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나는 스무 살 쯤으로 돌아가 스무 살 쯤의 글을 쓰고 싶습니다.
그 시절, 가을은 자주 `아 가을인가`였습니다.
그런 가을이 이번 가을에도 쭈르륵 미끄러져 내려와 닿아 있는지 모릅니다.
아 가을인가.
가을은 나의 내면입니다. 아니 나의 내면의 노을빛 아픔입니다.
그동안의 몸이 끝나고 마음이 시작합니다. 가을은 어떤 음험한 거짓조차 진실로 만들어주는지 모릅니다. 온통 참다운 대면이 아니면 안 됩니다.
어쩌면 좀처럼 떨어지지 않던 삶에의 애착도 한번쯤 어디론가 슬며시 떠날 채비를 하는 것인 양 하늘의 푸른 침묵 아래 울바자 밖으로 내 마음은 나서는 것입니다. 지금 내 마음 밖에서는 가을은 두 가지를 한꺼번에 다 보여줍니다. 조락과 결실. 하지만 내 마음의 뒤안에는 지난여름의 눈먼 관능과는 달리 이름 지을 수 없는 비애가 이슬 다음의 서릿발 서린 유리창으로 깨어납니다.
지는 잎새의 무심.
숨어 있던 개울물 소리의 빛나는 각성.
한 자락의 낯선 바람의 추위.
저만치 혼자 걸어가는 애인의 뒷모습.
아직 떠나지 못한 한 떼의 근심스러운 철새들의 빨랫줄.
갈꽃 흔들리는 냇둑.
개미행렬.
자동차행렬.
비행운.
이런 풍경 단면들의 소소한 감회로부터 눈을 돌려 냉큼 쳐다보는 푸른 하늘이사 지상의 모든 불안과는 좀 남남인 듯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구는 하늘을 크다고 말하고 또 누구는 하늘이 많다고 했거니와 정작 하늘은 그런 일원론도 다원론도 아니겠습니다. 천도무심입니다.
가을은 하나의 슬픔입니다. 그 슬픔의 이유를 누가 묻겠습니다. 옛사람들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고 말하지 않고 응당 봄 여름 슬픈 가을 겨울이라고 말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가을은 귀환의 시간인지 모릅니다. 어떤 행복한 둔재가 불행한 천재가 되어 돌아옵니다. 한자 귀(歸)는 시집간 여인이 친정에 가는 것을 상형(象形)한 것이라 합니다. 지금의 기혼여성에게는 들어맞는 글자가 아닙니다. 오랜 농경사회에서의 여자는 한번 시집가면 그것으로 삶의 시말이 결정되어버립니다.
혼인이란 여자를 성욕의 도구, 생식의 도구 그리고 가사 및 노동의 도구로 여기는 폐습이기도 했습니다. 한번 시집가면 그 여자는 친정부모와 혈친 권속으로부터 철저히 제거되어 이른바 출가외인이 됩니다. 친정아버지의 성씨인 김 씨에서 시아버지와 남편의 성씨인 장 씨의 삶을 살다가 그 장 씨 귀신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가부장제 남성중심의 가족제도 속에서 몽매간에 그리워하는 친정에의 비원이 어쩌다가 실현되는 기회의 친정나들이야말로 얼마나 눈물겨운 노릇이겠습니까. 바로 그 절절한 풍경이 담긴 돌아갈 귀, 돌아올 귀라는 글자를 낳은 것입니다.
이런 지난날의 친정나들이만이 아니라 무릇 삶의 역정 어느 고비에서 그때마다 마디를 이루는 정신 단위의 귀환행위야말로 철이 드는 행위라 하겠습니다. 내가 누구인가라는 새삼스러운 질문도 그런 자아에의 귀환에 꼭 따라붙어야겠습니다.
그간 살아온 바가 나 없이 내달려오지 않았습니까. 그런지라 모든 생명체가 다 이 세상에 나와서 꽉 채우고 있는 여름을 지나 무릇 바람에 모자가 벗겨져 날아간 듯이 나 자신의 허망을 만나는 것이 이런 가을입니다.
