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말엽의 방랑시인 김삿갓으로 불린 김병연
`날짐승도 길짐승도 다 제집이 있건만
나는 한평생 홀로 상심하며 살아 왔노라
짚신에 대지팡이 짚고 천리 길 떠돌며
물처럼 구름처럼 가는 곳이 내 집이었다
어린 머리칼 차츰 자라면서 운명이 기박해져
화를 입은 집안은 상전(桑田)이 벽해(碧海)로 변했네.
돌아가자니 어렵고 머무르기도 어려워 얼마나 긴 세월 길가에서 헤매야 하는가.
발길 닿는 데로 전국을 유랑하며 인간사 희노애락(喜怒哀樂)에 오욕, 칠정(七情)을 시로 읊었던 그는 서민 문학의 대가가 되었다. 워낙 글재주가 뛰어난 것이 그의 인생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는 20세가 되었을 때 영월 동헌 향시를 보았다. 그때 시제로 나온 것이 역적 김익순 을 비판하라는 것이었다.
김익순은 그의 조부이며 선천부사 로서 홍경래 반란군에게 투항하여 역적이 된 사람이었다. 그는 울분을 토하듯 호기 있게 획을 그어댔다.
`신하라고 불려오던 저 김익순 아 듣거라
정공은 문관 이면서도 충성을 다하지 않았더냐.
한나라의 이능은 농서에서 항복 했으니 너와 같은 부류이며.........
이렇듯 통렬한 비판의 글은 그의 출중함을 드러내 보여 장원급제를 했다. 그러나 그 뒤에 그 김익순이 바로 조부임을 알고 나서 조상에 대한 죄책감으로 자기 자신을 용서 할 수 없어 방랑의 길을 떠나 세상을 개탄하고 조소하는 시를 쏟아 놓으며 살았다.
세상에 대한 또 자신에 대한 조소였다. 머리를 하늘아래 드러내지 못한 채 항시 삿갓으로 가리고서......
그러는 것이 그에게는 조상에게 속죄하는 길로 여겼던 것이다.
사람은 움직임에 따라 운명과 운명의 갈래가 있다고 할 때 운명을 절대적인 것으로 보면 그것은 하나의 체념이고 자신을 절대적인 것으로 보면 그것은 경거망동으로 비친다는 말이다.
그것은 김삿갓에게 후세의 사람들이 죄 값을 치루는 것이 처자를 버리고 방랑을 하는 것이냐 고 비판을 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다. 그러나 자신의 행동이 세상의 눈에 어떻게 비치든 인간에게는 자신을 절대적으로 믿고 움직일 수밖에 없는 하나의 선이 있다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 이재신 문학평론가
인생은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갈 천리가 있다. 오로지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 누가 타인의 삶을 왈가왈부(曰可曰否) 할 것인가. 그저 내 삶의 잣대로만 삼아 옳은 것을 지향하고 아닌 건 지양하면 될 것이다.
하동의 마석리 산위에는 김립(金笠)이 그토록 그리워하면서도 돌아오지 못하던 생가가 그의 무덤을 내려다보고 있다. 한 많은 세상을 떠돌며 살다가 동북의 적벽강 기슭에서 하늘을 보고 눈을 감았다는 그의 시신은 3년 뒤에 아들에 의해 이리로 이장(移葬) 되었단다.
가문을 욕되게 한 죄를 방랑으로 잊으려 한 그가 잘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마음만은 강물처럼 모든 이의 마음속을 흐를 것 같다.
재산다툼으로 부모를 형제를 난도질 하는 현대에 김삿갓의 행로를 깊이 새겨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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