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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직 고성군 노동자 위해 100년 동안 제사 올린 일본인들
  • 고성방송2021-04-07 오후 04:50:26


- 지난해 326일 효고현애 추도비 건립`` 올해도 추모식

- 일가족으로 보이는 경남 고성군 사람 4명 사상(당시 신문기사)

 


해마다 326일이면 일본 효고현 다카라즈카의 시민단체 <외국인시민문화교류협회>의 곤도 도미오(近藤富男) 고문은 조선인을 추도하는 제사를 올린다. 1929년 후쿠치야마선 철도개수공사 중에 숨지거나 다친 경남 고성군 사람인 윤길문(尹吉文`` 21 즉사)`` 오이근(呉伊根`` 25 병원에 실려 가던 중 사망)`` 윤일선(尹日善`` 25)과 그의 부인 여시선(余時善`` 19 중경상) 씨와 1914-1915년 고베 수도건설 공사에서 사고로 숨진 또 다른 조선인 김병순`` 남익삼`` 장장수씨를 추도하기 위해서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곤도 도미오씨는 "코로나19로 크게 추도회를 열 수 없어서 올해는 몇 사람 회원들이 추도회로 모였다"고 전했다. 사망 시기가 서로 다른 희생자들이 한데 추도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부터였다. 이들을 함께 기리는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2020326일 제막되었기 때문이다.

 

곤도 도미오씨가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를 세운 것은 재일동포 향토사학자 정홍영 씨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서였다. 1993년 두 사람은 1929년의 신문기사에 의지해 후쿠치야마선 터널사고 현장을 답사하고 그 자리에서 첫 제사를 지냈다. 이날이 마침 순직자들의 사망일(326)이어서 두 사람의 제사는 희생자들의 사망 이후 64년 만에 지내는 첫 제사였다. 곤도 도미오씨는 이날이 고 안중근 의사 서거일이어서 또렷이 기억했다고 말했다.

 

이후 두 사람은 해마다 사고 현장을 찾아 윤길문`` 오이근씨의 제사를 올렸고`` 2000118일 정홍영 선생이 타계하신 뒤에도 곤도 도미오 선생의 주도로 제사는 계속됐다. 머지않아 다카라즈카의 시민단체와 재일동포들도 이 제사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위해 지내는 제사가 거듭되면서 추도비 건립이 의논되고`` 마침내 지난해 326일 옛 후쿠치야마선 제6호 터널 근처 <벚꽃동산> 신수이 광장에 추도비가 세워진 것이다. 사고가 난지 91`` 이들의 희생이 다시 세상에 알려진 지 27년만의 일이었다.

 

추도비 제막식을 한 달 앞둔 2020223`` 곤도 도미오 선생은 가까운 곳 타마세의 불교사찰 만후쿠지(萬福寺)의 주지스님한테서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 그는 "옛날(1914-15) 타케다오의 터널 폭파 공사로 죽은 조선인들을 추도하고 있다"면서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궁금하다"고 문의해 온 것이다.


곤도 도미오 선생이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건립소식을 전하자 주지스님은 "그동안 우리가 계속해 온 위령의 마음도 함께 이어갔으면 좋겠다"는 뜻을 밝혔으므로`` 결국 양쪽에서 따로 제사를 지내오던 다섯 사람의 희생자를 한데 추모하는 추도비를 세우기로 한 것이다. 주지스님은 추도비의 제막식 법회를 집전하기도 했다.

 

또 추도비 뒷면에는 "슬퍼할 도()"자가 크게 새겨져 있는데 이는 다카라즈카의 시장 나카가와 도모코(中川智子)씨가 쓴 것이다. 조선인 희생자 다섯 사람의 추도비 건립을 위해 다카라즈카의 시민단체와 종교단체`` 그리고 시정부까지 거들고 나섰던 것이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는 건립 1주년을 맞았지만`` 관계자들의 숙원은 풀리지 않은 채 남아있다. 추도비 속 다섯 사람 주인공들은 이름 말고는 알려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희생자들의 연고자를 찾는 것이 이들의 새로운 과제였다.

 

희생자들의 고향을 찾기 위해 두 차례나 한국을 찾았으나 목적을 이루지 못한 곤도 도미오씨는 필자에게 연고 조사를 부탁했다. 당시 최승희 조사연구차 효고현을 찾았던 필자가 80년 전의 공연 기록을 찾아내는 것을 보고 추도비의 조선인에 대한 기록도 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다시 솟았다고 했다.

