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인터넷뉴스

  • 페이스북커 박영호가 들려주는 나의 인생살이
  • 고성인터넷뉴스2013-03-27 오전 11:45:59

아래글은 페이스북커 박영호가 지금까지 14편에 걸쳐 쓴 나의 인생살이라는 글을 본사가 단독 게재 허락을 받아 싣는 것으로 필자 박영호는 이 글을 쓰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졸필이고, 보잘 것 없지만 한 시대를 사는 사람의 진솔한 이야기 혼자서 반성 할 수 있지만 솔직하게 내 놓고 싶어 가감 없이 쓴다고 밝히고 있다.

 

필자는 이 글을 페이스북에 공개하고자 할 때까지 며칠 밤낮을 고민했다다만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고자 함도 숨기지 않는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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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글쓴이 박영호는 641210일 강원도 삼척군 원덕읍 비화리에서 태어나 태백중학교와 춘천제일고(지금은 강원사대부속고)를 나와 충북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으며, 전대협 1기로 충북대학교 총학생회장을 지냈다.

 

박영호는 88년 남북학생회담 남측대표, 충북민협 조직부장, 청주민청 의장, 민주주의민족통일충북연합 집행위원장을 지낸바 있고, 98년 한청협 사무처장, 한국청년연합회(KYC) 준비위원장을 지내며 재야운동에 몸 바쳤다.

 

999월 새천년민주당 창당준비위원, 중앙당 국제협력부장, 조직부장, 정세분석부장, 직능부장, 2002년 새천년민주당 중앙당 당직자 협의회 초대회장을 지내고 열린우리당 정책국장과 2009년 민주당 강원도당 전략기획실장을 끝으로 정당 실무당직자 역할을 수행했다.

 

2012년 문재인 민주당 18대 대통령 후보 선대위 동행2본부 부단장을 역임했던 박영호는 대선 패배 후, 그의 삶을 되돌아보고자 이글을 쓴다고 페이스북에서 밝히고 있다.

 

자신이 그동안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할 것인가로 전개될 박영호의 글은 우리 시대 386, 486의 투쟁과 실패의 노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50대에 접어든 현재, 박영호는 치매가 진행 중인 부모님과 교사인 아내, 고등학생인 11남을 키우면서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뒤늦게 가정으로 돌아간 그는 가족의 소중함을 글 내내 들려주고 있다.

 

50대 베이비부머들의 퇴직 후 삶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그는 밥벌이를 위해 부동산과 보험 일을 하면서 열심히 살고 있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역사에 살고 역사에 다시 나타날 것이다. 다시 준비해 역사에 외칠 것이다. 이것이 민주화운동을 한 우리 시대 50대의 고민일 것이다. 앞으로 그가 어떤 삶을 살 것인지, 한번 지켜볼 일이다. 울고, 웃고....박영호가 전하는 그의 인생살이를 통해 우리네 삶을 함께 고민해보자.

 

 

[나의 인생살이 1]

 

나는 강원도 삼척의 조용한 어촌 마을에서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우리 할아버님은 장남 이셨다. 배를 타고 북한 지역까지 가서 명태를 잡으시며 생계를 꾸렸다고 한다. 11남을 두고 우리 아버님이 7살때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병으로 돌아가셨단다. 졸지에 고아가 되셨다. 그래서 나의 아버님은 7살 때 작은 아버지 집에서 자랐고, 고모님은 외할머니 댁에서 자라다가 시집을 가셨단다.

 

아버지는 20살에 결혼해 작은아버지 집에서 독립하셨다. 할아버지가 남겨준 얼마의 땅으로 생계를 유지 하셨다. 우리 어머니와 결혼하고 나서 이듬해에 군대에 가셨다. 어머니는 아버님이 결혼 직후에 군에 입대를 해 외할머니가 집에 오셔서 어머니를 지켜 주셨다고 한다.

 

아버님이 휴가를 나와 우리 누나가 생겼고, 어머니는 신랑이 군대 간 사이에 누나를 낳았다. 아버지가 제대하고 연속으로 3명의 아들이 태어났는데 나는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러고 보니 장손이 됐다. 그렇게 살았지만 아이들을 키울 수 가 없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님은 강원도 태백의 광산으로 취직하러 가셨다. 크는 아이들의 교육을 걱정하신 모양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치고 고향을 떠났다.

 

[나의 인생살이 2]

 

고향에서…….

 

우리 집은 바닷가에서 불과 30m 떨어져 있었다. 아침이면 문으로 아침 햇살이 창끝처럼 따갑게 비치고, 그 따가운 햇살 때문에 잠에서 깨곤 했다. 아버님은 아침 일찍 나를 깨워 앞바다에 던져 놓은 조그만 그물을 걷곤 하셨다. 내가 비록 덩치는 작아도 아버지 일을 도울 만큼은 됐다. 고기를 잡아 오면 팔 것과 먹을 것을 구분하고, 어머니는 고기 굽고 아버지는 다시 지게를 지시고 소 먹을 꼴을 하러 가셨다.

 

바다는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원동력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약 5Km를 걸어 다녔다. 지금처럼 봄이 오면 진달래 따먹으며 하교 했다. 바닷가로 걸어 하교 할 때면 저녁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배고픔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바닷가 푸성귀를 뜯어먹어야 했다. 박정희 정권 때니까 새마을 노래 부르면서, 줄지어 하교 했다. 하나, , , ~~~!!!

 

확실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내가 5살쯤 돼서 초등학교 옆에 교회가 있었는데 나는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먹을 것도 주고……. 어느 날 어머님이 동네 분들과 함께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안방구석에 모셔두었던 삼신 할매 바가지를 박살내기도 했다.

 

지금의 나에게 영향을 준 두 번째 사건이었다.

바다와 교회~~~

 

아버지가 얼마 되지 않은 땅을 파는 것을 잠결에 들었다. 그리고 그 돈으로 탈곡기를 샀다. 탈곡해주고 몇 푼이라도 벌을 모양 이었다. 하지만 사업이라면 사업인데 잘되지 않았다.

 

초등학교 2학년쯤인가? 아버지가 남의 소를 한 마리 데리고 왔다. 우리가 키워서 송아지를 낳으면 첫 번째 소는 주인한테 주고 두 번째 송아지는 우리 것이 된다. 두 번째 송아지가 어느덧 자라면 어미 소도 주인한테 돌려주었다. 나는 송아지를 먹이러 산으로 형들과 다녔다. 힘에 부대끼기도 했다.

 

어느 날 놀다가 늦게 출발하는 바람에 송아지를 혼자서 몰고 소먹이는 장소로 갔다. 갑자기 군용 지프차가 획 지나갔다. 송아지가 뛰기 시작했다. 나는 사력을 다해 잡았지만 역부족 이었다. 할 수 없이 허리에 고삐를 맸다. 허리가 부러지는 줄 알았다. 그때 지나가던 군인이 잡아주지 않았다면 아마도 난 큰 사고를 당했을 것이다. 집에 와서 지게작대기로 송아지를 엄청 때렸다. 눈물을 흘리는 송아지를 보면서 나도 울었다.

 

고향에서의 추억은 아마도 지금 내가 촌놈의 냄새를 풍기는 원동력이 된 것 같다.

 

[나의 인생살이 3]

 

흑진주의 땅으로 들어서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어느 봄 날 아버님이 태백으로 떠났다. 당시 태백에는 둘째 외삼촌이 사셨는데, 상이군인이라 강원탄광의 화약고를 지키는 일을 하셨다. 아버지는 처남을 만나 탄광에 취직하게 해 달라고 했단다. 외삼촌은 아버님의 의지가 너무 강해서 바로 취직자리를 알아봐 주셨다. 강원탄광에 취직하게 되었다.

 

수항(갱내에서 석탄 맥이 있는데 까지 수직으로 파고 들어가는 일)부에서 일하게 되었다. 채탄부는 그야말로 막장에서 탄을 캐는 일을 하는 것이다. 너무도 빨리 취직이 되고 출근을 하게 돼 아버지가 혼자서 조그만 방을 얻어서 자취를 하게 됐다. 집에서는 엄마가 어차피 이사를 가야 하니 누나보고 빨리 아버지가 계시는 철암(지금의 태백시)으로 가서 아버지 밥해주라고 하셨다.

 

당시 누나는 6학년 이었다. 누나가 6학년 여름쯤 태백의 철암으로 전학을 갔다. 엄마는 아들 삼형제를 데리고 논농사, 밭농사를 하면서 버텼다. 내가 4학년 이었으니까 나도 어느 듯 클 만큼 커 엄마를 도와 농사일을 했다. 똥을 퍼 밭에 뿌리기도 하고, 봄에는 보리를 거두는 일도 했다.

