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자치제가 시행되어 자기 고을의 문제를 지방민들이 자치적으로 해결해가는 시대가 열린 것은 얼마나 멋진 역사의 진보인가요.
그러나 역사의 진보만 옳다고 여기다 보니 선거로 선출된 자치단체장들의 큰 권력을 규제할 방법이 부족함은 또 다른 역사의 퇴보이자 주민의 불행입니다. 완전하지도 못하고 문제점이 많으면서도 주민소환제법이 통과되어 자치단체장들의 횡포에 맞설 수 있는 주민의 권한이 약간이라도 확대된 것은 다행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00년 전에 다산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도 통쾌한 이론을 전개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이계심(李啓心) 사건’에 언급된 바도 있습니다만, 잘못하는 자치단체장(당시로서는 각 고을 수령)에 대하여 주민들이 취할 수 있는 일에 대한 다산의 명쾌한 설명이 그 사건에서 분명하게 나옵니다.
“통치자들이 밝아지지 못하는 까닭은 백성들이 제 몸을 꾀하는 데만 재주를 부리고 백성들의 괴로움을 관에 항의하지 않기 때문이다”(官所以不明者 民工於謀身 不以 犯官也)라는 다산의 명언은 바로 요즘의 세상을 위해서 했던 말인가 싶습니다.
요즘처럼 자치적으로 재정을 운영하는 세상에서는 관에 협조만 잘하면 제법 보조금도 받을 수 있고, 지원금도 넉넉하게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하면 눈을 감고 귀를 막으면서 관에 불평을 하지 않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매우 유리한 행위입니다.
지금이 그럴진대 3권을 한 손에 쥔 다산의 시대에는 얼마나 관의 힘이 세던 때입니까. 그러던 시절에 백성 천여 명을 이끌고 관청으로 쳐들어가 관의 잘못을 성토하면서 시위를 주동한 이계심에 대한 다산의 판결이유는 얼마나 훌륭한 내용입니까.
정당한 사유가 있고, 반드시 주민소환을 당해야 할 자치단체장에게는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주민소환을 발의하고 싸우는 시민들은 그래서 훌륭한 대접을 받아야 합니다. 다산의 뜻을 지금에 되새기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전제군주 시대는 역적이나 반란군으로 몰리기 쉽던 때인데, 관의 잘못에 집단적으로 항의할 줄 알았던 이계심을 칭찬한 다산의 뜻을 생각하며 합리적인 주민소환제가 정착되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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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박석무
다산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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