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재미 있습니다.
**70년대 나의 여공일기(2)
되돌아보면 무슨 사명감이나 명분 또는 남다른 역사인식을 갖고 일을 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심지어 노조 대표를 했을 때도 노동자의식" 연대의식" 노조간부로서의 철학...뭐 이런 자의식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저 내가 그 자리에 있으니까 도망가고 싶어도 피할 곳이 없었으니까 같이 있으면서 차마 비겁하게 외면할 배짱도 없었으니까.
정주영 왕회장이 그랬다지. 시류를 거스를 수 없었다고. 나야말로 그 노인처럼 시류에 휩쓸려 닥치는 대로 살다보니 여기까지 왔다고 할 수 밖에 없다. 노조간부를 맡았으면서도 성격이 자분자분하지 못해 조합원 곁으로 다가가 하다못해 실없는 농담 한마디 던질 줄을 몰랐다.
조직부장과 쟁의부장은 부지런히 라인을 돌며 조합원들을 챙기던데 나는 부분회장이라는 것이 입 꾹 다물고 동료들 틈에 고개 처박고 납땜 삼매지경에 빠지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건방지다는 평은 안 들었던 것 같다 하늘같은 과장님 부장님한테는 쌈닭처럼 달려드는 싸가지가 정작 조합원 앞에서는 말수 없는 물탱이가 됐으니...
이런 내가 편했는지 나이 어린 애들은 언니 언니 하며 따랐고 내 또래 애들은 지들 고민상담 역으로 나를 찾곤 했다.
한번은 곱상하고 얌전하게 생긴 동료가 찾아와 다짜고짜 저 좀 살려달라고 눈물을 짜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쩌다가 임신이 됐는데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으니 산부인과를 같이 가달라는 부탁이었다. 처녀가 산부인과라니...앞이 캄캄했다 나는 도저히 못가겠다 다른 간부를 찾아라 할 수도 없었던 것이 임신사실이 소문나면 회사를 다닐 수 없을 터 미룰 데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영등포 어느 산부인과를 찾아가 수술실에 들여놓고는 꽁지가 빠지게 달아나 병원 멀찌감치서 서성거렸던 난감한 상황이 떠오른다. 그때 혼전순결은 지켜야한다고 믿었던 내가 받은 충격이란 어쩌면 우리 사회에 의외로 성개방 풍조가 넓게 퍼져있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퍼뜩 들었다.
크리스챤아카데미 사건 이후 상근이던 분회장이 노조사무실 출근을 하지 않기 시작했다. 2층 부분회장 말에 의하면 임신초기라 각별히 조심하라는 주의를 받아 출근을 못한다고 전했지만 사실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회사도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이 순식간에 호황이 지나갔는지 어째 경영사정이 신통치 않아보였다.
사측 노사협의위원 가운데 제일 점잖고 합리적이었던 생산2부 이사님이 넌지시 흘려준 정보에 의하면 사업 확장을 하느라 어디엔가 집중투자를 한 게 문제가 생겨 자금압박이 심각하다는 것이었다.
이 와중에 몇 달간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분회장이 사표를 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추측하면 그동안 누릴 만큼 누렸겠다 회사도 신통치 않다는 소식을 들었겠다 게다가 여러 사람 앞에 별 볼일 없는 후배 년한테 공개적인 망신을 사는 수모도 겪었겠다 아주 덧정이 떨어진 것 같았다.
재수 없는 놈은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던가 분회장 사직으로 임시 대의원대회에서 내가 직무대행으로 뽑혔는데 하필 그때부터 회사사정이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쥐꼬리만 한 봉급으로 자취방 월세 내고 고향에 몇 푼 부치고 나면 간신히 입에 풀칠할 정도인데 그나마 분기별로 나오는 보너스가 유일한 숨통이었다.
그런데 경영상태가 좋지 않아 보너스 지급을 못하겠다고 통보하는데 앞이 캄캄했다.
집행부 대책회의에서는 당장 체불보너스 이행하라는 농성을 벌여야 한다고 난리가 났다 가장 강경파가 쟁의부장 조직부장 우리 편이니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정말 싸우기 싫은데...말도 못하고 속만 부글부글 끓였다 막말로 파업 주동자로 내가 끌려갈 텐데 책임도 안지는 것들이 더 방방뛰네...
다수의견이 협상이 결렬되면 파업을 하자로 모아졌다. 몇 차례 협상을 했지만 사측은 보너스는 물론 월급도 제대로 지급할지 장담할 수 없다고 발을 뻗었다. 막다른 골목에서 방법은 하나. 파업을 결행하기로 했는데 생전 싸워봤어야 알지 어떤 준비로 어떻게 싸워야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크리스챤아카데미 교육을 끝내고 노동분과 간사인 김세균씨 소개로 알게 된 최영희 장명국씨 부부. 최영희씨가 인천산업선교회 간사로 활동할 때 반도 동일방직 투쟁을 전부 이끌던 사람이었다는 이력도 들었겠다 우리를 도와줄 사람은 그 사람 밖에 없겠다.