 

아버지가 떠난 5월쯤인가? 봄 소풍을 가야 하는데, 처음에 정해진 날에 비가 왔다. 두 번째 소풍날에는 때마침 보리를 수확하는 날이라 소풍을 가지 못했다. 멀리서 친구들이 소풍가고 있었다.

 

누나는 아버지가 계시는 철암으로 전학을 갔다. 단칸방에서 아버지 밥을 해 드려야 했다. 아버지는 3교대 근무를 하셨다. 일주일씩 돌아가면서 갑, , 병반을 했다. 갑반은 아침 7시에 출근해서 오후 6시에 퇴근하고, 을반은 오후 3시에 출근해서 새벽 2시에 퇴근하고, 병반은 밤 11시에 출근해 다음날 8시에 퇴근 했다.

 

누나는 6학년인데도 아버지 밥을 해 드렸다. 시간 맞추어 밥해드리고 학교가고…….학교도 약 5Km를 걸어가야 했다. 그렇게 여름과 가을이 가고 겨울이 다가와 방학을 맞았다.

 

1974년 겨울~~우리는 짐을 쌓다. 이사 가는 것이었다. 친구들과 송별회를 했다. 아는 노래라고는 음악책에 나오는 노래와 어른들이 부르는 뽕짝송이 다였다. 뭔 뜻인지도 모르고 마음껏 불렀다. 목청껏 불렀다. 그렇게 친구들과 헤어졌다.

 

바다를 뒤로하고, 자치기 하던, 얼음썰매 타던, 팽이치기하던, 논두렁으로 막걸리 심부름 하던, 소몰이 다니면서 개구리 잡아먹던, 소먹이 하면서 산골짜기 먼저 차지하려고 옆 동네 애들과 패싸움 하던, 젓가락에 무짠지 하나 끼워 꽁보리 조밥으로 허기진 뱃가죽 채우면서도 연날리기 하던…….내 고향을 뒤로 하고 우리는 덜컹거리는 버스에 몸을 싫었다. 동생 둘은 뭐가 뭔지 모르고 마냥 좋아라했다.

 

둘째는 1학년, 막내는 당시 아마도 5살 쯤 됐을 것이다. 지금은 미국에 살지만 이놈은 그때 한글을 깨우쳐 버스가 지나가면 간판을 읽는 데 재미를 붙였다. 나는 그놈이 천재인줄 알았다. 짐은 모두 해서 옷가지와 이불, 그릇 몇 개가 전부인 걸로 기억한다.

 

3시간을 달려 우리는 삼척 도경리역에 도착 했다. 강릉에서 철암, 영주, 제천, 원주를 거쳐 청량리로 가는 밤기차였다. 강릉에서 오후 6시쯤 출발하면 청량리에 아침 6시쯤에 도착하는 완행 열차였다. 처음 타보는 기차였다. 기차에서는 계란이 최고다. 물론 먹었다.

 

철암에 기차가 도착했다. 아마도 밤 12쯤 됐을 것이다. 눈이 억수로 내렸다. “철암~~철암~~여기는 철암역입니다. 내리는 손님 잃으신 물건 없으신지 다시 한 번 살펴보시고 안전한 플랫폼으로 나가주시기 바랍니다.” 뭐 이런 내용의 구슬픈 여자 안내원의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생생하다.

 

처음 내린 철암은 천국과 같았다. 온 사방에 불이 환 했다. 검은 연탄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백설의 천국이었다. 거기에다가 24시간 일하는 역에서 비치는 서치라이터는 나를 황홀에 빠지게 하는데 충분했다.

 

철암역에서 아버지가 누나랑 자취하고 있는 월천동까지 걸었다. 눈 맞으며…….낮선 도시에서의 처음 발걸음은 너무도 황홀했다. 날이 밝아 눈뜨면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는 아무 관심사가 아니었다. 다섯 살 막내는 한 30분 걷는 동안 동네 간판을 다 읽으며 앞서간다. 둘째는 졸립다며 칭얼댄다. 우리가 도착한 집은 단칸방으로 여섯 식구가 앉으니 딱 무릎이 맞닿았다. 그렇게 낯선 땅 흑진주의 땅 철암에서의 첫날밤은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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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과 함께

 

[나의 인생살이 4]

 

우리 집이 생겼어요…….

 

눈이 녹았다.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눈 물이 흘렀다. 검은 눈 물이었다. 한 발자국을 걸을 수 없었다.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산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철암에 가면 굳이 초등학교를 다니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말이 됐다.

 

아버지는 정말로 열심히 일하셨다.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우리 여섯 식구의 먹을거리와 학용품을 장만하기 위해 일하셨다. 생각만 해도 오그라드는…….상상해 보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생명을 맡긴 탄광 안에서…….나는 아버지가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스럽다. 아니 존경한다.

 

우리가 철암으로 이사 온 지 일 년이 안 돼 동점초등학교 앞에 집을 샀다. 아마도 50만원이었다고 기억한다. 당시 아버지 월급이 오만 원 정도 됐는데 어찌 샀는지 나는 모른다. 아마도 일부 저금한 돈과 땅 팔아서 숨겨둔 돈, 그리고 조금 빚을 얻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물론 외삼촌이 지키는 화약고에 약 5Kg 하는 화약을 매고 약 200m의 산중턱에 올라가면 5원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일도 나는 했다. 나도 조금 보탰다고 봐야 한다. 나는 장남이다. 우리 집 종손이다.

 

철암에서의 단칸살이는 지금 기억해도 뭐라 표현하기 어렵다. 옆방에서 밥숟가락 놓는 소리가 들리는 정도였다. TV가 없어서 남의 집에 가서 차돌이를 보았다. 사명대사 인형극을 볼 때는 숨도 쉬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TV가 생겼다. 하지만 볼륨을 높일 수 가 없었다. 옆집에서 난리가 났다.

 

그런데 우리 집이 생긴 것이다. 마당도 있고, 방이 두 칸이었다. 학교도 걸어서 5분이면 도착하는 꿈에 그리는 교동!!!

 

나는 6학년 초에 철암초등학교에서 동점초등학교로 전학했다. 철암 초등학교는 5학년만 다닌 것이다. 동점초등학교에 전학 왔는데 담임선생님이 나를 예뻐해 주셨다. 아침에 선생님이 출근 하시면 나보고 심부름을 시키셨다. 집에 가서 숭늉을 주전자에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 좋았다. 선생님이 심부름 시키는 것이 선생님이 나를 인정해 주는 것으로 알았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졸업식 날 송사와 답사를 읽는데 내게 답사를 읽는 영광을 주셨다.

 

 

[나의 인생살이 5]

 

축구에 미치다…….

 

학교 앞에 집이 있다는 건 참으로 좋았다. 저녁 늦게까지 학교 운동장에서 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뭐하고 놀았냐? 2002월드컵 이전에 여자들이 가장 싫어 한다는 축구하고 놀았다. 축구공이 없어서 테니스 공으로 찼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잘 찼다. 물론 내기를 했다. 골당 1원이었다. 넣고 빼고 하다보면 2원 따는 게 고작이었다. 그리고 집에 가면 욕 뒤지게 얻어먹고 잠자면 당연 다음날 지각이다. 학교 앞에 사는 애들이 지각 제일 많이 한다.

 

중학교엘 진학했다. 장성에 있는 태백중학교다. 아침에 등교할라치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버스가 서울 지하철 저리가라였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편하게 의자에 앉으려고 한 정거장 걸어간다. 그렇게 걷다 보면 결국은 버스 출발점까지 간다.

 

내가 중학교 3학년 초 쯤 이다. 하루는 아버님이 광산을 그만 두시고 사우디아라비아로 돈 벌로 가신다고 했다. 당시 중동건설 바람이 불었다. 아버지는 극동건설 노무자로 사우디로 떠났다. 아버지가 사우디로 떠날 때 아마도 브로커들이 설쳤던 모양이다. 돈을 얼마를 내야 갈 수 있다는 거였다. 아버지는 사우디가시면 돈을 많이 벌을 것이라 생각하신 모양이다. 그래서 집을 팔았다.

 

아버지가 집을 팔고 사우디로 떠나고 나서 우리는 셋방을 전전했다. 다시 단칸방으로 단칸방으로 아마도 이사를 대여섯 번은 한거 같다. 일 년 사이에…….그 사이에 연탄가스를 들이마셔 남은 다섯 식구가 몰살당할 뻔도 했다. 다행히 하나님의 보살핌으로 우리는 살아났다.

 

사우디에서 보내온 돈은 얼마 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강원탄관에서 버는 돈 보다 적을 때도 있었다. 속아서 간 것을 뒤늦게 알았다. 엄마는 남은 자식들을 위해 계란장사도 했다. 물론 망했다. 한번은 날계란을 이고 가다가 빨랫줄에 걸려 계란 열 판을 땅바닥에 쏟아버렸다. 엄마는 그중 덜 깨진 계란을 담아 오셨다. 그 날로 부터 한 열흘 동안 돌 씹히는 계란후라이를 먹어야 했다.

