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3일 출판됐던 페이스북커 박영호의 "나의 인생살이" 제2편에 이은 제3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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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는 어머니와 함께 |
[나의 인생살이 24]
전운이 감돈다.
아침 일찍 감사의 인사를 했다. 등교하는 학우들이 모두 반겨주었다.
선거캠프를 해산하고 부회장과 함께 인선작업에 나섰다. 물론 선거캠프에 몸담았던 사람들과 같이 했다. 총학간부는 8개 부서에 부장, 차장으로 구성됐던 거 같고, 교지편집장, 학생복지위원장 등을 임명하는 것으로 마무리 됐다. 소위 말해 학생운동을 함께하던 동지들이 많이 선발됐으나 일부는 평소에 일 좀 할 것 같다 하는 사람에게 다가가 총학간부를 제안해서 승낙을 얻는 방식으로 했다.
어느 날 인문대 앞을 지나는데....평소 학생회관 2층에 있던 불교학생회에 드나들던 여학생을 눈여겨 보아두었었는데....그 여학생이 지나가기에 총학생회 여학생부장을 맡아달라고 부탁을 했다. 고민 끝에 승낙을 얻었다. 이 사람은 후에 내가 감옥간 사이에 부학생회장과 눈이 맞아서 졸업 후에 결혼해서 지금은 아들, 딸 낳고 잘산다.
총학간부 구성이 끝났다. 우리는 소위 인수위 사무실이 없어서 동아리 사무실에 모여서 주로 일을 했다. 당시 총학생회는 민주화운동에는 관심이 없는 소위 말하는 비권이었다. 그러니 우리에게 사무실을 일찍 넘겨주기 싫었을 것이다. 그 당시 총학생회장을 하던 사람과 15년 뒤에 새천년민주당 당원으로 만났다. 솔직히 어색하기도 했다. 같은 당 동지란다~~~~받아들인다.
우리 총학생회가 출범도 하기 전에 정국은 어수선하게 돌아갔다. 아직 출범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슨 일을 주도적으로 하기도 어려웠다. 때는 87년 6월 10일로 접어들었다. 그날도 학교에서는 투쟁위원회 주도로 데모가 시작 됐다. 우리는 시내로 나갔다. 시민들의 반응이 그리 높지는 않았다. 서울 쪽에서는 난리가 났다. 또 시간이 지났다. 나는 투쟁위원회에 투쟁을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하지만 당시가 학기말 고사 시기라 학생들의 동참이 적었다.
6월 15일쯤인가? 학기말 고사가 끝나가는 금요일 이었다. 내가 지도하던 후배들이 선배들이 너무 소극적이 다고 항의를 했다. 나도 동의 했다. 그래서 미안하지만 후배보고 투쟁을 이끌라고 했다. 그날 오후 2시쯤 시작된 집회에는 시험을 마친 학생들의 동참이 늘어났다. 정문을 뚫었다. 시내진출이 이루어 진 것이다 아마도 80년 이후 충북대학교에서 학내시위를 통해 정문을 돌파하고 시내로 나간 첫 싸움이 아니었나 싶다.
조직원들 중심으로 시내에서 반짝 데모는 여러 번 있었다. 비밀리에 어디에 모여서 누군가 호루라기 불면 뛰어나가 ‘독재타도’를 외쳤다. 그리고 유인물 뿌리고~~~ 그러다가 경찰이 나타나면 잽싸게 도망가는 그런 방식이었다. 도망가면 시장 통으로 간다. 거기서 두부랑 콩나물을 사서 나온다. 마치 아무일 없었던 것처럼. 한번은 시내에 나갔는데 어찌된 일인지 경찰이 쫙 깔렸다. 약속이 들통이 난 모양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고 나면 조직 내부에서는 점검에 들어간다. 그래서 텍을 몇 개 잡는다. 그중에 삼번이라는 신호가 떨어지면 세 번째 장소에 나가 가두시위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잡혀가기 때문이다.
이 싸움을 이끈 사람은 나와 함께 독서토론을 하던 86학번의 정보통신학과의 김상통이다. 나는 지금도 이놈이 보고 싶다. 나와 함께 민주화 운동에 참가해서...그 뒤로 어떻게 사는지 나는 궁금하다. 만약 상통이를 내가 가르치지 않았다면 상통이는 무엇을 했을까? 나는 졸업 후에도 나와 함께 했던 선후배, 동료들과 충북대 학생들에게 내가 뱉었던 나의 주장에 대해 얼마나 책임을 지고 있는지 고민한다.
