룬 장본인 중 하나이며 성공적으로 정권을 넘겨주기도 했다.
그런데 그 민주당에서 한나라당의 대북송금 특검법을 받아, 전 정권에서 대통령의 최측근 보좌관이었던 자신을 징역살이 시킨 것이다.
징역살이를 빠져나가려면 빠져 나갈 수도 있었다.
노 전 대통령도 2002년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면서 김대중 정권의 공과를 모두 안고 가겠다고 했다. 흔히들 여당 대통령 후보는 선거에 유리하게 하기 위해서 임기 말 레임덕에 걸린 현 정권의 대통령과 거리를 두려고 한다.
실례로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1997년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의 대통령 후보가 돼 김영삼 대통령과 끊임없이 거리두기를 했던 모습을 상기해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은 전 정권의 과오를 끌어안고 가겠다고 해서 호평을 받았던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금 현 민주당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 후배들이라고 불려도 무방하고 그 뿌리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새천년민주당 더 나아가서는 평민당 시절부터라고 해도 무리라고 할 수 없을 정도다.
노 전 대통령의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신을 계승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스스로도 노 전 대통령의 임기 말과 퇴임 후 그리고 서거 전까지 박연차로부터 거액의 비자금을 받은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으며 인권 유린에 가까운 공격을 받을 때도 민주당은 노 전 대통령과 거리를 두려 했다.
그러다 노 전 대통령 서거 후 노 전 대통령의 업적이 재평가 되고 폐족이라 불리던 참여 정부 인사들의 정치적 주가가 뛰면서 노 전 대통령의 업적을 계승하겠다며 반성문을 썼던 게 불과 3년 전의 일이다.
물론, 노 전 대통령이 검찰과 경찰, 언론으로부터 융단 폭격을 맞을 때 당시 18대 국회에서의 민주당 인사들은 노 전 대통령과 거리두기를 넘어서 몇 몇 의원들은 공격에 가세하기도 했었다.
새삼스레 마녀사냥이 될 것 같아 일일이 지목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친노 인사들도 누구 하나 목숨 걸고 노 전 대통령을 구하려 했던 사람이 없었다.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는 게 참여정부에서 정무직 공무원을 역임했던 인사들은 이명박 정부 들어서 시쳇말로 탈탈 털려서 정치적인 보폭이 넓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와중에도 국군과 인민군은 제네바 협정은 지키려 했는데...
그러나 5.4 민주당 원내대표 선거를 앞두고 19대 국회의원 당선자들에게 원내대표 후보자들을 알리고자 마련한 토론회에서 진행된 박지원 최고위원에 대한 정도를 넘어선 공격을 보면서 2008년과 2009년에 민주당 출입기자로 옆에서 지켜보면서 느꼈던 염증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물론, 원내대표 한 번 역임했던 분이고 4.11 총선 과정에서 지도부의 일원으로 패배의 책임을 지고 총사퇴를 주장했던 박 최고위원이 이해찬 전 총리의 제안으로 또 다시 원내대표에 출마하는 모습은 분명 후배들의 길을 열어주지 않고, 권력욕이 앞선 노욕으로 비춰질 소지도 있다.
하지만, 정당하고 도를 넘어서지 않는 비난에서 그쳤어야 했다. 어차피 선택은 민주당 19대 국회의원 당선자들의 몫이다. 심판은 거기서 받으면 된다.
상대당 후보도 아니고 자당 의원이며 선배다.
거기에 가장 정도를 넘어섰다고 느낀 부분은 25년 절친이자 호남의 동료인 이낙연 의원이 박 전 최고위원의 18대 총선 과정에서 공천을 받지 못해 탈당 후 무소속 출마해 다시 복당한 점을 비아냥 거리 듯 비난한 발언이다.
박 전 최고위원이 왜 탈당을 했는지 옆에서 과정을 지켜보았고, 국민의 정부를 탄생시켰던 동료라면 그 부분을 또 다시 헤집지는 못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호형호제하는 사이에서는...
박 전 최고위원은 김대중 대통령의 트레이드마크인 대북관계에서 ‘햇볕정책’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6.15 정상회담을 성공시켰다. 그 과정에서 북에 1억 달러를 송금시켰다. 그 일의 총 책임자가 박 전 최고위원 이었다.
그 일로 2000년 역사적인 6.15 남북선언이 체결되고, 이산가족이 47년 만에 상봉하는 역사적인 사건을 만들었다.
