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사정을 헤아려선지 새 대통령은 비싼 밀가루 대신 쌀로 국수를 만들어 먹으라는 주문을 내놓으면서 쌀국수 전도사로 나섰고, 생산농민의 권익 보호에 힘써야 할 농협유통은 농산물 가격인하 판매에 앞장서면서 물가관리기관으로 나섰다.
이러한 좌충우돌의 연출자는 기상이변일 수도 있고 경제력을 키워가고 있는 거대 신흥공업국일 수도 있지만, 숨어서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보이지 않는 괴물`, 즉 투기자본과 곡물메이저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국제유가만 하더라도, 난방유 등의 수요가 감소할 시점인데다 미국의 원유재고가 예상보다 큰 폭으로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오르고 있다.
투기자본들은 달러화가 약세를 보임에 따라 원유 같은 실물자산 매입을 지속적으로 늘려왔기 때문에 국제유가는 쉽사리 안정되지 않을 것이다. 원유시장에서 발호하던 투기세력들이 곡물을 새로운 먹잇감으로 삼으면서 곡물가격은 급등하기 시작했고, 이를 구경하던 기관투자가나 연금기금 등마저 그 대열에 가세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국제 곡물시장이다.
▲ 사진은 민중언론 참세상 제공
투전장이 되어버린 국제 곡물시장
원래 국제 곡물시장은 카길(Cargill), ADM, 콘아그라(ConAgra) 같은 소수의 초국적 농식품복합체가 지배하는 과점체제이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투기자본이 기승을 부리기 쉬운 구조를 가지고 있다. 미국 내 소맥가공 부문에서는 상위 4개사가 60% 이상을 지배하고 있으며, 옥수수가공 부문에서는 80%에 가깝고, 대두가공의 경우는 80%를 상회하고 있다. 더구나 이들은 지구 전체를 대상으로 한 완벽한 정보수집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WTO협상은 카길협상이었다"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로 이들은 정·관계와 연계된 인사정책(이른바 `회전문`)으로 다져져 있기 때문에, 미국의 대외정책과 한 몸이 되어 움직일 정도로 빈틈이 없다.
여기에 부시 미 대통령의 `바이오연료정책`도 국제 곡물시장을 투기자본의 난장으로 만드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2017년까지 가솔린 소비량을 2007년보다 20% 감축하기 위해서 연간 350억 갤런의 에탄올을 공급한다는 이른바 `20 in 10`(10년 동안 20%를 감축한다는 계획) 때문에, 옥수수 쟁탈전이 자동차와 동물 사이에서 벌어지게 되었다. 투기자본에 또 하나의 노다지를 선물한 것이다. 이를 기회로 초국적 농식품복합체들은 옥수수를 연료용과 사료용으로 동시에 취급하는 이중적 위치를 활용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있다.
고개를 드는 곡물내셔널리즘
달러화의 약세나 투기자본의 개입이 없더라도 국제 곡물시장의 상황은 좋은 편이 못된다. 1970년대 초 이래 가장 낮은 재고율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바이오연료정책, 신흥공업국의 경제성장 등으로 소비량은 지속적으로 증대하고 있지만, 생산량은 소비량을 쫓아가지 못하고 있다. 이에 따라 1999/2000년에 31.5%를 기록했던 기말재고율이 2007/08년에는 14.6%에 불과할 전망이다. 국제 곡물재고의 안정적 수준은 70일분의 소비량이지만, 현재는 50일 정도에 그치고 있는 실정이다.
▲ 곡물년도는 소맥은 6월에서 이듬해 5월, 옥수수 및 대두는 9월에서 이듬해 8월, 2006/07년은 추정치, 2007/08년은 전망치.
곡물가격이 급등하기 시작한 2006년 가을은 투기자본이 국제 곡물시장에 유입되기 시작한 시점이면서, 기상이변으로 곡물생산에 적신호가 켜진 시점이기도 하다. 특히 소맥의 가격상승률이 가장 높았다.
▲ 출처: 앞의 자료
이 같은 곡물가격의 급등을 계기로 농산물 수출대국인 미국은 역사상 최고의 농작물 수익을 기록하여 남의 불행을 자신의 행복으로 만들었지만, 세계 각국은 자기 곳간 챙기기에 분주해질 수밖에 없었다. 곡물가격 인상은 국민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많은 나라들은 안정적으로 곡물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들을 취하고 나선 것이다.
