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순 / 자유기고가
조선의 선비는 기본적으로 양반 계층에서만 나올 수 있었습니다. 한문으로는 사대부(士大夫)라고 했고, 간단하게 말하면, 유교의 도를 실현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유교의 가장 높은 가르침인 인(仁)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목숨도 내놓아야 했습니다. ‘살신성인’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그들은 학문을 닦아야 합니다.
▲ 김흥순 선생
조선 왕조가 설정한 이상형 인간은 학예 일치(學藝一致)를 이룬 자였습니다. 학문 즉 문(文)ㆍ사(史)ㆍ철(哲)을 전공 필수로 이성 훈련을 체득하고, 예술 즉 시(詩)ㆍ서(書)ㆍ화(畵)를 교양 필수로 감성 훈련을 체질화한 자, 즉 이성과 감성이 균형 있게 잘 조화된 인격체, 그것이 조선 왕조가 설정한 학예 일치의 이상 인간형이었습니다.
최고 통치자인 왕도 비켜 갈 수 없었던, 조선 왕조의 인간화 작업이 탄생시킨 인간형, 그것이 선비(士)였습니다.
조선시대 지식인은 선비입니다.
오늘날의 왜소한 지식인과 곧잘 비교됩니다. 꼿꼿한 지조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두려워 않는 강인한 기개, 옳은 일을 위해 사약(賜藥) 등 죽음도 불사하던 불요불굴의 정신력, 항상 깨어 있는 청청한 마음가짐으로 특징지어진 선비상은 아직도 많은 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 현대사의 전개 과정에서 지식인들이 보여 주었던 체질적 한계와 현실 타협적 처신은 전통 시대 지식인인 선비와 비교되면서 선비 정신에 대한 재조명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물론 선비 예찬론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선비는 누구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비판을 받습니다. 선비는 우선 양반이어야 하고 남자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비는 비민중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의 시각으로 보는 것입니다.
전근대 사회는 어차피 신분 차별 사회였으니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다음 비판은 선비가 경제 활동을 경시한다는 점입니다. 한말에 조선에 온 서구의 선교사나 여행자들은 조선의 양반들이 빈궁하면서도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 것이 놀라웠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선비들은 경제 활동에 무관심하고 더 나아가서는 무능해 일제 치하에서는 더 더욱이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의’를 지킬수록 사회에서 더 낙오자가 되었던 것이지요.
이런 지적들은 충분히 일리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비정신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선비정신이 잘못 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아예 없어서 문제입니다. 오늘날처럼 혼탁한 사회에는 이런 비세속적이지만 고결한 분들이 필요합니다. 이재(理財)만 밝히는 현대 사회에서 선비는 분명 그리운 분임에 틀림없습니다. 노론이 장악했던 정권의 조선 매국관료들도 있었습니다.
조선의 선비
(1)전방위 지식인
(2)안빈낙도
(3)청렴 실천
(4)도덕적 모범
(5)‘예(禮)’와 ‘의(義)’ 실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