최루탄 추방 등 연일 시위가 이어졌다. 6월 27일부터는 시내 파출소가 불타기 시작했다. 사직동에 있던 안기부 충북지부 사무실 쪽으로도 화염병이 날아갔다. 이때쯤 해서 어디서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지만 구속자가 속출했다. 평소에 데모하지 않던 예비역 형들이 화염병 제작하다 구속되기도 하고....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됐다. 6월 29일 드디어 노태우의 항복 선언이 나왔다.
그렇게 뜨거운 87년 여름은 지나가고 있었다.
[나의 인생살이 25]
노동자의 상주가 되다.
6월 항쟁이 끝나고 학교는 조용했다. 방학이었다....내가 총학생회장이 됐으니까 학교는 초비상이었다. 당시 학교에는 총장이 광주 5적과 연관이 있다는 소문이 나 돌았다. 학생처장은 이미 사퇴요구의 대상이 됐다. 내가 2학년 때 도서관 대자보 붙이는 거 때문에 악연이 있던 분이었다. 그래서 인지 긴급하게 학생처장이 교체 됐다. 새롭게 학생처장을 맡으신 분은 체육과 출신이신데 당시 독일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신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체육과 출신의 교수가 학생처장이라~~~자못 기대되기도 하고 긴장도 됐다.
사건이 발생했다.
농촌활동을 가야 하는데 학교에서 버스를 빌려주지 않았다. 총학생회 차원에서 준비 할 수 없으니 농활준비위에서 했는데 학교...가 비협조적 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 저를 따르십시오. 총장실로 갑시다. 아마도 이렇게 연설했던 모양이다. 이것이 발단이 돼 조직의 선배들이 박영호 총학생회장 되더니 변했다고 했단다. 그러고 보니 6월 항쟁 당시에 민주쟁취 직선개헌을 외쳤던 것이 생각났다. 당시 충북대학교 학생운동 조직은 특별히 노선투쟁이 없었다. 서울에서는 자민투니, 삼민투니, 민민투니, 제헌의회니 하면서 노선 투쟁이 있었는데 우리학교에는 없었다. 아마도 선배들끼리 내부에서는 논쟁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어느 날 일부 선배들이 박영호를 조직에서 제명해야 한다고 주장한 모양이다. 그래서 당시에는 엄두도 못 낼 3,4학년 조직원 전원이 모이는 회의가 소집됐다. 상당산성에 있는 어느 식당에서였다. 아마도 당시에 경찰이 이걸 알고 덮쳤으면 충북대학교 최대의 조직사건이 만들어 졌을 것이다. 약 40여명이 모였다. 내가 처음 보는 사람도 있었고, 아 쟤도 조직원 이었구나 하는 사람도 있었다. 당시에는 비밀조직을 만들지 않으면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논쟁이 치열했다. 나는 징계를 위한 회의라면 응할 수 없다고 했다. 내가 만약 조직에서 잘린다 해도 나는 충북대학교 총학생회장 이었던 것이다. 일단 서로가 마음을 열고 토론하는 것이 순서라고 했다. 하지만 나의 주장은 받아지지 않았다. 나와 함께하던 총학 팀들은 철수했다. 그리고는 무심천에서 막걸리 먹고 실컷 목 놓아 소리쳤다. 노래 불렀다.
그 일로 충북대학교 학생운동 조직은 양분되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노선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총학생회는 오픈 돼 있으니 조직이랄 것도 없었다. 나는 총학생회장에 출마하면서 내가 지도하던 후배 조직을 다른 사람한테 넘겼다. 잘 지도해 달라는 부탁도 했다. 당시 내가 관리하던 팀이 6개 정도는 됐다. 나는 후배들한테 그동안 함께 해줘서 고맙다고 인사하고 다른 선배 만나더라도 열심히 공부하라고 했다. 멀리 떠나는 사람이 남아 있는 사람한테 하는 비장한 말투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날 술을 먹고 우리는 헤어졌다. 선배들의 노선투쟁에 후배들은 조직의 결정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모두 나와 함께 하지 않았다. 나중에 후배들 중 일부가 나에게 오기는 했다. 몇 명 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충북대학교 학생운동사는 다시 시작됐다.
