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커 박영호의 ‘나의 인생살이’ 제3막이 연재됩니다. 어린 시절과 대학시절을 보낸 청년기에 접어든 박영호의 삶은 여느 운동가의 그것처럼 파란만장입니다. 중간 중간 재치 있는 표현도 표현이지만 막상 독자 앞에 닥친 상황이라고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나는 장면도 더러 있습니다.
박영호의 ‘나의 인생살이’ 제3막을 연재합니다.
-제3막-
[나의 인생살이 39]
집에 불이 났다.
88년 학생회장을 마치고 10월쯤 인가 나는 형근이 형의 제안으로 충북민주운동협의회(충민협)에 조직부장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다. 사무실은 중앙시장 2층에 있었다. 학교를 졸업 하지 않았지만 학교에서 더 이상 할 일이 없었다. 충민협은 민통련 지역조직이었다. 대선에서 패배 후 다시 조직을 재편하는 과정이었다. 충민협은 당시 가맹하지 않은 단체들과 더 큰 조직으로의 확대를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89년 3월 19일 충북민족민주운동연합(충민련)이 결성 됐다. 충민련은 사무실을 육거리 시장으로 옮겼다. 나는 이 조직에서 조직국장을 맡았다. 충민련은 민통련 다음으로 결성된 전민련(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1989년 1월 21일 결성)의 지역 조직으로 됐다. 이렇게 해서 나는 또 다시 역사와 함께 살게 됐다.
만약 내가 충민협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그 뒤로 어떻게 됐을지는 나도 모르겠다. 88년 겨울에 집에 갔을 때 어느 보험회사에서 영업소장으로 스카웃 하겠다고 엽서가 오기도 했다. 하지만 가지 않았다. 기억에는 교보생명 이었던 거 같다. 사람의 인연이란 그런 것인가? 시간이 지나 25년이 흐른 2013년! 지금 나는 공교롭게도 교보생명에서 보험설계사 일을 하고 있다.
새로운 인생을 위해 가장 어렵다고 하는 보험 설계사 일을 해보고자 마음먹었다. 한편으로 부동산 일도 하고 있다. 금융을 알고 싶어서 이다. 돈이 어떻게 흘러 다니는지 알고 싶어서 이다. 역시 영업이란 사람 사업이다. 누구를 통해서든 보험은 들게 마련인데 과연 나는 그 사람에게 얼마나 신뢰를 주었을까? 뒤 늦은 영업에 갈 곳이 없다. 하지만 열심히 해보련다. 내가 보험 영업을 언제까지 할지는 모른다. 다만 내가 선택한 것이니 열심히 해 보련다. 그리고 난 내가 꿈꾸는 일을 준비 할 것이다. 처음처럼 말이다.
88년 11월쯤인가? 전두환 이순자 구속투쟁을 한참 하고 있을 때였다. 집에서 전화가 왔다. 집에 불이 났다고 했다. 아버지가 귀국하고 다시 강원탄광에 취직을 하셨다. 79년 사우디 가셨다가 80년에 귀국해 다시 강원탄관에 입사하신 것이다. 내가 대학을 다닐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회사에서 대학생 등록금이 나와서 가능했다. 아버지는 정말로 부지런 하시다.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지금도 노인 일자리 프로그램에 참가해서 일하고 계신다.
아버지가 사우디로 떠나고 여러 곳으로 이사하면서 전전하던 우리는 81년쯤 동점의 초등학교 앞에 월세를 얻어 살았다. 그 집에는 물이 엄청 좋았다. 방태골 이라는 곳에서 샘솟아 나는 물이라서 정말 맛있었다. 그러다가 87년 초 아버지 회사가 사택으로 아파트를 지으면서 이사를 했다. 찌그러져가는 집에 살다가 12평짜리 이지만 아파트로 가니까 너무 좋았다.
어머니는 화초 키우기를 좋아 하셨다. 또한 어항을 사서 물고기도 길렀다. 그러던 11월 어느 날 아버지가 출근하시고 어머니는 서울에 볼일을 보러 간 사이 어항의 산소 발생기가 과열 돼 불이 난 것이다. 없는 집에 제사 자주 돌아온다고..... 상황이 너무도 악화 됐다. 모두 탔다. 베개하나 건지지 못했다. 할 수없이 우리는 다시 이사를 해야 했다. 초등학교 앞으로 이사를 했다. 일부 보상금과 빚으로 다시 집을 샀다. 청주로 이사 오기 전까지 그 집에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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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자 손녀와 함께하신 어머니 |
88년 8월 총학생회 임기를 끝으로 나는 사실상 학생운동을 마쳤다. 졸업 후 무엇을 할 것인가를 많이 고민했다. 무엇보다 내가 총학생회장 시절 수많은 학우들 앞에서 조국의 자주.민주.통일을 위해 투쟁하자고 했던 기억이 뇌리에서 사라지질 않는다. 총학 간부를 했던 사람들은 각자의 길을 가고 있었다. 전대협 1기 동지들과의 만남도 자주 있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충남대 윤재영 동지가 찾아오기도 했다. 탁구도 잘치고 해서 우리는 자주 만났다. 천안에 박정열 회장도 자주 만났다. 지금은 영문과 교수님을 하고 있을 것이다. 천안 단대의 이봉구 회장도 자주 만났다. 지금은 분당에서 치과원장님으로 일하고 있다.
전대협 1기 동지들과 어느 날 대전 계룡산 동학사 입구에 있는 식당에서 1박하면서 실컷 놀았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각자 지역에서 운동을 계속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청년단체를 만들고, 또는 지역에서 사회단체에 들어가 실무자가 되거나 해서 꾸준히 운동을 하자고 했다. 10년 이상 꾸준히 해보자고 했다. 현실 정치권에의 참여도 10년 이상이 시간이 흐른 다음에 고민해 보자고 했다. 함께 총학을 했던 동료들과 논의해 봤다. 논의를 해보니 명구형은 문화운동에 관심 있었고, 여학생부장을 했던 이금희는 여성운동에 관심 있었고, 학복위 위원장을 했던 상호 형은 농민운동에 관심 있었다. 참으로 다양했다. 졸업 후 모두 자기가 관심 있어 하던 단체에 들어가 운동을 계속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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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재영 동지 묘소에서, 전대협 1기 동지들 |
89년 충민련에서의 일은 재미있었다. 당시에는 전두환 정권이 물러가고 노태우가 당선돼 각종 청문회가 열린 시점이었다. 많은 시민들이 우리를 인정해 주었다. 나는 전민련 회의에도 참가하고, 지역의 학생운동 조직과도 연계하고, 농민, 기독교 등등 다양한 조직들과 만나 민주운동에 대해 협의하고 조직하는 일에 열중이었다. 당시 전민련 본부에는 이인영, 박홍순 , 우상호 등 나와 전대협을 함께 했던 동지들이 많이 있었다.
문익환, 백기완, 계훈제, 이창복, 이부영, 김근태 등등 내놓으라 하는 재야인사들을 만나게 된 것도 그때쯤 이었다. 하지만 전민련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92년 총선을 앞두고 합법정당 건설 논쟁으로 당시 의장이던 이부영, 조통위원장 이재오 등이 사퇴하면서 급격히 세력이 약화 됐다. 이러한 논쟁은 우리 충북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87년 대선에 임하는 재야단체들의 입장 차이는 92년 총선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는 여전히 재야세력의 합법정치 영역에 어떻게 참여 할 것인가? 하는 논쟁으로 지루하게 전개됐다.
