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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스북커 박영호의 ‘나의 인생살이’ 4막1장
  • 고성인터넷뉴스2013-05-16 오후 04:03:20

페이스북커 박영호의 나의 인생살이’ 41장이 완성돼 올랐다. 이제 박영호는 재야 운동에서 현실정치로 무대를 옮겼다. 그는 새로운 도전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준비되지 않았던 그의 정치도전은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인생 4막으로 시작하는 그의 인생살이를 따라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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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호의 한청협 동지들

 

인생 4- 운동에서 현실정치로! 역사를 바꿔라! 새로운 도전에 나서다.

 

 

[나의 인생살이 60]

 

현실정치에 참여 하다. 담배를 다시 물었다. 후회한다.

 

운동의 영역에서 현실정치로 참여하면서 나는 새삼 이 노래가 생각났다.

 

내 사랑 한반도

 

끈질기게도 피어라 백두에서 한라까지

척박하여도 피어라 핵무기의 그늘 아래도

허리 잘린 상처에도 피어나라 사랑아

내 사랑 사랑 사랑 한반도 내 사랑 한반도

결국 하나가 돼야 할 되고 말

내 고향은 한반도

 

눈부시게도 피어라 압록에서 섬진까지

억울하여도 피어라 양키의 군화발밑에도

허리 잘린 상처에도 피어나라 사랑아

내 사랑 사랑 사랑 한반도 내 사랑 한반도

결국 하나가 돼야 할 되고 말

내 고향은 한반도

내 사랑 사랑 사랑 한반도 내 사랑 한반도

 

99년 청년운동을 마치고 나는 3의 힘이라는 조직에 가입했다. 이 조직은 학생운동을 마치고 각계각층에 다양하게 펼쳐져 있던 소위 386 세대들이 장차 정당을 만들 것을 목표로 해 조직된 단체이다. 나는 이 조직의 33인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가 했다. 한국쳥년연맹이 새로운 청년운동과 정치조직 건설을 결정한 이후로 나는 청년연맹을 대표해서 가입한 것이다. 한편으로 나도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봤다.

 

하지만 이 조직은 얼마지 않아 유명무실 해졌다. 집권당인 새정치국민회의가 새로운 정당(새천년민주당)을 건설하기로 하고 이인영, 우상호, 오영식, 임종석 등 이 조직의 핵심들을 영입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고진화, 정태근 등은 한나라당으로 들어가 버렸다. 황당했다.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정치가 이런 거구나~~~

 

나는 더 이상 이 조직에 관여하지 않았다. 어차피 잘 될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997월 쯤 해서 서울 생활을 마무리 하고 충주 집으로 돌아왔다. 퇴원한 상현이랑 은서랑 집사람이랑 어떻게 해서든 살아보려고 한 것이다. 집사람은 공부하러 갔다. 우리가 살 길은 이것 밖에 없었다. 나도 빨리 자리를 잡아서 집안에 보탬이 돼야 했다.

 

상현이 분유 값에 장루팩 값, 기저귀 값, 은서 어린이집 값이며.....들어가는 돈이 한두 푼이 아니었다. 집사람 지방공무원 월급으로는 도무지 해결되지 않았다. 나는 상현이를 봐야했기 때문에 취직도 쉽지 않았다. 청주 어머니나 화천 장모님이 와 계셔야 하는데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충주에서는 일 꺼리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10월쯤 충주생활을 정리하고 청주로 이사했다. 더 이상 충주에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집사람이 지방공무원을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97년 봄쯤에 집사람이 청주 내수에서 충주로 출퇴근 하는 것이 힘들어 충주로 이사한지 28개월 만의 일이다. 그동안 충주에서 상현이도 낳았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충주도 낯선 도시라 집사람은 잘 적응 하지 못했다. 그리고 상현이가 서울대 병원에 입원하고 나는 한청협 일하느라 서울로 다니고.....집사람이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청주로 돌아와서 나는 일자리를 찾았다. 하지만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상현이를 간호해야 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배운 것이 도둑질 이라고 정치에 대한 관심은 계속 가지고 있었다. 나는 민족민주 세력의 정치세력화를 위해서는 혼자의 힘으로는 어려우니 일단 김대중 정부와 손을 잡고, 그리고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에 당풍운동을 해서 새로운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당 개조론 보다는 두꺼비 작전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두꺼비는 민청련의 상징 이었다. 뱀에게 잡혀 먹히고 거기서 부화해서 새끼를 낳는다는 것이다. 일단 들어가서 세력을 확장한 후 적정한 시점에 대중의 동의가 일어나면 당풍운동을 통해 새로운 정당을 만들거나 아니면 당권을 장악해 새로운 정치를 하자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나는 청주민청의 동지들과 상의했다. 그리고 나는 당에 함께 들어가자고 했다. 하지만 청주민청의 일부 동지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전화가 걸려왔다.

 

99년 가을쯤 김대중 대통령은 새로운 당을 건설하기로 하고 민주신당 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새정치국민회의와 합당해 새천년민주당을 만들려고 한 것이다. 나는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지만 10월쯤에 민주신당 사무처로 출근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이유인 즉 이러했다. 내가 그동안 재야운동을 열심히 했고, 전국적 조직도 운영해 봤으니 정당에 잘 어울릴 것이라고 했다. 누가 말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민주신당이 만들어지니 일단 거기에 들어가 보라고 했다. 나는 많은 고민을 했다. 이렇게 하려고 여태 운동했던가? 한편으로는 내가 그동안 생각해온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또한 상현이가 아프고 먹고 살 것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그래 일단은 먹고 살자!

 

전대협 1기 모임인 계룡산악회 모임이 10월에 서울에서 있었다. 나는 그날 엄청 울었다. 어디 먼 곳으로 시집가는 기분이었다. 다음날 아침에 친구들과 춘천으로 왔다. 낮술을 엄청 먹었다. 전화가 왔다. 오후 5시까지 민주신당 정책위원장 방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갔다. 정책위원장이라는 사람이 대뜸 하는 말이 나보고 자기소개를 하라고 했다. 속에서 확 치밀었다. ‘! 니보다는 잘 살았다!’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 참았다.

 

그렇게 해서 나는 얼떨결에 민주신당 준비위원회 사무처 직원이 됐다.

 

내가 맡은 일은 창당되는 당의 명칭과 정책공모에 관한 일이었다. 내 기억에는 당명은 2천여 개 이상이 응모를 했고, 정책은 수 백 가지가 넘었다. 나는 이것을 깔끔하게 분석해서 제출했다. 하지만 당명은 청와대에서 이미 만들어져 있었다. 새천년민주당!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새천년이라는 말과 민주당 이라는 말을 엄청 아끼셨다. 두 말 할 것도 없다. 수천 명이 대통령 한 사람의 아이디어를 이길 수 없었다. 나는 청주에서 서울 여의도로 출퇴근 했다. 아이들을 부모님 댁에 맡겨놓고 새벽에 출발해서 여의도로 와서 일하고 오후에는 다시 청주 집으로 가는 그런 강행군을 했다.

 

사무실에 나가니 몇몇 아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모두들 바빴다. 점심시간이 다가오면 모두 어디론가 갔다. 저녁이 되기 전에 모두가 나가 버렸다. 나는 혼자였다. 전대협 1기 친구인 재룡이가 당시에 새정치국민회의 당직자로 있어서 놀러오곤 했다. 하지만 아무도 놀아주지 않았다. 어느 날 건물 계단에 갔는데 거기서 일부의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는 담배를 하나 달라고 했다. 담배 피우면서 몇 마디 말을 붙여볼 심산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대학 졸업하고 끊었던 담배를 다시 물게 됐다. 10년 만의 일이다. 후회 한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내가 민주신당의 당직자기 된 것은 당시 재야에서 이창복, 이재정, 이인영 등의 사람들이 참여하면서 재야출신의 사람들을 일부 당직자로 채용하기로 했단다. 5명으로 할당됐는데....그중에 한 명이라는 것이다. 누구는 누구의 몫으로, 누구는 누구의 몫으로, 또 누구는 어느 조직의 몫으로...그렇게 배분된 모양이다. 김현(현 국회의원), 고영기, 김현배 등과 함께 입당했다. 나는 정책팀의 실무자로 배정 됐다. 위성부 선배가 팀장을 맡았다. 이원욱(현 국회의원) 선배랑 같이 일을 했다.

 

 

[나의 인생살이 61]

 

집권당 당직자가 되다. 기왕에 정치를 하려면 출마를 해야지~~~

 

새천년이 온다고 온 세상이 야단법석 이었다. 컴퓨터가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그래서 전 세계가 비상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민주신당은 얼마지 않아 당시 집권당이던 새정치국민회의와 합당을 했다. 그리고 2000120일 새천년민주당으로 새롭게 창당 됐다. 사무실은 국회 바로 앞의 기산빌딩 이었다. 9층 건물인가 되는데 그걸 전부 다 쓰는 것이었다.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사무실도 널찍하고 맨날 TV에서나 보던 정치인들을 볼 수 있었다. 하늘같다고 생각했던 국회의원들을 수시로 만날 수 있었다.

 

새천년민주당으로 되면서 모든 당직자들이 새롭게 구성 됐다. 우선 민주신당의 당직자들과 새정치국민회의... 소속의 당직자, 그리고 새롭게 들어온 사람들로 해서 사무처 직원들과 정책위 전문위원, 연구소, 그리고 국회직 등으로 발령이 났다. 나는 사무처로 됐다. 새롭게 당직자가 된 사람들은 나를 포함해 현배형, 창교형, 김현(현 국회의원), 영기, 영교(현 국회의원) 등 몇 명이 되지 않았다.

 

99년 겨울이 됐다. 나는 창당되고 나서 있을 4월 총선을 생각했다. 같이 운동하다 정당에 영입된 친구들이 출마를 한다고 했다. 나도 하고 싶어졌다.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출마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출마 준비를 위해 주말에는 청주로 내려갔다. 그리고 나는 후삼이 하고 상철이 하고 성운이를 불렀다. 나의 사정을 말했다.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가 결론이 나기 전에는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신신 당부 했다. 나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싫어한다.

 

내가 나서서 충청지역(충북, 대전, 충남)의 청년들 1천여 명의 서명을 받아 신당창당 지지선언을 했다. 청주에 있는 일부 사람들이 반대 했다. 그 사람들은 지금 정치를 하고 있다. 꼭 남이 무얼 하려고 하면 씹는다. 자기들이 무엇을 하기 전에 남이 하는 일에 대해 씹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싫어한다. 경쟁을 하려면 자기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내 놓고 해야 한다. 요즘 민주당이 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답답하다. 안철수를 왜 씹는지....자기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내 놓아야 한다. 대안이 없으면 지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2000년 처음으로 정치인으로써 출마를 고민했었다. 하지만 힘이 없었다. 곧 바로 나는 접었다. 그리고 나는 당직자로써 충실하기로 했다. 무엇보다 은서와 상현이, 그리고 부모님을 돌 봐야 했다. 난생 처음으로 월급을 받았다. 당시로 150만원 이었다. 통장에 돈이 들어오니 엄청 행복했다. 나는 그 돈으로 부모님과 아이들을 실컷 먹이고 싶었다.

 

당직이 배정될 때 쯤 해서 나는 이인영(현 국회의원)을 만났다. 인영이는 전대협 1기 의장으로 내가 학생운동, 재야운동, 새로운 청년운동을 할 때 함께 하던 동지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이인영을 18인의 창당준비위원 중 한명으로 영입했었다. 내가 전국연합 중앙 집행위원으로 일 할 때 의장을 하셨던 이창복 선생님도 창당준비위원이 되셨다.

