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사상 초유의 광범위한 선거연합 실험이 최대 위기를 맞았다. 처음부터 선거연합에 소극적이었던 진보신당은 협상장을 떠났다. 연합의 최대 주주인 민주당은 어렵게 합의한 〈4당 잠정합의안〉을 거부하고 무리한 재협상을 요구하여 결정타를 날렸다. 지금 협상이 거의 결렬된 사태를 두고 그럴 줄 알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선거연합 추진 초기부터 대부분의 언론은 냉담했고, 호의적인 언론조차도 사석에서는 2009년 안산의 후보단일화 실패 경험을 들어 되지도 않을 일을 시작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나타냈다. 가다가 실패하면 부메랑이 되어 더 큰 매를 맞을 수 있는 상황에서 협상은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으로 어렵게 한걸음씩 전진해왔다.
살얼음판 걸어온 초유의 `정치실험`
민주당, 민주노동당, 창조한국당, 진보신당, 국민참여당 등 야5당은 희망과대안, 시민주권, 2010연대, 민주통합 등 시민4단체와 함께 민주주의 후퇴, 민생 파탄, 평화 위기로 특징되는 이명박 정권의 일방 독주를 막고, 지방자치의 건전한 균형을 회복하기 위해 선거연합 협상을 진행해왔다.
정당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드러나는 선거공간이라는 악조건 속에서 야5당은 정파성과 당리당략을 초월하여 미증유의 정치실험을 시작한 것이다.
야5당 대표가 2010 지방선거 공동대응을 검토·모색하기로 한 지 한 달 만인 2월 10일 드디어 야5당과 시민4단체가 공동협상기구를 공식적으로 발족했다.
이른바 `5+4회의`는 이명박 정부의 중간평가 성격을 갖는 이번 선거의 특성을 최대한 반영하여 현 정권의 일방적 정책기조를 극복하고 일자리·교육·복지·환경·평화 등 정책의제에서 미래지향적 대안을 마련하여 국민에게 희망을 주겠다는 큰 방향성을 합의하고 선언했다.
`5+4회의`는 약 한 달간의 토론과 협상을 거쳐 3월 4일 〈제1차 5당 합의문〉을 내놓았다. 이 속에서 광역과 기초를 망라한 전면적인 연합을 추진하고, 가치와 정책이 중심이 되어 상호 호혜와 배려를 바탕으로 유권자와 지역의 의사를 존중하는 방식의 선거연합을 위한 구체적인 원칙들과 일정을 발표했다.
3월 8일, `5+4회의` 산하 정책연합위원회는 그동안 여러 차례의 공개토론회와 내부 논의를 통해 형성해온 합의를 바탕으로 〈5당 정책연합 1차 합의문〉을 발표했다. 합의문은 일자리, 교육, 복지 등 12개항의 공동정책 핵심의제를 담고 있고, 이후 가치정책이 중심이 되는 선거연합을 구체화·풍부화 해갈 것을 천명했다.
이처럼 계속된 논의를 바탕으로 시민4단체는 우선 수도권을 중심으로 구체적 원칙과 기준, 향후 일정에 대한 선거연합안을 성안하여 야5당에 제안했다. 이 제안에 대해 민주당, 민주노동당, 창조한국당, 국민참여당은 합의했지만 진보신당은 동의하지 않고 협상중단을 선언하고 떠나버렸다.
야4당과 시민4단체는 3월 15일까지는 구체적인 협상안을 만들기로 국민에게 약속한 일정을 고려하여 일단 야4당끼리라도 합의문을 발표하고 진보신당에 대해서는 문을 열어놓고 계속 참여를 촉구하기로 했다.
합의안에 대한 민주당의 급제동
협상만료일을 최대한 지키기 위해 밤샘협상을 통해 만들어진 〈4당 잠정합의안〉에는 서울·경기지역의 광역단체장 단일후보 선출의 원칙과 일정, 호혜와 양보와 경쟁력에 기초한 기초단체장 지역의 분류, 광역의원과 기초의원에 대한 연대 비율 등이 매우 구체적으로 담겼고, 다른 지역의 선거연합 발표 일정까지 명시되어 있다. 잠정합의안을 보도한 언론들은 사상 초유, 미증유 같은 표현을 쓰며 협상의 성과를 대단히 높게 평가했다.
선거연합의 당위에 동의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합의안의 일정과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우리 정치를 한 단계 도약시키고, 정치 불신에 빠진 국민에게 새로운 정치에 대한 희망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감격했다. 그런데 3월 16일 합의문 발표 예정 시간 직전에 민주당은 발표에 제동을 걸었고, 다음날 민주당 최고위원회는〈4당 잠정합의안〉의 인준을 거부하고 재협상을 요구하여 선거연합을 절망에 빠뜨렸다.
정치를 사람과 사람, 집단과 집단 사이의 갈등을 해결해가는 과정이라고 볼 때 정치의 꽃은 협상을 통해 합의를 이루어내는 것이다. 지금 진행 중인 선거연합은 대의명분과 공동의 목표, 자당의 이해관계, 단기적인 이익과 장기적인 이익 사이에서 절묘하게 합의점을 찾아나가는 고도의 균형 감각이 필요한 합의제 민주주의의 실험과정이다.