89년 2월 고등학교를 졸업한 막내는 대학을 가지 않았다. 나는 충북대학교에 가라고 했으나 재수 한다고 했다. 내가 재수를 해 봤기 때문에 나는 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재수 한다고 했다. 그리고는 서울로 갔다. 서울 가서 시집간 누나네 집에 머물렀던 모양이다. 그리고는 아르바이트를 했단다. 이 친구는 노래도 잘한다. 잠실 롯데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단다. 동생은 유학가기로 마음먹고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한 모양이다. 어느 날 나한테 와서 유학가려고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는 결혼을 한단다.
나는 동생이 어떻게 영어 공부를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3년이 지난 92년 초 유학시험에 합격하고 토플도 당시 성적으로 평균 600점이 넘어서 미국 싸우스타코타 주립대학에 4년 장학생으로 간다고 했다. 나는 거짓말인줄 알았다. 그런데 진짜로 떠났다. 나보다 일찍 결혼하고 제수씨와 돌 갓 지난 아들을 데리고 그렇게 미국으로 훌쩍 떠났다. 그리고 3년 반 만인 94년 가을에 비행조종 관련 자격증 6개를 들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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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가 식구들 |
[나의 인생살이 40]
광고 기획사를 차리다.
졸업을 앞두고 나는 무엇을 해서 먹고 사나 하고 많은 고민을 했다. 그러던 차에 장섭이 형이 기획사를 차리자고 했다. 장섭이 형은 내가 대학 1학년 학생운동 막 시작했을 때 학교 정문에 있는 나의 자취방에서 함께 유인물 만들던 선배였다. 당시 장섭이 형이 기획사 일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장섭이 형하고 총학 때 총무부장 하던 명구형, 같이 구속됐던 사익이 형하고 동업으로 기획사를 차리기로 했다.
우리는 88년 겨울부터 광고기획사를 준비했고, 89년 1월쯤에 사창동 시계탑 부근에 회사를 개업했다. 충민협 에서는 활동비로 당시에 오만원인가 받았던 거 같다. 먹고 살면서 운동을 해야 했고 그래서 만든 것이 ‘글소리 기획사’였다. 이때쯤 해서 나는 담배도 끊었다. 술 먹고 담배피고 하면 건강을 장담할 수 없었기에 술은 어차피 사람 사업에 도움이 되니 차라리 담배를 끊자! 이렇게 생각하고 단박에 끊어 버렸다.
총학생회나 각종 단체의 홍보물이나 티, 수첩, 기념품 등을 납품하는 회사를 차린 것이다. 내가 총학생회장 출신이니 충북대학교에 가서 영업을 해보자고 했다. 우선 대학본부 총무과부터 학생과 등등에 다니면서 인사하고 명함을 돌렸다. 그랬더니 어떤 분이 글소리 기획사를 ‘큰소리 기획’으로 읽었던 모양이다. 하시는 말씀이 역시 학교 때 멋지게 연설하더니 ‘큰소리 기획사를 만들었구먼’ 했다. 역시 사람은 첫인상이 중요한 가보다. 어떻게 맺어졌는가가 그 사람의 이미지에 오래 동안 남는 모양이다. 몇 번을 가서 도와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충북대학교 병원 CI를 우리에게 주었다. 나는 사업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얼마에 계약했는지는 모른다. 나는 명구 형과 사직동에 조그만 자취방을 구했다.
당시 우리 네 명은 사업을 시작하면서 나는 운동을 계속 할 것이니 월급과 나중에 사업이 잘되면 배당금을 받는 것으로 하기로 서로 양해했다. 그렇게 해서 조금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면서 청주민청 일을 계속 했다. 이광희 동지는 조금 서운했던 모양이다. 함께 하자고 제안도 안했으니 당시에는 많이 서운했을 것이다. 이 글을 빌려 이광희 동지께 송구한 마음을 전한다.
낮에는 민청에서 활동하고 밤에는 기획사에 와서 인쇄물도 돌렸다. 나는 이때 옵셋 인쇄를 배웠다. 어느 날 밤에 유인물을 찍다가 왼쪽 엄지손가락이 말려 들어가 하마터면 손가락을 잃을 뻔도 했다. 인쇄물을 만들면 접지를 해야 했다. 손가락에 골무를 끼고 한 장씩 뽑아서 책을 만드는 일은 정말로 어려웠다. 총학생회에서 학생수첩을 수주 받아 껍데기 끼우는데 신물이 나도록 했다. 대동제 팸플릿을 납품기일에 맞추려면 밥을 꼬박 세우는 일도 있었다.
물론 기획사를 통해서 나는 돈을 벌지 못했다. 사업은 잘 될 때도 있고 못 될때도 있다. 사익이 형과 명구형은 사업이 시원찮아 떠났다. 다른 일을 하기 위해서다. 장섭이 형이 주도를 하고 있었는데 돈이 별로 안 된 모양이다. 나는 더군다나 일에 손을 데지 않았기 때문에 돌아가는 것을 몰랐다. 아마도 93년쯤 문을 닫았을 것이다. 역시 나는 자본을 중심으로 사업 하는데 는 재주가 없는가 보다. 하지만 사람과 하는 사업에는 자신 있었고 성공도 많이 했다.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하니 나는 여러 가지 아이템을 찾아 나섰다. 원주에 있는 친구가 녹즙배달을 해보라고 했다. 나는 그 일을 이광희 동지한테 알려 주었다. 이광희 동지는 사창동 시외버스 터미널 부근에 가계를 내었다. 당시로는 아무도 차리지 않은 가계였다. 너무 시대를 앞질러 갔는지 사업을 얼마 되지 않아 접었다.
[나의 인생살이 41]
김근태를 만나다. 청주민청에서 다시 태어나다.
89년 초 쯤 인가 청주에서 김근태 초청강연이 있었다. 나는 그렇게 조리 있게 말 잘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나도 당시에는 말께나 한다고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매력적이었다.
89년 초 충민련 사무실을 육거리로 옮겼다. 시간이 지나면서 충민련 에서의 일은 나에게 별로 흥미를 주지 못했다. 대중운동이 하고 싶어 졌다. 회원들과 함께 웃고, 울고, 뒹굴고 싶었다. 그래야 연합운동도 잘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청주민청 회원에 가입했다. 충민련 일이 끝나면 저녁에는 청주민청 회원들과 어울려 공부도 하고, 유인물도 뿌리고 했다. 그리고 기획사에 가서 일도 했다. 89년 가을쯤 충민련을 사직했다. 당시 청주민청 사무실은 충민련과 같이 쓰고 있었다. 함께 학생운동을 했던 이광희 동지가 청주민청 조직부장을 하고 있었다. 청주민청은 88년 4월에 창립돼 초창기 활발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조직부장을 하던 정성규 동지가 하계수련회 갔다가 익사 사고를 당한 이후로 주춤했다.
사실 나와 이광희 동지는 학생운동을 마치면서 많은 대화를 했다. 그래서 나는 연대운동체에 들어가고 이광희 동지는 민청에 들어가서 열심히 운동하자고 약속을 했다. 그런데 청주민청 일이라는 것이 회원대중을 많이 모아야 하는 것이고, 이들과 잘 놀고, 잘 조직해야 하는 일이라서 쉬운 일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당시 청주민청의 의장과 사무국장을 맡고 있던 선배들은 상근을 하는 것이 아니어서 조직사업이 지지부진 했다.
이광희 동지 역시 서울 출신이고 대학에서 학생운동을 늦게 해서 운동진영에 많은 사람을 알지 못해서 조직사업에 한계가 있었다. 이광희 동지는 조직부장으로 일하면서 청주민청을 살려보려고 엄청 노력했다. 회비가 걷히지 않으니 먹고 살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사무실 문을 열어보니 배가고파 쇼파에 잠자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 아팠다. 배가 고파 물을 먹었다고도 했다. 이광희 동지는 오로지 민청 일만 했다.