우리는 소위 비밀조직과 헤어졌다. 일부의 세력이 우리와 함께 했다. 내부의 노선싸움이 심했던 모양이다. 당연히 조직이 갈라졌으니 총학생회에서 집회를 하거나 무슨 일을 할 때 상당히 어려웠다. 우리는 오로지 학우들만 믿고 일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것이 정답이었다.
87년 7,8월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났다. 과정에 엄청난 노동자들이 죽었다. 아마도 삼일이 멀다하고 도서관 앞에 빈소를 차렸다. 그때마다 나는 상주가 됐다.
88년 4월쯤인가 청주민청이 창립됐다. 초청이 돼 축사도 했다. 내가 청주민청과 인연을 맺은 첫 번째 만남 이었다. 물론 창립멤버들은 다 아는 선배들이었다.
[나의 인생살이 26]
웃지 못 할 에피소드
나는 2학년 겨울 방학 때 동생과 함께 청주시내에서 동생이 구해온 자취방에서 살았다. 곤로에 불이 붙어 큰일 날 뻔 했었다. 총학생회장 후보 내정을 받고 그때부터 트레이닝이 시작 됐다. 나는 자취방이 필요 없게 됐다. 어차피 자취방이 경찰에 알려지면 연행될 수도 있고....동생은 고 2가 됐다. 친구들이나 후배들 방을 전전 했다. 자취방이 없어지고 나서 동생 또한 친구 집으로, 학교 교실에서 잠을 잤다고 했다. 내가 그렇게 아끼던 사회과학서적도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제일 어려운 것은 빨래였다. 명색이 총학생회장 후보로 나오는 사람의 옷이 너무 지저분하면 비주얼에서도 딸리게 되는데.....속옷도 문제였다.
내가 2학년 때 5월 달에 두 번째 ...구류를 살고 나오는 날 서부경찰서 정보과장이 불렀다. 공부해라! 뭐 그런 훈계였다. 그런데 갑자기 이양반이 나보고 하는 말이 ‘야! 임마! 손톱이나 깎고 해라!’하는 거였다. 엄청 창피했다. 나는 평소에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소위 사상적으로나 자부심에서 경찰이나 학교 당국자에게 일종의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다. 뒷날 운동권 출신들이 선민의식을 가지고 건방을 떨었던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갑자기‘손톱이나 깎고 하라’는 말은 나의 자존심을 확 긁었던 것이다. 얼굴이 화끈 그렀다. 그 뒤로 나는 손톱을 깎을 때 피가 나도록 바짝 깎는다. 이것도 트라우마~~~~
또 하나는 뒤에 나오겠지만 총학생회장이 돼 활동하다 구속되는 일이 있었다. 경찰에 연행되기 직전이다. 나는 갑자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수배당해 도망 다니면서 팬티를 제대로 갈아입을 수가 없었다. 당시에는 백양표 흰색 팬티를 입고 다녔다. 지금 같으면 색깔 있는 거 입으면 좀 덜할 텐데, 잡혀가면 발가벗겨 고문도 하고, 영화‘남영동 1985’에 보면 잘나온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놈들이 나를 홀랑 벗겨서 내 팬티를 보면 기절을 할 것이었다. ‘야! 팬티나 빨아 입어라!’한다면 얼마나 쪽팔리는 일인가..... 마지막에는 도망 다니고 하면서 열흘 이상 그냥 입고 다녔다. 누가 사주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팬티 사타구니며 온통 때 딱지가 앉을 지경이었다. 웃기는 말로 팬티가 더러워지면 뒤집어 입고, 그 다음에는 털어서 입을 지경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화끈거린다. 그래서 나는 연행돼 경찰서에 도착하자마자 화장실에 간다고 했다. 그리고는 팬티를 벗어서 화장실에 버렸다. 노팬티였다. 그리고 한 이틀 지났는데 이놈들이 때리지 않았다. 나는 조사관한테 팬티를 사달라고 했다. 사주었다. 그 팬티 입고 교도소에 갔다.
대학에 처음 입학했을 때이다. 우리 과 교수님이 뭘 잘못 했는지 선배들이 ‘어용교수 퇴진’ 하라고 난리를 쳤다. 그런데 아무리 우리 과 교수님 이름을 찾아봐도 어용이라는 사람이 없었다. 이상하다~~~ 도대체 어용이라는 사람이 누구야? 김어용 인가? 박어용 인가?.....누구한테 물어보지도 못했다. 나중에 술자리에서 물었다. 야! 어용교수가 누구니? 아무리 봐도 어용이라는 사람이 없던데... 그날 엄청 쪽 팔렸다.