 

그래서 나는 마포 서교호텔에서 인영이를 만나 기왕에 당직자가 되는데 나의 체면도 있으니 최소한 부국장급 이상으로 발령 내달라고 했다. 하지만 인영이는 나보고 당직을 맡지 말라고 했다. 호랑이가 아무리 배가 고파도 풀을 먹을 수는 없지 않느냐고 했다. 하지만 나는 당장 돈을 벌어야 했다. 집사람도 벌지 않고, 상현이는 수술을 수시로 해야 했고, 벌어놓은 돈은 하나도 없고....나는 좀 서운했다. 결국 나는 새천년민주당 첫 당직으로 국제협력국 협력부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1월에 새천년민주당 창당대회가 있었다. 나는 출입문 입구에서 창당대회 자료집을 나누어주는 역할을 맡았다. 사람들은 해방 후 첫 정권교체에다가 집권당이 새로 창당되고 나아가 창당대회에 김대중 대통령이 참석한다고 하니까 엄청 많이 몰렸다. 나는 거기서 정당의 힘을 보았다. 재야에서 죽으라고 노력 할 때 현실정치의 힘을 무시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는데 막상 현장에서 보니까 현실정치, 특히 집권당의 힘은 대단했다.

 

창당대회 자료집 이외에 당시에 창당선물로 시계를 나누어 주었다. 나는 이것을 정확하게 나누어 주려고 엄청 노력했다. 하지만 헛수고였다. 질서가 무너졌다. 집권당의 중앙대의원들의 모습이라고 보기에는 좀 거시기 했다. 그래서 나는 시계가 없다고 했다. 행사가 끝나고 시계가 1톤 트럭으로 한 차 분량이 남았다. 나는 그것을 지켜야 했다. 당직자를 찾는데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 시계를 현장에 있던 사람들한테 일부 나누어 주었다. 그러고도 남았다. 차를 불러서 반 트럭분량을 당으로 보내고 나머지는 내차에 실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선심 쓰듯이 뿌렸다. 사람들이 좋아했다.

 

행사가 끝나고 나는 한 가지 깨달았다. 정당의 행사는 시작 할 때 까지만 당직자가 필요하고 행사가 시작되면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끝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깨달았다. ~ 끝까지 있는 것이 아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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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가 자주 찾는 낚시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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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살이 62]

 

집사람이 교사가 됐다.

 

상현이는 수술하고 은서는 유아원 다니고 신랑은 돈을 벌지 않고.....병원비는 천정부지로 나가고 취향은 맞지 않고 충주에 아는 사람도 없고.....인생에 무슨 낙이 있었겠는가? 신랑은 살갑지도 못하고 동사무소 직원이라는 것이 매일 하는 등초본 발급하고 자신이 하고 싶었던 것은 선생님이고.....아마도 환장 했을 것이다. 양심과 개념으로 데모하는 남자가 좋아서 결혼 했건만....물론 자신의 의지가 있었다고 봐야지.....나를 사랑했으니까....어느 날 결심해 지방공무원을 그만두고 교사가 되고자 출전한 것이다. 신랑도 버리고....~~~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다.

 

그렇게 해서 집사람은 998월부터 교원임용고시를 준비해서 20002월 교원임용고시에 ...합격 했다는 것이었다. 90년 졸업하고 93년 초 부터 998월까지 공무원 생활하던 사람이 불과 6개월 공부를 해서 교원임용고시에 합격했단다. 꿈만 같았다. 참 머리도 좋구나 했다. 나는 운전면허 시험도 네 번 떨어졌는데......그렇게 해서 집사람은 20008월 강원도 철원의 동송에 있는 철원중학교에 첫 발령을 받았다. 도덕 선생님으로 말이다. 얼마나 설레었을까? 집사람은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고 한다. 이를 악물고 했단다. 이거 아니면 죽는다는 심정으로 공부했다고 했다. 신랑은 돈도 못 벌지, 상현이는 아프지 딸은 커가지.....아마도 이 사람의 마음에는 반드시 합격해야 한다는 일념만 있었을 것이다.

 

집사람은 8월에 발령을 받아 우선 학교 옆에 있는 조그만 가정집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살림을 합쳤다. 20012월 나는 9910월쯤 청주 모충동에 쌓아 두었던 살림을 거두어 철원으로 이사를 했다. 학교 관사에 짐을 풀었다. 흩어졌던 우리 가족이 16개월 만에 다시 뭉치게 됐다. 너무 좋았다.

 

철원은 내가 대학 2학년 때 전방교육을 할 때 가보고 처음 가보는 곳이었다. 전방입소는 6사단으로 갔다. 철원에 있을 때 어느 날 목욕하러 가는 길에 내가 입소했던 부대 앞을 지나가게 됐다. 감회가 새로웠다. 나는 군대를 가지 못했기 때문에 가끔 군대에 갔으면 어찌됐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물론 대학 다닐 때 양키의 용병교육이라고 거부했던 기억도 있지만 분단국가에서 태어나 분단의 아픔을 더 절실하게 느끼는데 는 군대복무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철원은 크게는 동송읍과 갈말읍(일명 신철원) 등으로 구성돼 있다. 철원읍은 지금의 노동당사가 있는 쪽인데 한국전쟁으로 파괴돼 철원의 중심이 되지 못했다. 동송은 우상호의 고향이란다. 나중에 알았다. 우상호의 책 촌놈에서 철원의 옛날 삶을 읽을 수 있었다.

 

우리는 가끔 아이들과 땅굴이며, 통일전망대로 구경 가기도 했다. 철원평야를 보면서, 철새를 보면서, 태봉국의 도읍지가 있다는 김일성 고지를 보면서 아이스크림 봉을 보면서, 백마고지를 보면서 아~~~분단의 아픔을 다시 느끼게 됐다. 철원에서 화천으로 가는 길 중에 마현리에서 상서면 산양리쪽으로 가다보면 민통선을 지나게 된다. 평온하다. 거기에도 사람들이 농사 짖고 편안하게 살고 있다. 전쟁만 없다면.....중간쯤에 통일전망대가 있는데 거기를 올라가보면 철원에서 금강산 쪽으로 가는 철길이 보인다. 지금도 검은 연기 휘날리며 철마가 달리는 모습이 상상된다.

 

집사람이 교사가 되면서 우리는 그나마 조금은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은서가 5살이고 상현이가 4살 되는 해였다. 교직원 관사는 방이 두 칸인데 평수로는 한 10 평정도 됐다. 집사람 학교는 걸어서 2분이면 됐다. 우리의 꿈의 거리 바로 학교 담벼락 옆에 있는 관사였다.

 

하지만 나는 철원 동송에서 여의도 까지 출퇴근 했다. 내가 출퇴근 하지 못할 때는 친구 재룡이네 자취방에서 기거했다. 재룡이도 어려웠지만 재룡이는 기꺼이 나를 거두어 주었다. 자기도 힘들지만 내가 힘들다고, 친구라고 나를 엄청 감싸 주었다. 둘이는 여러가지 면에서 비슷한 점이 있었다. 재룡이 아이도 장애가 있어서 우리는 가끔씩 술을 먹으면 껴안고 울기도 많이 했다. 그렇게 보낸 세월이 몇 년이 됐다. 이 글을 빌려 재룡이 한데 감사한다. 재룡이 건강하렴.....정말 고마웠다.

 

 

[나의 인생살이 63]

 

처음으로 국회의원 선거에 파견 나가다.

 

20004월 총선을 앞두고 2월 초쯤 나는 송파 을 지역구에 파견 나갔다. 처음 나가서 한 일은 우선 이 지역구에 총선에 출마할 사람들 현황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당시 국회의원이 새천년민주당의 김병태씨였고, 김성순 당시 송파구청장이 출마를 준비하고 있었다. 여타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별로 신통찮았다. 나는 이 사람들에 대해 현장실사를 했다. 그리고 보고서를 조직국에 제출 했다.

 

김성순씨가 공천을 받았다. 나는 열심히 도왔다. 지역 현황과 각 지지조직에 대한 파악, 당선가능성 등등을 파악해 중앙당 조직국의 보고서를 보내야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내가 당시에 파견자들 중에서 보고서를 제일 잘 썼다고 했다. 김성순씨는 당선 됐다. 송파구에서 당선되는 것이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는데 하여튼 당선 됐다. 이렇게 해서 나의 현실정치 데뷔전은 승리로 끝이 났다.

 

내가 국제협력국에 있을 때는 정말 웃겼다. 국장과 부국장이 날마다 싸웠다. 나는 회의시간에 이런 식으로 두 사람이 싸울거면 나는 회의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했다. 또 다른 한 명의 부장이 있었는데 이놈은 도통 사무실에 나오질 않았다. 컴퓨터도 못하고....나중에 이놈은 한화갑의원의 보좌관이 됐다. 하루는 사무실에 있는데 외국에서 전화가 왔다. 나는 영어를 잘 못한다. 그래서 무조건 Yes를 했다. 집권당에서 No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전화를 영어를 잘하는 국장한테 바꿔줬다.

 

정당에 처음 들어가니 참으로 허전했다. 내가 이러려고 여태껏 살아왔나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그래도 그동안은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이끌고 나가는 위치에 있었는데 이거는 실무자로써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결정은 지도부가 알아서 할 뿐이다. 하나의 소모품에 불과했다. 시키는 일만 하는....그리고 술 먹고....뭐하자는 건지 너무 한심했다. 나에 대해 실망했다.

 

2000410일 남북정상회담이 발표 됐다. 총선을 불과 3일 앞두고 였다. 정말 가슴이 벅찼다. 내가 88610일 남북학생회담 대표로 나섰던 일이 기억에 생생하다. 613일 부터 15일까지 역사적인 남북정삼회담이 평양에서 열렸다.

 

사실 첫 남북정삼회담은 94725일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 사이에 열리기로 돼 있었는데 김일성 주석이 78일 급서 하는 바람에 무산 됐다.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돼 다시 추진됐고 이것이 성사된 것이었다. 너무도 감격적인 일이었다. 나는 그 회담을 통해 이미 남북은 통일이 됐다고 생각했다. 남은 것은 그냥 서로 더 많이 교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정말 기뻤다.

 

총선이 끝나고 당 에서는 당직자들을 금강산에 보내 주었다. 처음으로 밟아보는 북녘 땅이다. 금강산으로 올라가는 입구에서 북쪽 안내원들을 만났다. 나는 내가 886.10 남북학생회담 대표라고 말했다. 잘 몰랐다. 그래서 전대협 1기고 임수경의 선배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이들이 나를 엄청 따랐다. 아마도 그들은 나 같은 사람을 처음 본 모양이다. 이들은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여러 가지 애기를 물어 봤다. 나는 이들한테 우리나라의 사정에 대해 당당하게 말해 주었다.

 

한편으로 북한 주민들의 삶아가는 모습을 보게 됐다. 우리나라의 70년대 초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경제가 무척 어려워 보였다. 북의 동포들이 어떠한 자부심을 가지고 사는지는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못살아도 민족적 자부심이나 깡다구 같은 것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9981118일 시작된 금강산 관광은 남북관계를 획기적으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됐다. 20087월 북한이 우리 민간인을 총격해 사망하는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멈췄다. 나는 희망한다. 하루 빨리 금강산 관광이 재개되기를 빈다.

