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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역사에 대한 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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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 반이 고개를 숙이고 (졸고) 있는데, 강사인 내가 이야기하고 싶지 않을 정도다. 애써서 이 자리에 온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달라." 최근 서울시내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현대사 특강`을 담당했던 어느 강사의 말이다.

 

자신들의 생각과 다른 교과서에 분서(焚書)를 감행하고, 동료 학자들에게는 좌파의 낙인을 찍고, 역사교사들과의 대화에는 귀를 닫은 채 학교에 들어와 일방적으로 권력을 찬양하는 이들에게까지 학생들은 고개를 숙이고 조는 정도의 예의를 보였다.

 

일부 학생들은 그러한 강의마저 귀담아들었고, 어떤 학생들은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기 때문에 반대편의 주장도 들어보고 싶다는 인터뷰를 남기기도 했다.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달라는 이 말 속에, 색깔을 숭상하는 저들의 촌극 한판이 모두 녹아 있는 듯하다.

 

역사학은 과거를 다루는 학문이다. 과거는 쉽게 닿을 수 없는 `낯선 나라`이면서도 오늘날과 유사한 모습을 가진 익숙한 대상이기도 하다. 낯섦과 익숙함의 긴장 위에서 역사가는 과거인들이 남긴 기록과 증언, 유물과 유적을 두드려 기나긴 침묵을 깨우는 작업을 한다. 낯선 나라에서 들려오는 무수한 이야기들은 어느 철학자의 비유처럼 `천개의 고원`에서 들려오는 천개의 소리를 담고 있다.

 

근현대사 교과서 개악 저지에 나선 젊은 역사학자와 교육자들

 

2백년이 안 되는 근대 역사학의 발전과정에서 역사가들은 낯선 나라에서 들려오는 천개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법들을 연구해왔다. 그중에서도 낯선 나라의 진실에 다가가는 가장 대표적인 묘안으로 제시된 것은 "낯선 나라와 끊임없이 대화해야 한다!"라는 평범한 해결책이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평범한 해결책이 늘 회자되는 이유는, 과거와 현재의 다양성을 담을 수 있는 관계성만이 `낯설지만 이해할 수 있는 그 나라`에 도달하는 방법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를 둘러싼 논란 속에 국내외의 대학원생들도 적극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밝히며 동참했다. 국내의 20여개 대학에서 역사학·역사교육을 전공하는 대학원생들과 해외의 한국학 전공자 약 5백 명이 성명서를 발표하고 정부의 역사교과서 개악조치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제

 

대로 된 연결망도 가지지 못한 이들이 `역사교과서 개악 저지를 위한 역사학 전공 대학원생들 모임`을 결성하고, 2개월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한목소리를 낸 것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들은 한국사·서양사·동양사·역사교육이라는 각기 다른 전공분야를 가지고 있고, 그 안에서도 다양한 시대사를 연구하고 있다. 또한 각 시대사 내에서도 정치사·경제사·사회사·문화사라는 분류사의 영역을 선택해서 민족주의사학·포스트모더니즘·포스트콜로니얼리즘·젠더사·지성사·제국사 등 다양한 사관을 취하고 있기에, 다채로운 이들의 존재 자체야말로 현재 역사학과 역사교육의 다양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지방과 서울, 국내와 해외라는 공간을 넘어, 저마다가 추구하는 역사적 관점을 넘어 쉽게 뭉치지 않던 이들이 한 곳을 직시했다. 천개의 이야기들에서 흘러나온 천개의 시선들이 하나의 바다로 모여든 곳은 역사학이 추구해야 할 다양성과 이를 뒷받침할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절차였다.

 

난독증을 넘어 악독증에 가까운!

 

기존의 근현대사 교과서에 흠결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젊은 역사학자들과 교육자들이 원한 것은 근현대사 교과서가 역사학과 역사교육이 꾸준히 발전시켜온 성과물을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담아내는 것이다.

 

그들은 권력과 이데올로기의 목소리를 경계하면서, 이전의 거대담론들이 비추지 못했던 `낮은 곳에서 소리 없이 흐르는 목소리`를 담기 위해 역사의 전 영역에서 노력해왔다.