필요한 기준이나 잣대를 합의에 의해 정하고 어느 일방의 이익이나 희생이 아니라 모두가 윈-윈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각 당이 지닌 정치적 실력과 책임감이 그대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대결의 정치, 배제의 정치가 판치는 정치현실에서 선거 결과를 떠나 광범위한 선거연합에 합의하고 결실을 맺었다는 사실 자체가 정치의 진보이고 최대의 성과일 수 있다.
우리는 그동안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길을 잘 개척해왔고, 선거연합이 국민의 뜻이라는 공감대 위에 〈제1차 5당 합의안〉과 〈4당 잠정합의안〉을 성과로 가지고 있다. 협상이 위기에 빠진 지금, 이미 합의한 약속에서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제1차 5당 합의문〉에는 광역단체장의 경우 5당이 합의하여 후보를 정하고, 합의하지 못할 때는 5당이 합의하는 경쟁방식을 통해 후보를 정하기로 했다. 진보신당과 민주당이 공당(公黨)이라면 우선 이 합의에 충실해야 한다.
정당간 합의와 국민 앞의 약속에서 재출발해야
무엇보다 〈4당 잠정합의안〉의 기본을 다시 살려내 현재의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민주당의 전향적인 태도 변화가 절실하다. 만약 정치연합이 끝내 결렬로 주저앉는다면 정치적 책임을 묻는 모든 화살이 민주당에 집중될 것임을 알아야 한다.
위기를 초래한 민주당의 재협상안은 그동안 광역단체장에 대해 경쟁력 위주의 단일화를 주장해오다가 유시민이라는 강자가 나타나자 태도를 바꿔 그를 후보에서 제외시키거나 자당에 절대 유리한 방식의 경쟁규칙을 요구하는 이율배반적인 내용이다. 민주당은 이러한 불합리를 바로잡고 광역단체장에 대한 공정한 경쟁방식을 내놓아야 한다.
민주당은 기초단체장과 광역의원, 기초의원에서의 연대가 표의 분산을 막을 뿐 아니라 선거연합의 성사라는 씨너지효과를 통해 훨씬 많은 지역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연합정치의 상식에 기초해서 호혜의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
또한 계파와 지역의 작은 이해관계를 떠나 국민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선거연합에 헌신하겠다는 내부 결의를 다져야 하고 무엇보다 지도부부터 자기희생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
만약 이미 합의된 연합정치의 정신을 무시하고 당리당략이나 몇몇 실력자의 정치적 욕심에 매달려 선거연합을 깨뜨린다면 범국민적인 비난은 물론 현실적인 저항에 직면할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혹시라도 상대편의 실책과 실정에 기대어 민주당 단독으로도 일정한 승리를 얻을 수 있다는 얄팍한 계산을 하고 있다면 수권정당, 대안정당으로서 인정받는 것을 포기하는 길이고, 그 결과도 감동적인 선거연합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성과와 정치적 효과에 비할 바가 못 될 것이다.
진보신당은 지금 국민이 원하는 최고의 진보정치가 입으로만 외치는 정책 해설이 아니라, 실천적인 선거연합을 통해 이명박 정부의 일방독주를 막고 지방정치에 참여해서 희망을 보여주는 일임을 읽어야 한다.
선거연합 협상을 못하겠다는 것은 정치적 무능에 다름 아니다. 진보신당은 즉각 협상에 복귀해서 선거연합을 더 역동적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선거연합을 통해 능력 있는 당원들이 정치적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진보신당이 선거연합을 주도하지는 못할망정 판을 깨는 역할을 하거나 끝내 외면한다면 거꾸로 대다수 진보적인 국민으로부터 외면당할 것임을 알아야 한다.
국민참여당의 유시민 후보에게는 주장이 아니라 호소를 하고 싶다. 자신이 수차례 강조해온 감동적 선거연합의 성사가 눈앞에 있다. 선거연합만 된다면 어떤 룰도 합의해줄 수 있다고도 했다. 지금 그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바보정치`를 실현하는 길이 무엇일지 깊이 생각하고 있을 것으로 믿는다.
선거연합, 유일하고 유력한 대안
야5당은 엄혹한 정치·사회 현실을 돌파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대안이 선거연합이라는 공통의 상황인식을 다시 확인해야 한다. 선거연합은 야5당에는 귀중한 정치적 경험과 공동승리를, 국민에게는 정치참여에 대한 기쁨과 희망을 줄 것이다. 야5당은 다가올 2012, 2013년과 더 먼 미래를 보면서 이번 선거연합을 이뤄내야 한다.
특히 민주당은 정권의 실정에서 반사이익을 얻는 `뺄셈의 정치`가 아니라, 선거연합을 성사시켜 국민의 감동을 끌어내는 `덧셈의 정치`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번 선거를 통해 정권교체의 단초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위기를 통해 `5+4회의`는 서로의 입장과 능력을 다시 냉정하게 점검해볼 기회를 얻은 측면도 있다. 이미 다른 길을 찾기에는 너무 멀리 와 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5+4회의`가 될 것으로 믿는다. 이제 공은 민주당으로 넘어가 있다.<창비주간논평>
저자 소개
전민용 / 희망과대안 운영위원,
<건치신문> 대표이자 `희망과대안`에서 보건의료부문을 대표해 운영위원으로 활동중이다. 비산치과 원장으로 있으며,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대표, 대한치과의사협회 이사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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