 

남북정상회담이 성과 있게 마쳐지고 김대중 대통령이 귀국했다. 민화협은 이를 축하하기 위해 큰 행사를 준비했다. 광화문에서 행사를 했는데 내가 사회를 봤다. 그리고 행사 후 수만 명의 사람들과 함께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앞을 돌아 이순신 장군 동상을 거쳐 미대사관 앞으로 한 바퀴 도는 행사를 했는데 내가 그 대열을 이끌었다. 조국통일을 외치면서 그렇게 한바탕 춤판이 벌어졌다. 또한 727일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기 위한 행사로 전쟁기념관에서 공연이 있었는데 거기에서도 나는 사회를 봤다. 당시 가수로 이선희씨가 출연했다. 가까이서 보니까 예뻤다. 노래도 엄청 잘했다.

 

나는 대중들 앞에서 마이크 잡고 사회 보는 일을 아주 잘했다. 92년에는 대선을 앞두고 한청협이 주최가 돼 ‘4천만의 대합창이라는 전국순회 공연을 했는데 청주 공연 때도 내가 사회를 봤고, 93년 서울대 범민족대회에서도 한청협 문화행사의 사회도 내가 봤다. 재미있었다. 나를 캐스팅한 사람은 홍만희 선배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감사드린다.

 

내가 국제협력국에 있을 때 일이다. 서영훈 전 적십자회장이 당의 대표가 됐다. 어느 날 말레이시아에서 인권장관이 당 대표를 예방했다. 나는 국제협력국 협력부장의 자격으로 배석 했다. 그 자리에서 말레이시아 인권장관은 한국은 어떻게 부정부패와 전쟁하고 있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서영훈 대표가 정권이라는 것은 깨끗할 수많은 없다고 말했다. 정권이 깨끗하고 싶어도 이권이 있는 사람들이 그냥 놔두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니 절대를 바라지 말고 이해가 가는 선에서 잘 조절 하라고 했다. 현실 정치권력의 한계를 지적한 것이라 하겠다. 정권은 절대 깨끗할 수 없다. 다만 관리 할 뿐이다. 그리고 걸리면 일벌백계해야 한다. 이것도 일종의 포로효과다.

 

10월쯤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는다고 발표가 됐다. 그리고 1210일 역사적인 노벨 평화상 수상식이 있었다. 정말 좋았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노벨상을 받은 것도 좋았지만 한반도 평화를 위해 노력했다는 점이 평가돼 평화상을 받았다는 점이 특히 좋았다.

 

 

[나의 인생살이 64]

 

IMF 위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솔직히 몰랐다.

 

9711, 상현이가 태어날 때 쯤 해서 IMF가 발생했다. 어느 날 친구가 전화를 했다. 이거는 보통일이 아니다. 그러니 잘 대비해야 한다. 나는 솔직히 무슨 말인지 몰랐다. 일단 아들 수술이 눈앞에 있고 해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냥 좀 어렵겠거니...그리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인 줄 알았다. 돈 도 없으니 별로 잃을 것도 없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곧 나의 문제가 됐다. 전부 어려우니 아무도 도와주질 못했다. 매일 언론에서는 국가가 부도다, 달러가 38억 밖에 없다, 구조조정 한다. 달러가격이 폭등한다....나라를 살리려고 국민들이 금을 내다 팔아야 한다고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이런 와중에 나는 집권당에... 있었다. 당에 와서야 나는 심각성을 알았다. 역시 국가를 운영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더군다나 재야와 야권에 있다가 집권당에 오니까 정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라를 살리기 위해 불철주야 열심히 뛰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물론 나쁜 짓 한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이들 보다는 나라를 올바로 이끌려고 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우리 사회역시 나쁜 사람도 많지만 역시 올바른 사람들이 훨씬 많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는 바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과거의 나를 돌아본다면 나는 우리사회에 대해 어쩌면 부정적인 면을 더 크게 본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균형 잡힌 시각으로 세상을 보아야 한다.

 

은행이 문을 닫는다. 회사가 망하기 시작한다. 평생직장이 아니다. 비정규직이 늘어난다. 노숙자가 길거리를 덮는다. 자영업이 늘어난다. 복지가 요구된다. 파견근로자가 생긴다. 계약직이 늘어난다. 아웃소싱이 많다. 지하철 순환선이 북적인다. 신용불량자가 속출한다. 파고다공원에 사람들이 넘쳐난다. 점심 먹으러 길거리에 긴 줄이 생긴다. 반면에 달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룰루랄라 한다. 가진 사람들은 더욱 가진다. 재벌기업이 더 커진다. 공적자금이 투여된다. 도덕적 해이가 만연한다.

 

이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 경제를 재편해야 한다. 세제를 개편해야 한다. 국민들의 소비를 늘려야 한다. 카드가 넘쳐난다. 정말 국가를 경영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전문가들이 해야 하는 일이다. 불만은 많을 수 있지만 이를 해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예산을 편성해서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실직자들을 재취업시키기 위해 일자리를 늘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 각종 재교육을 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돈이 센다.

 

복지를 해야 하는데 복지전달체계가 확보되지 않아 복지사각지대가 만연한다. 카드를 써야하니 자영업자들이 카드 수수료로 소득이 줄어든다. 외국계 회사들이 줄줄이 들어온다. 대형 마트가 생겨난다. 동네 재래시장이 망하기 시작한다. 산업구조의 재편을 이루어야 한다. 기존의 생산시설을 개조해야 한다. IT, BT, CT, 금융, 서비스 등 새로운 성장동력 산업을 개발해서 발전시켜야 한다. 그래야 나라가 일어날 수 있다. 먹고 살 수 있다. 하지만 실업자들을 재교육해서 다시 취업시장에 내보내기에는 시간이 없다. 이태백, 사오정이 넘쳐난다. ~~~ 주여! 이 나라를 굽어 살피소서.

 

내가 997월쯤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청주로 내려간 이후 다시 10월쯤 중앙당에 출퇴근 하면서 나의 서울 생활은 다시 시작 됐다. 처음에는 청주로 출퇴근 했는데 점차로 여의도 부근의 목욕탕이나 찜질방을 전전했다. 막내 동생이 94년 귀국한 이래로 대방동에 살았는데 동생 집에서도 기거하고, 때로는 양재동 누나네 집에서도 기거 했다. 물론 재룡이 자취방에서도 기거했다.

 

2000년 가을이 돼 당직자 정기 인사이동이 있었다. 나는 국제협력국에서 정세분석국으로 발령이 났다. 정세분석국 일은 정말로 힘들었다. 당시에는 가판신문이 있었다. 가판신문이란 익일 배포될 신문인데 매일 저녁 8시경에 미리 배포돼 기사의 내용을 수정하거나 수위조절, 방어권 행사, 팩트 확인 등을 검증받기 위함이다. 물론 이렇게 미리 배포하면 일부에서는 메이저 신문들과 거래를 하기도 한다. 언론사와 언론 대상자들 간의 거래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부조리로 인해 얼마 후에 가판신문은 폐지됐다.

 

매일 저녁에 정치, 경제, 국제면 등을 분석하고, 각종 증권가 찌라시, 야당의 동향 등을 취합해 문제점과 대책을 써서 청와대, 총리실, 당 대표등 주요 인사들 집으로 팩스를 보냈다. 여기서 일 할 때는 내가 뭘 하는 느낌이 있었다. 대응방안을 써서 보냈는데 다음날 당의 지도부 회의에서 언급이 되면 나름대로 성취감을 느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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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살이 65]

 

정당의 꽃 이라고 하는 조직국에 발령이 났다.

 

2001년에는 조직국으로 발령이 났다. 내가 조직국에 발령 난 것에 대해 일부 사람들이 말을 했다. 박영호가 동교동에 줄을 서서 조직국으로 발령이 났단다. 하여튼 신기한 사람들이다. 동교동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좋았겠다. 어쩌면 이렇게도 말을 잘 만들어 내는지....나는 나중에 이 말을 누가 했는지 알아냈다. 하여튼 내가 뭘 하면 꼭 배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속적으로....니들이나 잘하세요.....

 

조직국의 일은 출장이 자주 있었다. 나는 대구·경북지역을 담당했다. 대구·경북의 27(?) 지구당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당무감사를 가거나 지방자치 선거 시에는 출마신청자들에 대해 사전지역조사 등을 나가는 일을 했다. 민주당이... 가장 어려운 지역인 것이다. 가보면 참으로 안타깝기도 했고 한심하기도 했다. 집권당의 지구당 위원장 이라는 사람들은 지구당 위원장 자리를 자기 출세의 교두보로 삼고 있었다. 윗선에 줄 대고 공공기관의 장으로 발령 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일부의 사람들은 당무감사가 시작된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출장가려고 당사 지하에서 차 시동을 걸면 벌써 전화가 온다.

 

당무감사를 통해 나는 상당수의 지구당 위원장을 부적격 판정해 보고 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자기 계파의 수장을 통해 다시 살아났다. 모두 다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민주당이 영남지역에서 어려운 것은 바로 이렇게 자기 스스로 지역구를 닦고 하는 것이 아니라 중앙당 계보를 통해 먹고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역시 계보의 수장들은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나 최고위원으로 되려고 이 사람들은 수시로 관리한다. 물론 열심히 하는 사람들도 있다. 소신껏 한다. 이런 사람들이 총선에서 떨어지면 바로 바꿔 버린다. 정당의 병폐다. 정말로 어려운 지역구에서 독립운동 하듯이 야당운동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이 사람들이 진정으로 민주당을 살리는 사람들이라고 본다.

 

2001년 나는 재룡이와 한양대학교 행정대학원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한다. 정당에 당직자로 오래 있기보다는 공부를 해서 나중에 써먹으려고 한 것이다. 당시 한양대학교에서는 민주화 운동을 한 사람들에 대해서 사회적 공헌자라 해 등록금도 반으로 해주었다. 1학기는 열심히 공부 했다. 2학기를 마칠 때 쯤 해서 당 에서는 대통령 선거를 위해 엄청나게 룰 싸움이 있었다. 그래서 출장도 잦았다.

 

출장을 간 사이에 기말고사가 치러진 것이다. 시험을 보지 못해서 교수님께 사정을 말씀 드리고 리포트로 대체할 수 없냐고 했더니 안 된다고 했다. F가 두 과목이나 나왔다. 다음 학기에는 대선도 있고 해서 결국은 3학기 째는 등록을 하지 못했다. 아쉽다. 공부는 때가 있는 법인데 나는 기회를 놓쳤다. 사실 내가 사회복지학과를 선택한 것은 나중에 국회의원이 되면 보건복지위원회에서 일하고 싶어서였다. 이미 우리사회가 복지체제로 넘어가고 있었기에 사회복지를 모르고서는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나아가 통일이 된다고 해도 역시 복지가 중요한 영역이기 때문이었다.

 

겨울 어느 날이었다. 대선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조직국은 바쁘게 돌아갔다. 휴일을 마치고 월요일 아침 일찍 출근하라는 전화가 왔다. 철원 동송에서 서울 여의도로 출근하는 길은 몇 가지가 있었다. 우선 대마리로 해서 신탄리, 전곡, 연천, 동두천, 의정부로 해서 가는 길이 있고, 전곡에서 적성, 문산을 거쳐 자유로를 타고 가는 길이 있고, 동송에서 운천을 거쳐 포천으로 해서 의정부로 가는 길이 있다.