밀과 보리에 수출세를 도입하거나(러시아) 주요 곡물에 대해 수출할당을 적용하고(우크라이나) 아예 수출을 금지하기도 한다(세르비아). 카자흐스탄은 밀이 풍작임에도 불구하고 밀수출을 규제하고 있다. 파키스탄과 아르헨티나는 수출세를 도입하거나 인상함으로써 곡물 수출을 억제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FAO) 등은 올해까지 국제 곡물가격이 상승했다가 다시 안정을 찾을 것으로 전망했지만, 이들은 기본적으로 곡물 수출국의 입장을 대변하기 때문에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더욱이 되풀이되는 기상악화, 거대한 인구를 거느린 신흥공업국의 곡물 수요와 바이오에너지정책으로 인한 옥수수 수요의 급증 등을 고려한다면 각국은 식량의 안정적인 확보를 위한 경쟁에 나설 수밖에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
`식량안보`보다 `식량주권`을 회복해야
국제 곡물시장의 불안이 계속되면서 여러 언론매체들은 앞 다투어 `식량자원`의 안정적 확보를 외치고 있다. 하지만 국내에서 농업생산이 유지되지 않더라도 곡물을 해외에서 살 수 있는 돈만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설익은 `식량안보론`은 경계해야 한다. 돈으로 해결될 수 있을 정도로 국제 곡물시장이 녹록한 대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금고` 속의 돈만으로도 식량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식량이 남아돌 때의 이야기다. 이제는 내 `곳간`을 내 것으로 채우도록 노력해야 한다. 지금은 모두가 자기 `곳간`을 채우는 데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에 `식량자원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서 상투적으로 제시되는 방안이 해외 생산기지의 확보이다. 이명박 정부도 곡물시장 불안정이 지속될 것에 대비하여 해외농업 개발방안을 모색하기로 했다고 한다. 물류비를 절약하겠다며 대운하를 건설하겠다고 해서 온 나라를 벌집으로 만들어놓고서, 비싼 운송비를 들여가면서 먼 나라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가져와 자급률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우리의 문전옥답을 훼손하여 골프장을 건설하겠다면서, 먼 나라의 황무지에다 농사를 짓겠다는 것이다.
더욱이 곡물가격의 급등을 계기로 한몫 챙기려는 집단들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녹색혁명`을 통해서 생태계의 질서를 뿌리째 흔들어놓았던 바이오메이저들은 식량위기를 예견이나 했다는 듯이 생명유전공학을 내세워 식량위기의 해결사로 자처하고 나섰다.
이에 호응하듯 한국전분당협회 소속업체들은 오는 5월부터 전분·전분당 원료용으로 유전자조작(GM) 옥수수를 들여오기로 결정했다. 여전히 유전자조작 농산물의 안전성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고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관리방안들이 합의되지 않은 상황에서 곡물가격 폭등을 우산으로 삼아 논란의 핵심을 피해가겠다는 눈에 보이는 꼼수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내우외환의 상황에서 `곳간`을 지키는 것은 우리 모두의 공동작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밀가루 값이 급등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농산물을 매개로 도농연대를 실천해온 생협조직과 가공업체가 국수를 비롯한 우리 밀 가공식품의 가격을 인하하여 판매한다고 한다. 연대의 가치는 위기 때 더욱 의미를 더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해준다.
먼 곳에서 해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희망을 찾는 것이 현명한 일이기에, 지역의 친환경농산물을 학교급식을 비롯한 단체급식의 식자재로 이용하고자 하는 작은 노력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지역에서 소비하자는 로컬푸드(지역 먹거리)운동도 마찬가지다. 안전한 농산물을 우리 스스로 안정적으로 생산하는 것은 투기자본과 소수의 곡물메이저들이 농단하는 국제 곡물시장의 휘둘림에서 벗어나는 길이고, 식량주권을 올바로 내세우는 길이기도 하다.<창비주간논평>
저자 소개 / 윤병선
건국대 사회과학대학 교수(경제학 전공)로 있으면서 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 부소장을 맡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초국적 농식품복합체의 농업지배>, "Who Is Threatening Our Dinner Table?" 등이 있으며, 공역서로 《이윤에 굶주린 자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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