나 자신의 욕망과 의지의 어느 지점을 반환점으로 한 그 체념의 행위도 귀환의 뜻에 들어 있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삶의 목적지에 도달하는 일이나 삶의 완성이 아닌 경우라 하더라도 그것을 쉽사리 중단이나 패배로 여기지 않는 성숙이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이 어찌 여름의 일이겠습니까.
나 자신을 돌아보고 나 자신으로 돌아가는 행위야말로 그러므로 가을의 행위입니다. `지난여름은 위대 하였습니다`라는 어떤 절창 역시 그 여름은 이미 와 있는 가을의 어제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오동잎 하나로 천하의 가을을 안다는 그 커다란 깨달음은 거꾸로 천하의 가을을 잎 하나가 응축하고 있다는 깨달음이기도 하겠습니다. 이런 가을의 한 겨를에 삶의 행로를 에워싼 삼라만상의 철리(哲理)를 만나게 되는 것도 가을의 은전(恩典)입니다. 그래서 가을은 그저 가을이 아닌 슬픈 가을이고 깊은 가을입니다.
불교의 제행무상은 그 종교만의 교리가 아닙니다. 이것이 적용되지 않는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따로 없습니다. 가위 세계는 덧없습니다. 나도 너도 덧없습니다. 이 사실은 오직 냉엄한 사실일 따름입니다. 어떤 주관도 개입되지 못하는 사실 말입니다. 고대 그리스철학에서의 `존재`는 이런 제행무상의 교리 앞에서는 그 존재의 덧없는 행위와 변화를 뜻하는 `행(行)`으로 말해져야 합니다.
이 행으로서의 덧없음이 그러나 냉엄한 사실이더라도 인간의 생활정서에서는 매우 주관적인 것이 되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 덧없음은 `아 덧 없구나`라는 영탄이 됩니다. 자연현상이나 인생을 살펴볼 때의 이런 무상감(無常感)은 그 이유를 불문하고 비애의 정서일 수밖에 없겠습니다. 슬픈 가을이야말로 그런 무상에의 비애를 불러일으키는 시간의 의미화입니다.
저 쑥부쟁이나 구절초의 언덕은 아무런 까닭 없이 슬픕니다. 먼 산맥의 그 아슴프레한 푸르름도 자못 슬픔을 자아냅니다. 몇 날 몇 밤을 울고 난 듯한 푸른 하늘의 그 액체감 역시 슬픔의 저승으로 느껴진 때가 왜 없겠습니까.
가을밤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어찌 가슴속 에어드는 서슬이 아닙니까.
바로 이런 비애들과 함께 내 뻣뻣한 자만의 고개는 숙여지고 지난날 턱도 없이 나뒹굴었던 그 허세들도 더 이상 남아 있을 수 없게 사뭇 겸허와 공허의 시간 안에 잠기게 됩니다. 어쩌면 가을은 나에게도 자아에의 성찰이나 세계에의 통찰이 가능케 되는 어떤 사색의 빌미를 내주기도 할 것입니다.
슬픈 가을은 그저 슬픔으로 마감되는 것을 넘어 그 슬픔이 이윽고 하나의 사상, 하나의 철학을 낳는 힘이 되겠습니다. 저 참담한 시절 나는 우리들의 슬픔이야말로 유일한 힘이다라고 여러 번 외쳐댄 적이 있는데 그때와는 또 다른 소리 없는 외침이 있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뜻으로는 모든 철학은 이런 가을의 슬픔이라는 사색의 자궁에서 태어난 마음의 아들이기도 하겠습니다. 이를테면 니체의 습관이기도 한 그 강렬한 선언의 힘이 한 가닥의 비애도 허용되지 않는 대신 그가 가을을 너무 좋아해서 자신의 탄생일을 가을의 어느 날로 옮겼다는 전설로 미루어보면 그의 경이적인 세계인식이 가을의 사색과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짐작합니다.
아니, 고대 현자들의 철학은 무미건조한 진리에의 정의가 아니라 삶과 죽음, 세계의 시작과 끝이라는 감당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진리의 비애를 불러일으킨 것이 아니겠습니까.
