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지, 억압, 감시, 조작, 사이렌의 추억
나중에 커서보니 정치란 베푸는 것이었다.
국가와 정부가 뒤에서 궂은일을 도맡아 함으로써 백성들에게는 편안히 생업을 돌보며 두 다리 뻗고 잠잘 수 있게 하는 것, 대저 이런 것이 올바른 정치인 것이다. 반면에 독재라는 것은, 통치자들 스스로가 은밀히 안락과 특권을 누리기 위해 서민들에게는 온갖 궂은일을 강제하면서, 자신들의 비리가 폭로되지 않도록 국민의 눈과 귀를 억지로 틀어막으려 설쳐대는 바로 그 짓거리다. 독재자는 우선, 추구할 국가적 과업을 국민의 동의가 아니라 자신의 자의에 따라 전횡적으로 설정해가며, 둘째, 오직 자기 자신만이 이 과업을 능히 해낼 수 있다고 확신하고, 셋째, 그 과업의 달성을 위해 온갖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박정희는 전형적인 독재자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과거 독일이 통일되기 이전 동독을 거쳐 서독으로 열차를 타고 가다 보면 가장 두드러지게 눈에 뜨이는 두 나라의 차이는 구호와 현수막의 현란한 나부낌이다. 물론 동독이 그 현장인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남루한 건물들의 음산한 색조를 배경으로 오직 생생이 살아 꿈틀거리는 것은 유일하게 그 구호요, 현수막뿐이었다. 국민의 합의가 아니라 일방통행 식 강제가 통치의 본류를 형성하는 곳에 흔히 나타나는 광경들이다. 박정희 시대도 물론 예외가 아니었다. 이 시대의 가장 상징적인 구호는 “일하며 싸우고, 싸우며 일하세”였다. 일과 싸움질, 그것은 곧 ‘개발’과 ‘안보’를 뜻한다.
한마디로 박정희 시대는 개발독재를 국가안보로 정당화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개발 그 자체가 아니라 개발을 빙자한 독재야말로 ‘안보 위기론’에 의해 합리화되지 않으면 안 되었던 불의 그 자체였던 것이다. 미국의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는 “폭력은 정당화될 수(justifiable) 있다. 그러나 결코 정당한(legitimate) 것이 되지는 못 한다”고 설파한다. 독재 역시 정당화될 수는 있지만 결코 정당한 것이 될 수는 없다. ‘안보 위기론’은 곧 독재의 정당화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대학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이러한 독재와 안보가 빚어내는 코미디 앙상블을 관람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우리는 북한 김일성 주석의 환갑잔치를 서울 한복판에서 치러야 할지 모른다고 법석을 피우는 조작된 광기 속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책을 읽건, 말을 하건, 사람을 만나건, 심지어는 머릿속에서 공상을 하건 간에, 조금이라도 정권에 기스를 내는 일이라면 이내 김일성과 연계되었다. 우리는 소곤거려야 했고, 눈치를 살펴야 했고, 포승줄에 묶여 가는 동료들을 바라보며 불편한 양심을 달래야 했고, 쓰디쓴 소주로 우리의 비굴과 우리의 만용과 우리의 방황과 우리의 치기를 위로해야 했다.
그러나 정권은 보다 강인했다. 그들은 그러한 일상적 감시에 만족치 않고 그에 덧붙여 정기적으로 사이렌을 울려대었다. 매달 15일 오후 2시가 되면 우리는 잘 길들여진 군용견처럼 눈에 보이지도 않는 적기를 피해 잽싸게 지하도로 몸을 숨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무슨 광대 짓이었던가! 그러나 휴전선에 근접한 서울이라 어느새 적군들의 포탄이 우박처럼 쏟아질지 모른다고 윽박지르면서도,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전쟁이 터진 양 전국적인 공습훈련을 숨가쁘게 되풀이하면서도, 수도를 더욱 안전한 후방으로 옮기려는 시도 따위는 결코 하지 않았다.
전혀 딴판으로 오히려 수도 서울에는 고층건물들이 마치 개발의 성과를 과시하는 것처럼 나날이 쑥쑥 솟아 올랐다. 적군의 포탄이나 적기의 폭격에 금세 산산조각 나버릴 터인데도, ‘개발’은 북한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경제개발은 안보위기 따위를 도무지 거들떠보지 않았던 것이다.
개발독재, 군대식, 불신 시대의 절대군주
우리는 불신을 배웠다. 그러한 불신은 권력을 향해서만 조준되지는 않았다. 전라도 사람은 경상도 사람을 믿지 않았고, 민간인은 군인을 믿지 않았으며, 노동자는 기업가를 믿지 않았고, 국민은 지배자와 그 주위를 배회하는 자들을 믿지 않았으며, 권력자들 역시 서로 서로를 믿지 않았다. 총체적 분열이었다. 불신은 단순히 ‘풍조’ 정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삶의 뿌리가 되어 있었다. 믿음이 없는 사회에 어찌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들이 제대로 대접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한탕주의와 황금만능주의가 활개 치는 세상이 눈앞에 펼쳐졌음은 그 자명한 결과였다.
군인들은 역시 달랐다. 한국 군부는 일찌감치 사회적으로 거의 유일하게 근대화된 조직체계를 미국으로부터 전수 받았다. 게다가 6.25 전쟁을 치름으로써 그들 스스로가 민족적 사명감에 얼마나 투철한가 하는 것을 대외적으로 과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까지 향유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군대식 조직원리와 사고방식을 가능한 폭넓게 사회적으로 확산시키는 일이야말로 곧 민족적 소명의식의 발로로 미화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전쟁을 치르던 독일이나 이스라엘에서도 존재해본 적이 없는 군사교련을 평화로운 대학 캠퍼스에서 일상적으로 이수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대학까지 얼룩무늬로 뒤덮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군사문화는 곧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갔다.
바야흐로 우리나라는 ‘고지점령 식 정치문화’로 뒤범벅되었다. 일단 정해진 목표는 어떠한 불법적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정해진 기간 내에 달성하거나 달성한 것처럼 꾸미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윽고 명령복종이 사회적 미덕으로 기림을 받았다. 그와 더불어 소신과 경륜 대신에, 아부와 눈치보기가 공직사회의 덕목으로 자리잡았다.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히틀러가 유태인을 학살한 잘못도 있지만 예컨대 전 독일을관통하는 고속도로를 뚫은 공로도 있음을 ‘공평히’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를 잘못한 일도 있지만 잘한 일도 많은 정치가로 대접하는 것이 공정하고 객관적인 판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를 무조건적으로 독재자요, 반인륜적 파시스트로 단죄하는 것이 보다 합당한 역사적 판단일까? 나는 두 번째의 평가가 정당하다고 믿는다.
박정희 시대도 대체로 비슷한 범주에 속한다. 프랑스의 위대한 정치사상가인 토크빌은 절대군주는 자신에게 저항하는 자의 육체에 고통을 가함으로써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켰지만, 민주주의 시대는 소수의 영혼에 고통을 가함으로써 다수의 의지를 관철시킨다고 말한다. 그러나 박정희씨는 육체와 정신을 가리지 않고 위해를 가함으로써 자신의 개인적 의지를 무조건적으로 관철시켰다. 그는 민주주의 시대의 절대군주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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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교수)
· 한겨레 신문 객원 논설위원
· 학술단체협의회 대표간사
· 미국 Berkely 대학 및 캐나다 뱅쿠버 대학(UBC) 객원교수
· 저서 :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와 전망>,<우리 시대의 상식론>, <21세기 한국의 시대정신> 등 다수
<영광함평 인터넷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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