 

우리의 역사학계와 역사교육계를 짊어질 그들이 최종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낯선 나라에 도달하는 새로운 가능성들을 제시함으로써 다양해진 과거만큼이나 다양할 수 있는 현재를 열어가고, 이를 시민들·학생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확대되고 남북의 협력이 진전되면서, 역사적 사실을 `좌파`와 `우파`의 악의적인 이분법으로 해석하는 방식은 역사학에서 자리를 잃었다.

 

그로 인해 우리 역사학은 사료(또는 증언)의 건전성과 역사적 맥락의 타당성이라는 과학적인 방법에 의거해 역사적 사실들을 해석하고, 인문주의의 정신에 따라 인간 이해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본연의 자세를 찾아갈 수 있었다.

 

역사적인 방법과 대화를 무시하는 악의적인 이분법은 과학과 인문주의를 추구하는 역사의 바다가 아니라, 권력과 헤게모니를 갈구하는 정치의 전쟁터로 제자리를 찾아간 것으로만 알았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근현대사 교과서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이들이 목소리를 높여갈수록 역사를 바라보는 이분법의 망령은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고, 역사는 다시 전쟁터로 변해갔다.

 

그들은 새로운 시대가 지향해야 할 다양성을 담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담고자 한 것은 단지 `하나의 시대정신`이었다. ‘그들만의 시대정신`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확고히 빛내줄 성장주의의 관점에 입각해서, 주적(主敵)인 북한과의 차별성을 뚜렷이 하고 대한민국의 자본과 권력을 긍정적으로 인식시키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비록 성장주의라는 관점 속에 과거 제국주의의 힘의 논리와 극단적인 냉전 이데올로기가 숨어 있다 할지라도, 그들의 주장 역시 역사의 바다로 흘러들어올 `하나의 이야기`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역사이해를 위해 사용한 방법은 권력의 힘을 빌려 대화 자체를 봉쇄하는 것이었다. 근현대사 교과서들은 맥락을 무시하는 그들의 난도질로 인해 북한 교과서와 유사한 것처럼 묘사되었고, 교과서 집필자들은 학문적 성과와 학자적 양심과는 상관없이 좌파로 내몰렸으며, 특정 교과서를 선택한 역사교사들에게는 실제 소속여부와는 상관없이 전교조라는 빨간 딱지가 붙여졌다.

 

한 교과서 집필자는 그들의 난도질을 `난독증(難讀症)`이라고 했지만, 고등학생들도 충분히 이해하는 교과서 내용을 악의적으로 왜곡하는 그들의 독해법은 `악독증(惡讀症)`에 가까운 것이다.

 

악독(惡讀)은 결국 악독(惡毒)한 행동으로 이어지는 법인가 보다. 정부 스스로가 자신들이 만든 검인정제도의 취지를 무시하고, ‘수정 권고’가 아닌 ‘수정 강요’를 위해 직접 행동에 나섰다.

 

관련 교육법이나 저작권법으로는 어떤 명분도 설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정부는 이제 대화와 설득이라는 정도(正道)에서 벗어나 출판사에 압박을 가하는 잡수(雜手)마저 시도하고 있다. 출판사의 안위를 위협하고 집필자들의 양심과 인정(人情)을 흔들어대는 이러한 방식이, 학문과 교육의 발전을 책임진 정부가 할 일인지 매우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정부가 이념에 눈이 멀고 권력에 도취되어 있는 한, 학문과 교육의 장에서 논의되어야 할 역사교과서는 일방적인 힘의 논리가 판을 치는 진흙탕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된다.

 

이명박 정부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우리 사회가 함께 키워온 민주주의적 절차와 다양성을 일방적으로 매도하고, 그 결과 `자본과 권력의 확장`이라는 전리품만을 취하고자 발버둥치는 모습이 아니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이다.

 

과연 `현대사 특강`을 한 이들은 알고나 있을까? 척박한 인문학의 풍토 속에서 늦은 밤까지 연구실에 불을 밝히는 역사학자들과 역사연구자들에 대한 예의를. 성적지상주의의 현실에서 다양한 교수법으로 역사의 참뜻을 학생들과 나누고자 하는 교사들에 대한 예의를.

 

그리고 예부터 지금까지 더 나은 사회를 꿈꾸며 울고 웃었던, 이 땅의 평범한 이들이 만들어온 `우리들의 역사`에 대한 예의를 최소한이나마 알고 있을까? <창비주간논평>

 

김대호 / 서울대 역사교육과 석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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