철학은 슬픔 없이 태어날 수 없습니다. 비극 이후의 철학론은 관념적입니다.
이 같은 내 단언이 어찌 철학에만 해당되겠습니까. 바로 시야말로 슬픔의 모성에서 태어나는 철학 이전 또는 철학 이후의 원초적인 신생아입니다. 그래서 가장 철학적인 철학은 시의 세계 없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하이데거가 유난스레 자신의 주요 저작을 통해 시의 세계를 자신의 철학으로 재현한 사실이나 자신의 철학이 시 한 구절보다 못하다는 고백 역시 얼마나 거짓 없습니까. 거기에서 우리는 시와 철학의 만남이라는 궁극의 시세계를 발견합니다.
나는 진작부터 한국 철학자들에게서 시의 결핍을 보았습니다. 그런 나머지 올해 아시아 초유의 세계철학자대회가 열리게 되었을 때 그 조직위원장인 원로철학자에게 왜 철학이 시를 통해서 전개되는 일이 없느냐고 언짢은 말을 던진 적도 있습니다. 나 자신 그 대회의 자문위원 위촉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 생각을 거꾸로 돌려본다면 한국의 시가 얼마나 철학과 멀리 있는가를 묻는 일이 됩니다.
소월의 시가 굳이 철학 사색의 대상이 되지 않는바 아니겠으나 아니 고대 중국의 시경 국풍(國風)이라는 민요들이 고대 중국철학의 환경과 아주 동떨어질 까닭이 없겠으나 그것들을 철학으로서의 시 또는 시로서의 철학으로 현현할 수 있는 사색역량이 갖추어진 것이라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겠습니까.
나는 시가 반드시 철학에 맞닿아 있다는 것만을 난데없이 강박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호젓이 바라는 것은 이런 가을의 시가 서정의 나심 이상으로 사색과 철학의 침통한 도야(陶冶)를 이루어주기입니다.
가을 하늘은 깊은 마음의 은유입니다. 또한 내 사색의 오지에서 건져 올린 언어의 결정(結晶)들은 하염없는 가을 산천을 뜻하고 있겠습니다.
시, 말이되 말놀이만이 아닙니다. 시, 이것이 말일수록 말을 낳고 말을 파묻는 마음의 심연입니다.
아 가을의 시는 봄날이나 여름밤의 시가 아닙니다. 삶은 어느새 삶의 뒤인 죽음을 불러내고 가을은 이미 겨울의 그 가혹한 인내의 본체를 내다봅니다.
당신의 지상에 시가 내려오기를. 당신의 지상에서 시가 내년 봄의 노고지리로 오르기를. <창비주간논평>
저자 소개
고은 / 시인
1933년 8월 전북 군산에서 태어나 18세의 나이에 출가하여 수도생활을 하던 중 1958년 『현대문학』에 시 「봄밤의 말씀」 「눈길」 「천은사운(泉隱寺韻)」 등이 추천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첫 시집 『피안감성』(1960)을 펴낸 이래 고도의 예술적 긴장과 열정으로 작품세계의 변모와 성숙을 거듭해왔다. 시선집 『어느 바람』(2002), 서사시 『백두산』전7권(1987~94), 연작시편 『만인보』전26권(1986~2007), 『고은시전집』전2권(1984), 『고은전집』전38권(2002)을 비롯해 시 소설 산문 평론에 걸쳐 150여권의 저서를 간행했고, 1989년 이래 영어ㆍ독일어ㆍ프랑스어ㆍ스웨덴어를 포함한 10여개 언어로 시집ㆍ시선집이 번역되어 세계 언론과 독자의 뜨거운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만해문학상 대산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단재상 중앙문화대상 유심작품상 대한민국예술원상 등과 스웨덴 시카다상, 캐나다 그리핀공로상 등을 수상했으며, 현재 세계 시아카데미 회원(한국 대표)으로 세계시단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회 의장, 버클리대 한국학과 방문교수, 하버드 옌칭연구소 특별연구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위원회 이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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