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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실업계, 한번 들러리는 영원한 들러리?
기사입력 :
`미친 소 수입 반대` 집회장에서 작년에 함께 공부하던 공고 제자들을 만났다. 학교가 집회장 부근에 있어서인지 유독 많다. 제법 피켓까지 들고 나왔다. 오랜만에 만나 안부를 물으며 서로 `투쟁의 의지`를 다졌다. 지금 내가 다니고 있는 인문계 학생들은 없는 듯했다. 내가 잘 아는 어느 학교 교감은 멀찍이서 아이들 동태를 살피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슬며시 돌아서고 만다. 화가 난다. 지난 10년 이런 꼴은 안 보고 살았건만 다시 옛날 버릇들이 나오는구나.


학년이 바뀐 3월초, 늘 보는 시험이 있다. 이른바 `학력진단평가`. 전국의 고등학생들이 똑같은 문제로 동시에 쳐야 하는 시험이다. 이날이 되면 실업계 아이들은 다시 서글퍼진다. 수능 형식으로 치르는 시험이라 학교에서 배우지 않은 범위의 문제도 나오고 배우지 않는 과목도 있다. "우린 이거 안 배우잖아요" 하는 애들도 잘 없다. 그냥 하루 편하게 잘 수 있어 잘됐다는 듯 아이들은 답안지를 대충 채우고는 엎드려 잔다. 자는 것도 한두 시간이지 오후 4시까지 줄창 잘 수야 없다.   


안 배우는 과목의 시험을 쳐야 하는 학생들


아이들 장난이 슬슬 나온다. 시험지 여러 장을 아주 정교하게 말아서 단단한 봉을 만드는 아이들, 답안지 마킹으로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드는 아이들, 감독하는 교사들도 아이들 나무랄 명분이 없다. 배우지도 않는 과목 시험지를 나누어줘 놓고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외국어시험 시간은 더하다.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끝도 없이 흘러나올 때 아이들 심정은 어떨까. 그러나 우리 아이들은 늘 당해왔다는 듯이 도통 알 수 없는 문제지 위에 엎어져 침이나 흘릴 밖에.


이래놓고는 전국의 아이들을 한줄로 세운다. 8등급 9등급은 실업계 아이들이 깔아준 덕에 일반계 아이들은 평소보다 등급이 올랐다 좋아하겠지. 이런 들러리 짓은 사회생활에까지 이어질 것이다. 일반계 선생들이 말 안 듣는 아이들 꾸짖을 때 하는 말이 있다.


"넌 왜 실업계 안 가고 여길 왔어?" "그냥 넌 공고로 전학 가. 그게 편하겠어." 그런데 이 집회장에서는 들러리로 살던 그 아이들이 주인 되어 외치고 있다. "너나 먹어, 이명박!"


나는 작년까지 4년 동안 공고 아이들과 살았다. 지난 4·15 학교자율화 추진계획 ― 말이 좋아 자율화지 이건 아무래도 말뜻을 왜곡하고 있다. `공교육 포기 선언`이 맞는 말이다 ― 에서 공고 학생과 관계되는 내용을 찾아보니 `실업계고 현장실습운영 정상화 방안`을 폐지한다고 했다. 정상화 방안을 폐지한다면 비정상화하겠다는 말인가?


실업계고 학생들 형편 생각해 보았는가


4, 5년 전만 해도 공고 3학년은 1학기 중반부터 실습 바람이 불었다. 아이들이야 우선 학교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아무데나 덜컥 실습을 나가보지만, 이론으로 배우던 것을 실습해보기는커녕 청소나 심부름 아니면 잡역부 노릇만 하다가 걸핏하면 사고를 당해 돌아왔다. 그러면서도 보상은커녕 임금도 제대로 못 받는 일이 허다했다.


거의 모든 아이들이 실습이란 이름으로 노동착취를 당했던 것이다. 이것이 사회문제가 되면서 ‘현장실습운영 정상화 방안’이 생겼다. 기업규모 얼마 이상, 취업보장, 임금보장, 산재처리 등의 규제가 엄격해지고 실습 시기도 11월 이후로 미루어졌다. 최소한의 규제였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공고 학생을 지켜낼 수는 없다. 제 등록금이라도 벌어야 하고 친구가 가진 휴대폰을 나도 가져야 하겠기에 아이들은 밤마다 알바(아르바이트)를 하러 나가야 한다. 알바야말로 아이들 인권의 사각지대다. 불고깃집에서 숯불 나르던 일을 하던 어떤 애는 종아리를 데어 살점이 뚝 떨어져나가도 제 실수로 이렇게 된 걸 어찌하겠느냐며 학교로 돌아왔다. 진물이 질질 흐르는 종아리를 내려다보며 기껏 한다는 말이 "사장님이 첫날 치료비는 대주었어요"다.