 

중학교 3학년이 되던 해인 791026일 존경하는 박정희 대통령께서 총에 맞아 돌아가셨다. 그로부터 아마도 국장이 치러지던 날까지 울었던 거 같다. 나는 대단한 애국심의 소유자였다. 우리나라를 이끌고 있는 대통령의 죽음은 어린 나에게 있어서는 나라가 망하는 걸로 인식됐다. 나만 울었더냐? 온 집안 식구들이 모두 울었다. 그 눈물로 목욕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박정희가 존경해야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시기는 대학에 가서였다. 세상을 속아 살아온 느낌이었다. 내가 배운 우리의 역사가 이런 것이었던가? 나는 방황하지 않았다. 거짓 세상에 도전하고 바로 잡아야겠다고…….

 

3수 끝에 어렵게 들어가 대학에서 일주일 만에 데모대의 맨 앞줄에 있는 나를 발견했다. 나는 정의의 사도 차돌이와, 육군소위 나시찬, 세상을 위해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삶을 알고 있었기에,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나는 앞으로 전진 했다.

 

물론 사명대사, 마린보이, 마루치아라치, 로보트 태권브이....내게 그나마 바른 삶을 살아야 한다고 영향을 준 것은 어머님 아버님이 아니라 이런 것들이었다. 부모님은 나에게 있어서는 돈 벌어주고 밥 먹여주시는 당연한 사람에 불과했다. 내가 부모님에 대해 존경심을 갖게 된 것은 내가 아이를 낳아보고서야 조금 알게 됐다.

 

나의 고향이 바닷가라서 6.25 한국전쟁이 터지고 아침 7시에 북한군들이 우리 동네 앞바다로 쳐들어 왔다고 한다. 거기로 해서 태백산맥으로 들어가 후방 교란작전을 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아버지가 아마도 17살쯤 인가 됐을 때인데…….인민군들이 아버지한테 포탄을 메고 어느 지점까지 가라고 했단다. 아버지는 가다가 도망쳐 다행히 살았단다. 그래서 우리 고향에는 군인들이 많았다. 나는 군인들이 너무 멋있게 보였다. 그리고 전우라는 드라마에서 육군소위 나시찬이 너무 좋아서 꼭 육사를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뒤에 내가 고등학교를 춘천으로 유학하게 된 이유가 된다. 다시 말해 나의 애국심은 그렇게 형성됐던 거 같다.

 

 

[나의 인생살이 6]

 

TV를 보면서…….

 

아버님이 사우디로 떠나고 우리는 집을 팔고 우리가 살던 앞집의 단칸방에 월세로 들어갔다. 다섯 명이 칼잠을 자야 했다. 그런데 내 바로 밑에 동생은 외화를 무척 좋아 했다. 막내는 별로 기억나지 않는다. 누나는 고등학생이 돼 대학갈 요량으로 열심히 공부했다. 나는 뭐했지?

 

생각해보라!

단칸방에서 엄마는 코 골고 주무시고, 누나는 공부하고, 동생은 TV에서 나오는 외화보고, 아마도 그 시간쯤이면 막내는 잤을 것이고...나는 아마도 친구네 집에서 놀고 있었을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던 어느 날!

MBC로 기억되는데 타인의 인생이라는 단막 드라마가 방영됐다. 지금은 MBC를 보지 않는다. 이유는 나중에…….

 

내용인 즉, 돈 많은 어떤 여자가 한 남자를 좋아 했다. 둘은 결혼 하려 했으나 여자 집에서 반대했다. 그러던 과정에서 남자는 죽었다. 이 여자는 그 남자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자기 애인과 닮은 사람을 찾아 나섰다. 그런 남자를 찾았다. 그 여자는 그 남자를 이전의 자기 애인으로 교육시켰다. 결혼하려면 이전의 애인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남자는 결혼하려고 죽은 어떤 남자의 삶을 그 여자가 시키는 데로 하며 살았다. 결국은 그 남자도 앞서간 남자처럼 죽었다.

 

이 드라마를 본 나는 절대로 저렇게 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는데 거의 99%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책도 읽지 않았다. 나는 내 생각대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교조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감수성이 예민할 때니까....

 

무식이 통통 튀었지만 그래도 나의 주체성을 상실하면서까지 살고 싶지는 않았다. 아마도 나에게 이것을 설명해주고, 이끌어 주는 선생님이 계셨다면 내 인생에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이라는 후회 아닌 후회를 할 때는 이미 상당한 시간이 흘러서였다.

 

내가 이후의 삶의 과정에서 특별히 누구를 따르지 않거나 또는 어떤 것을 너무 좋아해 빠지고,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드는 그런 인생을 사는데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것은 뒷얘기를 읽지 않아도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대학가서 엄청나게 책에 빠져 그 유명한 사회과학서적을 탐독하고, 실천하는 계기가 됐음 또한 자명한 일이다.

 

지금 내가 생각 컨데 아마도 내 인생에서 그 때 책을 가장 많이 읽었던 거 같다. 이제 생각해보니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고 했던가.....두루 다방면에 걸쳐 책을 읽는 것이 인생에 도움이 됨을 늦게 깨달은 것은 나의 인간적 특성에 기인하는 것 같다.

 