나는 과감히 결정했다. 청년대중들을 조직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이광희 동지한테 내가 청주민청으로 가겠다고 했다. 나는 자신 있었다. 워낙 학생운동을 밑바닥부터 했고, 총학생회장을 했으니 대중들과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잘 놀고....하여튼 나는 사람사업에는 자신 있었다.
원래 청주민청의 창립이 4월 달이이서 4월에 총회를 해야 하나 조직이 정비되지 못해서 총회가 10월쯤으로 미루어졌다. 조직을 강화하기 위해 청주민청 회원교육을 1기부터 다시 시작했다. 교육을 받아야 정식회원이 됐다. 나는 낮에는 충민련 사무실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청주민청 사무실에서 이광희 동지와 함께 회원대중들과 기타 치며 놀았다. 내가 고등학교 때 배워 놓은 기타솜씨가 이렇게 쓰일 줄이야~~~~
어느 날 미니스커트를 입은 아가씨들이 사무실에 찾아왔다. 당시만 해도 일반인들이 재야단체 사무실에 출입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선조, 근순이, 현주, 후연이....나는 이들을 영원히 기억 할 것이다. 이들은 민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청년운동을 통해 노동운동을 배웠다. 청년운동을 통해서 민주주의를, 통일운동을 배웠다. 보고 싶다.
내가 청주민청에서 저녁에 기타치고 놀고 있으니까 후배들이 찾아왔다. 졸업한 후배들이 취직했다고 밥도 사고했다. 그렇게 오면 나는 청주민청 회원에 가입 시켰다.
89년 늦가을 쯤 이었다. 88년 내가 교원대가서 통일선봉대 강의하다가 잡혀간 이후로 학생과를 박살내고 징계를 당했던 후배들이 어느덧 졸업할 시기가 다가왔다. 이 친구들은 조그만 모임을 만들어서 자신들의 졸업 후 진로에 대해 함께 고민하자고 했다. 당시 학생운동에서는 ‘애국적 사회진출’이라는 것이 유행했다. 학생운동을 하고 사회에 나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등을 고민하는 그런 문건들이 많이 나돌았다. 그 모임에 자주 갔다. 열세명 정도 됐으니 적은 숫자는 아니었다.
술을 먹으면 꼭 소주 대병짜리를 먹었다. 막소주 말이다. 그 모임 성원 중에 아주 작고 귀여운 학생도 있었다. 강원도 화천 출신의 동향 후배였다. 울기도 잘하고, 말 수도 적고......그냥 운동권 친구들과 어울리는 착하고 양심적인 그런 학생이었다. 더군다나 윤리교육과에 다녀서 인지 무척 고지식하고, 나름 정의감에 불타고 있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면 귀를 쫑긋 세워 듣고, 울기도 잘 했다.
이렇게 인연이 돼 맺어진 교원대 후배들 중에는 졸업과 동시에 발령 받은 친구들도 있었고 일부는 발령대기 상태에 있었다. 그 친구들 중에 일부는 내가 있는 사무실에 자주 놀러 왔다. 화천이 고향인 후배도 놀러 왔다. 그렇게 해서 청주민청 회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 후배는 89년 겨울이 되면서 민청 회원이 됐고 총무부장을 하다가 90년 5월쯤 춘천으로 갔다. 춘천에서 아르바이트로 학원선생을 했다. 동국이는 군대 갈 때 까지 민청에서 기타쳤다. 병권이는 민청 소식지 만들었다. 회비도 걷었고, 선배들이 내주는 조그만 후원금으로 민청은 굴러가고 있었다.
89년 10월쯤 청주민청 총회가 있었다. 총회에서는 청주민청 3기 의장 선거가 있었다. 초대 의장은 성구 형 이었고 2기 의장은 철흠이 형 이였다. 나는 회원들의 뜻을 모아 3기 의장에 출마 했다. 하지만 일부 선배들이 반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투표를 했다. 총회에서는 내가 의장으로 선출됐다. 이러는 과정에 지역의 일부 사람들이 나를 운동권에서 재명 해야 한다고 연판장을 돌렸다고 들었다. 나는 보지 못했다. 일종의 왕따를 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 어떤 선배를 만났는데 나 보고 하는 말이 ‘노선 싸움이라고 해라’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의 뜻을 나중에 알았다.
이유인 즉, 기독교 중심의 운동을 하던 선배들은 서로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온 사람들이다. 나는 새롭게 대중운동을 통해 성장하고 있었다. 바로 이 지점이 충돌의 지점이었다. 기득권 이었다. 외로웠다. 청주출신이 아니라는 것이 이렇게 힘들 줄이야.....한편으로 이 사람들은 나를 자신들과 의견이 다르다고 나를 재수형 파라고 하기도 했다. 재수형은 민주의 당을 했다. 나는 민주연합파였다. 자신들과 의견이 다르다고 나를 매장하기 위해 험담을 하기도 했다. 하기야 내가 충북대학교에 처음 들어와 만난 첫 번째 운동권 선배가 바로 재수형 이다. 나와는 노선이 달랐지만 우리는 그래도 마음 열어 놓고 애기하곤 했다. 재수형은 나중에 전교조 출신의 선생님과 결혼해서 지금은 청주에서 운수업 사장님으로 일하고 있다고 들었다. 오로지 믿을 것은 청주민청 회원들뿐이었다.
‘예의 바른 청년! 성실한 청년!’ 이것이 청주민청의 정신 이었다. 여름 수련회도 가고 등산도 다녔다. 전국 집회에도 다니고......그야 말로 우리는 동지가 됐다.
청주민청은 정말 재미있었다. 내가 대학 2학년 때 후배들과 놀던 그런 재미를 느끼게 했다. 사람사업인 것이다. 앞서서도 말했지만 나는 사람 사업을 잘하는 편이다. 논리 싸움 할 때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놈’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눈물이 많은 사람이다. 마음도 여리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내가 믿는 것에 대해서는 올인 하는 성격이다.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도 치밀한 준비를 하기 보다는 진행 해가는 과정에서 일을 깨닫고, 현장감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많이 받았다. 판단력이 빠르고, 미래 예측이 너무 빨라 실수도 많이 한다. 이것이 나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나의 인생살이 42]
이범영을 만나다. 전국청년단체대표자협의회(전청대협)를 만나다!
김근태 선배가 초대의장으로 있던 민청련과 88년 이후 전국에서 자생적으로 생긴 새로운 청년운동의 흐름이 만나기 시작했다. 사실 전대협 1기들은 거의가 대중운동 출신들이다. 이들은 84학년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86년에 총학생회장 선거에 나가서 당선된 사람들이다. 그 전에는 간선의 학도호국단이 있었고, 운동권 학생들은 투쟁위원회를 만들어서 싸웠기 때문에 대중성이 떨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하겠다.
그런데 86년 이후 대학에 민주화 바람이 불고, 총학생회가 부활하면서 나름대로 각 대학에서 대중적으로 알려지거나 아니면 대중 활동 하던 사람들이 총학생회장에 당선된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당선되고 나서 87년 6월 항쟁을 이끌어서 대중적으로도 상당히 지도력을 인정받은 인물들이다. 전대협 1기들이 임기를 마치고 지역에서 청년단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대구의 박형룡, 전주의 정훈, 성남의 김태년, 수원의 고재룡, 대전의 윤재영, 서울에서는 허인회, 우상호 등이 나라사랑 청년회를 만들고.....