 

나는 운천, 포천, 의정부 행을 택했다. 열심히 달리면 2시간 40분이면 도착할 수 있었다. 레이싱이다. 그런데 새벽에 일어나니 눈이 엄청 왔다. 나는 당시 카니발을 타고 다녔다. 괜찮겠지 하고 나왔다. 그런데 운천 쯤 오는데 차가 시동이 꺼지는 것이다. 아마도 새벽 5시쯤이었을 것이다. 다니는 차도 하나 없었다. 추워 죽는 줄 알았다.

 

보험회사에 긴급출동을 요청 했는데 차가 오지 않는다. 오도 가도 못하고 꼬박 날이 밝아오기를 기다렸다. 결국 점심때 사무실에 도착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잠이나 실컷 자는 건데.....나는 철원에서 여의도로 출근 할 때 가끔 늦으면 군사훈련 때문에 탱크가 출동해서 도로가 막혀서 늦었다고 둘러대기도 했는데 이날은 정말 얼어 죽는 줄 알았다.

 

 

[나의 인생살이 66]

 

노사모를 만나다.

 

2001년 겨울 어느 날 이었다. 누가 나를 보자고 했다. 자기가 이인제 후보 일을 하는데 나보고 같이 하자고 했다. 나는 두 가지 이유로 거부했다. 첫째는 노동관이 뚜렷치 않고, 둘째는 철새다. 그래서 나는 같이 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그 사람이 이인제 후보의 주변에서 얼쩡대는 사람인줄 알았는데 실권자였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2002년 드디어 새해가 밝았다. 당에서는 대선후보 선출을 위한 중요한 논의를 시작했다. 룰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당내에서는 갑론을박이 시작된 것이었다. 당시 지방선거가 6월에 있었다. 그래서 대선 후보를 6월 지방선거 이전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이후로 할 것인가를 놓고 충돌했다. 결국은 6월 이전으로 하기로 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아들들이 비리로 난리가 났기 때문에 대선 후보를 빨리 선출해 지방선거를 돌파하고 후보 중심으로 난국을 풀어가자는 입장에 우세했던 것이다.

 

후보 선출을 위한 룰은 당원, 대의원 선거인단 35천명과 국민참여(200만 명 참여)로 모집된 사람들 중에 35천명을 랜덤으로 선출해서 총 7만 명으로 하기로 했다. 지역과 나이와 남여비율을 정했다. 조직국이 이 일을 하는 담당부서가 됐다. 나와 선애누나, 지금은 고인이 된 현무 등이 정말로 열심히 했다. 모든 지역에서 올라온 명단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꼼꼼히 검색했다. 조금만 틀려도 다시 해오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선거인단 명부가 완성이 됐다.

 

경선이 시작됐다. 노무현 후보 쪽에서 일하는 선배가 왔다. 충북에 일할 사람이 없으니 사람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나는 후삼이를 소개시켜 주었다. 후삼이는 처음에는 거부했는데 나중에 한 번 더 만나서 부탁했더니 하겠다고 했다. 엄청 열심히 했다.

 

아름다운 꼴찌 김근태 후보가 제일먼저 사퇴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인제 후보 쪽에서 음모론이 나오기 시작했다. 청와대가 노무현 후보를 돕는다는 주장이었다. 우리는 음모에 관심을 가졌다. 론은 관심이 없었다. 웃겼다. 재룡이와 상모가 공명선거감시단원 이었는데 울산에서 이인제 후보 쪽 사람이 돈을 뿌리는 것을 잡기도 했다.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청주대회가 다가왔다. 나는 대구·경북 담당이라 청주대회 이후에 있을 행사를 책임지면 됐는데 청주출신이라 현장에 갔다. 입장권을 나누어주는 일을 맡았다. 투표권이 없는 사람들이 들어가고 싶어 했다. 그래서 당에서는 제한적으로 입장권을 배부했다. 그런데 사고가 났다. 친구가 걸렸다. 노사모 쪽 사람들에게 입장권을 많이 준 것을 이인제 후보 쪽이 미행을 해서 잡은 것이다. 그날 친구는 박살이 났다. 나는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반쯤 작살난 친구를 데리고 사당동에서 병원하는 친구네 병원에 입원시켰다.

 

매주말 마다 민주당 경선을 구경하는 것이 낙이 됐다.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김영배 선관위원장이 발표 할 때 노무현 후보 0000, 이인제 후보 0000.....극적인 역전드라마가 쓰이고 있었다.

 

결국 노무현 후보가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로 당선됐다. 당선되고 켐프를 짜는데 후삼이가 배제 됐다. 나는 비서실에 가서 항의했다. 충북에서 열심히 한 후삼이를 왜 켐프에 안 쓰냐고....그렇게 해서 후삼이는 켐프에 들어가게 됐다.

 

6월 들어 지방선거가 있었다. 민주당이 박살났다. 당연히 노무현 후보에게 책임이 돌아왔다. 7월 중순쯤이었다. 8월에 있을 국회의원 보궐선거를 앞두고 조직국에서는 지역실사를 내려 보냈다. 나는 상모하고 군산을 맡았다. 김옥두 사무총장이 파견자들을 불렀다. 불편부당하게 조사하라고 했다. 당연히 그래야지.....회의가 끝나고 사무총장이 나와 상모는 남으라고 했다. 군산을 특히 잘 파악하라고 했다. 일종의 압력이었다.

 

분당에서 떨어졌던 강봉균씨가 군산으로 지역구를 바꾸면서 함운경 등과 공천경쟁을 하고 있었다. 당시 공천심사위원장이 지금은 고인이 된 민주주의자 김근태 선배님 이셨다. 우리는 열심히 조사해 함운경이 가장 좋다고 보고서를 올렸다. 하지만 공천은 강봉균으로 났다. 나는 그러려면 뭐 하러 실사하냐고 속으로 나불 그렸다. 김근태 선배님도 밀린 모양이다.

 

200264! 우리는 잊지 못하는 날이다. 한국과 폴란드의 월드컵 예선전 첫 경기가 열리는 날이다. 나는 이날 6.13 지방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나온 강북구의 박겸수 후보 사무실을 방문했다. 거기서 진구랑 만나서 축구를 봤다. 다방에서.....사람들이 길거리에 하나도 없었다. 나는 축구를 엄청 좋아 한다. 우리가 20으로 이겼다. 정말 좋았다. 그리고 미국과 비기고, 포르투갈을 이겼다.

 

그로부터 나는 우리나라 경기가 있는 날이면 광화문으로 나갔다. 미국과의 경기가 있는 날에는 비롤 홀딱 맞으며 후삼이 하고 광화문에서 응원 했다. 대한민국은 엄청난 나라다. 나는 시청 앞에서 경기를 보고 종로바닥에서 그렇게 멋지게 노는 것을 보면서 다이나믹 코라아를 실감했다. 나중에 2008년 촛불행사가 아마도 이때를 본받지 않았나 싶다.

 

8월에는 국회의원 보궐선거가 있었다. 나는 인천서구 강화 을 지역구에 동근이 형을 도우러 갔다. 7월 말쯤 이었다. 99년 나와 같이 KYC 공동준비위원장을 했던 신동근 선배가 인천서구 강화 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공천장을 받고 아직 잉크도 마르지 않은 상태로 나한테 전화를 했다. 같이 가서 선거를 도와달라고 했다. 나는 조직국에 보고하고 즉시 동근이 형이랑 강화로 갔다. 당시는 박용호 의원이 선거법 위반으로 낙마한 상태였다.

 

개고생을 했다. 거기에서 노사모 회원들을 만났다. 정말 열심히 돕고 있었다. 당시 동근이형이나 나는 노사모 온라인 회원이었다. 노무현 후보도 와서 도왔다. 하지만 동근이 형은 선거에서 졌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내가 만난 노사모 회원들은 참으로 겸손했다. 하지만 이름을 부를 때 아이디명으로 불렀다. 꼭 가명을 쓰는 것 같았다. 그리고 상당히 주관적인 언사들은 많이 썼다. 정치 공학적 분석을 할 때는 박사급이었다. 이들은 신념에 차 있었다. 하여튼 이 사람들이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열심히 한 것은 사실이다.

 

 

[나의 인생살이 67]

 

후보를 흔드네....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다.

 

6월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대패하면서 노무현 후보에 대해 책임지고 물러나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사실 노무현 후보는 지방선거 승리를 장담하면서 후보직을 걸겠다고 한 상태였다. 하지만 후보직을 유지하니까 당연히 일부에서 흔든 것이다. 김영배라는 사람은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고 설렁탕 한 그릇 못 먹었다며 서운한 감정을 노골적으로 표하기도 했다.

 

8월 보궐선거 이후에 나는 새로운 당직 발령을 받았다. 정책위원회 심의위원으로 발령이 났다. 그리고는 직능국 부장으로 파견됐다. 한화갑씨가 당 대표를 맡고 있었는데 후보한테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원래 당헌에는 대통령 후보가 되면 당의 모든 권한이 후보에게로 가도록 돼 있었다. 하지만 ...한화갑씨는 당의 재정이나 인사권 등을 후보에게 주지 않았다. 흔들고 있었다. 하도 당 지도부가 후보를 흔들어서 곧 떨어질 것 같았다. 하루는 당직자들을 모아놓고 노무현 후보를 모셨다. 그 자리에서 일부의 당직자들은 지방선거 책임론을 제기하면서 거취를 논하기도 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노무현 다움을 보여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20028월 쯤 해서 개혁국민정당이 창당 됐다. 김원웅, 유시민, 유기홍 등이 주도가 됐다. 한청협 회원이었던 동지들이 참여하기 시작했다. 김태년(현 국회의원)이는 중앙위원장이 되기도 했다. 개혁당에는 아는 후배들이 당직자로 엄청 많았다.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 왔다. 민주당에서 하도 노무현 후보를 흔드니까 유시민씨가 화염병을 들고 민주당으로 쳐들어가자며 호위병을 자처했다. 결국 후보를 지켰다.

 

선대위가 구성되고 나는 선대위 조직본부로 편재됐고 충북담당 부장으로 퍄견됐다. 당시 상현이는 수술 후에 청주 어머니 댁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이놈이 노무현 후보 로고송을 틀어주면 엄청 좋아했다.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했다. 아마도 상현이의 응원으로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이 됐는지도 모른다.

 

충북에 내려가니까 청주상당구의 홍재형 의원 쪽은 이인제 후보를 밀었기 때문에 열심히 하지 않고 있었다. 곧 탈당한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후보등록이 시작되면서 선거운동이 시작됐다. 그런데 선거사무소 등록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일단 나를 선거연락소장으로 해서 선관위에 등록을 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이미 상대방 이회창 후보 쪽은 어깨띠를 두르고 시내에서 선거운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미칠 지경이었다. 그날 저녁에 홍재형 의원은 선거사무소를 개설 했다. 그렇게 해서 하루 늦게 청주 상당구는 선거운동을 했다. 충주로 제천으로 열심히 돌아 다녔다.

 

선거가 막바지에 이르러 중앙당에서 돈이 8천만 원이 내 통장으로 입금 됐다. 그걸 각 지구당에 천만 원씩 배부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 돈을 모두 통장으로 배부 했다. 그랬더니 나중에 대검 중수부에서 엽서가 왔다. 니 통장을 내가 봤다고.....이것이 대선자금 수사였던 것이다. 중앙당 당직자는 당에서 시키면 해야 했다. 물론 나는 나쁜 짓인 줄 알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시켜서 하는 일을 하기 싫었다. 나의 자의적 판단에 의해서 그것이 나쁜 짓이던 좋은 일이던 하는 것을 좋아 한다. 내가 당직자를 그만둔 이유이기도 하다.