박정희가 죽고 어느 듯 시간이 흘러 고등학교 입학원서를 써야 하는 시기가 됐다. 나의 고민이 시작 됐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니, 당시 공업고등학교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엄청나니 공부도 곧 잘 하고 그러니 공고를 장학생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나는 가기 싫었다. 이미 마음속에는 육군사관학교를 가야겠다고 정해 놓고, 그러려면 춘천에 있는 제일고등학교(지금은 강원사대부고)를 가야하고....엄마랑 지겨운 투쟁이 시작됐다. 누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고…….내가 춘천으로 고등학교를 가면 누나는 대학을 포기해야하고…….

~~~어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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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살이 7]

 

단식투쟁이 시작 되었다.

 

나는 왠지 모르지만 덩치도 작고 한데 어디선가 깡다구를 부리면 고집을 꺾지 못한다고 늘 어머님께 핀잔을 듣고 했다. 덩치가 작기 때문에 싸워서는 이기지 못하니 늘 친구들과 웃으며 대화하고, 머리로 전략과 전술을 짜서 힘 센 친구들과 어울리고…….아마도 동물적 본능에 기인했지 않나 싶다.

 

교회를 일찍 다녀서 인지 나는 예수님의 삶에 너무도 감동 받았다. 한때 내가 교회 목사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는 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지금도 교회는 가지 않지만 마음속에는 항상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 어머님도 나의 영향으로 교회를 다니셨는데, 내가 대학가서 감옥 갔을 때 엄마는 나에게 예수님을 만난 것 같다고 했다. 너무 고맙고 눈물이 났다. ...고생해서 아들 대학 보냈는데…….돈 벌어 줄 것이라고 믿었던 아들이 남이 돼 창살 저 너머에 갇혀 있는 모습에서도 당신은 울지 않았다.

 

태백에서 청주까지 면회 올 때면 이틀에 걸쳐서 와야 했다. 그렇게 강단지시던 어머님이 이제는 치매가 진행되고 있다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고나서 나는 어머님을 업고 병원 문을 나서면서 환하게 웃게 됐다. 이제 서야 아들의 도리를 하는 모습에 부끄러움 보다는 이제라도 어머님을 어머니로 생각 할 수 있게 해주신 어머님이 고마웠다. “부모님을 모시고 싶으나 이미 계시지 않더라” “ 부모님 살아생전에 효랑 다 하여라!” 천 번 읽는 것 보다 한 번의 실천이 중요하다.

 

어머니는 아버지도 사우디 가셔서 안계시니 나를 태백기계공고로 가라고 다그쳤다. 나는 차라리 봉화종고(당시에는 전기고등학교 떨어지고 가는 …….)가겠다고 버텼다. 결국 어머님이 지셨다. 자식이기는 부모님이 어디 있으랴…….

 

당시 태백중학교에서 춘천으로 연합고사 치러 온 학생이 23명인가 됐으니 나도 공부는 좀 했다. 나는 어느 날 친구를 따라 갔다. 친구가 과외를 한다고 했다. 나는 무슨 말인지 몰랐다. 따라가 봤더니 조그만 공간에 책걸상이 있었고 누군가가 공부를 가르치고 있었다. 처음 봤다. 신기했다. 참고로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유치원이 있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다. 친구 집에 가니까 친구의 어릴 적 사진인데 학사모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물어보았더니 유치원 때 사진이라고 했다. 아 이런 것도 있었구나.....

 

그렇게 해서 원서를 제출하고 연합고사 시험을 보기위해 새벽기차를 타야했다. 우리 집에서는 아침 버스를 놓칠 것 같았다. 중학교 앞에 살고 계셨던 막내 외삼촌댁에서 잤다. 새벽에 외숙모님이 깨우셨다. 찬바람 맞으며, 눈 비비며 어두운 길을 걸어 내려오다가 시궁창에 빠졌다. 기분이 더러웠다. 혹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 생겼다.

 

황지 역에서 아침 기차를 타고 4시간 가까이 원주역에 도착해 약 3시간 가까이 버스타고 해서 춘천 명동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별천지였다. 그날 밤을 어떻게 보냈는지 모른다.

 

다음날 시험을 봤다. 잘 본 거 같았다. 발표가 났는데 합격했다. 날아갈 거 같았다. 문제는 뺑뺑이를 돌려서 내가 원하는 춘천제일고등학교에 배정받아야 했다. 그야말로 복불복이었다. 내가 춘천제일고등학교에 배정받고자 했던 이유는, 우선 육군사관학교에 가고 싶어서였다. 나는 제일고등학교에 가면 육사에 쉽게 가는 줄 알았다. 교복도 멋있었다. 더 중요한 것은 기숙사에 들어가야 했다. 하숙이나 자취를 하게 되면 돈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뺑뺑이를 돌렸다. 2번이 나왔다. 저녁에 라디오로 배정학교가 발표된다고 하였다. 시험 볼 때 보다 더 떨렸다. 라디오에서는 100고등하교, 2번 춘천제일고등하교…….~~~나는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당시에는 집에 전화도 없고 해서 엄마께 알려드리지도 못했다. 자기가 원하는 학교에 배정받지 못한 친구들은 그날 저녁을 술로 보냈다.

 

집으로 오는데 왜 이리 먼 가…….차안에서 뛰었다. 집에 오니 저녁 7시쯤 됐다. 버스에서 내려 우리 집까지는 약 10분 걸렸다. 숨이 하나도 차지 않았다. 엄마! 나 제일고등학교야.......온 집안이 경사였다. 고등학교 붙은 것이 이렇게 좋을 줄이야…….

 

 

[나의 인생살이 8]

 

월요일 아침조회가 군대식 열병식이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꿈에 그리던 제일고는 정말로 황홀했다. 기숙사에 400M 트랙이 있는 넓은 운동장, 체육관, 도서관, 식당, 더군다나 교실에는 당시에는 상상도 못하는 스팀!!! 월요일 아침 조회 때는 밴드부의 우렁찬 밴드…….군대식 열병...우리는 월초에 한 번씩 조회를 하면 군대식 열병을 했다. 왜냐하면 당시 우리학교의 재단은 육군1군 사령부이고 이사장은 1군사령관이었다. 이사회가 열리면 헬기가 뜨고 이사진들이 군인인 관계로 별이 도합 50개가 떴다. 교장선생님은 예비역 육군 중장이었다. 전방에 직업군인들의 자녀들을 전교생의 30% 받았고 나머지는 뺑뺑이로 일반 자녀들이 입학했던 것이다.

 

그랬으니 오죽 열병식이 강했겠는가? ...우리 학교는 군군의 날에 고등학생을 대표해서 서울에서 행진을 했다. 우리학교, 서울의 중경고등학교, 금호공고 등으로 이루어진 고등학생 행군 단이다. 하지만 내가 고등학교 들어갔을 때는 이것이 없어졌다. 아쉽기도 했고,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엄청 힘들었던 모양이다.

 

한번은 국군의 날 행사 행군을 위해 서울 여의도 고수 부지에서 야전텐트를 치고 훈련을 하는데 우리 학교는 1학년이고 중경고등학교는 2학년이 참가 했단다. 그러던 중 화장실에서 싸움이 붙었단다. 결과는 우리학교의 승리란다. 왜냐고? 제일고 교장은 예비역 중장이고 중경고등학교 교장은 예비역 소장 이었단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날 어머님이 함께 했다. 뿌듯해 하셨다. 기숙사에 들어갔다. 엄격한 군대식 내무반 생활이었다. 아침 6시에 사감님이 몽둥이 들고 깨우셨다. 운동장 3바퀴 돌고…….아침밥 먹고 등교하고…….교실까지는 불과 100 발자국 정도 됐다. 주말이면 3학년 선배들이 기숙사 내무검열을 했다. 그럴 때면 우리는 기숙사를 아주 빨래하듯이 청소했다.

 

선배들이 흰 장갑 끼고 들어온다. 아무리 청소를 잘 했다고 하지만 이미 숙달된 조교들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이놈들이 어디를 청소 안하는지 그들은 다 알고 있었다. 가끔 책꽂이에 책이나 노트가 거꾸로 꽂히는 경우도 있다. 귀신같이 찾아냈다. 걸리면 그 방 전체가 일주일 동안 그 층의 화장실 청소였다. 안 걸렸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토요일이면 점심으로 라면이 나왔다. 면은 찌고 국물을 부어 주는 것이다. 팅팅 불어 터졌다. 그래도 맛있었다. 이거 먹으려고 눈썹이 휘날리도록 뛰었다. 빨리 먹고 청소해야 하고…….청소 끝나면 어머님 젖가슴 만지러 집으로 가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어머니 젖가슴을 만졌다. 어머니는 웃음으로 받아들였다. 사랑의 표시였다고 생각한다.

 

고등학교 입학을 위해 반배치 고사를 봤다. 당시는 우열반이 있었다. 나는 당연히 열반이었다. 600여 명 중 420등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위권에 속해서 충격이기는 했어도 춘천까지 와서 그만큼 했으면 잘했다고 위안 삼았다. 나의 고1 담임선생님은 국어 담당인 현원철 선생님 이셨다. 가끔 수업시간에 반정부성 발언도 하셨다. 내가 이후 대학가서 데모를 하는데 영향을 주었다고 봐도 된다. 지금은 강원도 교육청 창의지원 과장을 맡고 계신다.

 

5월에 전국소년체전이 춘천에서 개최된다고 했다. 우리학교 운동장이 넓고 좋아서 축구경기 예선전이 열린다고 했다. 우리는 교련시간이나 체육시간에 운동장에서 풀 뽑기를 했다. 어느 날 교련시간이었다. 학교 정문을 나와 풀을 뽑고 있었다. 우리 학교 정문은 강원대학교 후문과 불과 100M 정도 떨어져 있었다. 나는 기숙사에 있었기 때문에 바깥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기숙사에는 TV도 없고 해서 세상 돌아가는 일은 깜깜이었다.

 

풀을 뽑으려고 삽이며, 괭이며 들고 작업을 하고 있는데, 강대 후문 앞에 군인들(전경들임을 나중에 알았다.) 쫙 깔려 있고, 학생들이 머리에 머리띠를 메고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잠시 후 빠바방…….~~…….하얀 연기가 날았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데 코가 매콤하기 시작하더니 기침과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뒤도 안돌아 보고 정문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난리가 난 것이다.

 

우리는 교련선생님의 지시도 무시하고 아무렇게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고....얼마 후 교련선생님이 호각을 불어서 집합했다. 연장 없는 놈 다 나와!!! 가만히 보니까 전부 없었다. 단체로 기합을 엄청 받았다. 하시는 말씀이 전쟁터에서 총을 놓고 도망간 것과 똑 같다고 했다.

 