이렇게 순식간에 자생적 청년단체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전두환이 물러가고 물태우 시절이니 민주화 운동은 대중적 성격을 띠기 시작한 것이다. 선도적 투쟁을 이끌던 조직운동에서 대중들과 함께 호흡하고 웃고, 울면서 문화 활동도 하고, 민주.통일 운동도 하는 그런 조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각 청년회에서는 풍물반, 문학반, 노래반 등 다양한 동아리 모임이 생겼고 그로 인해 다양한 청년대중들이 가까이 하게 됐던 것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민청련은 5개인가의 지역 지부를 가지고 있었는데 지역에서 새롭게 만들어 지는 대중청년단체들과 통합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이 전국적으로 모여서 89년 1월 ‘전국청년단체대표자협의회(전청대협)’을 만든 것이다. 초대 의장은 지금은 고인이 된 이범영 당시 민청련 의장이 맡았다.
나는 1989년 후반부터 본격적인 청년운동을 시작했다. 제천으로, 충주로 돌아다니면서 충북에 청년운동 단체를 만드는데도 열성을 다했다. 육거리 에서의 민청 활동은 정말 재미있었다.
내가 의장이 되고나서 하루는 민청련 부설 민족민주운동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정세연구’에 대한 수금을 하러 사람이 내려왔다. 김흥섭 선배다. 그때까지 청주민청에서는 외상값이 꽤 있었다. 나는 단판을 지었다. 깎아줘라! 그러면 다음부터는 대금을 잘 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외상값 일부를 탕감 받았다.
나는 전국 청년단체 회의에도 나갔다. 전청대협 중앙상임위원으로 활동했다. 거기서 많은 동지들을 만났다. 이범영, 유기홍, 한충목, 이승환, 홍만희, 김종원, 박형룡, 손미희, 김진희, 허인회, 최종태, 이경률, 이기동, 강기정, 한창식, 유문종, 조완기, 김영철, 박우영, 우위영, 유정배, 임근재, 유성찬, 장승현, 김태협, 김홍섭, 이재성, 박헌용, 신상엽, 장준호, 박선희, 지금은 고인이 된 대구의 이영기, 역시 고인이 된 본부의 유수동......이루 말로 할 수 없는 많은 동지들을 만났다. 전청대협은 정말 멋진 조직이었다. 모두 자신의 지역에서 열과 성을 다해 운동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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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나, 한창식, 홍만희 동지 |
90년 봄쯤 해서 나는 같이 자취하던 명구형 집에서 나와 민청회원 몇 명과 교대앞쪽에 자취집을 구했다 통째로 얻었다. 거기서 밥해먹고 그리고 살았다. 우리는 그 집을 ‘반미의 집’이라고 불렀다. 91년 여름쯤 우리 집이 태백에서 청주로 이사 오면서 우리는 각자의 헤어졌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의지하며 살았다.
90년 들어서 대학생들도 민청 회원가입으로 했다. 어느 날 농대 4학년에 재학 중인 사람이 민주화 운동을 하고 싶다고 사무실로 찾아왔다. 회원이 됐다. 노동자들도 회원이 되겠다고 찾아왔다. 어느 날 근순이가 회사에서 잘렸단다. 다음날부터 출근투쟁을 한다고 했다. 어느덧 근순이는 미니스커트입고 다니던 애띤 소녀가 아니라 투사가 됐다. 눈물이 났다. 지금은 구미에서 학생 운동하던 사람과 만나서 결혼해서 잘 살고 있을 것이다. 보고 싶다.
90년 5월! 광주항쟁 10주년 행사를 위해 광주에서 열리는 전청대협 집회에 참가하려고 순례단을 모집했다. 버스 두 대를 예약했다. 그런데 경찰에서 엄청 심하게 막았다. 우리는 내덕동에 버스를 숨겨 놓고 회원들을 마치 간첩 접선하듯이 해 버스에 태웠다. 나는 순간적으로 머리를 썼다. 차를 대전 쪽으로 몰고 가면 틀림없이 검문에 걸릴 것 같았다. 그래서 서울 쪽으로 올라가는 노선을 택했다. 진천쯤 가는데 검문소에서 걸렸다. 뒤 따라온 청주경찰서 기동대가 막아섰다. 우리는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여행의 자유가 있는 대한민국에서 왜 우리가 가는 길을 막느냐 하고 따졌다. 우리가 광주 집회에 참석하려 하기 때문에 막는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우리는 서울로 가고 있다고 우겼다.
결국은 청주서부경찰서로 연행 됐다. 우리는 차에서 내리지 않고 버텼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나는 48시간이 지나면 우리를 풀어줄 수밖에 없으니 버티자고 했다. 차에서 잤다. 그런데 경찰에서 협상제의가 왔다. 이름과 주민번호, 주소를 쓰면 보내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러면 우리가 작성을 해서 넘겨줌과 동시에 회원들 모두는 경찰서 정문으로 나가게 해달라고 했다.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수사과장이 약속을 깼다. 주소록을 받고서는 바로 신분조회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그래서 나는 수사과장 한데 내 것만 맞고 나머지는 모두 틀리다. 그러니 맘대로 하라고 했다. 수사과장 당신이 약속을 어겼으니 이제 우리는 나간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나왔다. 이미 구금시간이 지났다. 회원들의 신분이 노출되면 틀림없이 이놈들이 회사에 통보해서 괴롭힐 것이기 때문에 회원들을 철저하게 보호 했다.
8월에는 판문점에서 열리려던 역사적인 범민족대회가 열리지 못하고 연세대에서 남측대회가 열렸다. 우리는 전청대협 깃발아래 모여 조국통일을 외쳤다. 갑자기 경찰이 지랄탄을 쏘아 댔다. 나는 근순이 손을 놓쳤다. 그래도 나는 숙달된 조교로 생각했는데 역시 지랄탄은 지랄탄 이었다. 한참 후에 근순이를 찾았다. 울고 있었다. 의장님! 손을 놓고 가면 어떡합니까! 어휴~~~근순아! 미안해 다시는 손 놓지 않을게!!!
충북대학교에 다니는 후배들이 교지에 글을 써서 이적표현물이라고 구속되기도 했다. 나는 그들을 도왔다. 이들도 나중에 청주민청의 회원이 됐다. 우리는 민청의 사무실 마련을 위해 대학의 축제에 가서 닭곰탕도 팔았다. 명절이 되면 조그만 선물 사업도 했다. 그렇게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보듬으며 의리도 다지고 민주화 운동에 대한 열정도 살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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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만희 김종원 나 조완기 |
10월쯤 윤석양 이병이 보안사가 민간인을 사찰했다고 폭로했다. 나는 당시에 춘천에 잠깐 쉬로 갔었다. 아마도 화천에 있는 후배를 만나러 온 모양이다. 그동안 학생운동 하느라고 만나지 못했던 윤기와 상은이도 만났다. 그런데 이 사건이 터진 것이다. 나는 그날로 청주로 내려갔다. 무엇을 할까 하다가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은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보안사 해체를 주장하며 단식을 했다. 열하루를 했다. 아무 준비 없이 해서 무척 힘들었다. 은주가 간호사를 하고 있어서 나에게 변비약을 똥꾸로 넣어 주었다. 창피한 것도 잊었다. 은주야 고맙다. 그렇게 해서 나중에 결국은 보안사가 국군기무사로 대체 됐다. 나도 일조 했다고 생각한다. 육거리에서 민청활동은 정말 좋았다. 우리는 그렇게 또 한해를 육거리에서 마무리 했다.