공고 아이들이 얼마나 원천적으로 소외받고 있는지 나는 확실히 안다. 담임을 할 때마다 나는 우리 반 아이들 가정을 하나도 빼지 않고 방문해보았기 때문이다. 한반 32명 가운데 제 방에 제 책상을 가진 아이는 셋을 넘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어쩌면 이렇게도 철저히 가난한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학력은 경제력에 비례한다는 현실이 여실했다. 이런 아이들에게 현장실습 운영규제를 풀어버린다면 4, 5년 전의 문제가 그대로 되살아나고 말 것이다. 국민을 조금이라도 생각하는 정부라면 우선 이 아이들에게 `노동법`과 `인권`을 정규시간에 가르치는 일부터 먼저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노동법이나 인권에 관한 이야기를 오히려 불온시하는 세상이다.


어떤 사람 아들은 슬리퍼 바람으로 서울시장실에서 히딩크와 사진을 찍고 있을 때, 우리 공고 아이들은 그 슬리퍼가 몇 십만 원짜리라고 부러워할 줄 알았지 제 종아리 상처의 억울함은 모르고 있다. 이런 아이들은 대를 이어 부자들 뒤치다꺼리나 하며 사회의 들러리가 되어 살아가야 하는가.


이들이 사람다운 삶을 꾸려갈 수 있도록, 적어도 자기 주체는 잃지 않고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교육이다. 그 교육을 위해 교육과학기술부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기껏 한다는 소리가 "이제는 기업에서 아이들 마음대로 가져다 써도 좋소. 적당히 쓰다 버려도 기업 발전을 위해서는 불가피한 일이지요" 이런 말인가. 하기야 이 아이들은 예나 지금이나 푸대접받기에 이골이 났다.


실업계에도 불어 닥칠 4·15 바람


공고 아이들에게 0교시니 우열반이니 심야 보충수업이니 하는 소리는 강 건너 불이긴 하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이 아이들에게도 불똥이 튀지 말란 법이 없다. 일반고에서는 저렇게 열심히들 하는데 공고라고 가만히 있어서야 되겠나, 어차피 학생들도 대학 진학을 원하지 않나, 우리도 0교시부터 보충수업을 시켜야 한다는 교장 교감이 나올 것이 뻔 하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또 선생과 아이는 죄도 없는데 죄를 지은 듯 서로 싸우게 되겠지.


작년 우리 학교 기계과 학생들 90여명 가운데 예닐곱 명만 반듯한 회사에 취직을 했다. 이들은 성적도 좋고 성실한 아이들이었다. 나머지는 취직이 안된다. 물론 처음부터 대학 진학을 희망한 아이들도 스무 명 정도 된다. 이 아이들은 그나마 이름 있는 대학에 간다. 동일계 특별전형 덕을 보는 셈이다. 나머지 60여명(70%)은 갈 데가 없다.


마지못해 대학 진학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줄만 서면 들어가는 지방 사립대학들이다. 이 대학이 아이들에게 어떤 힘을 줄 수 있을까. 아이들이 2년 또는 4년 동안 `절망을 유보하는` 댓가로 치러야 하는 경제적 부담은 너무나 엄청나다. 국가적 손실이다.


게다가 입시를 대학자율에 맡기게 되면 실업계 아이들에 대한 동일계 특별전형도 없어지고 말 것이다. 그나마 걸었던 희망마저 빼앗기는 셈이다. 3년 내내 수능 문제풀이 연습만 하던 아이들과 맞붙어 이길 재간이 없는 교육과정으로 운영되는 실업계 아이들은 갈 곳이 없다. 이런 아이들을 두고 "아이들이 대학 진학을 희망하니 보충수업을 시켜야 한다"는 말을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산 오르기 시합을 하자는 토끼란 녀석이나, 자는 토끼 몰래 먼저 올라 만세 부르는 거북이란 녀석이나 싹수는 똑 같다. 거북이가 먼저 바다건너 섬까지 누가 먼저 가나 내기하자고 했으면 토끼는 어찌했을까? 하루는 토끼가 거북이 손을 끌어 산으로 데리고 가고, 하루는 거북이가 토끼를 등에 태워 섬 구경을 시켜주면 안될까. 이런 세상 만들 수는 없을까? 끝내 난망한 꿈일까? <창비주간논평>

 

저자 소개

 

이상석(李相奭)    / 부산 양운고 교사

 

1979년부터 대양공고 성모여고 중앙고 경남공고 등을 거쳐 지금은 부산 양운 고등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국어 공부를 하고 있음. 쓴 책으로 『사랑으로 매긴 성적표』 『못난 것도 힘이 된다』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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