나중에 대학가서 실컷 마셨다. 지랄탄~~~~~~~

 

그러던 어느 날~~~

 

 

[나의 인생살이 9]

 

다시 봄은 오는가?

 

갑자기 휴교령이라고 집으로 가라고 했다. 얼마 후 다시 학교로 나오라는 연락을 받고 학교에 갔다. 우열반이 해체됐다. 반이 새로 짜였다. 그 때도 현원철 선생님이 담임을 맡았다.

 

현원철 선생님은 나와 숙명적 인연을 가지고 있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청주로, 철원으로 돌아돌아 다시 춘천에 온 것은 약 25년이 지나서였다. 친구들과 우연히 현원철 선생님을 만나 소주 한잔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이 전화를 하셨다. 나의 아들이 고등학교에 입학을 했는데, 아들의 담임선생님이 현원철 선생님의 사모님이시란다. 2대에 걸쳐 인연을 맺게 됐다.

 

어느 날 학교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누가누가 잡혀갔다고 했다. 삼청교육대로 끌려 간 것이다....

 

여름방학이 지나고 다시 학교로 왔다. 보충수업도 없어졌다. 너무 좋았다. 기숙사 생활은 그럭저럭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우리 학교 교복은 육사 교복과 비슷했다. 학년 표시가 소매에 있었다. 멀리서 봐도 누가 선배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교모는 원래는 육사 모자 닮았는데 뺑뺑이 이후 일반 검정모자로 바뀌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춘천 고교평준화 2기인 셈이다.

 

교복을 입고 춘천에서 버스타고 나서면 많은 사람들이 쳐다보았다. 황지 역에 내려면 어깨가 우쭐했다. 어머니가 계시는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꼭 내가 무슨 높은 벼슬이나 한 것 마냥 콧대가 높아지는 것이었다. 아쉽게도 토요일 춘천에서 떠나면 밤늦게 집에 도착했고, 다음날 10시면 다시 춘천으로 와야 해서 교복입고 동네 한 바퀴 돌 시간도 없었다.

 

기숙사 생활은 엄격했다. 저녁이면 배가 고팠다. 전열기 일체금지! 하지만 귀신같이 전열 기구를 들여왔다. 그릇이 없어서 우리는 세숫대야에 라면을 끓여 먹었다. 냄새가 진동한다. 귀신같은 사감님이 살금살금 순찰하신다. 걸린다. 아주 작살난다. 당연히 화장실 청소해야 한다. 학교 뒤에 과수원이 있었다. 몰래 담 넘어 서리 해 먹는다. 걸린다. 아주 작살난다. 그래도 한다…….

 

우리 학교는 여학생이 한 반이 있었다. 이성에 눈이 뜨기 시작한다. 나는 없다…….

 

여름 쯤 아버지가 귀국 하셨다.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아버지는 돈을 벌지 못했다. 다시 강원탄광에 입사했다. 아버지가 돌아오시면서 우리 집은 조금씩 자리가 잡혀갔다. 집도 단칸방에서 방 두 칸으로 월세를 옮겼다. 역시 집안에는 가장이 있어야 했다. 나는 가장이라는 말의 뜻을 알지 못했다. 최근에야 알았다. 가장이란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는 사람! 이란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 가장은 마눌 님이시다. 아마도 그해 겨울에도 눈이 엄청 내렸다고 기억된다.

 

1980년의 삶은 이렇게 시작해서 끝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한 학년이 지나고 2학년이 됐다. 문과 이과를 갈라야 한다. 나는 이과를 선택했다. 이것이 내 인생의 한 갈림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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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종종 호수로 나가 세월을 낚는다

 

[나의 인생살이 10]

 

숨기면 안 된다.

 

과외도 금지되고, 완전히 학교 공부만 하라고 했다. 나는 좋았다. 돈이 없어도 내가 노력하면 실력 것 싸울 수 있으니까…….서울~부산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과외 받다 걸렸다는 기사도 나왔다. 부자들은 좋겠다.

 

어느 날 친구 형이 잡혀갔다고 했다. 강원대를 다녔는데…….점심시간에 식당에서 유인물 뿌리면서 학우여~~~가자!!!’ 했단다. 혼자 갔단다. 아무도 따라 나서지 않았던 모양이다. 식당에 있던 경찰에 의해 잡혀갔다. 암울한 시절에 나는 왜 이런 것을 기억하고 있었는지…….

 

나는 어릴 적부터 축구를 좋아했다. 반 대항 축구시합에 우리 반을 대표해서 출전 했다. 어떻게 찼는지 모르지만 내가 한 골을 넣었다. 그것이 내가 여태껏 축구하면서 공식경기에서 넣은.,...처음이자 마지막 골이 됐다.

 

나는 이과를 선택했다. 육사를 가고자 했다. 만약 실패하면 공대를 가서 집안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춘천으로 고등학교 오면서 누나는 대학을 포기했다. 누나는 유아교육과를 가고 싶어 했는데 결국 동생의 유학 때문에 꿈을 포기 한 것이다.

 

어느 날 집에 가니까 누나가 없었다. 대구의 어느 옷 만드는 회사에 취직했다고 했다. 나중에 들었는데 누나는 거기가 너무 무서워 도망 나왔다고 했다. 그리고는 교회 유치원 보모로 취직했다. 피아노도 샀다. 누나는 배워야 산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엄마는 얼마 안 되는 아버지 월급으로 곗돈을 부은 무양이다. 어느 날 계주가 도망갔다. 빈 털털이가 됐다. 아버지가 귀국 하시고 우리는 얼마 되지 않아 또 이사를 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출국하시면서 귀국하시기 까지 우리 집은 다섯 번 이사를 했다. 두 달에 한 번씩 이사를 한 셈이다. 돈이 없으니까 교회 다니는 어떤 집사님이 잠시 살라고 하면 거기서 기거하다가 또 상황이 생기면 이사를 하고…….

 

아마도 6월쯤인가에 우리 집에 전화가 생겼다. 19816…….전화가 생기면서 우리 집에는 그래도 생활 가전기구가 완성됐다. 전기밥솥, 냉장고…….아 세탁기는 그 뒤로 2년이 흘러서 산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나는 이과를 갔다. 하지만 나는 이과를 가면 안 되는 신체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6학년쯤인 것으로 기억한다. 어느 날 시력검사를 하는데…….담임선생님이 점심 먹고 다시 학교로 오라고 했다. 가서 다시 검사를 하는데 적록색약이라고 했다. 나는 칠판에 붉은색으로 글을 쓰면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창피했다. 숨겼다. 적록색약은 이과를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때부터 나는 시력검사를 하면 친구의 어깨너머로 그가 읽는 숫자를 외우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그리고 시간은 흘렀다.

 

2때는 정말 재미있게 마음껏 놀았다. 기숙사에서는 축제도 했다. 웃통 훌렁 벗고 고고 춤도 추고, 주말에 집에 가지 않을 때는 친구 기타를 빌려서 기타도 배우고, 탁구도 치고…….나는 덩치는 작았지만 운동신경이 좋아서 여러 가지 못하는 운동이 없었다. 최근에 골프를 배웠는데 나는 독학을 했다. 나의 절친 신원철 서울시 의원은 나보고 골프 신동이라고 했다. 기분 좋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단다.

 

상은이네 집은 춘천 온의동에서 과수원을 했다. 주말에는 상은이네 과수원에 가서 배, 사과, 복숭아를 따 주었다. 우리는 실컷 먹었고, 가끔 배부르면 의암호 쪽으로 멀리던지기 시합도 했다. 지금은 그곳이 온의동 금호아파트가 들어섰다. 상은이 아버지가 땅을 팔았는데…….내가 알기로 싸게 팔았다. 그런데 그 땅을 산 사람이 3년인가 있다가 40억에 금호건설에 팔아서 35억 이상의 차익을 봤다는 소리를 들었다. 상은이가 지금 경제적으로 어려운 건 아마도 이 영향이 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 주변에는 잘은 모르지만 재산이 10억 넘는 친구가 거의 없다. 아마도 그렇게 저렇게 하면서 다 털어 먹었나 보다.

 

 

[나의 인생살이 11]

 

친구를 많이 사귀다.

 

나는 덩치는 작았지만 고향에서와 마찬가지로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좋아 했다. 동아리도 가입했다. 교회 다녀서 YMCA 고등부에 가입도 했고, 춘천에서는 교회도 다녔다. 기숙사에 있으니 주말에 집에 가지 않는 친구들과 뛰놀고…….

 

어느 주말! 집이 멀어서 가지 자주 가지 못하고…….물론 차비도 없었다. 소주를 한 병 샀다. 새우깡 한 봉지, 콜라 한 병.....친구들과 학교 체육관 뒤에서 먹으려 했다. 뚜껑을 딸 수가 없었다. 지금이야 돌리면 되지만...그래서 내가 이빨로 땄다. 그리고 한 모금씩 먹었다. 콜라도 한 모금씩 먹었다. 소콜 폭탄주가 됐다. 죽는 줄 알았다. 내가 나중에 술을 잘 먹었던 것도 이때의 영향이 컸지 않나 싶다. 하지만 나는 담배는 배우지 않았다.

 

2학년이 되니까 후배들이 기숙사에 들어왔다. 개중에 껄렁대는 놈이 있었다. 나는 그 놈을 불러서 한 대 때렸다. 알고 보니 이놈이 싸움도 잘하고, 재수를 해서 나랑 나이가 같았다. 문제는 이놈이 정선에 살았는데 집에 갈대 같은 기차를 탔다. 나는 덜컹 겁이 났다. 중간에 나를 끌어내려서 때리면 어떡하나~~~~ 그래서 기차를 탈 때는 항상 친구들과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객기를 부린 거 같다.

 

2학년 2학기가 되면서 나는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엄마한테 졸랐다. 겨울방학 때 공부를 할 테니 하숙을 방학 동안에 시켜달라고 했다. 엄마는 흔쾌히 허락 하셨다. 정말 열심히 했다. 3학년이 돼 첫 시험에서 이과 전교 23등을 했다. 고등학교 첫 입학할 때 420등 했으니까 많이 따라 잡은 것이었다. 물론 이과는 300명 이었다. 실력이 월등히 올랐다. 조금만 더 하면 내가 원하는 육사에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3학년이 되고부터 나는 기숙사가 싫었다. 공부하기에 좋지 않다고 엄마한테 말하고 상동 출신의 재휘랑 하숙을 하기로 했다. 강원고등학교 부근의 교동 어느 집에서 하숙을 했다. 학교까지 걸어서 30분 이상 가야 했다.

 

판단 착오였다는 것을 안 것은 학력고사가 끝나고 대학에 떨어져서였다. 앞서 말했지만 나에게는 스승이 없었다. 멘토가 없었던 것이다. 그저 내가 생각하고 내가 판단하고…….우리 집에서는 내가 하면 무조건 인정해 주었다. 상담해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오로지 자력갱생 이었다. 대화할 사람은 친구들이 전부였다.

 