겨울쯤 해서 ‘노래이야기’라는 단체와 통합을 논의 했다. 용성이, 미영이랑 같이 논의 했다. 노래이야기는 청주에 있던 노래패의 일종의 팬클럽 비슷했는데 노래를 좋아하는 청년들의 자발적 단체였다. 우리는 통합을 했다. 청주민청은 점점 커져갔다.
[나의 인생살이 43]
흑진주의 땅 태백을 뒤로 하고 청주로 이사하다.
내가 청주에서 일하게 되면서 우리 집은 청주로 이사하기로 했다. 아버님은 광산에서 크게 다치셔서 더 이상 광산에서 일하기 어려웠다. 막내가 서울로 가서 아르바이트 하면서 아버지도 광산을 떠나 서울의 어느 아파트 경비로 취직을 했다. 바로 밑의 동생은 방위를 마치고 태백에서 알바를 하다가 청주로 왔다. 그리고 취직을 했다. 나랑 같이 자취를 했다.
나는 부모님을 청주로 모시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내가 학생회장 할 때 학생처장으로 계시던 이규문 선생님을 찾아갔다. 아버지 취직을 부탁하기 위해서다. 90년 5월쯤 선생님은 아버지를 청주에 있는 주공아파트 경비로 취직시켜 주셨다. 감사드린다. 91년 여름쯤 돼서 우리는 태백의 집을 팔았다. 그리고 청주로 이사 왔다. 청주 사창동에 단칸방을 얻었다. 우리가 고향을 떠나 철암으로 처음 왔던 것처럼 그런 방이었다. 대학생들이 자취하는 그런 단칸방이다. 그 방에서 부모님과 바로 밑의 동생과 함께 네 명이 거주 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족은 내가 춘천으로 떠난 지 11년 만에 다시 모여 살게 됐다.
얼마나 오랜 만인가?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고 했던가? 80년 고등학교 기숙사, 83년 서울에서 자취, 84년 강남 레스토랑에서 일하면서, 85년 대학 입학하면서 자취하고, 87년 감옥가고...그렇게 돌고 돌아 나는 부모님과 만나게 됐다. 어머니는 자식 공부시킨다고 식당으로, 식모살이로 다녀야 했고, 아버지는 광산으로 사우디로, 다시 광산으로...누나는 나 때문에 대학도 못가고 공순이에서 교회 유치원 보모로....바로 밑에 동생 역시 목사가 되고 싶었으나 대학을 가지 못하고, 막내 역시 대학을 가지 못하고 아르바이트로....모든 것이 나 하나만을 위해 존재했던 것 같다. 아무것도 없는 집안에서 장남 하나를 위해 몰빵한 우리네 가족사였다. 이렇게 살은 사람들이 어디 한 두 가정인가? 나의 부모님과 같은 과정을 겪으신 모든 부모님들께 감사드린다. 그렇게 큰 386들이 정치를 잘했어야 했다. 정말로 잘 했었어야 했다.
내가 고향을 떠나 태백으로 이사한 것이 1974년 이었고, 태백을 떠나 청주로 이사한 것이 1991년 이니까 태백에서는 17년간 살았다. 한 많은 태백 살이였다. 연탄가스로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고, 아버지가 사우디로 돈 벌러 간 사이 온갖 설움을 이기며 살아남았던 그곳, 불도 났고, 아버지가 다치신 그런 곳이다. 공부해야 산다고 생각하고 새벽에 춘천으로 연합고사 시험 보러 떠났던 그 태백을 떠나는 것이다.
막내 동생은 92년 초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92년 여름쯤에 어머님이 미국으로 동생네 집에 갔다. 6개월을 있기로 했는데 불과 2개월 만에 귀국 하셨다. 다치셔서 병원비가 없어서 귀국 하셨단다. 미국으로 공부하러간 동생은 싸우스타코타에서 공부하다 너무 힘들어서 뉴욕으로 이사를 했단다. 차로 꼬박 4일이 걸렸단다. 그리고는 탱크로리 조수로 따라다니면서 돈을 벌어 대학에 다녔단다. 엄마가 손자를 보기 위해 미국으로 가신 것이다. 막내는 파괴공학을 공부하다가 비행으로 전공을 바꾸어 비행조종사가 되기로 했단다. 비행조종 자격을 획득 했지만 결국은 되지 못했다. 나 때문이었다. 내가 95년 국가보안법으로 감옥살이를 했기 때문이다.
93년 가을쯤에 우리는 산남동에 13평짜리 주공 영구임대아파트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나는 결혼했고, 95년 감옥 갔다 와서 용암동에서 역시 13평짜리 주공 영구임대아파트에 들어가면서 부모님 품안을 완전히 벗어나게 됐다. 독립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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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째 딸, 은서 |
[나의 인생살이 44]
백학빌딩 시대가 열리다.
91년 초에 우리는 시내로 사무실을 옮겼다. 구 고속터미널 부근의 백학빌딩 5층에 사무실을 얻었다. 청주민청에서 상근을 하다 보니까 돈은 한 푼도 벌지 못했다. 나는 민청회원들과 함께 농사도 지었다. 음성에 있는 용성이네 집에 가서 땅콩, 고구마, 벼농사를 지었다. 용성이는 택시기사로 일하면서 원래는 ‘노래이야기’를 이끌고 있었는데 민청이 너무 멋있어서 우리와 통합을 했단다. 그것을 수확해서 내다 팔았다. 돈은 안 되었지만 회원들 간의 친목은 더욱 높아 졌다.
우리는 청년학교도 운영했다. 4강좌에서 6강좌 정도를 개설해서 재야인사나 교수들을 초청해서 강연을 했다. 그렇게 하고 나면 회원들이 4~5명씩 늘어났다. 회비도 솔찬히 걷혔다. 어디서 지원하는 것도 아니니 순전히 우리의 힘으로 자력갱생 했다. 당시 청주민청 상근자는 4명 정도 됐다. 우리는 막일도 했다. 일명 노가다 말이다. 그렇게 해서 돈이 생기면 유인물 만들고, 통일운동 행사도 했다.
청주대를 졸업한 조대형은 총무부장을 맡았는데, 우리가 만든 유인물이며, 각종 성명서 등을 넣어서 배달을 했다. 후원회원들에게 보내주고, 자료회원을 모집하기도 해서 후원금도 받아왔다. 어느 날 총무부장이 돈이 생긴 모양이다. 어디서 났냐고 물었더니 상갓집에 가서 화투해서 땄다고 했다. 총무부장은 화투를 잘 했다. 우리는 그렇게 벌어온 돈으로 가끔씩 회식도 했다. 지금은 성남에서 살고 있다.
백학빌딩 시절은 정말로 재미있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이상호가 왔다. 상호는 정말 호인이다. 노래도 잘 부르고......종호형이 족발을 사가지고 저녁에 왔다. 육거리에 사무실이 있을 때는 순대도 엄청 먹었다. 보리밥도 먹었다. 일기, 용준이, 태성이, 이숙씨, 재면이, 만규, 미라. 동국이, 병권이, 은섭이, 인숙이, 금희, 성숙이, 상철이, 혜림이, 동진이, 혜진이, 정호, 선애, 호종이, 명호, 승희형, 경민이형, 은주, 다비, 소영이, 춘자, 중식이, 성덕이, 혜림이, 황호, 영아, 민경이, 후연이, 진걸이....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것은 내가 많이 늙어서 인가? 답답하다......아~~그리운 이름들이여! 당신들이 있어 우리는 행복했소! 조국의 민주화가 조금이라도 앞당겨졌다고 생각하오! 나는 영원히 당신들을 잊지 못할 것이요.
백학빌딩은 청주의 대표적인 소주회사인 백학소주의 건물이었다. 우리는 옥상도 이용했는데, 투쟁이 있는 날에는 어김없이 옥상에 청주민청 깃발을 올렸다. 정말로 회원들과 한 몸으로 움직였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 구속될지 몰랐다.
