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5일은 ‘스승의 날’이다.
스승의 은덕을 기리자는 뜻으로 정한 날이다. 까마득한 옛날부터 그런 날이 있었던 것으로 아는 사람이 많지만 ‘스승의 날’을 기념하는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60년대 초엔가 청소년적십자 단원들이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고취하기 위해 이 날을 ‘스승의 날’로 정했다고 들었다.
60년대 대학생들에게 이 날은 주로 고등학교 은사를 찾는 날이었다.
대학생들은 학교 여기저기에 방을 써 붙여 모교 방문단을 모은 뒤에 떼를 지어 모교를 찾아갔다. 고대 학생들은 다른 대학 학생에 비해 유난히 많이 모교를 찾았다. 숫자로라도 모교나 은사에 대한 마음을 과시하고픈 특유의 기질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80년대 ‘스승의 날’과 모멸감
80년대에 내가 학생이 아니라 스승이 되어 목도한 ‘스승의 날’ 풍경은 학생 시절의 그것과는 판이했다. 나는 11년 동안 광주에 살면서 ‘스승의 날’마다 결코 모멸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스승의 날’이 하필 5·18 광주항쟁 기념일의 코앞에 있는 게 화근이었다.
어느 해에 학생들은 고성능 확성기를 교수 연구동 앞에 놓고 종일 교수집단을 비판했다. 민주주의가 짓밟히고 있는 상황에서 지식인이 침묵하는 것은 죄악이라는 게 요지였다. 학생들이 무서워 아무도 그 확성기를 치우지 못했다.
어느 해에는 학생들이 강의 동을 점거하고 있다가 교수들이 다가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소방 호스로 물을 뿌려댔다. 그들에게 교수는 독재 권력의 시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정작 나를 힘들게 한 것은 학생들의 그런 시선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당당하게 맞설 자신이 없다는 사실이 나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어느 해에는 한 보직교수가 학생이 들고 있는 핸드마이크를 빼앗으려 하자 많은 학생들이 교수들한테 돌멩이를 던져대는 바람에 교수들이 우르르 도망치는 볼썽사나운 모습도 보였다. 벗겨진 신발을 손에 들고 달아나던 어느 노 교수의 모습은 곧 나의 자화상이었다.
한 번은 견디기 어려운 행패를 당하기도 했다. 학장께서 이번 학생들은 다르다며 학생 행사에 많이 참석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한 터라 교수들은 별다른 생각 없이 강당으로 갔다. 학생들은 단막극을 하다가 점차 지식인을 비판하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한 여학생이 교수들에게 바가지로 물세례를 퍼부었다.
이제 80년대의 그런 살벌한 풍경은 대학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요즘은 대학생들이 붉은 카네이션을 들고 연구실로 찾아와 공손하게 감사 인사를 한다. 여유 있는 학생들은 꽃다발을 사오기도 하고 꽤 비싼 양주를 가져오는 학생도 더러 있다. 대학원 학생들은 여러 명이 모여 교수 연구실을 돌기도 한다.
요즘 ‘스승의 날’은
그러나 요즘 ‘스승의 날’은 이 시대의 세태를 어김없이 반영하고 있어 마냥 즐길 수만은 없다. ‘스승의 날’에 연구실로 찾아오는 학생은 거의 현재 개설중인 강의의 수강생이다. 지난 학기에, 또는 작년에 강의를 들은 학생이 찾아오는 경우란 드물다. 이런 경향은 고등학교에서도, 중학교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모두 현재의 담임선생만 챙길 뿐, 지난 시절의 은사는 까맣게 잊고 산다. 중요한 것은 현재일 뿐이다. 학생들이 스승에 대한 감사를 현찰박치기로 거래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건 80년대의 스승에 대한 모멸보다 나을 게 없다.
몇 년 전부터 ‘스승의 날’에 다행히 강의가 없으면 나는 아예 학교에 가지 않는다. 강의가 있어 학교에 가더라도 되도록 연구실을 비우고 다른 곳에 머물곤 한다. 대접받기보다 나를 돌아보는 일이 더 의미 있을 것 같아서다. 그러나 연구실 밖에 있어도 마음은 결코 편치가 않다. 성찰을 강요당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다. ‘스승의 날’을 없애줄 후보는 없는가?
글쓴이 / 김민환
· 고려대 교수 (1992-현재)
· 전남대 교수 (1981-1992)
· 고려대 언론대학원 원장
· 한국언론학회 회장 역임
· 저서 : <개화기 민족지의 사회사상>
<일제하 문화적 민족주의(역)>
<미군정기 신문의 사회사상>
<한국언론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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