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10월에는 대구에서 열린 동북아자치단체연합 주최의 국제회의에 초청받았으며, 11월에는 서울에서 열린 한일역사가회의에서 김용섭 교수와 함께 `역사가의 탄생`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며칠 뒤 역시 서울에서 한국국제정치학회와 동북아역사재단이 공동으로 개최한 `동북아시아의 영토문제`에 관한 국제회의에 참석해 발표를 했다. 회의의 주제는 서로 달랐지만, 나는 점차 어떤 중요한 생각 한 가지를 하기 시작했고, 그것을 다른 회의석상에서 거론하거나 회의 중간에 백낙청 교수를 비롯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화제로 삼았다. 그 중요한 것이란 `韓國민주혁명이라는 인식의 필요성`이었다.
5월 광주에 갔을 때 도청 앞 광장에서 거행된 기념행사에 참가한 인파 속에서 1980년의 사건이 국민적인 기억으로 확립되어 있음을 느꼈던 것이 출발점이었다. 서울로 돌아와 6월 회의의 주최자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를 방문하여 정해구 연구소장과 만나 책을 건네받았다.
韓國민주화운동에 대한 개념 정립이 필요
그 가운데는 《한국민주화운동사연표》(2006)라는 두꺼운 책과 서중석의 《한국현대사 60년》이 들어 있었다. 발표를 준비하는 데 정말로 필요한 책이라 귀국해서 꼼꼼히 검토했다. 이 연표는 1954년 3월 5일에 일어난 UCLA 한국인 직원의 임금인상 요구 파업에 관한 항목에서 시작하여 1992년 12월 18일에 김영삼 씨가 대통령에 당선할 때까지를 다루고 있다.
이런 종결방식은 하나의 선택일 수 있지만, 그 시작은 어떠한 생각에 근거한 것일지 알 수 없었다. 이 연표를 보고 韓國민주화운동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 아직도 확립되어 있지 않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책을 읽고 여러 가지를 생각한 결과, 6월 회의에 발표할 <한국민주혁명의 30년과 일본>이라는 글을 준비했다. 일본인이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73년 8월 8일의 김대중 납치사건을 통해서였다.
김대중 씨가 1972년 10월에 선포된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체제에 굴복하지 않고 그들과 투쟁하기 위해 망명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 우리들은 韓國민주화운동을 군사독재정권의 최고 형태인 유신체제에 대항해 투쟁하는 것이라 이해했고, 그들과 연대했다. 1980년의 역사적 드라마는 시민이 무기를 들고 저항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저항 의사의 극한적인 표현일 뿐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기본적으로 비폭력 투쟁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결국 1987년 6월 항쟁의 승리를 통해서 대통령 직선제로 복귀하자, 우리들은 연대운동의 조직을 해산했다. 하지만 군인 출신 대통령의 출현은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남겼기 때문에, 김영삼 문민정부가 출현한 1992년 12월에 이르러서 이것이 한층 중요한 단락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1997년 12월 김대중 씨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우리들은 오랫동안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날이 도래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들의 생각에서 보면, 1972년의 유신쿠데타에 대한 저항에서 1997년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까지가 역사적으로 고유한 한국민주화운동의 시기가 되는 것이다.
韓國민주화운동은 `민주혁명`이다
그렇다면 25년이 되는데, 내가 30년이라고 말했던 이유는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까지라고 생각하는 편이 옳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이 오랜 기간에 걸친 운동을 좀 더 고유한 사건으로 파악하는 데는 한국민주화운동보다 `한국민주혁명`이라고 하는 편이 적절하다.
나는 혁명을 기성 국가권력의 전복, 새로운 국가권력의 창출, 그에 의해 초래된 사회체제 변혁의 시작이라는 세가지 관점에서 정의한다. 군사독재권력을 타도하고 민주국가를 실현한 한국의 운동은 이 정의에서 보면 훌륭한 혁명이다. 그것이 오랜 기간에 걸쳐 1987년까지의 비폭력 혁명기와 1987년 이후의 대통령선거를 통한 혁명기라는 두 시기로 이뤄진다고 생각할 수 있다.
러시아에서는 러일전쟁 중에 일어난 1905년 혁명을 제1차 혁명이라고 부른다. 당연히 1차 대전 중에 일어난 1917년 혁명을 제2차 혁명이라고 불러야 할 텐데, 일반적으로 그렇게 부르지 않고 전제권력을 타도한 2월 혁명과 사회주의로 나아간 10월 혁명이라 부르고 있다.