이로 인해 김 전 대통령은 남북긴장관계를 해결한 공로가 인정 돼 대한민국 최초의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김 전 대통령이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 위해 다리를 절룩이며 시상대위로 나가던 그 감격스러운 광경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2000년 호주 시드니에서 치러진 올림픽 입장식에서 남북 선수단은 공동 입장을 했고, 한반도기를 들었다.
이 때 관중들은 일제히 기립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고 노 전 대통령이 집권하자마자 국회에서 날라든 것은 대북송금 특검법이었다.
노 전 대통령도 재임하자마자 한나라당의 정권 흔들기가 극심했던 것이 사실이고, 노 전 대통령은 김 전 대통령이 ‘대통령 임기 중 벌인 통치행위’라며 ‘대통령 임기 중 벌어진 통치행위는 처벌할 수 없다’는 사법적 판단에 따라 당시 한나라당을 위시한 국회에서 제출한 특검법을 거부하려고 했었다.
이에 노 전 대통령은 당시 조용히 김 전 대통령에게 사람을 보내 이 같은 뜻을 전달했으나 소통 부족으로 김 전 대통령이 이러한 공식적 해명을 거부했기에 어쩔 수 없이 특검법을 받아들였다고 했다. 이 사실은 노 전 대통령의 자서전에도 자세히 기록 돼 있다.
김 전 대통령도 한반도 평화와 국가의 이익에 크게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에 실정법상 문제가 있음에도 이를 수용했다고 했다. 이 같은 내용은 김 전 대통령의 자서전에도 밝혀진 내용이다.
이후 특검은 사정없이 진행됐고, 이것이 현대 비자금 의혹으로 번져 박 전 최고위원은 모든 책임을 끌어안고 징역살이를 했다.
현대에서 비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은 이후 재판에서 무죄로 밝혀졌다.
노 전 대통령은 당시 조직이 큰 검찰에서 광범위한 계좌 추적과 수사를 통해 만에 하나 정치적 수사로 불똥이 튈 것을 염려해 차라리 수사 범위의 한계가 있는 특검법을 수용해 털고 가는 것이 정략적으로 더 낫다는 판단 하에 특검법을 수용했다는 견해도 자서전을 통해 밝혔다.
또 노 전 대통령은 이러한 저간의 사정을 김 전 대통령과 박 최고위원에게 설명하고, 박 최고위원과 유죄를 받은 관련자들을 사면했다.
그런데 민주당은 18대 총선 당시 박 최고위원을 비리전력을 이유로 공천에서 탈락 시켰다.
이후 박 최고위원은 김 전 대통령의 암묵적 허락 하에 민주당을 탈당하고 목포에 출마해 당선돼 정치적으로 재기 했다.
그리고 국민의 정부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인 6.15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그는 의원 회관집무실도 615호실을 쓰는 사실은 이미 새로울 것도 없는 만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다.
18대 국회에 입성해서도 박 최고위원은 낮은 포복을 유지하고, 민주당에 복당해서도 철저히 낮은 자세로 임했다.
이후 2009년 법사위 위원들로 구성된 천성관 전 검찰총장 후보 내정자에 대한 인사청문회에서 본인의 정보력을 바탕으로 뛰어난 활약을 해 정치력과 지략을 입증한 바 있다.
이것을 계기로 정책위의장을 거쳐 3기 원내대표, 지난 1.15 지도부 경선을 통해 최고위원에 입증됐다.
박 최고위원이 당을 위해 헌신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 과정에서 방법이 다소 타인들에게 과욕과 독단으로 비춰질진 몰랐을 지라도, 국민의 정부에서 한 배를 탔던 인사들만큼은 그의 탈당 전력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바로 민주정부 10년을 계승한다는 민주당 동지들이 기본적으로 지켰어야 할 덕목이었다.
국민의 정부를 비교적 성공시키고 주군의 정책을 받들어 사후 책임까지 졌던 그는 민주당에 의해 한 번 버려졌었다. 이후 철저히 낮은 자세로 다시 민주당에 돌아와 당을 위해 헌신했다.
아무리 선거에서는 인정사정이 없다고 하지만 적어도 함께 정권을 창출하고 함께 정권에서 머리를 맞댔던 인사들이 그것도 누구보다 사정을 잘 아는 아우가 형님에게 그러한 상처를 헤 집는 것은 비정하다 못해 잔인할 정도였다.
또 다시 자신들이 계승해야 한다고 부르짖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신을 자신의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취하고 버리는 모습과 결코 다르지 않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