프로야구가 시작되고…….놀기 좋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재휘랑 나는 학교 앞으로 하숙집을 옮겼다. 재휘는 공군사관학교 1차 시험에 합격했다.

 

나는 육군사관학교 원서를 쓰고 10월쯤인가 청량리 고등학교로 시험 보러 갔다. 떨어졌다. 전날에 서울로 올라가서 학교 주변의 여관에서 잤다. 친구들 몇 놈은 명동으로 구경 갔다. 롯데백화점에 들어갔는데....어떤 친구가 신발을 벗어 들었단다. 너무 깨끗해서…….또 어떤 놈은 안내 데스크에 있는 여자가 인형인줄 알고 만졌다가 혼났다고 했다. 촌놈 들이다.~~~~

 

육사 시험에 떨어지고 나니 충격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학력고사를 잘 봐서 대학에 가면 되니까…….

 

시험 결과가 나왔다.

 

나랑 상은이, 재휘, 윤기 이렇게 네 명이서 당구도 치고, 술도 먹었다. 3 졸업을 즐겼다. 한동안 다녔다. 막걸리, 소주 먹고…….헤롱헤롱~~~~우리는 겨울바다도 갔다. 그렇게 꿈 많은 고등학교 시절은 어수선하게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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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살이 12]

 

대학에 떨어지다.

 

지금 생각해보니 어차피 육사에 합격을 했어도 아마도 신체검사에서 떨어 졌을 것이다. 나는 장학생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국립대학이 등록금도 싸고, 친구도 많고…….등등의 이유로 강원대학교 토목공학과를 선택했다. 문제는 신체검사였다. 아니나 다를까 걸렸다. 재검사를 받았지만 결국은 탈락 이었다.

 

앞이 캄캄했다. 마냥 춘천에 있을 수도 없었다. 춘천에 있을 때는 상은이네 집에서 기거 했는데, 대학도 떨어진 마당에 갈 곳이 없었다. 그러던 중 8212월 쯤, 6촌 형이 수원 종로에 있는 카사라고 하는 커피숍에서 일한다는 애기를 들었다. 나는 형을 찾아갔다. 아르바이트라도 하게 해달라고 했다. 형은 해보라고 했다.

 

사회에 나오면서 첫 일로 커피숍 쟁반돌이가 된 것이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사회에 나와서 첫 직장을 무엇으로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이 정해진다고…….서비스업인 것이다. 나는 남에게 해코지를 하거나 시비를 걸거나 싸움을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잘 놀고 말 잘하고 뭐 그런 무난한 성격의 소유자 정도는 됐다. 그래서인지 적성에 맞았다.

 

당시 내가 일하던 커피숍의 커피 값은 상당히 비쌌다. 한 잔에 5천 원 하는 것도 있었다. 점심으로 라면 먹고 비싼 커피 마시러 오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에스프레소 커피가 그렇게 쓴 맛인지는 그때 알았다. 테이블에 장미를 한 송이 올려놓았다. 저녁이 되면 장미를 거두어 얼음물에 담가두면 장미가 늦게 피어서 다음날에도 쓸 수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을 모르고 냉장고에 넣었다. 다음날 장미꽃에 눈이 내렸다. 얼어서 다 돌아가셨다. 엄청 깨졌다. 하지만 그 일을 오래하지 못했다. 거기서 나의 미래를 규정받고 싶지 않았다. 약 세 달 정도 일한 것 같다. 나의 첫 일은 그렇게 마무리 됐다.

 

초라한 모습으로 동점 집으로 향했다. 재수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날로 집에서 걸어서 한 시간 걸리는 도서관에 다니기 시작했다. 달리 공부할 만한 곳이 없었다. 일을 해야 했다. 벽돌 찍는 공장엘 갔다. 여섯 개 짜리가 한 판으로 나오는 보도블록이었다. 그것을 약 100M 떨어진 곳으로 옮기면 5원을 준다고 했다. 리어카에 30판을 싣고 날랐다. 그렇게 한번을 나르면 150원 이었다. 하루 종일 하면 약 30번 정도 나를 수 있었다. 4,500원 정도 받았다. 그 돈을 모아 참고서를 샀다. 문과로 전과해서 공부해야 했기에 참고서 비용도 만만찮았다.

 

공부가 생각대로 잘되지 않았다. 나는 고향에 가서 조용히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겨울에 떠난 그 고향에 돌아가서 공부하고 싶었다. 큰 집에 가서 공부를 했다. 하지만 농사일을 병행해서 공부 한다는 건 무리였다. 아마도 잠시 피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친구들이 나를 격려한다고 춘천에서 놀러 왔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이모네가 서울로 이사를 가니 내가 거기 가서 기거 하면서 공부하면 어떻겠냐고 했다. 나는 좋았다. 짐을 싸서 서울의 중화동엘 갔다. 가보니 이건 있을 곳이 아니었다. 이모는 이모부가 일찍 돌아가시고 딸 하나와 아들 네 명을 키웠는데, 딸은 시집가고 이모와 아들 넷이 단칸방을 얻어서 살고 있었다. 너무 미안했다. 하지만 이모는 받아 주었다. 나더러 공부도 잘하니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하셨다. 형들과 동생도 동의해 주었다.

 

부엌은 없고 그냥 방 앞 계단에 곤로 놓고 음식을 만드는 곳이었다. 하루는 비가 많이 왔다. 중화동은 당시에 상습 침수 지역이었다. 방안까지 침수됐다. 하여튼 이모님과 형님들과 동생한테 이 글을 빌려 감사의 마음을 드린다.

 

나는 집에서 보내주는 돈으로 청량리 진학학원에 다녔다. 미안하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느 날 어머님이 서울로 오셨다. 이모님이랑 같이 혜화동 서울의대 병원 구내식당에서 일하기로 했다고 했다. 어머니는 맏이인 아들이 잘돼야 우리 집이 산다고 생각하신 거 같다. 집에는 누나가 있으니 아버님과 고1, 1의 두 남동생 밥을 해야 했다.

 

용돈이 떨어진 어느 날 서울의대 병원 구내식당에 갔더니 어머니는 배고프지?“ 하면서 라면 한 그릇과 밥을 주셨다.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나면 주머니에서 쌈지 돈을 주셨다. 학원비랑~~~~눈물이 났다.

 

나중에 어머니한테 들은 애기다. 원래 이모가 먼저 취직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주방장이 성격이 아주 지랄 같았단다. 엄마는 이모가 식당에서 일하고 있는걸 알고 언니인 이모한테 자신의 취직을 부탁했다고 한다. 이모는 서로 모르는 사이로 하고 취직을 부탁해 주인으로 부터 승낙을 얻었단다. 한곳에서 일하면서 자매라고 말도 못하고 일했단다. 이모는 동생인 우리 엄마가 일을 못하면 막 뭐라고 했단다. 그렇지 않으면 주방장이 지랄을 하니까....

 

주방장이 우리 엄마한테 뭐라고 하면 이모는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고 한다. 참 기구한 인생이다. 지금은 두 자매가 서로를 의지하며 산다. 이모님은 안양에 사신다. 팔순이 넘으셨다. 두 자매가 전화하는 거 보면 역시 피는 못 속이는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인간은 서로에게 기대어 사는가 보다.

 

한편, 상은이는 강원대 건축과에 입학하고, 재휘는 학력고사 성적이 좋지 않아 공군사관학교 2차에서 떨어지고, 결국 한림대에 합격했으나 역시 가난해서 등록을 포기하고, 윤기는 공부를 잘해서 고대 기계공학과에 합격했다.

 

 

[나의 인생살이 13]

 

친구는 평생을 두고 만난다.

 

나는 천성이 놀기 좋아하고 친구 좋아하고 해서 부모님이 고생하시는 것을 순식간에 잃어버리곤 했다. 이모 댁에서 학원 다니면서 가끔 고교 동창들 중에 서울로 대학 온 놈들과 술도 한잔씩 했다. 그중에 제일 자주 만난 친구가 윤기였다. 윤기네 가정도 무척 어려웠다. 이놈은 학교에 오면 집에 갈 때 까지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이 없었다. 나랑은 고등학교 2학년 때 같은 반 이었는데, 나는 윤기가 오줌도 안 싸는 줄 알았다.

 

3 졸업하면서 무척 친해졌다. 네 놈이 만나서 즐겁게 놀았다. 윤기, 재휘, 상은이 그리고 나~~~우리는 지금도 자주 만난다. 가끔 나의 페이스북에 낚시 얘기를 올리는데 틀림없이 이놈들하고 놀고 있다고 보면 맞다.

 

서울에서 대학 다니는 애들을 만나면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로 마음의 위로도 됐다. 그것은 내가 공부 못해서 대학 못 간 것이 아니라 신체검사에서 떨어졌다는 핑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놈들과 만나면 객기도 부리고, 술 먹고 오줌 멀리 싸기 시합도 하고…….대학 1학년인 놈들이니 얼마나 좋았겠나. 지금이야 취직 때문에 낭만도 없고, 나아가 진리의 상아탑은 헌책방에 먼지 뭍은 책에서나 나오는 얘기로 들리겠지만 ....

 

술 먹으면 대학에서 있었던 애기를 많이 했다. 가끔씩 데모애기도 했다. 하지만 그냥 오늘 학교에서 데모 했는데 자기도 스크럼을 짰다나?...뭐 그 정도였다.

 

어느 날 윤기가 나에게 자기 자취방에서 같이 공부하자고 했다. 너무 고마웠다. 나는 어머니께 말씀 드렸다. 그리고 이모님께 그동안 감사하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몇 권의 책과 옷을 챙겨서 윤기네 집으로 옮겼다. 윤기네 자취방은 장위동에 있었다. 윤기 누나가 그 옆집에 살고 있어서 가끔씩 반찬도 가져다 주셨다. 열심히 공부했다. 역시 누나께 이 글로 인사를 대신한다.

 

나는 이과에서 문과로 바꾸면서 기자가 돼야겠다고 목표를 세웠다. 이유는 간단했다. 시골에 있을 때 가끔 무슨 일이 생기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릴 얘기네하는 말을 어른들이 자주해서 나는 그만의 뜻은 잘 몰랐지만 신문기자가 되고 싶기도 했다. 한편으로 어릴 적부터 가졌던 정의감이나 뭐 그런 걸로 해서 나는 정론직필의 옳 곧은 기자가 되는 것에도 상당한 매력을 느꼈다.

 

가끔 공부가 잘되지 않을 때는 윤기랑 중랑천에 나갔다. 당시에는 중랑천 물이 똥물이었다. 우리는 중랑천변에 앉아서 소주한잔 하면서 만주 벌판을 찾아야 한다느니, 세상이 더럽다느니 하면서 신세한탄을 했다. 윤기가 고대에 다녔기 때문에 막걸리 찬가도 자주 불렀다. 나는 고대가 마음에 끌렸다. 열심히 해서 고대 신방과를 가야겠다고 목표를 세웠다. 한편으로 우리는 자주 중랑천변에서 울기도 했다. 나중에 우리 친구들은 나를 중랑천 울보라고 불렀다.

 