셋이서 삼청동 언덕배기 한옥마을을 올라가던 광경이 어제처럼 선하다. 만삭의 몸으로 반갑게 맞아주던 언니. 맛있는 점심까지 먹이고 비스듬히 누워 "조합원에게 드리는 호소문"을 절절하게 써내려갔다. 조합원을 대상으로 하는 호소문이 절실했던 게 우선 조합원이 단결돼야 투쟁이고 뭐고 벌일 것 아닌가.
지금도 첫 문장이 생각난다. 쥐꼬리만 한 봉급 월세와 동생학비를 보태주면 쌀 한 봉지 새끼줄로 꿴 연탄 두 덩이가 전부여서 눈물로 서러움을 녹였다는...
호소문과 함께 언니는 꼼꼼히 투쟁계획표를 짜줬다. 언니 집을 나와 우리는 바로 영등포지역지부를 찾았다. 지부장님을 만나 여차저차 상황을 설명하고 내가 호소문을 작성했으니 지부장님이 보시고 수정해달라고 했다.
우리가 한껏 치켜 올렸더니 순진한 지부장은 좋다고 두어군데 단어가 너무 과격하다고 수정해주며 가서 잘 싸우라고 격려까지 해주었다.
대강당에 수백 명의 조합원 앞에 새끼줄에 꿴 연탄 어쩌구 호소문을 읽으니까 여기저기 훌쩍훌쩍 울음바다가 되었다. 내 설움 네 설움 섞어 어느새 하나가 되고 투쟁 열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다.
우리 할아버지 얘기를 해야겠다. 할아버지는 동네에서 괴팍하기로 소문 난 양반이었다. 내 자식이든 남의 자식이든 눈 밖에 난 꼴은 못보는 어른이었다. 장소 대상 가리지 않고 호통을 쳐서 동네 아짐들은 우리 할아버지를 보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여자가 무슨~을 달고 사시던 꽉 막힌 할아버지가 동네 코앞에서 다 큰 손주 딸년이 회사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강서경찰서 형사들이 총출동하는 난장을 벌였다는데 밍크담요를 둘둘 말아 옆구리에 꿰시고는 수위실까지 찾아오셨다.
이 놈아 여자가 찬데서 자면 못쓰느니라. 딱 한 말씀 남기시고 등을 돌리시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사랑은 말이 필요 없음을 그때 깨달았다.
이틀간 파업으로 체불 보너스 전액을 지급하겠다는 각서를 받아냈다. 첫 싸움이 완벽한 승리를 거둔 것이다. 강서경찰서 상대로 여차하면 김포가도를 점령하겠다는 협박도 한 몫 하긴 한 것 같다.
그러나 후폭풍이 장난 아니었다. 제일 앞장서서 설치던 쟁의부장 조직부장은 가만 놔두고 달랑 분회장 직무대행인 나만 잡아간 것이다. 강서경찰서 정보과 조사실에 가두고 겁을 주는데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것 같은 공포가 엄습했다.
이년아 배후가 누구야? 무식한 것들이 이런 호소문을 쓸 리가 없어! 바른대로 대! 머리끄뎅이를 잡고 흔드는데 정신이 없었다. 배후? 남산만한 배로 호소문을 써주던 언니 얼굴이 떠오르는 순간 여기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언니는 불 수 없다는 결기가 치받쳤다.
눈을 똑바로 치켜뜨고 악을 썼다. 무식한 것들이라니 당신이 나를 뭘로 보고? 이래봬도 초등학교 때 시민회관에서 서울시 주최 백일장 상을 탄 사람이야. 이런 내가 이까짓 호소문 하나 못쓸까? 지금 당장이라도 주제를 주면 써보이겠다.
큰소리를 치는 김에 호소문을 고쳐 준 사람은 지역지부장이라고 불어 배후를 지부장으로 만들었다. 단어 두어 개 고쳐주고 파업배후로 찍힌 지부장. 나중에 들으니 경찰서에 끌려가 치도곤을 당했단다. 순진한 지부장이 얼마나 분했을까? 지금 생각해도 미안해진다.
에잇~! 청명에 죽으나 한식에 죽으나 악착을 떤 김에 진도를 더 나가 매를 더 벌기도 했다. 어디어디 갔냐는 추궁에도 두발 달린 짐승이 어딘들 못 가겠냐고 약 올렸더니" 이년아 그러니까 두발 달린 짐승이 어디어딜 갔냐니까? 사정없이 싸대기가 날아왔다.
이틀간의 취조에도 끄떡 않고 버텼더니 보통 독한 년이 아니라고 하면서 풀어줬는데 돌아와서는 하도 지겨워 당장 회사를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때는 시국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몰랐지만 내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던 74~5년도는 독재정권의 악정이 정점을 찍는 시대였다. 민청학련사건에 인혁당 사형사건" 학생 노동자 농민 할 것 없이 걸핏하면 남산으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처박히는 것이 비일비재했다.
노동현장도 살벌하긴 매한가지였다. 동일방직 똥물사건 반도상사 yh투쟁 세상을 뒤흔든 노동자 탄압사건이다. 이 엄혹한 시대에 똥인지 된장인지 구별도 제대로 못하는 공순이를 배후 조정한 최영희 언니는 얼마나 가슴이 졸였을까? 다시 생각해도 등골이 서늘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