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드는 계절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인생의 황혼녘을 그리기도 하고 ‘느림의 철학’과 ‘곡선’에 대한 사고력을 키워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느리게 걷기’를 좋아하고 ‘느림의 미학’과 ‘느림의 철학’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우리의 삶을 ‘느리게 걷기’에 비유하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느리게 걷기’란 ‘빠르게 걷기‘의 반대로 여러 가지의 논란과 논쟁이 있을 수도 있다. 즉 삶의 게으름을 감추기 위해 ’느리게 걷기‘를 미화시키지 않았나 하고 반문할지도 모를 일이다.
특히 ’빠르게 걷기‘에 익숙한 현대사회에서는 ’느리게 걷기‘에 대한 깊은 사고력을 갖지 않으려 할 것이다.
사실 시간에 쫓겨 살아간다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다. 바쁜 시간 속에서 바쁘게 움직이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짜증이 솟아나고 그로인한 스트레스를 받아야 한다. 다시 말해 ‘사육된 비둘기’처럼 자신을 옴짝달싹 못하게 묶어놓은 덫과 같다할 것이다.
어찌 보면 ‘빠르게 걷기’에 집착한 현대인들에게는 활력과 긴장감이 넘치는 삶에 길들여져 있어 주변을 뒤 돌아볼 ‘여유‘조차도 없는 삶을 영위하고 있다할 것이다.
저자 피에르 쌍소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느림은 게으름이 아니라 삶의 길을 가는 동안 나 자신을 잃지 않고 조금 천천히 가더라도 인생을 바로보자는 의지이다.”며 빨리 빨리 에만 익숙해진 현대인들에게 ‘느리게 산다는 의미’를 일깨워 주고 있다.
지난 토요일이었다. 필자는 ‘느리게 걷기‘에 첫 발을 내디딘 지산선생을 모시고 지리산 등산을 했다. 단풍드는 지리산의 풍광은 별 볼일 없었지만, 맑은 공기와 산파도가 몰려오는 지리산 자락은 ’느리게 걷기‘연습장으로서 안성맞춤이었다.
시암재에서 성삼재를 거쳐 노고단을 오르면서 임걸령까지의 ’느리게 걷기‘의 산행은 또 다른 의미를 부여 했다. 즉 오늘의 삶을 살찌웠고 내일의 삶을 여유롭게 하는 원동력으로 비축되고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빠르게만 살아왔던 삶들을 지켜보고 그 삶들의 조급함을 엿 보아서인지, 그 주변을 돌아보며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갖고 살아가려는 의지와 모습들이 보여 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득, 세인들이 말하는 인생의 속도계가 떠올랐다. 흔히 인생의 흐름을 키로 미터로 비유하면, “10대는 10km. 20대는 20km. 30대는 50km. 40대는 70km. 50대는 100km. 60대는 120km. 70대는 150km...”로 질주하는 듯 속도계에 빗대고 있다.
이러한 인생의 흐름 속에서 70km 이상의 속도를 내고 있는 인생들은 자신의 인생속도를 낮추려 할 것이다. 아니 더디게 가기를 원하며, 속도계자체를 부인하려 할 것이다. 그것은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안전감이 희박하고 죽음의 문턱이 가깝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속도는 어느 누구도 낮출 수도 없고 멈추게 할 수도 없다. 다만 느리게 갈 수 있는 ’생각과 여유‘를 갖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람의 생각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을는지 몰라도, 자신의 주위와 주변을 돌아보면서 “느리게 걷는 여유와 현명한 생각”은 참으로 아름다운 곡선의 삶으로 비쳐지리라 믿는다.
어느 날 지산선생은 “빠르게 가는 길은 직선의 삶이고, 느리게 가는 길은 곡선의 삶이다.”며 느리게 걷기를 곡선의 아름다움에 비유하기도 했다.
아무튼 붉게 타는 노을과 새 빨갛게 물든 단풍잎들의 아름다움 보다 ‘느리게 걷는 사람들’의 삶이 더욱 아름다운 색소를 띄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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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뉴스 칼럼리스트
시인 김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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