이런 애기를 나중에 고등학교 친구들과 놀 때 말했다. 그랬더니 강원도 정선군 상동에서 온 친구가 하는 말이 더 걸작이다. 이 친구가 하는 말이 집에 가려고 터미널에 갔는데 현상수배자 주소를 보니까 본적은 전부 다른데 현 거주지에는 거의가 ‘상동’ 이라고 쓰여 있더란다. 그래서 이 친구는 생각하기를 ‘대한민국 도둑놈은 전부 상동에 사나?’ 했단다. 그날 엄청 웃었다. 배꼽이 빠지는 줄 알았다. 이놈은 나보다 한 수 더 하는구나~~~하하하! 얼마나 순진 했던가~~~~
[나의 인생살이 27]
구국의 강철대오 전대협!
“통일의 물결로 굽이쳐라! 내 사랑 한반도여!”
상당산성 사건이후로 총학간부를 하던 소위 조직원들이 철수를 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그동안은 조직이 있어서 서로 밀어도 주고 했는데 이제는 상의할 사람도 없었다.
오로지 우리 총학 간부들만이 유일한 동지였다. 나는 빈자리를 다시 채워야 했다. 이번에는 조직에서 파견된 사람들이 아니라 내가 직접 뽑았다. 양심적이고 소신 있으며.....대중을 믿고 일하는 수밖에는 답이 없었다. 학우들이 싫어하면 나는 잘릴 것이요, 학우들과 함께 일하면 나는 성공 할 것이다. 결국은 학우들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면서 모든 일을 해 나가야 했다.
6월 항쟁이 끝나고 총학 사무실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중에 하나가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를 만들자는 제안 이었다. 공감했다. 그리고 권역별로 협의회를 만들기로 했다. 몇 차례 회의가 있었고, 결국 충북대학교 휴머니스트 동아리 방에서 우선 충청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를 결성하기로 하고 충청대협 의장 투표에 들어갔다.
충북에서 온 회장들은 나를 추천했고, 대전에서 온 회장들은 충남대 회장을 추천했고, 충남에서 온 회장들은 천안 상명여대 회장을 추천했다. 참 우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쩌랴~~~누군지 모르는 상황에서 팔이 안으로 굽는 것은 당연한 이치 아니겠나? 적어도 같은 지역출신이니까 나는 잘 봐주겠지? 뭐 이런 아주 평범한 심리가 소위 전운이 감도는 시기에도 통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세 사람 모두 민주화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고, 학생운동 노선도 비슷했다. 그러니 누가 돼도 별 상관은 없었다. 정치는 대중과 함께 하는 것이고, 대중은 대학교수가 아니기 때문에 이념으로 정치적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이때쯤 나는 배운 것 같다.
투표 결과는 충남대 윤재영 회장이 1등을 했다. 대전에서 온 회장들이 제일 많았고, 초록은 동색이라고 충남은 충북보다는 대전에 가까웠다. 이어서 부의장 투표에 들어갔다. 나는 부의장에 당선됐다. 충남의 천안 상명여대의 박정렬 회장과 불과 한 표 차이였다. 아마도 미안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국립 충북대학인데!!!!
그렇게 해서 전대협 지역조직인 충청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가 1987년 8월 15일 출범됐다. 그리고 드디어 8월 19일 충남대학에서 전대협 1기 출범식이 열렸다.
우리는 열심히 준비 했다. 학우들도 함께 출범식에 가기 위해 밤을 새운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정말 열정적으로 일했다. 이때쯤 해서 물러가는 학생회에서 우리에게 사무실을 내주었다. 우리는 사무실을 잘 꾸미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잘 꾸며도 폼 나지 않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사무실을 변경했다. 땅 탁구도 했다. 감옥 갔다 온 행렬이 형이 가르쳐 주었다. 땅에다가 금을 긋고 나무로 탁구라켓을 만들어 치는 것이다. 감옥에서 하는 운동이란다. 재미있었다. 점심내기도 했다.