어머님께 학원비며 용돈을 타 쓰는 것도 한계에 도달했다. 어머님이 아프셔서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다시 철암으로 내려 가셨다. 당시 윤기는 아르바이트로 은행에 야간 당직을 서는 일을 했다. 한번은 학원비가 없었다. 그래서 윤기한테 그때 돈으로 10만원을 빌렸다. 윤기는 흔쾌히 빌려 주었다. 지금도 그 돈을 못 갚았다. 마음에 영원한 빚으로 남아 있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어찌해야 할 줄 몰라서이다. 하여튼 나는 돈에는 약한 편이다. 한편으로 관대한 편이다.

 

군대 신검이 나왔다. 당연히 1급 수다. 현역 입영대상!!!

 

그때는 등화관제가 있었다. 나는 민방위에 편제 됐다. 하루는 민방위 등화관제 훈련이 있었다. 나는 민방위 모자 쓰고 나갔다. ~~ 불 꺼!!! 아마도 서울에서 그렇게 목 놓아 소리쳐 보기는 처음일 것이다.

 

우리나라 청소년 대표 선수들이 세계청소년 축구대회에서 4강에 들기도 했다. 아마도 내가 성적이 안 나온 것은 이놈의 축구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서 다시 시험을 봤다. 생각만큼의 성적이 나오지 않았다. 신방과를 가야 한다는 목표여서 성적에 맞추어 성균관대에 지원했다. 또 떨어졌다.

 

고등학교 다니던 어느 주말 이었다. 춘천에서 태백으로 가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버스타고 원주 가서 기차 타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춘천에서 기차타고 청량리에서 태백선 기차를 타는 방법이다.

 

그날은 청량리에서 기차를 타려고 했다. 11시쯤에 출발해서 원주, 제천, 영주를 거쳐 새벽 4시쯤에 철암을 거쳐 아침 6시쯤 강릉까지 가는 기차였다. 조금 늦게 청량리에 도착했는데……. 아뿔사! 입석표도 없었다. 동해안으로 놀러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기차를 놓쳤다. 막막했다. 어디 잘 때도 없고....주변에서는 아주머니들이 짧은 밤도 되니 자고가라고 하고…….따라가면 큰일이고....구석에 쭈그려 앉아서 졸고 있었다. 그런데 옆에서 어떤 청년 두 명이 어디 가냐고 물었다. 자초지종을 말했더니 자신들도 기차를 놓쳤는데 같이 자자고 했다. 이들은 성균관대 학생들이었다. 강릉으로 놀러 가려고 한단다. 나는 아무생각 없이 따라갔다. 이렇게 좁은 방도 있나 하고 잠들었는데 아침이 됐다.

 

내려가는 기차에서 이 형들이 성균관대학이 좋다고 했다. 데모도 많이 한다고 했다. 나는 솔깃했다. 왠지 모르지만 내 주변에는 데모하는 사람들이 자꾸 꼬였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강대생들이 데모하는 거 보았고, 최루가스도 마셔보고, 친구 형이 감옥 갔다는 말도 들리고, 고대 다니는 친구와 아침이슬도 부르고, 어랍쇼! 이제는 성대생들까지…….

 

나의 앞길이 그렇게 밝아오는 줄 나는 몰랐다.

 

뭘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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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살이 14]

 

다시 도전하다!!! 재수는 필수고 삼수는 선택이다.

 

또 대학에 떨어졌다. 어디 갈 데도 없었다. 아르바이트 할 수밖에 없었다. 사회 나와 첫 일이 커피숍 쟁반돌이였다. 할 일이 없을 때는 다시 그 곳으로 간다.

 

재수에 실패하니 기운이 많이 빠졌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지는가? 앞이 보이지 않았다. 기껏해야 군대 갔다 오는 것이고, 그 뒤로는 다시 공부해서 대학에 가든, 아니면 취직을 하든가…….

 

일단은 다시 서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했다. 태백 집에 가봐야 할 일도 없고…….그래서 시작한 일이 레스토랑 보이였다. 나는 당시에 귀엽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레스토랑 보이 하기에는 딱 맞는 신체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의 서울 강남 경복아파트 앞, 한 때 부킹으로 유명했던 돈텔마마가 있던 그 주변의 레스토랑이었다. 이름이 파크였다. 면접을 봤다. 일 해보라고 했다. 나는 낮에는 공부하고 저녁에 일하는 조건으로 그리고 레스토랑 건물 옥상의 조그만 방에서 자고 먹는 것을 해결하는 조건으로 일하기로 했다. 낮에는 지금의 삼정호텔 옆에 있었던 양영학원에 다니고 오후 5시 부터 새벽 2시까지 일을 했다. 당시 그 레스토랑에는 <눈이 큰아이>라는 노래로 인기를 얻고 있던 박장순 이라는 가수가 라이브로 노래도 불렀다. 잘 불렀다. 대중가수를 가까이서 본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내가 쟁반돌이를 시작해서 인지 친구들도 모두 쟁반돌이의 길로 나섰다. 아마도 아르바이트는 친구가 무얼 하느냐에 따라 주변 친구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았다. 친구 재휘가 내가 일하는 곳에서 함께 일 했다. 그러다가 칵테일 기술을 배워서 바텐더로 나갔다. 윤기는 대학 다니다가 알바로 역시 커피숍에서 일하다가 역삼동에 있는 가라오케에서 일하게 됐다.

 

나는 거기서 1984년 강남의 변화해 가는 모습을 보았다. 사회 지도층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 경험했다. 별 달은 군인들이 어떻게 다니는지 보았다. 룸살롱이 어떤 곳인지 나는 보았다. 허허벌판이 어떻게 도시로 변해 가는지 나는 보았다. 당시 강남 최대교회인 충헌교회가 만들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일했다. 테헤란로가 만들어지고 거기에 건물이 들어서는 것을 보며 공부했다.

 

토요일 오후였다. 학원이 쉬었다. 레스토랑 숙소에서 자고 일어나 청소를 하고 있는데 지하 룸살롱에서 일하는 형이 늦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그에게 찬물을 한잔 권했다. 그랬더니 그 형이 나보고 지하에 가보자고 했다. 나는 호기심으로 따라갔다. 들어가니 조그만 홀이 나왔다.

 

그런데 이 집에는 밥에는 고급차량들이 엄청 들어오고, 내가 새벽 2시까지 일했으니까, 그때쯤 사람들이 술에 취해서 여자들이랑 차를 타고 나갔다. 그래서 난 엄청 크겠거니 했는데 아니었다. 그러던 순간 책장 문을 열어보여 주었다. 골목이 나왔다. 복도를 따라 양쪽으로 그야말로 룸이 나왔다. 룸 문을 여니까 운동장만 한 대리석 테이블에 소파가 쫙 둘러 있었다. 밴드도 있었다. 별천지에 온 기분이었다. 형은 나한테 여기서 일해 볼래 하고 제안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공부를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거기서 테이블 구석에 앉아서 반대편 끝에서 양주를 따른 언더락 잔이 나에게 총알보다 빨리 밀려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맛있게 먹었다.

 

내가 먹은 첫 번째 양주다.

 

낮에는 공부하고 새벽 2시까지 일하는 것은 참으로 힘들었다. 청소까지 하면 3시는 돼야 잠을 잘 수 있었다. 아침 7시에 일어나서 다시 청소하고 학원가고…….그렇게 공부를 했다. 성적은 자꾸 떨어졌다. 방법이 없었다.

 

강남생활을 하나 더 쓰자면…….친구가 신사동 사거리쯤에 있는 가라오케 집에서 일을 했다. 당시 그 집에는 소위 일본인들이 섹스관광을 오는 집이었다. 공항에서 태우고 와서 술 파티를 했다. 유유상종이라 했던가? 그 방면에 일을 하니 친구들이 하나씩 꼬여 들었다.

 

저녁에 일 끝나면 가끔 놀러 가기도 했다. 가계일이 끝나면 우리끼리 둘러앉아 마치 돈 많은 손님인양 기레빠시(먹다가 남은 술)를 마셨다. 그러면서 어느덧 우리의 말투나 행동은 돈 많은 사장님 흉내를 내고 있었다. 가끔 팁도 나온다. 그렇게 배운 버릇은 어디든 택시를 타고 가다보면 거스름돈도 안 받는 건방짐으로 발전했다. 건방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레스토랑일이 너무 힘들어 다시 커피숍으로 옮겼다. 명동 어디에 있는 곳이었다. 갔는데 도저히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이틀 만에 나왔다. 다음으로 지금 영등포 명화극장 주변에 있는 블랙박스라고 하는 커피숍에 갔다. 거기는 일 할만 했다. 커피숍에서 자면서 일했다. 학원을 그만 두었기 때문에 커피숍 숙소에서 쉴 때 마다 공부를 했다. 주변에 동료들이 격려도 해주었고, 어떤 사람은 지랄한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묵묵히 공부하고 일했다. 일하면서 공부했다.

 

대학생들 방학이 됐다. 겨울 어느 날인가 아르바이트 학생이 들어왔다. 어느 대학 다니냐고 하니까 중대 다닌다고 했다. 그렇구나 했다. 나중에 알았는데 이 친구는 충북대에 다녔다. 아마도 쪽팔렸는지 그냥 충대 다닌다고 한 것을 나는 중대 다닌다고 들었다. 나의 충북대학교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 됐다. 나중에 알았지만 충남대 학생들도 충대 다닌다고 했단다.

 

전대협 일을 할 때 지금은 이 세상에 없지만 충남대 총학생회장을 하던 윤재영 동지와 다툼 아닌 다툼을 벌인 적도 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총학생회장이 됐을 때 충대 앞에다 민족충대라고 이름을 붙였다. 충남대는 그 뒤로 뭐라고 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어머니는 서울의대 구내식당을 그만두고 어느 약국을 경영하는 집에 식모살이를 하셨단다. 나는 몰랐다. 그 집에서는 아무리 봐도 식모살이를 할 아주머니가 아닌데 어떻게 이런 일을 하냐고 물었단다. 어머니는 자식 공부 때문에 이런다고 했단다. 혼자서 엄청 우셨던 모양이다.

 

84년 추석을 앞두고 어머니는 한 많은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태백 동점 집으로 귀가 하셨다. 아버지가 다시는 가지 말라고 하셨단다. 지금은 치매가 진행되는 당신의 마누라를 밥 해먹이랴, 빨래하랴, 노인일자리로 어린이 지킴이 나가시랴…….고아로 크신 아버님은 엄청 부지런 하시다.

 

어느 날 차를 타고 가는데 어떤 할아버지가 길거리에서 일수 돈 빌려준다는 명함이 뿌려진 것을 줍고 계셨다. 춘천시에서 이걸 주워오면 얼마간의 돈을 준다고 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순간적으로 아버님임을 알 수 있었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렇게 아버님은 일 하신다. 잠시도 쉬지 않는다. 동사무소에 가서 일자리 만들어 달라고 조르기도 하신다. 아버님은 광산에서 다치셔서 장애도 있다.

 

