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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오늘]서기 668년 9월 21일 고구려 멸망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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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 강대국 고구려(高句麗)가 멸망한 날이다. 멸망의 원인은 내분이다. 665년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죽자 그의 아들 연남생(淵男生)·연남건(淵男健)·연남산(淵男産) 형제는 막리지(莫離支) 자리를 둘러싸고 서로 내분이 일어났다.

 

자중지란(自中之亂)은 같은 편끼리 하는 싸움이다. 싸움이나 다툼은 상대나 적과 하는 것인데 자기 편 안에서 싸움이나 다툼을 하니 그 상황이 오죽하겠는가.

 

그 결과 남생은 국내성으로 쫓겨난 뒤 당 고종에게 항복했으며, 연개소문의 아우 연정토는 신라에 투항했다. 결국 668년 고구려는 나·당 연합군에게 멸망했다.

 

고구려 멸망 이후 검모잠(劍牟岑), 안승(安勝) 등의 고구려 부흥 운동이 지속됐으며, 안시성과 요동성을 비롯한 일부 요동의 성들은 고구려 멸망 이후인 671년까지 당나라에 항전했다.

 

보장왕도 말갈과 함께 복국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결국 698년 옛 고구려의 장수 출신인 대조영(大祚榮)이 만주 동부의 동모산(東牟山) 일대에서 발해(渤海)를 건국하면서 고구려 부흥 운동은 일단락되고, 고구려는 발해에 의해 계승됐다.

 

 

한편 10세기에 들어서 후고구려(後高句麗)와 고려(高麗)가 각각 고구려의 계승국 임을 자처했는데, 이는 고구려의 영향력이 이때에도 남아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때의 역사는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중국은 2002년부터 이른바 동북공정이라는 국가적 프로젝트를 추진, 고구려 등의 역사를 중국 역사의 일부로 포함시키려는 작위적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에 한국도 고구려의 역사의 계승을 입증하기 위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서 2004년 고구려 연구재단을 설립했으나, 2006년에 외교를 뒷받침하기 위해 설립된 동북아 역사재단에 통합됐다.

 

중국의 동북공정이 한국 사회에 널리 알려지면서 주몽, 연개소문 등 고구려를 주제로 한 여러 역사드라마가 방송되기도 했다. 그러나 유무형의 문화적 유물들, 생활 습관, 국호 등 고구려와 후대 한반도 왕조들, 현대의 한국, 북한과의 부인할 수 없는 연속성이 명명백백함에 따라 2000년대 후반 이후, 중국의 화살은 고구려에서 빗겨난 발해사에 집중됐다.

 

현재는 발굴 유물, 유적지 훼손부터 사료 조작에까지 완전히 발해사에 대한 공정이 마무리돼, 현행 중국 역사교과서에는 발해 왕조를 중국의 소수민족 왕조로 소개되고 있으며 현재 중국 전역에서 자라나는 청소년들은 발해사를 자국의 소수민족사로 배우고 있다.

 

고구려(高句麗)의 한국어 독음이 고구려가 아니라 ‘고구리’라는 의견이 있다 이는 麗의 독음이 나라 이름을 나타낼 때는 ‘리’로 발음된다는 음운 법칙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훈민정음 창제 이후에 나타난 한글 문헌에 따르면, 고구려라 나타나고 《대동지지》에는 “(중국인이나 음운학 책과 달리) 우리나라 사람은 ‘려’라 바꾸어 부르고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나라 이름을 나타낼 때도 麗는 ‘려’로 읽는다는 예외도 있는 등 해당 주장은 신빙성이 낮다. 한편 장수왕 3년(414년), 69년(481년)에 각각 설치된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의 고려태왕(高麗太王), 호태왕(好太王)이라는 명칭을 근거로 고구려에선 왕들을 `태왕`이라고 칭했다는 의견이 있다.

 

고구려의 정신과 영토를 찾는 훌륭한 후손이 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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