막내 동생과 헤어졌다. 막내 동생은 그 뒤로 누구네 집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나는 몰랐다. 이미 가족을 멀리하고, 춘천의 친구들과도 멀어지고 있었다. 일에 미쳐서 나와 관계가 있는 사람들과 점차로 멀어지고 있었다. 중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단다. “새로운 친구를 사귀려고 과거의 친구를 버리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새로운 일을 하려고 나의 가족과 친구들을 버리고 있었다. 그로부터 30년이 흐른 지금 나는 다시 가족과 친구에게로 돌아왔다. 너무 좋았다. 30년 동안 온갖 길을 돌아 이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친구들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제 다시 이 둥지에서 나의 꿈을 펼쳐야 한다. 함께 했던 30년의 사람들과 다시 인생 재정립해야 한다. 어려운 일이다. 많이 변했다. 하는 일도 다 다르다. 이해관계도 다르다. 생각도 많이 다르다. 이렇게 된 현실을 앞에 두고 나는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가?.....
웃으며 살자! 내가 총학생회장이 되고 나서 처장님이 총학 간부들과 회식을 제안했다. 그날 메뉴는 ‘갈매기살’이었다. 나는 바닷가 출신이다. 그래서 바다의 갈매기 고기를 먹는 줄 알았다. 맛있게 먹었다. 그것이 돼지고기의 일부라는 것을 한참 후에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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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여름 아내와 함께한 유럽 배낭여행 중 |
[나의 인생살이 28]
내 인생에 처음으로 존경하는 분이 생겼다.
신임 학생처장으로 되신 체육과 교수님은 나를 잘 대해 주셨다. 독일에서 귀국하신지 얼마 되지 않았고, 데모하는 학생들과 별로 상대하지 못해서 인지 이해하려고 하셨다. 우리가 충북대 학생회중 최대 강성파라는 것을 아셨을 것이고, 독일에 계실 때 방송을 통해 방영된 5.18 광주학살 비디오를 보셨다고 했다. 우리는 전대협 발족식에 가야하니 학교버스를 대여해달라고 했다. 처장님은 오케이 했다. 아마도 당시에 국립대학교에서 학교버스를 대여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웠을 것이다.
학교와의 여러 가지 충돌이 있었지만 우선 처장님과 상의를 했다. 그러면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말씀해 주셨다. 나는 이해할 것은 이해하고 학생들을 위해 반드시 해야 할 것은 처장님을 설득했다. 그러면 처장님은 ‘네 말이 맞다’ 하시면서 총장님 면담을 통해 해결 해 주셨다. 내가 워낙 강성이고, 당시 시대상황이 전두환 정권이 항복한 상태라서 모든 일은 잘 풀렸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무조건 싸운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너무 싸우면 대중들은 싫어한다. 하지만 너무 안 싸워도 국민들은 싫어한다. 싸워야 할 때는 싸워야 한다. 오만하면 안 된다. 우리 사회는 유교적 영향을 많이 받은 사회이기 때문에 예의에 벗어나면 싫어한다. 그러니 정치를 하는 사람이나,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이나, 영업을 하는 사람이나 모두가 갖추어야 할 공통의 자세는 “겸손이다.” 하지만 자신이 철저하게 준비돼 있지 않으면 아무리 겸손해도 일을 그르치게 된다. 실력이 갖추어진 겸손이야 말로 최상이라 하겠다. 필승이라 보면 틀리지 않는다. 다만 정치라는 것을 이해 해야 한다.
흔히들 정치를 종합예술이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예술을 대중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세심하게 작가의 붓놀림 속에서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지 대중들은 알지 못한다. 그래서 큐레이터가 있고, 정치평론가가 있는 것이다. 정치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종합예술 인답게 행동하기를 바란다. 다만 그 예술가의 표현이 진실이 듯이, 정치인의 행동 또한 진실에 기초해서 여러 가지 화장을 해야 한다. 거짓을 숨기려고 하는 것은 조명에 비친 화장빨이 된다. 이것은 반드시 들통 나고 국민들로부터 철퇴를 받을 것이다.
나는 나를 이해해 주시고 내 말을 들어주시는 처장님이 좋아졌다. 하는 일에 대해 상의했다. 어느 날 선생님이 너희들 보는 문건이 있다는데 좀 보여 달라고 했다. 나는 보여드렸다. 아마도 당시 총학생회 부서 중에 체육부가 있었는데.....다른 부서장은 내가 직접 임명해도 체육부는 체육과에서 추천하면 받아야 했다. 그래야 각종 체육대회를 치를 수가 있었다.
