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7일, 민주평화대행진으로 시작하는 광주의 5월 맞이
5월 17일 오후 3시, 광주 북구 금남로에 있는 수창초등학교 앞으로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다섯 시, 곧 있을 민주평화대행진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5.18 민주평화대행진은 수창초등학교 앞에서 출발해 광주일고 사거리를 거쳐 금남로 공원 앞까지 걷는 행사로, 금남대로 일대 4km 정도 되는 거리를 걸으면 미리 펼쳐놓은 전야제 무대 앞에 닿는다.
붐빌 만큼 사람이 모이자 곧 행진 선두를 맡을 트럭이 도착하고 광주 오월 풍물패가 사물놀이로 행진이 시작됨을 알렸다. 선두에 선 광주시장을 포함한 의원들과 여러 내빈들도 눈에 들어왔지만 고려인 독립 투사 후손 모임과 해외에서 온 광주 민주화운동과 오월 정신을 함께 기리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 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민주노총, 416연대, 광주416시민상주모임을 포함한 많은 참여 단체들도 눈에 띄었다.
5.18 민주평화대행진을 이끄는 커다란 트럭 위에는 젊은 여성 참여자가 올라섰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의 목소리가 돼 주었던 그 애끓는 음성 그대로, 가두 방송이 광주 전역에 울려 퍼졌다. '시민 여러분, 저희는 오늘 광주 오월 정신을 기리고 계승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단순히 재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시의성이 있는,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을 던지고 현 정권을 비판하는 호소력 있는 방송은 가다가 설 때마다 반복되었다. 시민들은 철저한 경찰의 교통 통제와 보호 아래 질서를 지키며 행진 대열 안팎에서 몸과 마음을 함께 나누었다.
- 통영 고성 사람으로서 다시 돌아보아야 할 광주의 오월
통영 고성 사람이라는 데에는 두 말 필요 없는 처지이지만 기자는 고등학생 때부터 한 해도 빼놓지 않고 광주에 갔었다.
해마다 소속과 위치는 달랐다. 담양에 있는 고등학교 학생으로서 멀지 않은 거리를 걸어 도보로 5.18 국립민주묘지를 참배하기도 하고, 서울 모 대학 인권위원회 위원 혹은 위원장 또 연대 단체 소속으로서 광주를 찾기도 했다. 해마다 오월이면 광주에 있었다.
올해는 출발점이 다르게 느껴진 것도 그래서일까. 통영 고성에서 광주로 가는 길은 조금 낯설었다. 이맘때 광주에 가서 몸과 마음을 오월 정신으로 무장하고 오는 것이 당연한 사람이 있는 반면에, 남의 일인 정도가 아니라 관심조차 없거나 그마저도 아니면 '북괴'의 침공으로 오해하고 있는 사람도 있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사실 기자는 오월에 광주에 가는 것과 광주의 수많은 영령들을 기리는 데에 의문조차 없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겨온 일이다. 그러나 그런 만큼 통영 고성 사람으로서 다시 한 번 광주의 오월 정신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무엇을 왜 잊지 말아야 하는가를 돌아보고,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광주의 오월을 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 "여러분, 우리는 오늘 이길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 5.18 전야제, 예술로 승화한 5.18 민주화운동을 기억하는 방식
5.18 전야제는 모든 무대를 하나의 연극 안에 포함시킨 액자식 구성으로 이루어졌다. 다른 많은 무대를 인상깊게 봐 왔지만 연극이 막바지에 다다를 즈음 전남도청을 사수하는 청년 장정들이 등장한 배경에서 울려퍼진 첫 소절은 탄식을 불러왔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 이길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영화도, 전쟁도 아니기에 저 해맑은 영혼들이 죽음 앞으로 뛰어드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시구가 전광판을 스쳤다. 그렇다. 그때는 현실이었고 지금은 역사가 되었다.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 마지막까지 광주의 심장을 지키고자 했던 청년들, 그 선두에 선 청년 배우의 패배와 실패, 절망과 좌절을 예감하는 한마디 말은 이 투쟁이 승리만을 염두에 둔 국가 간 전쟁도 아니요, 이권 다툼도 아니요, 오로지 자유와 민주화를 위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의 희생임을 실감케 했다.