 

쉬운 일 일리 없었다. 사고 이후 오랜 시간이 흘렀고 전공 분야가 아닌 기록을 어떻게 찾아야할지 막막했다. 그러나 누군지도 모르면서 100년 동안 조선인 제사를 모셔온 이들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1914-15년과 1929년의 관공서 기록과 신문기사를 다시조사하면서 다행히 새로운 정보가 나타났다. 1929년의 신문기사에서 윤길문`` 오이근씨의 고향이 경상남도 고성(固城)임이 확인되고`` 1914년에 죽은 김병순씨의 매장허가서에서 그가 강원도 강릉 출신임도 찾아냈다. 김병순씨의 기록에는 본적지 주소가 거의 완벽히 쓰여 있었으므로 강릉 조사부터 시작했다.

 

강릉 조사에 앞장서 준 것은 현지의 시민단체와 학계인사들이었다. <김성수열사 기념사업회>의 홍진선 이사장과 강릉원주대학의 강승호 교수`` 그리고 강릉의 문화콘텐츠사 <네트피아>를 경영하면서 강릉원주대학에 출강하는 유선기 사장 같은 분들이 그들이었다.

 

이들의 요청으로 강릉 향교의 전교 최기순씨`` 사무국장 김남철씨`` 성균관유도회 강릉지부 회장 최상은씨가 적극 협조해 주었고`` 성균관유도회의 왕산지회장이자 유림 잡지 <청년유림> 발행인 권우태씨도 김병순씨의 100여 년 전 소재를 찾기 위한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여러 사람의 노력 끝에 결국 경주김씨 수은공파 강릉지회의 총무 김자정씨를 만날 수 있었고`` 김자정씨는 상하 두 권에 걸쳐 600 쪽이 넘는 세보 기록을 샅샅이 뒤진 끝에 결국 김병순씨의 이름을 찾아냈다. 김병순씨 항목에는 "일본 거주(居日本)"라는 석 자가 기록의 전부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이 김병순씨가 다카라즈카의 김병순씨라는 점이 확인됐다.


이제 앞으로 이 족보기록을 바탕으로 김병순씨의 유족과 친척을 찾는 일이 남아 있다. 가족과 친족의 도움을 얻어야 호적이나 민적과 같은 공식 기록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건강상의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김자정씨는 친족의 소재를 찾는 일을 맡아주기로 하셨다. 족보에 친족들의 이름과 선산의 위치가 기록되어 있으므로 결국 연고자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강릉 조사가 진척을 보이면서 경상남도 고성 조사도 곧 시작될 예정이다. 윤길문`` 오이근씨가 고성 출신임이 확인되기는 했지만`` 자세한 본적지 주소가 파악되지 못했으므로 조사 과정은 더 까다로울 것이다. 하지만 강릉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향교와 문중의 도움을 받으면 두 사람의 연고를 찾아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한편`` 일본에서도 효고현 이타미 거주 재일동포 정세화씨는 일본 기록을 조사 하고 있다. 1915년에 숨진 장장수`` 남익삼씨에 대한 한국내 연고지에 대한 어떤 기록도 찾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효고현과 오사카부`` 교토부의 외국인등록 기록과 회사 고용기록을 찾아 열람하고 있다. 현해탄의 이편과 저편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다카라즈카 조선인 추도비> 주인공들의 연고를 찾기 위해 1세기 동안 제사를 지내고`` 뒤늦게나마 그들의 연고를 찾으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곤도도미오씨는 "20세기 초 효고현의 발전`` 나아가 일본 근대화를 위해 조선인들이 노력하고 희생한 것을 잊으면 안 된다"고 대답했다. 재일동포 정세화씨도 "우리 할아버지와 할머니들께서 이 땅에 살아가며 뿌리내리기 위해 치르신 희생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동북아역사재단>이 발간한 <조선인희생자추도비(2019)>에 따르면 일본전역에 170개 이상의 조선인 위령비와 추도비가 세워진 것이 확인됐다. 그 가운데에는 생존을 위해 현해탄을 건너간 노동이민자들도 있고`` 2차 대전 동안 강제로 끌려간 노동자들도 있다. 어떤 경우이든 열악한 임금과 노동조건 속에서 혹사당하다가 죽음을 당한 조선인들을 기리기 위함이다.

 

오늘날의 일본 정부는 당시 군국주의 정부와 기업의 만행을 부정하고 미화하지만`` 많은 일본인 시민들은 조선인들의 희생을 기억하면서 기리고 있는 것이다.

 

다카라즈카 시민들이 <조선인 추도비>를 세우는 데 멈추지 않고 희생자들의 연고를 찾아 나선 것은`` 정부가 해결하지 못하는 과거사 문제를 정리하고 두 나라 시민들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고 싶은 열망 때문일 것이다. (*)

 

조정희 PD

재일조선인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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