91년 강경대 학생이 백골단한테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우리 민청 회원들이 제일 앞장섰다. 학생들이 학교 정문을 통과하지 못한 시점에 청주민청 회원들이 제일 앞에서 스크럼을 짰다. 겁도 없다. 경찰이 연행 한다 해도 꼼짝도 하지 않는다. 근순이 선조 현주가 길거리에 눕는다. 나는 이들과 함께 투쟁하는 것이 너무도 행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싸움이 격렬해 졌는데....저녁이 돼 경찰이 나를 찍어서 현장에서 체포하려 했다. 나는 사력을 다해 뛰었다. 백골단이다. 순간적으로 기질을 발휘해 골목에 숨었다. 경찰이 앞으로 지나친다. 아마도 그날 체포됐으면 구속됐을 것이다.
우리는 농민집회, 전교조 집회, 노동자 집회, 전두환.이순자 체포투쟁, 통일운동.....그야 말로 만능 이었다. 전교조 합법화 운동에 힘썼다고 나중에 전교조 충북지부로 부터 감사패도 받았다. 부끄러운 일이다. 민청 회원들 아니었으면 불가능 했을 것이다. 원래 청년운동이라는 것이 종합운동인 것이다.
나중에 청년들의 이해와 요구를 담는 운동을 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청년운동은 정치운동이요, 정당의 선봉대인 것이다. 지금 많은 정당들이 늙어가고 있다. 청년조직이 없어서 그렇다. 이전에 김대중 대통령은 ‘연청’을 핵심적으로 키웠고, 노무현은 노사모가 그 일을 대신 했다. ‘청년이 살아야 조국이 산다.’ 이것이 한청협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전민련은 91년 12월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으로 확대 개편된다. 청년, 노동, 농민, 교사, 빈민 등 소위 6개의 전국조직이 앞장섰다. 이광희 동지가 총학시절 부터 사귀어 오던 이금희와 결혼을 한다. 우리는 제천에 가서 함을 팔았다. 청주민청 동지들이 가서 얼마나 짓궂게 굴었는지...결국 시간을 어기는 우를 범했다. 지금 두 사람은 아들, 딸 낳고 잘 산다. 이광희는 지금 충북도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민청회원 끼리 결혼한 1호 커플이 됐다. 청춘들이 모여서 일까? 그 후로 많은 민청회원들이 소위 ‘성내혼’을 했다. 회원끼리 눈이 맞아서 결혼한 커플이 상당히 많다.
충북에서도 충민련에 가입하지 않은 노동, 농민, 전교조 등의 단체들과 연대 테이블을 만들었다. 91년 12월 24일 민주주의민족통일충북연합이 결성 됐다. 그렇게 해서 충민련은 창립된 지 2년 6개월여 만에 해소됐다. 우리 민청은 충북연합 가맹단체가 됐다.
종관이형, 창호형, 정태옥 선생님, 김병우 선생님, 고흥수 선생님, 재명이형, 수남이, 영구, 시영이, 형근이형, 재수형, 도종환 선생님, 강혜숙 교수님, 김정웅 목사님, 한사석 목사님, 노영우 목사님, 차윤재 목사님, 김창규 목사님, 이도형 목사님, 조순형 전도사님, 지금은 고인이 된 권영국 선생님, 장문식 도연맹 의장, 이유근 집사님, 자행이형, 승원이형, 원덕이형, 희식이형, 윤구병 교수님, 유초하 교수님, 서관모 교수님, 허석렬 교수님, 정진경 교수님, 이주형 선배님, 유영주, 정은숙, 유영길 선배, 이도형 목사님, 변지숙, 남정현 누님, 최맹섭, 영애, 성곤이, 유숙이, 최미애 대표님, 나양이, 근태, 후삼이, 지금은 고인이 된 박찬우, 현웅이, 형철이....
이 모든 분들이 충민협을 거쳐 충민련, 충북연합, 충북연대회의 등으로 이어져 오는 과정에서 나와 인연이 있는 분들이다. 물론 이보다 훨씬 많은 분들이 계시다. 역시 내 머리의 한계로 이름을 못 쓴다. 죄송하다.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고, 건강하시길 기원한다.
92년 2월 한청협이 결성 됐다. 세종대학 에서였다. 한청협의 결성은 한국민족민주운동의 일대 사건이었다. 한청협의 결정은 전국연합의 결정이 됐다. 왜냐하면 전국연합은 부문단체와 지역연합으로 구성돼 있었는데, 한청협 소속 지역단체들이 지역연합을 거의 움직였기 때문에 한청협에서 어떤 노선이나 정책을 결정하면 전국연합 대의원대회에서 거의 통과 됐다. 이쯤 해서 나는 전국연합의 규칙발언을 도맡아 했다. 이후 나는 ‘박규칙’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것이 내가 전국적인 사람으로 되는 계기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만 해도 전국연합의 각종회의는 말은 많은데 무엇을 쉽게 결정 할 수 없었다. 소수파가 주장을 세게 하면 아무것도 되지가 않았다. 그래서 회의규칙을 잘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국회의 의사규칙을 읽고 공부했다. 이후 각종 회의 때 나는 경우 없이 발언하는 사람들을 규칙발언을 통해 제압하곤 했다. 그 후 나는 전국연합과 한청협에서 ‘박규칙’으로 통했다.
92년 통일투쟁 과정에서 한청협 이범영 의장이 구속됐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병에 걸렸다. 암이다. 췌장암 이란다.
[나의 인생살이 45]
결혼하자! 프러포즈를 했다. 무슨 깡다구로!!!
89년 가을 교원대학에서 처음 본 후배가 90년이 여름쯤 돼 청주를 떠났다. 춘천으로 갔다. 강원도 출신이라 졸업과 동시에 교원발령을 받지 못하고 대기 중에 교원임용고시가 생겼다. 그래서 공부한다고 춘천으로 떠난 것이다. 떠나기 전까지 청주민청에서 총무부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후배는 주말이면 청주에 놀러오곤 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교원임용고시 시험이 시작됐다. 강원도는 윤리과목을 뽑지 않아서 인천으로 신청했다. 인천에는 국립사대가 없어서 많이 뽑았다. 교원대 후배들도 여러 명이 시험 봤다. 1차 필기에서 합격했다. 나는 면접시험을 볼 때 틀림없이 전교조 가입 문제가 나올 것이니 일단 가입하지 않는다고 하라고 했다. 그런데... 이 친구는 역시 윤리과 출신이라 그런지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면접에서 떨어 졌다. 그리고는 93년 지방공무원 시험을 봐서 1등으로 합격했단다. 그래서 첫 발령이 화천군청 이었다. 고2때 돌아가신 자기 아버지가 일하시던 그 곳에서 공무원으로 첫 발을 내딛은 것이다.