 

투표 당일이었다. 당시 아버지의 주소는 막내 동생의 집인 서울 대방동으로 돼 있었다. 나는 오후 2시쯤 아버지를 모시고 서울로 향했다. 한 표라도 절대 포기하면 안 되다. 대방동에 오니까 젊은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나는 속으로 당선 됐구나 했다. 아버지는 투표를 마치고 버스로 다시 청주로 내려 가셨다. 나는 당사로 향했다. 당시 조직국 사무실은 3충에 있었다. 오후 5시쯤 해서 방송사 출구조사 현황이 당직자들한테 통보됐다. 이기고 있었다. 나는 사무실에서 꽃가루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6시 출구조사가 발표됐는데 승리하는 걸로 나왔다. 우리는 사무실에서 꽃가루를 뿌렸다.

 

그 장면이 TV에 생중계 되고 있었다.

 

 

[나의 인생살이 68]

 

중앙당 사무직당직자협의회 회장이 되다.

 

노무현 후보가 당선 됐다. 정권 재창출이다. 너무 좋았다. 당선 후 선대위 실무자 전원이 양평의 한 리조트로 연수회를 갔다. 거기서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인사 청탁을 하면 패가망신을 하게 해 주겠다고 했다. 속이 시원했다. 그래 멋지게 해라! 그런데 선대위 실무자들에 대해서 다면평가를 한단다. 그날 연수회에서 선대위 각 기구마다 속한 부서별로 다면평가를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조직본부에 있어서 충북에 일찍 내려갔는데 누가 누군지 아무도 모르는데 어떻게 평가를 한다는 것인가? 당시 선대위 실무자들이 한 500여명이 됐는데....

 

민주당 중앙당 당직자들은 서로를 얼추 알아도 노사모니 하면서 당 밖에서 들어온 사람들은 알 길이 없었다. 그런데 평가를 하란다. 이거는 사기다 이렇게 생각했다. 당시 당 밖에서 들어온 선대위 실무자들은 민주당 당직자들에 대해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당직자들은 모두 노무현 후보를 흔드는 사람으로 보거나 아니면 자신들이 노무현 후보를 당선시키는데 더 큰 공을 세운 것처럼....소위 완장 찬 사람들 같이 행동했다. 그렇게 해서 지내들끼리 높은 점수를 주고....짜고 치는 고스톱을 하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그래 시발 놈들아 니들이 다 해쳐먹어라!!!! 나는 그날 저녁 재룡이와 일부 친구들과 함께 리조트에서 나와 버렸다. 그리고 술을 실컷 먹었다.

 

대통령 취임식 날에 아버지 어머니 이모 삼촌까지 초대했다. 얼마나 바라던 바인가? 너무도 좋아 하셨다. 영호 네가 고생을 많이 하더니 이제야 빛을 보는구나~~~~하지만 빛 좋은 개살구였다. 속으로는 끓고 있었다. 저놈들끼리 다 해먹고 있어요!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어디에다가도 말 할 때가 없었다. 멘붕 중에는 당선된 사람들의 멘붕도 있다. 진 사람들이야 어차피 졌으니 할 일이 없을 것이고 이긴 사람들 중에 엉뚱한 놈들이 공과를 낚아 채가면 아주 환장한다. 물론 자기 나름대로는 열심히 했다고 하지만 듣보잡들이 청와대에 가거나 공과를 나누어 처먹을 때는 환장한다. 나는 이걸 승리 멘붕이라고 부른다. 요즘 박근혜 주변 사람들이 이걸 겪고 있는 모양이다.

 

대통령 당선 이후 새천년민주당은 당권투쟁이 격화 됐다. 소위 천,,정 이라는 사람들이 당권을 장악하기 위해 투쟁에 나선 것이다. 당이 이쯤 되면서 당직자들 역시 불안해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장 직장이 없어지는 것이니 얼마나 가슴 졸였겠는가? 2월 초가 되면서 당의 국장급들이 당직자협의를 만들자고 나섰다. 자신들의 신변과 당의 미래가 걱정이 됐던 모양이다. 한편으로 이들의 움직임에 대해 부장 급들은 반발했다. 솔직히 말해서 니들은 이제 그만 다른 자리를 알아봐라 였던 것이다.

 

김대중 정부 때 출마를 하던지 했었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리고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논리도 있었다. 일종의 계보 싸움인 것이다. 한편으로는 당직자 조직을 노조로 할지. 협의회로 만들지도 논란이 됐다. 사실 민주당의 중앙당 당직자는 일반적 공채가 아니고 당의 유력정치인들에 의해서 나눠 먹기식의 책상 배분이 많았다. 이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민주통합당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민주당이 성공하려면 이러한 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본다. 사실 새누리당이 이 부분에 있어서는 훨씬 선진적인 정당인 것 같다.

 

양측은 서로 협상해서 결국은 노조 대신 협의회를 만들기로 했다. 중앙당 당직자는 정치인이다. 그러니 노조는 맞지 않는다는 논리였다. 지금은 중앙당 당직자들이 노조를 만들었다. 정치인이 아니라 생계형 노동자인 것이다. 그렇게 해서 사무당직자협의회 선관위가 구성되고 선거전에 돌입했다. 동료들은 나보고 출마하라고 했다. 나는 결심했다. 그리고 상대는 국장인 사람이 출마했다. 나는 당시에 부장이었다.

 

5월쯤에 약 250여명의 투표권자중에 80% 정도가 투표했다. 사무처, 정책위, 원내 등의 당직자 등 많이 참여 했다. 내가 76%의 압도적 지지로 당선 됐다. 여의도 바닥에 이변이 일어났다. 재미있는 것은 여의도 정치권에서 2/3이상의 지지를 얻은 사람이 두 명 있는데 하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직선거에서 얻은 것이고 그 뒤에 내가 얻은 득표란다. 재미있는 말이다. 내가 당선이 되니까 개혁당의 당직자들이 만세를 불렀단다. 왠지 나는 모른다.

 

내가 집권당인 새천년민주당의 초대 사무직당직자협의회 회장이 됐다. 여전히 국장급들은 나를 인정하지 않았다. 월급에서 회비를 공제하기로 했는데 이들은 거부하기도 했다. 부회장에 송옥주 부장(현 민주당 국장)을 임명하고 조직을 정비했다. 사무실을 당사 9층에 마련했다. 당 에서는 별로 좋아 하지 않았다. 개소식을 하는데 사무총장만 참석 했다.

 

협의회가 발족됐지만 당직자들의 마음은 협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정치적 이해와 계파간의 결속력에 의해서 움직여졌다. 정치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정당의 당직자들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노조운동의 한계를 보는 것과 같았다. 노동조합이 임투 할 때와 정치투쟁을 할 때와의 차이를 보면 알 수 있다. 민주노총이 과거 민노당을 배타적으로 지지 할 때도 민노총의 조합원들의 숫자 보다 민노당 후보가 얻은 표가 적었다는 사실을 보면 정치투표는 밥그릇 위에 있는 것이 확실 하다. 그러니 정치를 업으로 하는 정당의 당직자들이니 오죽 했겠는가?

 

당직자 협의회는 그야 말로 월급이나 당직자들의 권익만 요구하는 선에서 그 이상 할 일이 없었다. 한번은 정책위원회에서 여성 전문위원을 뽑는데 당시 정책위 의장이 정세균 의원이었다. 사무처 당직자 중에서 한명이 응시를 했다. 그리고 회장인 나보고 정책위 의장을 만나달라고 했다. 나는 만났다. 사무처 당직자들이 고생이 많으니 전문위원 선발 할 때 고려 해달라고 했다. 아마도 선발 됐던 거 같다.

 

열린우리당은 어디로 가지? 4대 개혁입법 관련해서 당이 혼란스러웠다. 대통령도 갈피를 잡지 못했다. 기득권 세력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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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살이 69]

 

8.15 민족대회 참가를 위해 평양을 방문하다 !

 

새천년민주당은 혼란에 빠졌다. 사무직당직자협의회 회장 이지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민주당의 개혁을 바라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당직자들이 나서서 할 일은 아니었다. 당무위원회가 당원들의 의사를 모아서 결정하도록 하면 되는 것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통일에 대해 많은 일을 하셨다. 그동안 박정희, 전두환 정권으로 부터 빨갱이라고 매도 당해온 과거를 털어버리기라고 하듯이 남과 북은 엄청난 속도로 화해의 분위기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생태는 그동안 내가 재야에서 통일운동을 해온 십 수 년의 시간보다도 압축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미 통일은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을 거치면서 남과 북은 엄청나게 멀어지고 있다. 새벽이 오기 전이 가장 어둡다는 말이 있지만 현재의 남북관계를 보면 암흑이 아니라 전쟁의 구렁텅이로 달려가고 있는 것 같다. 미국이 있고, 중국이 있어서 더욱 꼬이고 있다. 민족의 지혜가 절실히 필요한 시기다.

 

20038월 나는 2차 민족대회 참석을 위해 평양을 방문했다. 태어나서 처음이다. 많이 떨렸다. 북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까? 많이 궁금했다. 또한 이들은 통일을 위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우리가 1999년 만든 한청협 동지회는 민화협(민족화해협력 범국민협의회)의 가맹단체가 됐다. 나는 민화협의 정책위원으로 활동 하고 있었다. 나는 한청협 동지회 대표로 8.15 민족대회 대표단에 합류 했다. 특별 비행기를 탔다. 3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출발했다. 인천공항을 출발해 비행기가 북녘 땅에 들어섰다는 기내 방송을 들었을 때는 이제 정말로 평양에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행기 안에서 창문으로 북한 땅을 내려다보았다.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개성을 지나 평양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북녘 땅은 평화 그 자체였다. 서해안 쪽은 정말로 대 평야였다. 개성에서 평양으로 가는 고속도로가 보였다. 차가 하나도 없었다. 북한의 경제 사정을 보는 거 같았다.

 

평양에 도착했다. 평양 순안비행장은 조그마했다. 조용했다. 국제공항이라고는 도저히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어느 시골 비행장 같았다. 내리니 많은 북한 주민들이 꽃을 흔들며 반겨 주었다. 그동안 TV에서 보던 그런 꽃 이었다. 조화였다. 우리는 북측이 마련한 버스를 타고 평양시내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평양 외곽을 보았다. 너무도 초라했다. 거리에 차가 거의 없었다.

 

우리를 실은 버스가 달리는 반대편에서 차가 없으니 중앙선을 넘어서 역주행 하기도 했다. 버스는 평양 시내를 거쳐 양각도 호텔에 우리를 내려 주었다. 양각도는 우리나라의 여의도 같은 곳이다. 대동강이 흐르는데 중간에 토사가 쌓여 섬을 이룬 곳이다. 이곳에서는 평양 시내가 모두 보였다. 저녁에는 시내가 어두컴컴했다. 전력난이 심한 모양 이었다.

 

몇 가지 행사를 했다. 한번은 점심을 먹고 담배를 피려고 나왔는데 북쪽 사람들이 밖에서 서성대고 있었다. 나는 그들과 대화를 시도 했다. 내가 누구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솔직하게 대화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통일에 대해서, 주한미군의 주둔에 대해서 말했다. 이들은 수긍하는 눈치였다. 이미 6.15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통일 후에도 주한미군의 주둔에 대해 일정한 양해가 있었기 때문 이었던 거 같았다. 평양의 지하철도 타 보았다. 정말로 지하 100M에 있었다. 이들은 전쟁에 대비해서 그렇게 만들었다고 했다.

