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다지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개인적으로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연한 영화 〈블러드 다이아몬드〉(The Blood Diamond)를 제법 흥미롭게 보았다.
잔인한 현실과 로맨스를 섞고, 역사와 활극을 혼합하며, 건달을 회개시켜 소영웅으로 만든 것이 평론가들에게는 불만스러웠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정도 타협이나마 하지 않았다면 도대체 그 영화를 만들 화폐를 어디서 구했겠는가.
두 눈이 있다 보니 보석이 아름답다는 것은 알지만, 그래봤자 그저 돌일 뿐인데 왜 그렇게 많은 돈을 주고받으며 거래하는지 솔직히 이해가 안 된다. 알다시피 다이아몬드는 고온에서 결정이 되어버린 탄소에 지나지 않는다. 한마디로 숯과 본질이 같다는 뜻이다.
하지만 나 또한 보석을 바라보는 여인들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본 일이 있다. 본질이 아무리 숯에 지나지 않은들 그것을 보고 눈빛이 흔들리는 여인이 다수라면 그것은 경제 법칙이 된다.
숯과 다이아몬드
영화 〈블러드 다이아몬드〉는 빛과 견고함으로 인해 `영원한 사랑의 징표`로까지 격상된 다이아몬드의 생산과 교환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아프리카인들이 희생되고 있는가를 보여줬다.
이 영화 때문에 다이아몬드의 수요가 실제로 감소했는지는 의심스럽지만, 많은 사람들은 다이아몬드를 볼 때마다 사랑이 아니라 아프리카 소년병사의 피눈물을 연상하게 되었다.
그런데 오만한 인간들의 거친 세상에서 피로 얼룩진 것이 어디 다이아몬드뿐일까. 유명 스포츠용품이나 커피에서 가혹한 노동착취를 연상하게 되는 것도 이제는 낯설지 않다. 따지고 보면, 가축을 도륙하여 식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인간사의 기본이니만큼 좋은 것 치고 피로 얼룩지지 않은 것이 없다.
아프리카인들의 피가 어린 다이아몬드 반지를 손가락에 끼워주며 행복한 눈빛을 주고받는 남녀나, 레스토랑에서 쇠고기 스테이크를 먹으며 고상한 대화를 주고받는 사람들이나 그로테스크하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만지는 것마다 금으로 만드는 미다스 왕처럼, 만지는 것마다 피로 더럽히는 것이 인간들이 하는 일이지만, 장자연이라는 젊은 연기자의 소식을 들었을 때 `블러드 다이아몬드`라는 상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스타의 삶 또한 무수한 사람들의 일상이 그렇듯이 본래는 그저 숯에 지나지 않는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그들이 다이아몬드처럼 빛난다고 믿었거나 믿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 다이아몬드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할 만큼 괴로운 삶, 피로 얼룩진 삶이었던 것이다. 과연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에게 숯으로서 따분한 일생을 살든가 핏빛 다이아몬드가 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있는가.
장자연 사건이 상징하는 것
필자가 명색이 영화사 대표라니까 지인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 중 하나는 "연기자들을 자주 만나느냐" 하는 것이다. 여성들이 물어볼 때는 장동건 씨를 만났느냐는 뜻이고, 남성들이 물어볼 때는 김혜수 씨와 아는 사이냐는 것이다.
물론 일터가 그렇다 보니 오며가며 스타들을 만날 일이 없지는 않다. 처음에 그런 스타들을 볼 때는 제법 긴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들도 모두 그저 사람일 뿐이라는 것을 안다. 그들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숯인지까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다이아몬드라고 믿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이 이른바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일반인과 전혀 다른 외계인이라 생각하면 곤란하다. 단지 타인의 이목을 끄는 직업을 가졌고, 그에 맞는 어떤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이해하면 된다.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견딜 수 있는 단단한 신경, 가능하면 호감을 주는 용모, 늘 대중에게 노출되는 상황에서 돌발적으로 발생하는 순간에 대처하는 최소한의 지적 능력 따위가 그것이다. 나는 그들이 경멸의 대상이 되는 것도 안타깝고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도 어색하다.
