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현재 정부 통일방안의 모태가 되는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발표하면서(1989.9.11) "남북각료회의는 남북의 총리를 공동의장으로 하여 각각 10명 내외의 각료급 위원으로 구성하고 그 안에 인도, 정치, 외교, 경제, 군사, 사회문화 분야 등의 상임위원회를 둘 수 있을 것입니다"고 언급하였다.
또 1990년 9월부터 1992년 9월까지 8차례 열린 남북고위급회담의 수석대표는 남북의 총리였다. 이 회담에서는 정치, 경제, 군사, 사회문화, 인도주의 등 각 분야에서 남북관계 발전을 약속한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하였다. 이와 같은 과거의 경험에서 각종 각료급회담을 총괄 조정하는 남북총리회담의 위상이나 역할을 파악할 수 있다.
이번 남북총리회담의 의제는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2007 남북정상선언) 이행`이다. 2007 남북정상선언은 남북관계 발전, 평화, 번영, 남북관계 제도화 등 크게 네 가지 주제들로 구성되어 있다.
합의사항들을 이에 따라 분류해보면, `남북관계 발전`에 해당하는 조항은 1항 6·15선언 고수, 2항 상호존중과 신뢰, 6항 사회문화교류, 7항 인도주의 협력, 8항 국제무대에서의 협력 등이고, `평화`와 관련해서는 3항 군사적 신뢰구축과 4항 평화체제와 비핵화가 해당된다.
`번영`은 5항 남북경협에 집중되어 있으며, `남북관계 제도화`는 총리회담 개최와 정상간 수시 접촉을 비롯하여 부총리급 남북경제협력공동위원회 및 국방장관회담 개최, 남북 의회간 대화 등 각 항에 자리 잡고 있다.
남북총리회담과 남북관계의 제도화
총리회담은 정상회담 합의사항을 이행하기 위해 열리게 되므로, 크게 본다면 이 네 가지 범주에서 ‘선택과 집중’의 방식으로 의제를 다뤄나갈 것이다. 실제로 정부는 정상선언에 담긴 합의사항 8개항과 별항 2개항 등 총 10개항을 45개 세부항목으로 나누고, 총리회담에서 구체적인 이행계획을 만들며, 공동이행기구도 구성한다는 방침이다.
45개 세부항목들 가운데 총리회담에서 세부일정을 잡아 추진해나갈 사업이 있고, 더 중장기적인 사업도 있다. 중장기적인 사업은 남북관계발전법에 따라 수립될 남북관계 5개년 기본계획에 포함시켜서 11월 중에 국회에 보고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남북관계가 국내적으로 제도화되는 법적 근거가 생기는 것이다.
이와 같이 총리회담은 남북관계 제도화의 출발점이 된다. 게다가 총리회담의 핵심의제가 `남북정상선언 이행을 위한 남북한간 기구와 구체적인 운영방안에 대한 합의 도출`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까지 남과 북은 1972년 7·4공동성명,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와 비핵화선언, 2000년 6·15공동선언, 2007년 남북정상선언 등 5차례에 걸쳐 중요한 합의를 이루었다. 이 모든 합의에서는 항상 그 이행을 위한 남북공동기구를 구성했다. 7·4공동성명에서는 남북조절위원회, 남북기본합의서와 비핵화공동선언에서는 각종 남북공동위원회, 6·15선언에서는 장관급회담, 2007 남북정상선언에서는 총리회담을 두기로 했던 것이다.
역대 정부의 통일방안인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은 남북관계를 화해협력→남북연합→완전통일의 3단계로 설정하고 있다. 남북연합은 정상회의, 각료회의, 남북평의회로 구성된다. 2007 남북정상선언에서는 남북연합의 구조를 만드는 `사실상의 남북연합`을 출발시켰다고 볼 수 있다.
2007 남북정상선언에서 "남과 북은 남북관계 발전을 위해 정상들이 수시로 만나 현안문제들을 협의"한다는 항목은 남북정상회의로 발전할 수 있다. 남북총리회담과 부총리급 남북경제협력공동위원회, 국방장관회담은 남북각료회의의 기초가 된다. 2항에서 합의한 남북 양측 의회의 대화와 접촉은 남북평의회로 발전할 수 있다.