91년 여름, 8.15 제2차 범민족대회가 열렸다. 열심히 투쟁하고 나는 잠시 휴식을 취하려고 춘천에 갔다. 춘천은 내가 고등학교를 나온 곳이어서 친구들도 많이 있고 해서 마음의 고향 같았다. 90년 춘천으로 떠난 후배는 춘천민청에 나갔다. 당시 춘천민청의 회장을 맡고 있던 현수형한테 소개해 주었다. 총무부장을 했단다. 그러면서 후평로터리 부근에서 학원강사로 일하고 있었다. 나는 이 후배도 만나보기로 했다. 춘천에서 휴식을 취하던 어느 날 이 후배를 만났다. 그런데 이 후배가 어떤 남자를 만난다고 했다. ROTC라고 했다. 나는 기분이 이상했다. 아! 이렇게 그냥 떠나보내는가? 나는 마음 약한 후배가 ROTC를 만난다는 것이 마음에 놓이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군인에 대한 선입견이 별로 좋지 않았다. 내가 육사를 가려고 했었는데 내가 군일을 별로로 생각하다니....군사독재에 대한 트라우마 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묘하게도 꼭 후배의 보호자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따라가 봤다. 같아 앉았는데 왜 내 가슴이 이렇게 뛰는 것일까? 나는 알 수 없는 감정이 솟구쳤다. 그러면 둘이 사귄다는 것인가? 나중에 알았는데 후배가 다니던 학원의 어떤 선생이 소개를 해줘서 두 번째 만나는 자리였단다. 내가 그 자리에 따라 나간 것이다. 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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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얘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수술을 10번 이상 한 아들 상현이다. 지금 고1인데 씩씩하게 잘 적응하고 있다. |
잠시 앉아 있다가 그 자리를 나왔다. 다른 커피숍에 혼자 앉았는데 별생각이 다 들었다. 그 전날 이었다. 후배가 다시는 선배 안 만날 거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아차! 이런 것이구나! 나는 그때서야 뭔가 잘못됐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 후배가 주말에 춘천에서 청주로 내려온 것이 그냥은 아니었구나! 뭔가 있었구나! 내가 그것에 답하지 않아서 삐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후배를 만나기로 했다. 싫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후배의 자취방에 찾아갔다. 강대 후문 쪽에 자취방이 있었다. 저녁이었다. 거기에서부터 공지천까지 걸었다. 아무 말이 없다.
공지천 이디오피아 커피숍 부근의 오리뱃터 뚝방에 앉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수십 년이 흐르는 것 같았다. 드디어 내가 용기를 내었다. ‘우리 결혼하자!’ 남들이 하는 그 흔한 프러포즈를 그렇게 했다. 아무것도 준비 된 거 없이 그렇게 했다. 꽃 한 송이 못 건내주고 그렇게 프러포즈 했다. 싫다고 했다. 나는 일주일 정도 생각해 보고 연락을 주라고 했다. 그리고 상은이네 집에서 잤다. 밤잠을 설쳤다.
다음날 청주로 내려왔다. 3일이 지났는데 전화가 왔다. 다음 주에 만나자고 했다. 나는 춘천으로 갔다. 그리고 오케이를 받았다. 아~~~가슴이 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연인이 됐다. 이후로 나는 결혼할 때까지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화천에 가서 차를 태워서 청주로 데려오고, 다음날 일요일 다시 차를 태워서 화천에 데려다 주고 청주로 돌아왔다. 내가 미쳤다. 그렇게 버릇을 들여서 인가? 지금도 나를 종 부리듯이 한다.
92년 가을쯤인가? 나는 어머니께 인사시키고 결혼하고자 한다고 했다. 어머니는 불만이 많으셨다. 당신은 며느리가 퉁퉁했으면 했다. 당신이 호리호리 해서 꼭 퉁퉁한 며느리를 보고 싶어 했다. 키도 작다고 하고....하여튼 맘에 안 들어 했다. 하지만 나는 굽히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나의 인생살이 46]
92년 대선에서 또 졌다.
92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연초에 전국연합이 만들어 졌다. 충북연합도 만들어 졌고, 한청협도 만들어 졌다. 전국적 네트워킹이 생긴 것이다. 청주민청은 충북연합을 떠 받쳤고, 한청협은 전국연합을 떠받쳤다.
충북연합은 92년 총선에서 민주연합 후보로 충주의 정기영 후보를 지원하기로 했다. 이광희 부의장을 단장으로 우리는 지원을 열심히 했다. 하지만 졌다.
대선이 다가왔다. 전국연합은 민주연합후보 전술을 채택했다. 김대중 후보를 지지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당선 가능한 야당 후보를 지지하자고 했다. 둘 다 똑 같이 김대중을 지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전국연합의 결정은 전국연합을 향후 정치적 집단으로 키워 가는데 목표가 있었다. 그런데 당선... 가능한 야당후보를 밀자는 것은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92년 전국연합이 대선방침을 정하기 위해 논쟁이 한창이던 가을쯤일 것이다. 나와 함께 충청대협을 이끌었던 충남대 윤재영 동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87년 충청대협을 함께 만들고, 전국 청년운동을 함께 하던 동지가 갑자기 천식으로 사망했다고 했다. 고생 참 많이 했는데....당시 재영이는 수배 상태였다. 발 한번 쭉 뻗어 자지 못하고 그렇게 재영이는 갔다. 월악산에서, 청주에서, 천안에서 막걸리 먹고 토론하던 재영이가 민주주의 세상을 보지 못하고 훌쩍 떠났다. 재영아 편히 쉬어라~~~
어느 날 회원활동을 열심히 하던 동진이가 왔다. 동진이는 89년 충북대 교지에 글을 썼는데 이것이 이적표현물이라 구속된 적이 있었다. 나는 당시에 동진이 애인이었던 혜진이랑 면회도 다녔다. 그래서 인지 동진이는 나를 고맙게 생각한 모양이다. 동진이가 석방되고 민청 회원으로 되면서 민청은 한층 더 힘을 받았다. 가을쯤엔가 동진이가 약혼식을 하고 청주로 내려왔다. 그날 우리는 회원들과 시내에 유인물을 뿌리기로 했다. 정권교체를 위해 민주대연합을 해야 한다는 요지의 유인물 이었다. 동진이와 선애를 한 조로 해서 내 보냈다. 그런데 사단이 난 것이다. 이것들이 나가서 경찰에 연행이 됐다. 동진이가 구속이 된 것이다. 선애는 초범이라 훈방조치 됐다. 얼마를 지나 동진이는 보석으로 풀려났다. 그리고 이듬해 가을쯤에 결혼했다. 우리는 인천까지 가서 내가 기타 치면서 축가를 불러 주었다. 지금은 인천에서 마누라와 두 아들과 잘 살고 있다.
대선이 가까이 오면서 민자당 김영삼의 집권저지를 위한 지역 연대조직이 만들어 졌다. 나는 거기서 대변인을 맡았다. 매일 아침 논평과 성명을 내보냈다. 하지만 언론에는 잘 다루어주질 않았다. 조선일보나 동아일보에는 기사보다 광고가 더 많았다. 나는 신문을 모두 끊어 버렸다.
열심히 뛰었지만 대선에서 졌다. 투표전날 우리는 ‘민주정부 탄생을 청주시민과 함께 기뻐합니다.’ 라는 대형 플랭카드를 만들어서 새벽이 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새벽은 오지 않았다. 그 플랭카드를 부여안고 얼마를 울었는지 모른다. 김대중은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영국으로 떠났다.
우리가 김대중을 지지한 것은 그를 통해 민주주의가 발전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통일의 공간이 조금이라도 넓혀지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민중의 정치세력화가 진전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대선에서 패배 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일부의 사람들은 운동에서 멀어졌다. 또 일부는 독자적으로 정당을 만들어 나갔다. 또 일부는 시민운동으로 전환하기도 하고, 또 일부는 새로운 정치조직을 만들어야 한다며 떠나갔다.
[나의 인생살이 47]
대선 졌다고 그냥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또다시 꼼지락 거리다.
93년 봄이 오기 전에 나는 민청 조직을 정비해야 했다. 우리는 2월 하순 계룡산으로 수련회를 가기로 했다. 저녁쯤에 공주 갑사에서 걸어서 출발해서 동학사로 와서 밤에 토론하고...하는 일정으로 떠났다. 갑사에서 동학사 오는 길은 요즘으로 말하면 올레길 같은 길이다. 그래서 편안한 신발과 편한 복장으로 약 20여명이 떠났다.
