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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우리가 입 하나에 귀가 둘인 이유
언론의 자유를 다시 생각한다
기사입력 :
우리는 지금 누구나 자기 생각을 무엇이나 말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있다. 87년 ‘6월 항쟁’이 가져 다 준 언론자유 시대의 성과이다.


이 우리시대의 언론자유가 심각한 문제점을 던져주고 있다. 누구나 다 말하지만 누구의 주장도 ‘말발’이 먹히지 않고 있다.


대통령의 말도, 국회의 말도, 사법부의 말도 ‘말발’이 별로 없다.


그렇다면 ‘말발’이 서는, 또 다른 사람이나 기관이라도 있는가? 언론기관인가? 대학기관이나 학계인가? 사회원로들인가? 시민단체들인가? 사회단체들인가? 종교지도자들인가? 아무리 둘러보아도 ‘말발’이 서는 사람이나 기관은 아무데도 없다.


말의 공해가 싫어 ‘박정희 신드롬’? 위험천만


누구나 자기 주장만 하지 남의 말은 거의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라디오나 TV의 시사토론 프로를 한번 보자. 토론이라는 게 있기나 한가?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제멋대로’ 떠들지만 다른 사람 말은 듣지도 않는다. 상대방들도 마찬가지다. 토론은 없고 논쟁만 있다. 이러한 현상은 방송프로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정당정치에서도, 노사문제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친구들 사이의 술자리에서도 일어난다. 듣기 싫어하는 사람에게 자기 생각을 강요하려니 목소리만 자꾸 높아져 간다. 결국 진정한 의미에서의 말은 거의 없어지고 ‘소음공해’가 판을 치고 있다.


심지어 무수한 말들이 ‘소음공해’가 되어 대한민국을 떠돌아다니지만 아무데도 기댈 곳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래서 가슴이 텅 빈 듯이 허전하다고 생각하는 일부 국민들 사이에서는 “강제력을 가진 권위라도 생겨났으면 좋겠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점잖게 말해서 ‘강제력을 가진 권위’이지 이것은 ‘독재에로의 회귀’를 뜻한다.


‘박정희 신드롬’도 이 과에 속한다. 그럴 리는 결단코 없겠지만, 만약 우리가 박정희 시대, 전두환 시대 같은 시대로 되돌아간다면 박정희 신드롬을 갖고 계신 분들만이라도 행복해 할까? 그 분들은 박정희 시대를 찬양하는데 반비례하여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의 정치 행태들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그 생각들을 거침없이 토해내 왔지만, 독재정권이 들어선다면, 그 독재정권은 그 분들에게도 곧바로 재갈을 물릴 것임은 명약관화하고 그러할 때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을 마구 한다면 감옥 가거나 고문 당하거나 해고되기 십상이다.


이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 아니, 어떻게 할 수밖에 없을까?  감옥, 고문 또는 해고를 피하려면 옛날 방식으로 되돌아 갈 수밖에 없다. 아무리 하고싶은 말을 못해서 몸살을 앓더라도 말을 참을 수 밖에 없다. 그것으로도 불안하면 말의 자유라는 개념을 머리 속에서 지워버리도록 최면을 걸어야 한다.


우리는 박정희, 전두환 시대에 시사적인 이야기를 친구지간에 할 때도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귓속말을 했다 “하기야 우리 같은 서민에게 정치가 무슨 상관이 있담?”이라고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우리는 이제 언론자유에 대해 다시 생각할 때가 되었다.


올 해는 ‘6월 항쟁’ 2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아직도 지난 20년 동안의 나라의 민주화와 선진화의 성과와 한계에 대한 평가가 크게 엇갈리고 있지만, 우리가 20년을 허송세월 한 것만은 아니라고 본다.


언론자유 문제만 하더라도 그렇다. 이승만 정권 시대부터 70년 동안 우리는 말할 자유를 제대로 누려 본 적이 없었다. 아니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왕조 이후 700년 동안 백성들은 지배자들의 명령만 들어야 했지 어떤 토도 달 수 없었다.


그 700년의 ‘질곡’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 때문에 지난 20년 동안 우리는 남의 말을 듣기보다는 자기 말을 하기에 바빴던 것이다.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말 한 마디 하려면, 남의 말 두 마디는 들어야


그러나 이제는 언론자유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때가 된 듯하다. 한번 상상해 보자. 수 천명, 또는 수만 명의 군중이 광장에 모여 진행도 없고 사회도 없이 자기 얘기만 늘어놓는다면 그것이 언론자유인가?


우리는 폭력이 지배하는 사회, 독재자의 명령만 존재하는 일원주의 사회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다. 우리는 누구나 말할 자유를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 민주주의 사회, 다원주의 사회가 독재 시대, 일원주의 사회보다 더 나은 사회임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언론의 자유를 제대로 누릴 수 있는 사고방식이 필요하다. 마음만 먹는다면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규칙이다.


“내가 말할 자유와 권리를 누리려면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의 자유와 권리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상대방의 권리를 진심으로 인정하는 것은 상대방의 얘기를 진심으로 듣는 것이다. 듣는 척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말하고 듣고, 듣고 말하는 진정한 대화(Dialogue) 속에서 건전한 토론문화가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성인이 아닌 다음에야 언제나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 들을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우리 범인들도 남의 말 두 마디는 듣고 한 마디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입 하나에 귀 둘을 가진 까닭이다.


이 규칙에 실천 순서는 따로 없다고 생각한다. 대통령이, 국회의원이, 또는 공무원들이 솔선수범하면 우리도 따라 하겠다고 해서는 부지하세월이 될 것이다. 먼저 실천하는 사람이 먼저 참다운 언론자유를 누리는 사람이될 것이다.


오늘날의 한국 정치체제는 우리 국민들의 힘과 열정의 산물이다. 사람도 스무 살이면 성년이다. ‘6월 항쟁’ 20주년을 맞는 우리는 진정한 언론자유를 다 함께 가짐으로써 ‘민주한국의 성년식’을 가졌으면 좋겠다.

 

▲ 글쓴이 성유보
글쓴이 / 성유보

· 언론인

· 한겨레신문사 초대편집위원장

· 전 방송위원회 상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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