총리회담의 의제와 의의
이번에 개최되는 총리회담에서 남북연합의 기초를 만들기 위한 의제를 별도로 선정할 필요는 없다. 평화와 번영에 대한 현안을 풀어나가는 과정에 발맞추어 자연스럽게 제도화를 위한 노력을 병행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번 총리회담에서는 정상간의 수시 접촉을 위한 기본방향, 부총리급 경제회담과 국방장관회담의 추진일정 등에 대해 합의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당위적이고 추상적으로 되어 있는 항목들에 대해서도 세부적인 실행지침을 만들 필요가 있다. 민족의 존엄과 이익 중시(1항), 사상과 제도의 차이 초월(2항), 상호 존중과 신뢰(2항), 내정불간섭(2항), 법·제도 정비(2항), 분쟁을 대화와 협상으로 해결(3항), 전쟁 반대와 불가침(3항) 등이 그런 항목들이다.
지금까지 합의한 남북간 공동기구 가운데 6·15공동선언 이후 21차례 열린 남북장관급회담을 제외하고, 70년대의 남북조절위원회나 90년대의 남북공동위원회는 몇 차례 열리다 말았다. 이 기구들을 운영하기 위한 규범이 정착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세가 변하면 곧바로 중단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항목들이 구체화되면 남북 사이에 만들어지는 각종 기구들의 운영규범으로 정착될 것이다.
한편 이번 총리회담에서 2007 남북정상선언의 실현을 위해 만들어야 할 공동이행기구로서 가장 시급한 것은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공동위원회`이다. 서해에서의 평화협력은 남북간 경제협력과 군사적 신뢰구축이라는 두 가지가 충족되어야 가능하므로 별도의 이행기구가 필요하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10월 8~11일 경제전문가 378명을 대상으로 남북정상회담 경협관련 의견을 조사한 결과, 가장 기대되는 1순위 사업으로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설치(36%)가 뽑혔다.
NLL에 대한 솔로몬의 지혜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설치와 관련해서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북방한계선(NLL)이다. 일각에서는 남북기본합의서에서 남북이 잠정적으로 NLL을 인정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남북기본합의서의 불가침에 대한 부속합의서 제10조는 "남과 북의 해상불가침 경계선은 앞으로 계속 협의한다. 해상불가침 구역은 해상불가침 경계선이 확정될 때까지 쌍방이 지금까지 관할하여온 구역으로 한다"고 되어 있다.
즉 아직까지 해상경계선에 대해 남과 북이 합의하고 있지 못한 상태다. 1953년 정전협정에서 육상에는 군사분계선을 설정하였으나 해상에는 분계선을 설정하지 않은 채 54년이 흘렀다. 그사이 해상분계선을 두고 남북 사이에 많은 충돌과 갈등이 있었다.
서해에서 해상분계선 설정은 평화협정이 체결되기 전까지 쉽게 합의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따라서 공동어로구역 설정, 해주공단 조성 등 경제적인 노력을 통해서 이 지역의 갈등과 충돌을 예방하자는 것이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설치의 취지이다.
이번 총리회담에서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공동위원회`를 설치하게 된다면 분쟁의 평화적 관리라는 측면에서 세계적으로도 내세울 수 있는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사실 `공동어로구역 설정` 같은 아이디어는 이미 1982년 손재식 국토통일원 장관이 북한에 제기한 20개 시범실천사업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 아이디어가 25년 만에 결실을 맺은 셈이다.
`사실상의 남북연합`으로 진입
총리회담을 앞두고 농업협력, 조선협력 등 각종 남북접촉이 진행되는 것은 총리회담의 전망을 밝게 한다. 북한의 김영일 내각총리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총리회담을 앞두고 EU 의원들을 면담했으며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를 방문했다. 싱가포르 투자시찰단을 만나기도 했다. 대부분 경제협력이나 투자유치와 관련한 일정이다. 북한이 총리회담에서 경제협력에 비중을 둘 것으로 전망할 수 있는 움직임이다.
이런 흐름들을 볼 때 이번 총리회담이 실용적으로 전개될 것임을 예측할 수 있다. 합의사항 이행을 위한 실용적인 회담이 된다고 하더라도, 총리회담의 개최는 그 자체로 2007 남북정상선언 이행의 출발점이다. 나아가 남북관계를 제도화하려는 노력이고, 남북관계가 확대 발전되어 `사실상의 남북연합`으로 진입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저자 소개
김창수 /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정책실장, 통일맞이 정책실장. 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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