그런데 우리는 산 이라는 특성을 잘 몰랐다. 빨리 어둠이 찾아왔다. 손전등도 없었다.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난리가 났다. 산속에서 길을 잃었으니 잘못 헤매다가는 얼어 죽을 것 같았다. 아직 눈도 녹지 않았다. 나는 순간적으로 판단했다. 산 정상으로 올라가자! 그러면 내려가는 길이 보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구두신은 사람을 포함해 엉금엉금 기면서 산꼭대기로 올랐다. 그렇게 해서 계룡산 정상에 올랐다. 그리고 다시 하산했다. 한참을 내려가다 보니까 구조대가 올라왔다. 밑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우리를 조난신고 한 것이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다.
대선이 지나고 충북연합을 책임질 사람이 없어졌다. 형근이 형도 떠나고, 재수형도 떠났다. 나와 나양이만 덩그러니 남았다. 참으로 외로웠다. 사무실을 성안길 한복판으로 옮겼다. 이 건물은 청주에서 제일 비싼 건물인데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이라서 싸게 나왔다. 우리는 기획사 사무실이라고 하고 사무실을 얻었다. 이건물의 주인은 당시 민자당 재정위원의 건물 이었다. 경찰이 말했는지 어느 날 깡패들이 와서 사무실을 빼라고 했다. 나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러면 싸우자고 했다. 그랬더니 건물주가 타협이 들어왔다. 이사비용을 준다고 했다. 나는 굳이 싸울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이사비용을 받으러 그 사람 집으로 갔는데 어리어리 했다. 난생 처음 들어 가보는 부잣집 이었다.
그렇게 해서 성안길로 옮긴지 한 달이 안 되서 우암동으로 충북연합 사무실을 옮겼다. 전농 충북연맹과 함께 옮겼다. 시영이가 도 연맹 간사를 보았다. 선배들이 모두 떠나고 나는 충북연합 집행위원장과 청주민청 의장을 겸직했다. 나양이랑 둘이서 충북연합을 이끌었다. 청주민청 사무실도 우암동으로 옮겼다. 우암유리 2층이다. 사무실에 탁구대도 들여 놓았다. 그리고 풍물반을 운영해 사무실에 계란 판으로 방음 막도 만들었다. 회원들과 사진반도 만들었다.
93년 초 우암상가 아파트가 무너져 많은 인명피해가 났다. 나는 청주민청이 나서서 헌혈을 하자고 했다. 헌혈차가 와서 많은 회원들이 했다. 이금희는 임신 중에도 헌혈을 한다고 나섰다가 퇴짜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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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교시절 친구들 |
대선에서 지고 한청협 차원에서 평가회가 있었다. 대전에서였다. 한청협의 결정이 중간에 변질됐다. 한청협의 결정은 민주연합후보 지지였는데 한청협 본부에서 나온 대선 수첩에는 당선가능성 있는 야당후보를 밀자고 돼 있었다. 나중에 공식사과 받았다. 이범영 의장은 92년 통일투쟁 과정에서 구속됐다가 석방돼 다시 한청협 의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5월쯤인가? 전대협 1기 모임인 ‘계룡산악회’가 중턱산악회로 되버린 지 꽤 오래돼 청주 상당산성에서 1박으로 모임을 했다. 상당산성을 한 바퀴 도는 것으로 산행을 마무리 하고 청주민청 사무실에 와서 탁구를 쳤다. 이인영 당시 계주와 윤재영이 탁구를 잘 쳤다. 나도 좀 치는 편이다. 한 판하고 싶은 사람은 언제든지 붙자!
[나의 인생살이 48]
통일운동의 지도자 문익환 목사님이 서거 하시다.
93년은 참으로 허전 했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일어나야 했다. 아픔을 뒤로 하고 다시 일어나야 했다. 민청 회원들 중에는 군대 가는 회원도 생겼고, 새로운 회원들이 생기기도 했다. 충북연합 일은 정말로 힘들었다. 혼자서 책임져야 했다. 청주민청도 책임져야 했다. 93년 중순쯤으로 기억난다. 정치운동을 한다고 통일시대민주주의충북연대가 만들어졌다. 나는 민족민주운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떠났다. 민족민주운동의 정치세력화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 길은 험하고도 험했다. 아쉽기도 했지만 나는 그들이 성공하기를 바랐다. 솔직히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기존의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남북해외의 처한 상황이 다른데 연합적 운동을 하기에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문익환 목사님이 주창 하셨다. 나는 공감했다. 그래서 한청협 차원에서도 범민련 운동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통일운동체 건설에 나섰다.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94년 초 창립)가 그것이다. 한청협 이범영 의장은 청주에도 자주 오셨다. 청주에 와서 회원들과 술도 한잔 했다. 노래도 잘했다. 닭똥집이 벌벌벌 닭다리 달달달~~~잔업 철야 지친 몸 소주로 달랜다~~~~춤도 아주 웃기게 추었다. 그렇던 이범영 의장이 암에 걸렸단다. 왜 하나님은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 꼭 이런 시련을 주시는 걸까.....
93년은 정말 힘들고 어려웠던 시기였다. 대선패배는 엄청난 후과를 주었다. 아마도 민청회원들이 아니었으면 나는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부모님이 청주에 계시지 않았다면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상희가 없었으면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조국과 민족에 대한 신심이 없었다면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범영이 형이 암에 걸리고 청주에도 오셨다. 어허~~~참!!!
94년 1월 통일의 선구자 문익환 목사님이 서거 하셨다. 급사 하신 것이다. 너무도 슬펐다. 우리 민족이 어려울 때 꼭 민족의 지도자들이 서거 하신다. 우리 역사는 그렇게 만들어 졌나 보다. 청주에서 빈소를 차리고 조문객을 맞이했다. 상주노릇을 했다. 한신대 발인식에도 갔다. 김대중씨가 발인식에서 추도사를 했다. ‘민족의 지도자 문익환 목사님이 서거 하셨다’는 첫 마디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나는 통일운동과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을 열심히 하기로 정했다. 당시 김영삼 정부는 역사 바로 세우기를 정권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도구로 삼았다. 금융실명제도 도입 됐다. 93년을 지나면서 근태가 연합에 들어왔다. 그리고 얼마 후 나양이가 연합을 그만 두었다. 나는 할 수없이 우암동에 있던 충북연합 사무실을 없애고 청주민청 사무실의 한쪽 모퉁이를 충북연합 사무실로 쓰기로 했다.
우리는 통일운동에 열정을 다 했다. 청년학교도 꾸준히 열었다. 8.15 범민족 대회도 지역차원에서 열심히 준비 했다. 당연히 내가 집행위원장이 됐다. 돈이 없어 후원금 요청하러 다닐 때는 정말 눈물이 났다. 민청 사무실 유지하랴, 충북연합 사무실 유지하랴, 각종 행사비 마련하랴~~~ 내가 수완이 좋았나 보다.
어느 날 누군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박영호는 돈이 어디서 생겨서 저렇게 사는지 모르겠다. 경찰에서 나의 자금줄에 대해서 조사한다는 말도 들렸다. 별다른 거 없었다. 오만 원, 십만 원 주시는 쌈짓돈으로 했다. 내가 쓰는 돈이 없으니 가능했다. 저축할 일도 없고, 문화생활 할 일도 없고, 놀러 갈 일도 없고, 집안에 가져다 줘야할 일도 없고....오로지 민청과 충북연합을 위해서 일했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
49편으로 이어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