 

평양 시내를 버스타고 가는데 이상한 나라에 온 기분이었다. 우리하고 사는 방식이 많이 달랐다. 하지만 평온해 보였다. 부모들이 어린아이들과 손잡고 거니는 것도 보았고 대동강 주변에서 낚시하는 모습도 보았다. 인민문화궁전에서 악기를 다루는 아이들도 보았고 컴퓨터 프로그래밍 하는 사람들도 보았다. 민족대회가 열리는 장소에서 나는 해외에서 온 동포들도 만났다. 내가 94년 일본 갔을 때 통역해주던 재일 한청의 사람들도 와 있었다. 반가웠다.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나는 그냥 여행 온 기분이었다. 어떠한 긴장감도 없었다. 그들이 아무리 북한체제를 설명해도 별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삶의 방식이 다르고 생각하는 것이 달랐기 때문이다. 나는 다만 전쟁 없이 이렇게 서로 왕래하면서 서서히 통일의 길로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들도 그들 나름의 삶의 방식이 있을 것이다. 이것을 우리에게 강요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평양에서 1주일 정도의 행사를 마치고 우리는 다시 평양을 떠났다. 내가 비행기를 탈 때쯤 해서 나를 안내하던 사람이 명함을 한줌 주었다. 나보고 가서 주변사람한테 나눠주라고 부탁했다. 나는 뿌리치지 않았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구나 정도로 말았다. 그리고 비행기에서 내릴 때 나는 그 명함을 비행기에 두고 내렸다. 명함에는 자신들이 운영하는 인터넷 사이트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자신들을 알리려고 무척이나 애쓰는 모습 이었다. 나는 방문한 사람한테 자신들을 알리려고 하는 정도로 보고 뿌리치지 않았다. 그걸 뿌리치는 것이 좀스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비행기에서 가지고 내릴 수 는 없었다. 국가보안법 위반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그냥 그렇게 담담하게 그들과 헤어 졌다.

 

어쩌면 통일은 상당히 먼 일인지도 모른다. 경제구조가 다르고 정치체제가 다르다. 더군다나 지금은 북이 핵을 가지고 있다. 엄청난 군사력이 양측을 지탱하고 있다. 그러니 생각해 보자! 결과적으로 통일은 하나의 체제, 하나의 국가로 가는 것이지만 지금 그걸 목표로 통일을 시도한다면 결론은 파멸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남북은 이미 상대방의 체제나 내정간섭을 하지 않기로 여러 가지 공동의 성명이나 합의를 한 바 있다. 그런데 서로는 내정간섭을 하고 있다. 보편적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한편으로 북한은 우리에게 포탄을 퍼붓기도 하고.....인간 사회에서 보편이란 힘 있는 사람들이 표준화 하려는 것과 같다. 그래야 물건을 팔아먹을 수 있고 그것이 힘 있는 사람들의 삶을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의 삶을 표준화 하려는 것에 대해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 삶은 다양하게 누리는 것이 맞다. 자신에 맞게 말이다. 다만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야 한다. 내가 잘하다 보면 다른 사람들이 따라 올 수도 있고....나는 그것이 맞다고 본다. 남을 존중하고 존경할 점이 있으면 존경하고 그리고 따라 배울 수도 있고......

 

인생은 그런 것이다.

 

 

[나의 인생살이 70]

 

본격적인 당권투쟁이 벌어졌다.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됐으니 당을 새롭게 만들자는 논리가 당연히 나왔다. 천신정(천정배, 신기남, 정동영)으로 대표되는 사람들이 주도 했다. 당헌개정을 통해 당을 국민참여형으로 만들자는 논리였다. 이렇게 되면 당권이 자연스럽게 개혁파들한테로 넘어오는 것이었다.

 

20034월 국회의원 보궐선거가 있었다. 경기도 고양시에 당시 개혁국민정당의 유시민씨가 후보로 나섰다. 민주당에서는 후보를 내지 않았다. 나는 의정부로 파견 나갔다. 의정부 선거를 지원하면서 틈틈이 고양으로 나가서 지원도 했다. 유시민씨는 당선 됐고 의정부는 낙선했다.

 

유시민씨가 당선되고 국회 등원하는 날 한바탕 소동이 있었다. 소위 빽바지 논란이었다. 유시민의원...이 관행을 깨고 캐주얼 복장으로 국회의원 선서를 한 것이다. 이를 두고 당시 국회의원들이 난리를 쳤다. 하지만 그 뒤로 강기갑 의원은 한복을 입었고, 어떤 민노당 의원들은 작업복 차림으로 등원하기도 했다. 관행은 깨면 되는 것이다.

 

여름이 지나면서 당은 어수선 했다. 정대철의원이 대표로 있었다. 새로운 당으로 거듭나기 위한 당헌 개정논의가 시작 됐다. 하지만 구 당권파들의 저항이 격화 됐다. 당무위원회의장에서 일부의 부위원장들이 런닝셔츠 바람으로 난리를 쳤다. 어떤 사람은 이미경 의원의 머리카락을 잡아 당겼다. 일부의 사무처 국장들은 당무회의장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안건 통과를 가로 막았다. 정대철 대표가 머뭇거렸다.

 

여러 가지 폭력이 난무한 가운데 당은 더 이상 하나로 될 수 가 없었다. 양지탕 건물에 신당 창당을 위한 사무실이 차려졌다. 나는 사무직당직자협의회 회장으로써 이 사건에 개입하지 않았다. 당직자들의 개입은 폭력에 폭력이 더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미 대세는 형성됐다.

 

20039월 말쯤 노무현 대통령이 민주당을 탈당한다고 선언 했다. 새천년민주당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노무현 대통령은 당선되는 날 당시 개혁당 사무실에 들러서 여러분과 같이 정당을 하고 싶다고 말을 했었다.

 

30여명의 당직자들이 탈당해 신당으로 가기로 했다. 함께 가고자 하는 당직자들이 많았지만 이것은 밥그릇이었다. 월급 받는 당직자는 그 숫자가 법으로 제한돼 있었다. 그러니 아무나 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새롭게 만들어지는 정당의 사무처 당직자는 민주당 쪽에서 30여명, 노무현 후보 대선켐프에서 몇 명, 노사모에서 몇 명, 개혁당에서 몇 명, 신당추진위 쪽에서 몇 명.....이런식으로 밥그릇이 짜여져 있기 때문이다. 이 또한 당이 망하는 징조라 하겠다. 남아있는 당직자들에게는 미안했다. 9월 중순쯤 1차적으로 당직자들이 민주당을 탈당했다.

 

나는 남아서 사무직당직자협의회를 정리해야 했다. 나는 당직자들께 미안하다며 일일이 인사를 했다. 나는 탈당하면서 월급 받는 당직자를 하지 않았다. 다가오는 총선에 출마하려 했다. 그렇게 말했더니 많은 당직자들이 꼭 성공하라며 격려해 주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사람은 당시 대변인실 국장을 하던 축호형 이었다. 처음에는 남아있는 당직자들이 나를 배신자라고 욕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분당을 안타까워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199910월쯤 민주신당 창당준비위원회 사무처 요원으로 현실정치에 참여해 20001월 새천년민주당 사무처 직원을 거쳐 2003924일 퇴직 겸 사무처당직자협의회 초대 회장직 사임, 그리고 새천년민주당 탈당을 하게 된다.

 

다음은 내가 새천년민주당 사무직당직자협의회장 사임과 탈당 기자회견문이다. 인터넷에서 찾았다.

 

새천년민주당 중앙당 사무직당직자협의회 회장 사퇴 및 탈당 기자회견문

 

저는 오늘 새천년민주당 사무직당직자협의회 회장직의 사퇴와 탈당을 선언 합니다.

 

그동안 민주당 당직자로서 또한 사무직당직자협의회 회장으로서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하지만 저 자신이 살아온 과정이나 정치적 지향성으로 볼 때 현재의 민주당은 맞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저는 20여 년간 청춘을 바쳐 청주지역과 서울에서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리고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이후 국민의 정부의 통일과 복지정책에 공감해 더 이상 재야에서의 운동보다는 정당에서 저의 정치적 소신을 실현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 하에 새천년민주당의 창당준비위원회에 참가해 실무 당직자로 일하면서 오늘에 이르게 됐습니다.

 

민주당에서 당직자로 일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고, 또한 현실정치의 부정적인 측면도 보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정치가 올바로 설려면 정당이 올바로 서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대선이후 민주당의 환골탈태와 혁신적 개혁을 주장하고 이를 실현하고자 했습니다. 이에 사무직당직자들이 이제 더 이상 정치인들을 위한 단순한 실무자가 아닌 진정으로 정당의 주인으로 나서 정당개혁의 주체가 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사무직 당직자 협의회를 조직해 76%라는 압도적 지지로 초대 회장에 당선 돼 일했습니다.

 

하지만 민주당은 정당개혁에 실패 했습니다. 당무위원회를 통한 합법적 토론의 장은 일부 당직자들의 폭력과 욕설로 난장판이 돼버렸습니다. 당의 개혁을 통한 거듭남은 물거품이 됐습니다. 더 이상의 민주적 토론은 불가능하게 됐습니다. 이러한 정당에 희망이 없음이 확연해 졌습니다. 일부 사무직 당직자들의 본분을 벗어난 폭력적 행동에 저는 분노 합니다. 또한 개혁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현실 기득권만을 주장하는 일부 의원들의 행태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민주당을 떠나기로 결심 했습니다.

 

남아있는 건강한 일부 당직자들의 아픔을 함께 하지 못한 점에 대해 무한한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밀려옵니다.

 

저는 이제 새로운 길로 가고자 합니다. 민주화와 민족통일의 꿈을 키웠던 청주로 돌아와 정치권에 참여하면서 처음에 그랬듯이 복지정책의 지향과 민족통일이라는 저의 신념을 실현하고자 소신 있는 정치인으로 성장하고자 합니다. 당 지도부를 돕는 실무 당직자가 아닌 대중과 함께 호흡하면서 몸으로 부대끼는 생활 정치인이 되고자 합니다.

 

저는 다가오는 17대 총선에 청주 흥덕구에 출마할 결심을 굳혔습니다. 그리고 이미 실무적 준비에 착수해 지역현안에 대한 파악과 사회적으로 소외받은 이들과 함께 하는 따뜻한 정치인이 되고자 실천에 돌입 했습니다. 아울러 국민참여와 통합이라는 시대적 과제에 걸 맞는 정치적 동지들과 함께 새로운 정당을 건설해 도민과 민족 앞에 떳떳한 정치인이 되도록 할 것입니다.

 

저는 새로 건설되는 정당이 도로 민주당화 되는 것에 대해 단호히 반대 합니다. 정치적 소신과 비전을 갖지 않고 단순히 당적을 옮기는 행위는 배척돼야 합니다. 이제 새로이 건설되는 신당은 그야말로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토론이 가능하고, 시대정신에 부합하며, 국민 무서운 줄 알고 봉사하며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는 신선한 정당이 돼야 합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정당정치가 노회한 정치인들의 자리보존의 공간이 돼서는 안 됩니다. 희망이 넘치는 젊고 능력 있는, 봉사하며 책임지는 사람들의 활기찬 생산의 공간이 돼야 합니다.