~~~ 부모님 살아생전에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불효라고 내입으로 말하는 것은 어쩌면 변명의 또 다른 시작일 뿐이다. 왜 나는 부모님을 배신했는가? 나는 무엇인가? 내 자식이 나처럼 한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머리 아프다. 이제라도 내가 나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부모님을 조금이나마 이해 할 수 있게 됐다는 것에 감사한다.

 

삼수 학력고사 시험이 끝났다. 원서를 써야 한다. 성적은 떨어졌고,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려니 돈도 없고…….나는 기자가 되겠다는 꿈을 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신방과를 찾았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는 실력이 모자랐다. 때마침 친구가 충북대학교에 간다고 했다. 청주에 있었다. 청주에는 한 번도 가 본적이 없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했던가? 때마침 청주대학교에 신방과가 있었다. 나는 이미 삼수한 마당에 강원대학에는 가기 싫었다. 친구들은 이미 3학년이니…….그래서 마음먹었다. 그런데 청주대학교는 사립이라 등록금이 너무 비쌌다.

 

나는 친구가 간다는 충북대학교에 갔다. 충북대학은 국립대학이어서 등록금이 쌌다. 당시 등록금이 45만 원 정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돈은 아버님이 광산 다니니까 회사에서 학자금으로 나왔다. 그래서 나는 충북대학교로 가기로 했다. 하지만 충북대학교는 신방과가 없었다. 그래서 어디를 갈까 고민 하다가 결국은 법학과에 지원했다. 합격했다. 친구는 떨어졌다. 나만 아무도 없는, 머리에 털 나고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땅! 청주에 그렇게 혼자서 덩그러니 남게 됐다.

 

15편 이어 집니다.

 

오늘까지 나의 인생살이 14편을 얼숲(페이스북)에 올렸다. 태어나서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하기까지의 삶이다. 돌아보니 어린 시절 추억과 낭만이 있었던 거 같다. 대학가면서 나의 인생은 180도 달라진다. 이렇게도 인생이 변하는 구나 싶기도 하다. 열심히 써보고 있다.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셨다. 모두 모두 감사드린다.

 

특히 오늘은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셨던 현원철 선생님과 선배님과 강원도 교육청에서 근무하는 동창과 점심으로 막국수를 먹었다. 그리고 오후에는 갑자기 서울에 일이 있어서 강남엘 갔다. 내가 일하던 "파크"라는 레스토랑이 있던 그 부근이었다. 찾아가보지는 못했다.

 

하여튼 이제부터 인생 2막이 시작된다. 간혹 당시의 학생운동, 청년운동, 재야운동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는 페친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용어도 전투적으로 쓰일 것이다. 현실감을 살리기 위함이니 양해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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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인생살이 10편에 나오는, 나 때문에 대학을 포기한 누나가 운영하는 식당이다. 강남구 대치동 롯데백화점 뒤 먹자골목에 있다. 지하철 분당선 한티역 2번 출구....강원도 오대한 산채비빔밥 전문점이다. 맛 있으니 나를 믿고 애용해 주시기를 당부 합니다. 누님 고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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