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인은 24일 오전 9시,
▲ 최순덕 선생
- 빈소는 광주 한국병원 장례식장.
062-380-3041
백지동맹(白紙同盟)은 말 그대로 시험 때 학생들이 모두 짜고 아무것도 쓰지 않은 빈 답안지를 내는 일이다.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 전교생 시험 거부 투쟁인 백지동맹사건을 주도한 최순덕 선생이 별세했다. 향년 103세.
최 선생은 1929년 전남여고의 전신인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3학년 재학 중 학생회장으로 활동하며 11월 광주역에서 일어난 반일시위와 백지동맹사건을 주도해 퇴학을 당했다.
당시 3학년 재학 중 학생회장을 맡고 있던 최순덕 여사는 나주 통학열차에서의 일본 학생들과의 시비가 도화선이 돼 발발한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인 11월3일 광주역을 중심으로 대규모의 시가전이 벌어지자 동료들과 함께 시내로 나가 치마폭에 돌을 나르며 남학생들의 시위대에 전달하는 등 반일시위에 가장 먼저 뛰어들었다.
최 여사는 이날 대규모의 시위 과정에서 수많은 청년 학생들이 체포·구속되자, 이에 반발해 11월10일부터 치러질 예정이었던 중간고사를 전면 거부하는 ‘백지동맹’으로 일제에 온 몸으로 항거했다.
1954년 공로가 인정돼 학교로부터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유족은 이재웅 전 전남 완도경찰서장과 광주시 부교육감을 지낸 이재민 순천향대 교수, 이재균 씨(치과 원장) 등 6남 1녀가 있다.
발인은 24일 오전 9시, 빈소는 광주 한국병원 장례식장. 062-380-3041
백지동맹하면 노무현 대통령도 떠오른다. 그는 중학생 때 반이승만 ‘백지동맹’을 했다 -노무현 평전-(2장) 출생과 어린시절, 가족 이야기
노무현이 중학교에 들어간 무렵은 이승만이 대통령 4선을 앞두고 농성중이던 야당 의원들을 무술경관을 동원하여 지하실에 감금하고 자유당 단독으로 새 국가보안법을 처리하고, 가톨릭계 야당지 <경향신문>을 폐간시키는 등 폭정을 일삼고 있었다. 정권말기 현상이 도처에서 나타났다.
권력이 타락하면 아첨배들이 줄을 선다. 정ㆍ부통령 선거를 앞둔 1960년 2월 이승만 대통령의 생일을 앞두고 전국의 모든 학교가 대통령을 찬양하는 글짓기 행사를 열었다. 진영중학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노무현은 이것이 못마땅했다. 큰형님과 친구들의 이야기 속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잘못을 들은 터였다. 그래서 급우들에게 “백지동맹”을 선동하였다.
나는 이것이 부당한 일이니 백지를 내자고 급우들을 선동했다.
그렇지 않아도 글을 쓰기 싫은 터에 잘됐다면서 모두들 백지를 냈다. 나는 택(턱)도 없다는 뜻으로 ‘우리 이승만(택)통령’이라 쓰고 이름을 적어서 냈다. 감독하러 들어온 여선생님이 울음을 터뜨렸다.
괘씸죄에 걸려 교무실에서 종일 벌을 섰다. 그런데 그날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 박사가 미국에서 돌아가셨다는 뉴스가 신문에 났다. 선생님이 신문을 보면서 말했다.
“역시 이승만 대통령은 운을 타고난 사람이고 하늘이 내신 분이야.”
더 반감이 생겨서 반성문을 쓰지 않고 집으로 도망쳤다. 큰형님이 꾸지람을 했다. 잘못했다고 생각하면 반성문을 쓸 일이고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면 끝까지 버텨야지, 사내놈이 왜 도망을 치느냐는 것이다. 다시 학교에 갔다. 그러나 반성문은 끝까지 쓰지 않고 경위서만 냈다. 다행히 사건은 유야무야 되었다. 교감선생님이 나를 보고 "조그만 놈이 우월감이 굉장하다"고 했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 그땐 몰랐다. (주석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