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제 27>은 여러 정당과 정파로 나뉘어 있는 민주·진보·평화·개혁세력들에 가치와 정책을 중심으로 연대하여 대선에 임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데, 그러한 요구 자체가 결국은 어처구니없는 지지로 판명되리라는 것이었다.
진보개혁세력이라는 맷돌을 제대로 돌릴 수 있는 `어처구니`는 <의제 27>의 주장대로 공통의 가치와 정책이어야 하지만, `잡탕정당`에 불과한 대통합민주신당 등이 주축이 되는 연대가 (설령 성사된다 할지라도) 어떻게 그것을 마련할 수 있겠냐는 비판이었다. 범여권세력이 취해야 할 현명하고도 당연한 도리는 `아름다운 패배`를 준비하고 전열을 가다듬어 후일을 도모하는 것뿐이라고 했다.
스스로 진보를 표방했던 노무현정부에 대한 실망이 극에 달한 현실에서 이러한 주위 반응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것이었다. 사실 나 자신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념과 정책 중심의 정당정치 활성화가 한국정치 발전의 핵심과제라는 점을 강조해왔던 터였다. 금번 대선정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예컨대, 지난 6월 열린우리당이 통합신당으로 새출발 하겠다고 했을 때 나는 6월 13일자 《한겨레》 칼럼을 통해 범여권은 대선만을 목표로 일회용 정당 급조에 나설 일이 아니라 무엇보다 정체성이 분명한 이념정당부터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3개월 후 나는 다시 같은 신문 9월 5일자에서 가치와 정책지향성이 유사해 보이는 유력 정치인들, 이를테면 김근태, 신기남, 임종인, 천정배 의원 등이 문국현씨 등과 함께 중도진보정당을 만들어가야 하리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아름다운 패배론`이 아니라 범여권 연대론이 필요하다
그랬던 내가 범여권 대선연대론을 지지하게 된 것은 10월 초쯤부터였다. (지금 생각하면 상당히 늦은 감이 있지만) 그즈음에서야 나는 비로소 가까운 미래에 중도진보정당의 출현이 가능하기는 힘들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사실 그 전까지도 나는 상기한 분들을 포함하여 범여권에 속한 유력 정치인 중 최소 몇 분은 `진보세력 무능론`으로 대변되는 상황의 절박함과 그에 따른 정책정당 출범의 긴요성을 절감하여 스스로 그러한 정당 만들기 작업에 적극 나설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이분들이 자기는 낮추고 상대는 높여주는 자세로 멸사봉공의 리더십을 발휘해준다면 그 수가 그리 많지는 않을지라도 양식 있는 범여권 정치인들이 상호간의 양보와 절충 그리고 타협을 통해 유의미한 중도진보정당을 세워갈 수 있으리라고 본 것이다.
그 경우 설령 한나라당이 정권을 잡을지라도 진보개혁세력이 이 제대로 된 정책정당을 중심으로 상당정도의 영향력을 보유하게 됨으로써 우리 사회의 신자유주의 편향 움직임을 제어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순진한 희망에 불과했다. 희미하나마 가능성이 엿보이던 정책정당 결성 노력은 9월이 지나면서 모두 무위로 돌아간 것으로 파악됐다. 기대했던 범여권의 유력 정치인들은 대부분 각론에서의 셈법이 서로 달랐고 결국 각자의 길을 걸었다.
유력한 중도진보정당의 출범은 요원한 (혹시 실낱같은 희망을 걸어봤자 기껏 내년 총선 이후에나 그 태동이 가능한 일인) 것으로 여겨졌다. 결국 나는 10월 17일자 《한겨레》 칼럼에서 한나라당의 집권으로 인한 우리 사회의 신자유주의화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우선 `급한 대로` 범여권의 정책단일화, 그것마저 힘들면 적어도 당장은 주요 이슈영역에서의 최소 정책연합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물론 궁극적으로 최선의 대안은 역시 정체성이 분명한 이념 및 정책 정당의 출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현시점에서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대선은 불과 보름 앞으로 다가왔다. 그렇다면 이제 차선책을 도모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범여권의 분열상태가 지속된다면 시장만능주의와 성장지상주의, 아니면 냉전수구주의를 이념기조로 하는 보수정권이 들어설 것이 거의 확실하다.
`좌파`도 아닌 `우파` 신자유주의정권 아래서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의 발전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추측건대 아마도 그것은 지금의 낙후된 수준에서 오히려 더 퇴보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사회양극화나 비정규직의 급증 같은 문제들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수구보수정권이라면 대북포용정책에 혼선을 불러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작업을 더욱 힘들게 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지금의 범여권 정당들이 대선과 총선을 거친 이후 그러한 보수정권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유력한 야당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상당한 것도 아니다.
후보단일화를 위한 결단을 환영한다
결국 범여권에 남아 있는 유일한 방책은 지금의 분열 상태에서 하루빨리 벗어나 좋은 일자리의 창출, 사회양극화의 해소, 평화공존체제의 정착 방안 등을 포함한 최소 범주의 정책대안 패키지에 합의하여 서로가 연대하는 일이다. 엉성할지라도 그나마의 `어처구니`는 제공해주어야 진보개혁세력에 여전한 기대를 걸고 있는 상당수 국민들의 손과 마음이 그것을 중심으로 다시 한데 모아질 수 있다.
소탐대실(小貪大失)의 우를 범해서는 결코 아니 될 시점이다. 이 점에서 오늘 문국현 후보가 후보단일화에 나서기로 하고 그 기준과 절차를 시민사회에 위임하기로 한 결단은 일단 높이 평가할 만한 것이다. 부디 그 결단으로 시작된 대통합민주신당과 창조한국당의 연대작업이 민주당에까지 이어져 범여권의 대선단일화를 완성시키길 기원한다.
그것으로 금번 대선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면 그건 물론 좋은 일이다. 그러나 범여권의 정책연대는 사실 대선 결과와는 상관없이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 될 수 있다. 진보개혁세력의 정책정당 만들기 작업은 그들이 대선에서 이기든 지든 계속돼야 하는바 어느 경우이든 그 작업은 연대의 구심점이었던 그 최소한의 정책 패키지를 기초로 하여 진행되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그 진행과정 중에 엉성했던 `어처구니`의 속과 모양이 채워지고 다듬어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진보개혁세력의 진정한 구성원이 누구인지도 가려질 수 있다.
새로운 가능성은 항상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할 때야만이 비로소 조금씩 펼쳐진다. 제대로 된 이념이나 정책정당에 대한 비전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 듯싶다. 그것은 지금 처해 있는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다해가는 노력들이 축적되면서 점차 구체화돼가는 것일 게다.
노무현정부에 실망했다고 진보 발전의 맥을 잇는 작업을 게을리해선 안된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답답하면 답답한 대로 현실에 발을 딛고 이상과 비전을 향해 꾸준히 진보해야 한다. 그렇다면 범여권세력들에 대한 최소 정책 중심의 연대 요구는 `어처구니없는` 지지가 아니라 `어처구니 만들기`를 위한 지지이다.
최태욱 / 한림국제대학원대 국제학과 교수
| |
-Copyrightsⓒ고성인터넷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국지역인터넷언론협회 뉴스 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