다만 실제야 어떻든 간에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 땅의 무의미한 하루하루를 버티게 해줄 환상이 반드시 필요하고, 그 환상의 주재자가 되려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누군가는 실제로 그 무대를 점유하는 다이아몬드가 된다.
그런데 다른 인생의 길과 마찬가지로 그 무대를 차지하는 것이 단순히 재능과 노력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는 우열을 가리기 힘든 경우가 너무 많다.
게다가 이 상징적 위치를 차지하느냐 마느냐가 너무 많은 차이를 낳기 때문에 경쟁은 살벌한데, 그 경쟁을 사회가 공정하게 관리하기도 어렵다. 저기 무대가 있다. 그 무대에 서면 꿈이 이루어진다.
숯이 다이아몬드가 되는 연금술이 저 무대를 향한 입구만 통과하면 이루어질 것 같다. 그런데 만일 내가 들어가고자 하는 입구를 야수들이 지키고 있다면 어쩔 것인가.
야수들을 통과해야 하는 낙원의 입구
삶은 본디 비루하다. 부자 부모를 만났거나 출중한 DNA를 타고나지 않은 한,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의 시스템에서는 다이아몬드는커녕 은이 되는 것도 어렵다. 노력하면 누구나 무언가 될 수 있다고, 성공할 수 있다고 자기암시를 하면 정말로 성공할 수 있다고, 온갖 처세서적들은 감미롭게 속삭인다.
그러면, 모두 열심히 하면 누가 경쟁에서 이기는가. 결국은 또 재력과 선천적인 DNA가 문제가 된다. 그런 책들의 일부는 진실하지만 대부분은 당신의 빠듯한 주머니에서 돈을 털어 당신이 아니라 저자의 꿈을 이루려는 술책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은 삶의 비약을 위하여 꿈을 꾸라 한다. 하지만 행운의 별을 타고나지 않은 사람이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야수들이 지키는 저 입구를 지나야 하는데 야수들은 당신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당신의 양심을 내려놓거나, 당신의 몸을 던지거나, 당신의 웃음을 팔아야 한다. 이것은 장자연씨만의 문제가 아니다. 연기자들만의 문제도 아니고 이 비루한 세상을 사는 우리 모두의 문제다.
만일 당신이 그 요구들을 거절할 생각이면 숯으로 사는 것에 만족해야 하며, 야수들의 요구를 거절하고서도 저 입구를 통과하고자 한다면 야수들과 싸우느라 피투성이가 될 각오를 해야 한다.
야수들이 낙원으로 가는 입구를 지키는 사회에서 꿈을 꾸는 것은 위험하다. 차라리 꿈을 꾸지 않았다면 장자연 씨도 사랑하는 사람들, 좋아하는 친구들과 다정하고 은근하며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저 야수들은 그런 조용하고 빛나지 않는 삶을 비웃을지 몰라도 어차피 우리 모두 탄소에 지나지 않는다.
숯의 모양이든 다이아몬드의 모양이든 나름의 삶에는 모두 작으나마 행복의 기회가 있고, 그 행복을 찾는 지혜는 다행히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다. 꿈을 이루라고 부추기는 사회는 위험하다.
더군다나 어느 사회가 꿈을 이루기 위해 지나야 할 입구를 야수들에게 맡겨둔 주제에, 사람들에게 꿈을 이루라고 부추기는 것은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살인이 되기도 한다.
나는 장자연 씨가 좋은 사람이었는지 아니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녀가 삶의 마지막 순간에 느낀 절망이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절망보다 더 화려했거나 더 값싼 것은 아니었으리라 생각한다.
<창비주간논평>
저자 소개
조광희 / 영화제작자 , 변호사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 사무차장 역임. 명필름, 봄, 싸이더스 등의 영화제작사에서 고문변호사로 활동했으며, 영화 〈카라〉 관련 사건을 시작으로 〈하얀방〉 〈범죄의 재구성〉 등 상영중지 가처분 사건을 상당수 수임했다. 현재 `영화사 봄` 대표이사,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안필름마켓` 운영위원회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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