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군은 고성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고 고성체육회와 고성청년단 조직 등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을 고취시킨 선각자 박거수(1887~1928)선생을 2017년 11월의 고성인물로 선정했다.
박거수 선생은 고성읍 무량리에서 태어났다.
박 선생은 일본으로 건너가 2년여 동안 학업과 선진문물을 접하고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1908년 고성읍 덕선리에 민족학교 철성의숙(鐵城義塾)을 설립했다.
삼은(三恩) 곧 국은(國恩)" 사은(師恩)" 부은(父恩)을 교육목표로 행사 때 마다 애국가를 부르고 운동장 주변 둑에 무궁화나무를 심어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야학(夜學)을 직접 열어 주도했다.
‘사람은 알아야 하고" 알아야만 사람다운 구실을 할 수 있다’는 육영(育英)의 신조로 22년 간 학교를 운영했으나 일제의 압력으로 1930년 결국 문을 닫았다.
1910년에는 고성체육회를 조직해 초대회장으로 체육진흥에 기여했으며 대중운동 모임체인 청년단과 신간회 조직에서도 많은 역할을 담당했다.
1919년에는 진주사람 이주현이 찾아와 국내 사정을 설명하고 고성에서도 독립만세 의거를 결행할 것을 논의했다.
그후 박 선생은 배만두" 이상은" 김상욱으로 하여금 거사를 실행토록 종용하는 한편 선생의 집과 철성의숙에서 태극기를 만들어 거사 일에 고성읍 장터까지 운반해 군중에게 나눠주었다.
거사 후에는 3.1독립만세 운동의 주역인 배만두" 이상희" 이진경을 독립운동에 참여시키기 위해 이들을 상해 이범석 장군에게 보내 운남기병학교에서 군사교육을 이수하고 광복군에 종사케 했다.
박 선생은 1927년 10월 자녀교육을 위해 고향을 떠나 서울로 상경한 후 1928년 음력 3월 23일 서울 태평로에서 교통사고로 42세의 젊은 나이로 운명했다.
박거수 선생의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고성문화원에서는 후손이 거주하고 있는 고성읍 무량리에 표시석을 설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