레닌은 1905년에 20세기의 사회주의혁명(사회혁명)은 새로운 형식으로서 “한 번의 전투가 아니라 (…) 많은 전투로 이루어지는 한 시대”라고 했다. 유신쿠데타, 김대중 납치사건, 민청학련사건, 민주구국선언사건, 부마항쟁, 박정희 암살사건, 전두환 쿠데타, 광주항쟁, 김대중 구명운동, 6월 항쟁, 김영삼 대통령 당선, 김대중 대통령 당선으로 이어지는 한국의 민주혁명이야말로 오히려 한층 새로운 혁명의 형식을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韓國민주혁명이 일본에 영향을 끼쳐 1993년의 코오노(河野) 담화, 1995년의 전후50년 국회결의, 아시아여성기금 설립, 무라야마(村山) 담화가 탄생했던 것이지만, 혁명을 한 한국과 혁명과는 인연이 없는 일본은 국민의 태도에 커다란 차이가 있기 때문에 문제도 발생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점을 나는 지적했다.
한국의 민주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11월 한일역사가회의에서 나는 나 자신이 역사가로서 성장해간 과정을 통해 그 같은 내용의 강연을 했다. 그 회의는 `반역인가 혁명인가`라는 주제로 개최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나는 `한국민주혁명`이라는 문제를 한국과 일본의 역사가들에게 제기했던 것이다. 하지만 실은 6월과 11월 사이에 나는 새로운 착상을 얻었다. 10월에 일본에서 열린 역사교육 심포지엄에서 남북한의 현대사에 대해 발표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일본의 중학교 역사교과서에서는 한국의 민주화가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전후의 조선해방, 한국전쟁, 학생혁명, 한일조약, 戰後보상문제는 언급되어 있었다. 하지만 한국의 민주화는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고등학교의 일본사 교과서 중에는 한국의 민주화에 대해 기술되어 있는 것도 있다는 지적은 있었다.
나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양국의 역사가가 협력해 만든 역사교육 부교재, 두 권의 보조교재, 한국·일본·중국의 연구자가 공동으로 엮은 《내일을 여는 역사 ― 동아시아 3국의 근현대사》와 《한일교류의 역사》에서도 한국 민주화에 관한 내용이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아, 이 측면에서의 한일연대운동이 전혀 거론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 김성보 교수와 정재정 교수가 말했지만, 역사가들의 토론과 노력에 어딘가 부족함이 있었던 것인지 모른다. 나도 역사학계 바깥에서 일해 왔기 때문에 동료 역사가들과의 협력이 적었던 것을 후회하고 있다. 역사교육 심포지엄에서 이야기했을 때, 한국의 민주화를 교과서에 어떻게 쓸 것인지, 또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가 어렵다는 지적이 있었다.
`한국민주혁명`이라고 하면 개념은 명료해진다. 백낙청 선생이 혁명의 기점은 4·19라고 했지만, 이미 교과서에도 나와 있는 학생혁명을 미완으로 끝난 제1차 민주혁명이라고 부르고, 한국 민주화를 제2차 민주혁명, 즉 본래의 민주혁명이라고 설명하면 학생들이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한국의 동료 여러분들과 한층 더 진지한 토론이 이뤄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백낙청 선생으로부터는 분단체제에 주목한 시대구분과 민주혁명의 관련에 대해서 들었다. 그 점 또한 토론을 바란다. [박광현 옮김 주간창비논평
저자 소개
와다 하루끼(和田春樹) / 토오꾜오大 명예교수
1938년 일본 오오사까(大阪)에서 출생.
1960년 토오꼬오 대학 문학부 서양사학과 졸업 후 러시아·소련사와 현대 한국에 관해 연구.
1978∼79년 소련과학아카데미 소련사연구소에서 연구.
1984년 미국 워싱턴 대학 국제연구학부 객원연구원.
1985년부터 토오꼬오 대학 사회과학연구소 교수로 재직.
저서 『맑스·엥겔스와 혁명러시아』(1975), 『한국민중을 주시하자』(1981), 『북의 벗에게 남의 벗에게―조선반도의 현상과 일본인의 과제』(1987), 『뻬레스뜨로이까―성과와 과제』(1990),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1992, 창비신서 114)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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