 

저는 이러한 일을 하고자 합니다. 그러한 사람들과 함께 진정으로 도민과 국민들로부터 사랑받는 정당을 건설하고자 합니다. 소신과 원칙이 살아있고 책임질 줄 아는 도내의 많은 동지들이 함께 하리라 확신 합니다.

 

민주당을 떠나는 저의 마음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뻔 한 종말이 예견되는 현실을 책임 있게 인도하지 못하고 떠나는 마음은 앞으로 저의 정치적 항로에 두고두고 짐이 될 것 입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의 미련을 갖지 않습니다. 역사는 미래를 고민하는 자에게 그 책임을 맡깁니다. 희망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손을 부여잡고 다시 전진 하겠습니다.

 

많은 동지들의 동참을 기대 합니다.

 

2003924

 

박영호 (새천년민주당 사무직당직자 협의회 회장, 충북희망네트워크 회장)

 

 

[나의 인생살이 71]

 

정치를 하려면 출마를 해야 한다. 열린우리당 창당 중앙위원이 되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고 나서 나는 내가 현실정치에 참여한 것에 대해 더욱 자부심을 가졌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 일부 부조리는 있었어도 김대중 대통령의 탁월한 지도력으로 IMF 극복과 IT, BT, CT 등 다양한 산업의 성장이 이루어 졌고, 무엇보다 통일의 길이 활짝 열렸다. 한편으로 4대 보험의 정착과 민주주의의 신장이 이전 정권과는 확연히 대비 됐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노동시장의 유연성으로 비정규직의 양산이 이루어졌고 외국계 회사들의 국내 진출로 농민들의 어려움이 가중 됐다.

 

나는 2003년 초에 다가오는 2004년 총선에 출마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느 날 대구에 있던 전대협 친구 진구를 만났다.... 나는 친구와 함께 청주로 갔다. 내가 출마하려 한다는 사실을 청주민청을 함께 했던 동지들한테 말하러 간 것이다. 이광희 동지를 분평동의 어느 맥주집에서 만났다. 열심히 말했지만 내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아마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참여정부가 출범하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기득권 세력들의 저항이 만만찮았다. 그래서 나는 월급 받는 당직자가 아닌 현장에서 대중과 함께 기득권 세력의 저항을 막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출마하려고 한 것이다. 당선되면 복지 분야나 통일 분야에서 일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나는 2001년 한양대 행정대학원 사회복지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졸업은 하지 못했다. 청주에 내려와 출마를 위해 열심히 뛰었다. 많은 사람들이 박영호가 이제 할 때가 됐다고 하면서 격려해 주었다. 한편으로 나를 견제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나는 개의치 않았다.

 

나는 당시 철원에서 여의도로 출퇴근 했는데 매주, 또는 시간 날 때 마다 청주로 갔다. 지역구가 분구 될 가능성이 높았다. 청주의 국회의원 지역구는 상당구와 흥덕구로 돼 있었는데 상당구는 홍재형 의원이 흥덕구는 노영민 선배가 지구당 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흥덕구는 인구가 늘어나서 분구될 가능성이 높았다. 노영민 선배는 청주 공단 쪽을 지역구로 하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 집이 있던 수곡동, 분평동 쪽을 지역구로 삼고자 했다.

 

총선 출마를 허락 받다.

 

20035월에 중앙당 당직자협의회 회장이 되면서 나는 2004년 총선에 청주에서 출마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우선 집사람한테 동의를 구해야 했다. 어느 날부터 꼼지락 꼼지락 거리며 출마 애기를 시작했다. 출마한다고 하니까 집사람은 반대 했다. 돈도 없고, 당시 우리는 철원에 살고 있었는데 그러기 위해 내가 청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 집사람이 애들 보면서 학교 출근하는 것이 너무 힘들다며 반대했다.

 

한편으로 만약 출마하면 어떤 사람처럼 동네 목욕탕에서 때밀어주는 선거운동도 해야 하고.....여러 가지로 싫었던 모양이다. 그러면 나는 몇 마디 하고는 몇 일을 그냥 보낸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힘없이 빌빌 거린다. 밥도 잘 안 먹는다. 일종의 시위인 것이다. 그러다가 몇 일 지나면 또 슬쩍 한마디 던진다. 나 출마하면 안 돼? 당연히 안 된다고 한다. 그러면 또 전과 동일하게 넋 나간 사람처럼 약 먹은 병아리처럼 빌빌 거린다.

 

어느 날 밤이었다. 한숨을 푹푹 쉬다가 깜박 잠이 들었다. 그런데 집사람이 깨우는 것이다. 할 말이 있다는 거다. 옳거니!!! 당신이 출마를 하려면 돈을 1억 원을 내 놓고 가라! 나도 애들 데리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 많다고 했다. 5천으로 깎자고 했다. 좋다고 했다. 그러더니 자금집행계획을 말하란다. 그래서 나는 우선 내가 출마하면 처갓집 쪽에서 일부 후원금을 줄 것이니 그것을 모두 당신이 가져라! 아무리 안 들어 와도 2천만 원은 되지 않겠냐? 그리고 천만 원은 벽보 붙이면 주고 나머지는 당선되면 주겠다고 했다. 집사람은 웃으며 오케이 했다. 그날 밤 우리는 손 꼭 잡고 잤다. 해석하지 마라!!!

 

그렇게 집사람한테 출마를 허락 받았다. 그리고 나는 그길로 청주로 내려갔다. 상철이를 만나 함께 하자고 했다. 집사람한테 물어보겠다고 했다. 이틀 후 상철이는 오케이를 받고 왔다. 너무 좋았다. 돈도 없으면서 무슨 깡다구로 출마를 하려 했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당시에 카드가 열개 정도 있었는데 그걸로 일단은 충당했다.

 

그래서 5월 말쯤 분평동 시장 통 안에 조그만 원룸을 얻어서 충북희망네트워크라는 조직을 만들고 사무실을 만들었다. 나의 국회의원 출마를 위한 전초기지를 만들은 것이다.

 

한편으로 나는 중앙당 당직자들한테 출마하자고 했다. 최동규형, 권형우형, 정진우후배 등과 함께 만나기도 했다. 나중에 진우는 부산에 출마해서 아깝게 떨어졌다.

 

20039월 말, 민주당 당직자 생활을 그만두고 청주에 와서 본격적으로 출마를 준비했다. 가장 큰 것은 역시 돈이었다. 당직을 그만 두었으니 월급 받는 것도 아니고 해서 카드를 돌려 막으며 썼다. 사무실 운영비며 활동비며 돈이 한두 푼이 드는 것이 아니었다.

 

민주당이 분당의 위기를 맞으면서 나는 민주당은 더 이상 정당개혁을 할 세력이 아니라고 보고 9월 말에 민주당을 탈당했다. 그리고 나는 열린우리당 창당 작업에 나섰다. 1027일 중앙당에서는 151명의 중앙위원을 발표 했다. 나는 청년 몫의 중앙위원이 됐다. 1028일 열린우리당 충북추진위를 구성 했다. 홍재형 의원과 강혜숙 교수가 공동추진위원장에 선출 됐다. 나는 대변인을 맡았다. 당시 열린우리당 중앙위원은 참으로 높은 서열의 직위였다. 지금 정당의 당무위원회 같은 성격의 조직 이었다 .

 

내가 청주에서 출마를 위해 열심히 뛰고 있던 11월 초쯤 중앙당에 있을 때 알고 지내던 조선일보 기자가 전화를 걸어 왔다. 몇 가지 물어보면서 열심히 하라고 했다. 그리고 얼마 있다 보니까 조선일보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났다.

 

[총선 향해 뛰는 사람들](66) 박영호 우리당 중앙위원

청주 흥덕에서 내년 총선 출마를 준비 중인 민주당 당직자 출신인 박영호(39) 열린우리당 중앙위원은 개혁을 강조했다. 그는 자신이 정치권 입문 3년 만에 개혁적 인물로 평가받았다고 했다. 지난 5월 민주당 사무처당직자협의회 회장선거에서 76% 지지를 받아 당선된 것. 그는 경쟁 인물인 정치권 경력 15년의 쟁쟁한 선배를 누를 수 있었던 것은 개혁성때문이라고 했다. “직능국 심의위원이던 시절 민주당의 개혁이 중요하고 이를 위해 사무처 당직자들이 변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월급을 받는 입장인 사무처 당직자들은 자신의 뜻과 무관하게 당내 불법행위와 관련된 행동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직자들도 불법 행위에 대해 솔직히 밝혀야 한다는 차원에서 협의회를 만들었죠.” 박 위원은 구체적인 불법 행위를 얘기하지는 않았다.

 

정당의 생리를 알게 되면서 정당이 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그는 지난 9월 민주당을 탈당하고 신당을 택했다. “분당(分黨)을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민주당은 국민요구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개혁을 못했다고 판단했습니다.”

 

박 위원의 신당 행은 노무현 대통령과 통하는 정치적 소신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지난 12월 대선 때 충북지역 노풍(盧風)’을 일으키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노 대통령이 민주당 후보가 될 때 선거운동을 돕기도 했습니다. 대통령선거 때는 대선조직본부 충북지역 조직담당을 맡았죠. 노 대통령의 득표율은 이곳에서 이회창 후보를 10% 앞섰습니다.”

 

그는 지난 1999년 새천년민주당 창당 때 이창복 의원(열린우리당강원 원주)의 권유로 합류했다. 그는 당시 정치입문에 대해 “DJ정부 이후 사회변화가 어느 정도 있었고, 저의 관심사인 통일복지문제를 고민하다가 현실정치에 참여해 사회발전에 기여하자고 생각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청주를 정치적 고향이라고 불렀다.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난 그는 충북대에 들어가 1987년 이 학교 총학생회장을 지내고 이후 청주민청련 의장, 충북사회민주단체연대회의 집행위원장 등 지역에서 꾸준히 시민사회단체 활동을 했다. 이 과정에서 정치적 상황과 현실에 눈을 뜬 동네가 청주라는 것이다.

 

청주 흥덕은 인구가 많아 다음 선거에서 선거구가 2개로 나뉠 것이 확실시 된다. 흥덕갑을 택할 예정인 그는 현역인 한나라당 소속 윤경식 의원과 맞붙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정치신인이지만 그는 자신감에 넘쳐있다. “충청도는 자민련세가 거의 죽었습니다. 지역 색채로부터 자유로운 편이죠. 노 대통령 당선이후 지역색채가 없습니다. 개혁적 인물, 능력 있고 일할 수 있는 사람을 바라는 지역민심도 크고, 특히 참여정부에 불만이 크지 않아 우리당이 불리하지 않습니다.”

 

그는 학생운동, 청년운동, 시민사회운동, 실무정치로 이어지는 경험과 오랜 지역 활동을 자신의 강점으로 내세웠다. “지역정치 측면에서 보면 청주가 태어난 고향이 아니라는 점에서 공격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역 활동에 대한 진정한 평가가 저를 지탱해주는 입니다

 

그는 청주를 위해서 부족한 복지시설 만들고 교육도시 이미지를 되살리고 싶다고 했다. 지난여름 벌어진 양길승씨 향응파문으로 마치 향락도시처럼 비춰지고 있어 이미지 쇄신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 -

 

이 기사가 나의 발목을 잡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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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살이 72]

 

나에 대한 공격이 시작됐다.

