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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왜 ‘분노 신드롬’ 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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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욱열 강남대 대우교수·

   한국지역인터넷언론협회장

   정치학 박사

서점가에 때 아닌 분노가 폭발하고 있다. 다름 아닌 스테판 에셀이 지은 ‘분노하라’는 제목의 번역서 얘기다. 88쪽밖에(실제 본문은 30쪽 정도) 되지 않는 분량인데도 프랑스에서만 지난해 출간 7개월 만에 200만부 이상 팔렸으며 전 세계 20여 개국에서 출간 되거나 출간 예정이라고 하니 가히 ‘분노 신드롬’이라 할만하다.

 

한국에서도 예외 없이 초판 2만부가 매진되어 2쇄 인쇄를 준비 중이라고 한다. 책이라고 하기보다 팸플릿 수준정도인 번역서가 날개 돋힌 듯 나가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생각해보니 하나는 우리현실이 책의 주제와 부합되는 측면이 있고 다른 하나는 94세의 고령임에도 그가 던지는 화두가 제법 묵직하기 때문이다.

 

독일 태생에 전직 레지스탕스 투사, 유엔주재 프랑스 대사, 유엔 인권위원회 프랑스대사를 역임한 특이한 이력의 저자가 레지스탕스의 기본 동기는 ‘분노’였으며 젊은 세대에게 ‘분노의 총대를 넘겨받아 레지스탕스의 유산과 이상을 부디 되살려 달라’고 호소한다. 덧붙여 ‘무관심이야 말로 최악의 태도이며 지금은 분노하고 저항해야 할 때’이며 ‘비폭력의 방식’을 확산하자는 외침에 프랑스가 뜨겁다.

 

국가의 최고영역까지 금권의 충복들이 장악하고 민영화된 은행들은 우선 자기들의 이익배당과 경영진의 고액연봉액수에나 관심을 보일뿐, 일반대중의 이익 같은 것은 아랑곳 하지 않는다. 극빈층과 최상위 부유층의 격차가 이렇게 큰 적은 일찍이 없었다는 노투사의 지적은 우리사회의 모습과 닮은꼴이다.

 

주위를 둘러보자. 우리사회 도처에서 분노가 끓고 있다. ‘나라가 썩었다’는 대통령의 발언은 절박한 현실인식을 토로한 것이다. 개인적인 사감(私感)이 아닌 정의를 위하여 불의를 참지 말고 ‘분노하라’는 직설적이고 선동적인 메시지에 관심이 가지 않는 것이 도리어 이상할 지경이다.

 

존 케네스 갈브레이는 그의 저서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현대를 불확실성의 시대(The Age of Uncertainty)로 규정했다. 사회의 예측 가능성이 낮아지고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불안은 커진다. 불확실성이야 말로 불안을 키우는 토양이라는 것이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시계(視界)제로’ 상황이 문제인 것이다.

 

물론 불안은 그것에 맞설 때 내가 원하는 것을 하게 만들고 내가 가고자 하는 길로 서둘러 이끄는 매우 강력한 긍정 에너지가 된다는 것을 부인 하지는 않는다. 불안을 극복하려는 개인의 놀라운 에너지가 분출될 수 있도록 근본적인 대책이 절실하다. 그것은 바로 미래 세대에게 서둘러 확실한 희망과 비전을 제시하는 길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너·나 할 것 없이 미래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고 있다는데 절망하고 있다. 이 문제는 좌·우 이념이나 세대 차이를 떠나 우리 공동체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과제다. 머뭇거릴 필요도 없이 바로 나라 전체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한다.

 

프랑스에 레지스탕스가 있었다면 우리는 그것을 능가하는 수많은 의병이 있어왔다.

 

국가가 외침(外侵)으로 인해 위태로울 때 정부의 명령이나 징발을 기다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일어나 싸웠던 민병(民兵). 공분(公憤)과 의분(義憤)은 반죽을 부풀릴 누룩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러한 일들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을 누가 할 수 있겠는가. 공정한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가 자꾸만 사라지고 있는 이 마당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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