'어린이와 여성들, 살고자 하는 시민 여러분은 돌아가십시오. 우리는 마지막까지 도청을 사수하겠습니다.'
살고자 하는 이는 살리되 죽음을 각오한 자들은 패배 혹은 죽음이 코앞에 있음을 알아도 끝까지 맞서 싸웠다. 그 자명한 사실을, 광주는 연극이라는 문화 예술로 승화해 후대에 전한 것이다.
-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만난 사람들
5월 18일 9시, 국립 5.18 민주묘지는 기자들과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정부 기념식에 초청받은 인사들과 기자들을 제외한 모두가 민주의 문 바깥에서 식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묘지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묘역으로 들어서기 전, 광장 입구에서 당시 시민군 전남도청 상황실장이었던 박남선 씨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광주 5.18의 진실을 모르는 일부 극우 인사들이 5.18은 북괴가 내려와서 일으킨 폭동이라고 국민들을 호도하고 있다. 5.18 민중항쟁은 다른 게 아니다.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던, 반反민주주의에 저항하는 운동이었다"라고 말하고, "이제 5.18은 전라도나 광주만의 민중 항쟁이 아니고 전 국민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광주 사람들이 싸웠던 사건이다. 이 좁은 나라에서 동서 갈등, 계층 간 갈등을 부추기는 세력들은 이제 퇴출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박관현 당시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 묘역 앞에서 만난 시민은 "형이 이 묘역에 있다"며 박관현 당시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을 소개한 뒤 그의 형이 있는 자리로 기자를 안내했다. 5월 23일, 전남대 쪽에서 집으로 돌아오다 계엄군의 총에 사망한 사연을 전하며 "정부 기념식에서 대통령이 국민 통합이나 화합에 대한 정확한 메시지를 전달해 줬으면 좋았을 것"이라면서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 역사는 기억하는 만큼만 기록된다
또 기자가 만난 사람 중에는 인도네시아와 태국에서 광주까지 온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광주의 민주화 운동은 인도네시아에서 온 나에게도 큰 의미가 있고, 국제 사회가 연대해야 하는 중대한 역사에 함께 하는 마음으로 광주에 왔다'고 말하며 '국제 사회의 연대(solidarity)'라는 가치를 거듭 강조했다.
이처럼 국제 사회에도 많이 알려진 5.18 민주화 운동은 흔히 말하는 '일부 시민의 폭동'이라거나 '북괴의 지령을 받은 것'이라는 일부 극우의 주장과는 전혀 다르다.
기자가 만난 사람들은 '동서, 영호남을 불문하고 광주 5.18 영령들의 억울함과 광주가 이어 받으려는 오월 정신을 바르게 알고 기억해 주기만 하면 된다'며 멀리서 오느라 고생했다는 말로 기자를 반겨 주었다.
묘지를 찾을 때마다 지금은 그 기억이 희미하더라도 꼭 잊지 않는 자리가 있다. 바로 공식적으로 첫 번째 희생자로 알려진 '김형철' 씨의 묘다. 그는 청각 장애인으로, 공수 부대의 '손 들어, 꼼짝 마'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해 총에 맞아 사망했다. 기자는 그 앞에 잠시 멈춰 서서 앞으로도 한 사람만이라도 잊지 않고 제대로 기억하리라고 다짐했다.
역사는 기억하는 만큼만 기록된다. 어찌 보면 기억하는 데에 집착해서 과거의 아픈 기억을 자꾸만 끄집어 내고, 괴롭거나 외면하고 싶은 사실을 자극적으로 전시하는 게 아니냐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이틀 간 지켜본 광주의 예술과 그 정신은 5.18을 마냥 아픈 상처를 후벼파듯 자극적으로 전시하지 않는다. 민주평화대행진과 전야제를 비롯한 많은 행사로 후대 사람들이 기억하고 또 잊지 않으며, 5.18 정신을 이어받아 더 나은 세상을 만들도록 격려하는 축제를 열어가고 있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당장 무언가를 하자는 게 아니라는 말을 먼저 하고 싶다. 광주가 5.18을 이렇게 기억하고 기록하듯이, 담양에서 5.18 민주묘지까지 걸어왔던 그 때의 마음 그대로 통영, 고성에서 다시 광주를 찾듯이, 그렇게 광주 오월 정신은 언제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는 시대 정신이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