 

일단 출발은 좋았다. 10월쯤 해서는 주변 분들의 도움으로 분평동 대로변에 70평짜리의 큼직한 사무실도 새로 얻었다. 경민이 형이 인테리어도 해 주었다. 물론 돈이 들었다. 상철이 영아가 함께 일해 주었다. 태왕이도 도와주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상호가 운전을 해주었다. 종희형, 재문이가 조직 일을 도와주었다. 얼추 사무실이 사무실다웠다. 개소식을 했다. 이창복 선생님(당시 국회의원), 최종원(연기자), 가수 이안(이동희) 등이 참석해 주었고 많은 분들이 참석해서 성황리에 마쳤다.

 

나는 동네 조기축구회에도 가입했다. 아침 일찍 축구도 했다. 당시 술을 많이 먹어서 아침에 축구하러 가려면 무척 힘들었다. 회원들은 정말 운동을 좋아 했다. 축구회는 거의 계모임같이 움직였다. 매월 회비도 내고 가입비도 냈다. 사실 나는 이런 활동을 처음 해보는 것이었다. 단지 선거를 위해 움직이는 것이 싫기는 했지만 처음 시작하는 것이라 어쩔 수 없었다.

 

하루는 원룸에 있는데 세탁소 아저씨가 오셨다. 나보고 교회 다니냐 고 물었다. 나는 믿기는 하는데 다니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랬더니 나보고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 나오라고 했다. 알고 보니 청주에서 제일 큰 교회였다. 나는 선거를 앞두고 나가는 것에 썩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집사님은 자주 나의 원룸에 찾아와서 교회에 같이 가자고 했다. 이분은 내가 무얼 하려는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 나는 집사님의 인도로 교회에 나갔다.

 

사무실도 안정되고 이제는 열심히 뛰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어느 날 국민의 힘이라는 단체의 사람이 사무실에 왔다. 국민의 힘은 안티조선 운동을 하고 있었다. 이 사람은 상철이 친구였다. 그 사람이 왔다가고 나서 상철이가 내게 하는 말이 저사람 단체가 신문을 만드는데 우리를 처음으로 인터뷰를 해서 거기에 나오게 해 줄 테니 찬조금을 내라고 한다고 했다. 나는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부터 나의 홈페이지에 이상한 글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국민의 힘 이라는 인터넷 사이트 회원이라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일반적인 동호회 수준의 사이트로 알고 가입을 했다. 그리고 노사모 사이트에도 가입하고....온라인 회원가입과 오프라인 조직의 회원 가입에 대해 나는 다르게 생각했다. 그래서 온라인 회원 가입은 일반적인 동호회 가입 하듯이 했다. 그리고 별로 활동도 하지 않았다. 그 사이트의 글을 보고 싶어서 가입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 이상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 단체 사람들이 나보고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했으니 제명한다고 했다. 71편의 [총선 향해 뛰는 사람들](66) 박영호 우리당 중앙위원 이라는 글이 문제란다.

 

내용이 뭐가 문제가 있는가? 내가 요청해서 한 인터뷰도 아니고, 그리고 정식 인터뷰도 아니고.....나는 수긍하기 힘들었다. 중앙당에 근무 할 때 알고 지내던 기자인 후배가 전화해서 형 어떻게 준비 되냐 해서 그냥 현실을 말해줬는데, 그걸 조선일보가 실었는데 나보고 어쩌라는 거냐? 나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사람들은 나보고 조선일보에 전화해서 그 기사를 없애달라고 하라고 요구했다. 말이 되는 소린가? 자신들이 안티조선 운동을 하는데 조선일보와 인터뷰 한 사람들은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황당했다.

 

당시에 조선일보에 난 사람들이 어디 한 두 사람인가? 내가 66번째 였고, 아마도 100명 정도 했을 것이다. 그중에 열린우리당 쪽 인사들이 상당수 있었을 것이다. 집권당 후보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이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기사가 이미 났는데 어쩌라는 거냐? 그랬더니 나 보고 반 민주인사라고 했다. 이들은 아주 집요하게 나를 괴롭혔다. 나는 이들이 무슨 꿍꿍이 수작이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들이 밀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그 상대방인 나를 공격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나를 괴롭힌 것이다. 참으로 비겁한 자들이다. 안티조선 운동을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얻고자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교조주의자들이라고 나는 본다.

 

나는 엄청 충격을 받았다. 내가 반 민주인사라고? 나도 나름 민주화운동을 정말 열심히 했다. 그리고 나는 반민주적 행위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보고 반 민주인사라고?.....나를 아주 심하게 괴롭힌 사람은 충북대 의대 교수로 있던 손 모씨다. 이 사람은 나중에 내가 하려고 했던 지역구에 국회의원에 출마하려고 경선 붙었다가 떨어졌다. 환장하세......

 

뭐가 말이 돼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그 사이트 회원에서 탈퇴 했다. 나는 이들이 지금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 지켜보고 있다. 과거에 무얼 했고, 앞으로 무얼 하는지 나는 똑똑히 볼 것이다. 교조주의자들이요, 완장 찬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민주화세력이 분열되고 망한다. 아무나 공격한다. 하이에나처럼~~~~~

 

이런 자들이 민주화 운동 했던 사람들을 폄훼하고 다녔다. 민주화운동 한 것이 무슨 완장이냐고 하면서 다녔다. 정작 자신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면서.....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고 나서 이런 자들이 전국에서 난리치고 다녔다. 분열의 종자들이다. 나는 이들을 솔직히 경멸한다. 제발 없어졌으면 좋겠다.

 

이들은 나중에 내가 공천신청을 했을 때 나에 대해 험담을 늘어놓았다. 당시 공심위 위원 중에 조기숙 교수가 있었다. 이 사람은 내가 공천심사 면접을 보는데 나에게 국민의 힘 사람들과 싸웠냐고 물어봤다. 아마도 이들이 조기숙씨 한데 이른 모양이다. 참 더러웠다. 공천에 사적인 감정이 끼기 시작한 것이다. 공천심사 과정에 대해서는 뒤에 또 쓰겠다.

 

하여튼 문제다.

 

 

[나의 인생살이 73]

 

죽으라고 뛰었다.

 

나는 선거에는 일정하게 자신이 있었다. 사실 내가 선거에 직접적으로 출마해 본 경우는 대학 1학년 때 학년대표로 나간 것이 처음 이었다. 그때 나는 떨어졌다. 그리고 두 번째는 총학생회장 선거였다. 당선 됐다. 그리고 청주민청 의장선거에서 당선됐고, 민주당 중앙당 사무직당직자협의회 회장에 당선 됐다. 처음 선거에서 떨어지고 나머지 선거에서는 모두 당선 됐다.

 

나는 직접 출마하기도 했지만 출마한 사람을 도와주기도 했다. 단순히 도와준 것 보다는 내가 이겨야 한다고 생각한 선거이고 이겨야 내가 바라는 방향대로 가기 때문에 단순히 도와주었다고 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새천년민주당 중앙당에 근무 했으니 각종 선거에 파견돼 선거 실무에 대해서는 전문가였던 것이다.... 재보궐 국회의원 선거 때 혼자 파견 나가서 처음부터 다 조직해본 경험도 했다. 그러니 나름 선거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

 

청주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이 가장 약점으로 작용했다. 그래서 나는 죽으라고 바닥으로 뛰었다. 우선 연고가 있는 사람들을 찾아서 도와달라고 했다. 한편으로 기존의 정당조직에서 소외당한 당원들을 찾아가 잘 모시겠다고 했다. 왜냐하면 기존에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기존 지구당 위원장과 잘 아는 사람들이거나 일정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나를 지지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운동화 신고 부지런히 명함 배부하는데 열성을 다했다.

 

인지도 조사를 해보면 처음에는 5%가 안 나온다. 부지런히 다니고 언론사에 나의 정책과 내가 출마한 이유를 알리기 시작하니까 인지도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인지도가 올라가면서 지지도도 올라갔다. 내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주변에 구전홍보를 하기 시작하면서 거의 폭발적으로 지지도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너무 좋았다.

 

모르는 사람들도 나를 지지한다고 사무실에 찾아왔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내가 새로운 집권당인 열린우리당의 중앙위원이니까 권력의 힘을 빌리러 접근해 오기도 했다.

 

11월이 되면서 지역의 언론에 나기 시작했다. 유망주라며 많은 기자들이 관심을 가져 주었다. 당시 기사를 그대로 옮겨 본다.

 

희망을 꽃 피우는 새 정치 실현” 17대 총선을 뛰는 사람들 (박영호 중앙위원)

 

박영호(39) 열린우리당 중앙위원은 지역의 개혁적인 젊은 신인 중 가장 빠른 속도로 상승세를 타고 있는 주목받는 인물이다.

 

그는 정치적 소신과 신념을 갖게 해주고 현실에 눈을 뜨게 해 준 청주를 사랑한다. 청주에서 출발해 전국으로 진출해 청주와 나라의 발전을 위해 일하고자 한다. 내년 총선 청주 흥덕구(, 분구예상)지역 출마를 위해 부지런히 뛰고 있다고 했다.

 

박 위원은 충북대학교 총학생회장 시절 6월 민주항쟁 학생지도부를 시작으로 청주민청련 의장, 충북사회민주단체연대회의 집행위원장, 친일파 정춘수 동상철거 등 14년간 지역에서 숱한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또 중앙무대로 진출해 김근태 의원이 대표를 맡았던 민청련 후신인 한청협 사무처장과 KYC 준비위원장, 민주당 중앙당 조직부장 등을 거쳐 지난 5월 민주당 중앙당사무직당직자협의회 회장선거에서 76%의 압도적 지지로 당선되기도 했다. 대통령 선거 때는 노무현후보 선대위 충북조직담당으로 활동했고 지난 11일 창당한 열린우리당 중앙위원에 선출되기까지 한숨도 쉬지 않고 뛰었다. 주변에서는 그를 성실하고 부지런하며, 결단성과 저돌성이 돋보이는 입지전적인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정치인은 살아온 삶으로 평가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그는 새천년민주당 창당 때 이창복 의원(열린우리당)의 권유로 정치권에 입문했다.

 

행정수도 충청권 유치는 청주가 살아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덧붙인 그는 최근 IT 산업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청주는 오송 바이오단지, 오창 과학산업단지 등을 통해 IT, BT, CT 등 무공해 환경친화적 공장을 적극 유치해 지역경제를 활성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이 이사로 있는 ()EZapply를 청주로 유치했다.

 

이 회사는 국내최초 특허출원 기술인 PDF 통합원서 접수 시스템과 eForm 데이터 전송 모듈을 개발해 상용화시킨바 있으며, 야후 등 인터넷 포털 업체들과 업무제휴를 맺고 있는 전자문서(PDF) 전문 개발업체로 현재 청주문화콘텐츠재단에 입주해 있다.

 

현실 정치인으로는 고 제정구 의원, 이창복 의원, 김근태 의원을 존경한다고 했다. 자신의 정치활동을 이해해 주고 광부의 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부모님을 존경한다고 했다. 자신의 정치활동을 이해해 주고 도와주는 부인에게 감사한다고 했다.

 

-주요 경력-

충북대학교 총학생회장

충북사회민주단체연대회의 집행위원장

서울시 제2건국위 상임위원

새천년민주당 중앙당 사무직당직자협의회 초대회장

열린우리당 중앙위원

()EZapply 이사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은 바닥을 기어야 합니다.

 

42장은 74편으로 계속 이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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