처장님이 그런 문건이 있다는 사실을 아신 것은 체육부를 통해서 알았지 않았나 추측해 본다. 선생님은 읽어 보시고 하시는 말씀이 ‘아 그렇구나!’ 였다. 뜻밖이었다. 선생님은 나를 이해하려고 하면서도 나의 인생에 대해 조언도 해 주셨다. 선생님은 내가 데모해서 수배가 떨어져서 서울로 회의를 갈 때는 꼭 선생님 타 트렁크에 숨겨서 교문을 나가셨다. 그리고는 체육부장과 차장보고 보디가드를 서서 내가 가자는 곳까지 바래다주라고 하셨다. 당시 우리 체육부장과 차장은 역도 선수였다. 몸무게가 둘이 합해서 270Kg 나갔다. 둘이 있으면 든든했다.
전대협 발족식을 위해 전국통일대장정이 시작됐다. 전국에서 걸어서 대전의 충남대학교로 모이는 것이었다. 강원지역 학생들은 충북대학교에 모여 신탄진을 거쳐 충남대학교로 가기로 돼 있었다. 충북지역 학생들은 우리학교 도서관 앞에서 기다리고....잠시 후 강원지역 학생들이 버스로 도착해서 내렸다. 맨 앞에 내리는 사람이 눈에 확 띄었다. 태백중학교 동창인 권오덕 이었다. 오덕이는 강원대 부총학생회장 이었다. 당시 총학생회장이 구속됐나(?) 해서 총학생회장 직무대행을 맡고 있다고 했다. 반가웠다.
그 무더운 여름 전국의 대학생 약 6,000여명이 충남대학교에 모였다.
충남대 학생회관에서 각 대학 총학생회장들이 모여 전대협 의장을 뽑기 위해 선거를 했다. 서울지역협의회 의장을 맡고 있던 고대 이인영회장이 출마했다. 한편으로 성균관대 회장이 출마했다. 압도적으로 이인영이 이겼다. 이렇게 해서 역사적인 전대협이 완성 됐다.
우리는 전대협 1기다. 그 후로 88년 겨울인가에 모두 감옥에서 나와서 대전 계룡산 입구에서 친목모임을 만들었다. 계룡산악회다. 그렇게 모여 현재까지 25년째 만나고 있다. 우리 전대협 1기 친구들 중에서 국회의원이 5명이 나왔고, 구청장, 시도의원 등등을 해서 상당수가 정치인이 됐다. 물론 나도 도전했으나 공천에서 탈락해 국회의원이 되지 못했다. 못내 아쉽다. 열린우리당 시절이다. 뒤에 상세히 기록하기로 한다.
전대협은 그렇게 만들어 졌다.
우리 학생처장님은 당일 충남대학교에 오셔서 모든 행사를 지켜보셨다. 그날 행사를 마치고 대전 시내에서 한바탕 전경과 싸움이 붙었다. 처장님은 그때도 그 자리에 계셨다.
[나의 인생살이 29]
전대협은 살아 있다.
전대협이 결성되던 87년 여름 전국에 엄청난 수해가 있었다. 특히 충남지역이 심했다. 전대협은 즉시 수해복구지원단을 만들어 대민봉사에 나섰다. 참으로 잘 한 일이다. 전대협이 한때 국민들로 부터 사랑받았던 이유이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성심껏 해야 한다. 국민은 정치집단으로 부터 받은 혜택에 감사 하지만 오래 기억하지는 않는다. 또 다른 것을 요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치집단이 주는 선물이 아니라 국민이 누려야할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인은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노력하지 않는 정치인은 국민으로 부터 외면당할 것이다. 이것을 연장하려고 정치인들은 꼼수를 부린다. 그러다가 감옥 간다. 정치인의 한계다.
아마도 방학이 끝나갈 무렵이었을 것이다. 청주 시내에서 재야단체 주최로 초청시국강연이 있었다. 그런데 경찰이 막았다. 학생들과 싸움이 벌어졌다. 그러던 중 경찰차에 치여서 어린 학생이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시신을 병원에 안치하고 경찰과 대치했다. 사과와 피해보상, 재발방지를 요구하는 시위가 연일 이어졌다. 그런데 어느 개념 없는 증평의 공군부대 중위(?) 인가하는 사람이 시비를 걸어서 아마도 우리학교 학생과 싸움이 벌어져 드잡이를 한 모양이다.
개강이 되고 우리의 총학생회 임기가 시작 됐다. 우리는 총학생회 이름을 무엇으로 지을까 열심히 토론했다. 뜨거운 토론이었다. 결론은 ‘민족충대 제19대 구국총학생회’ 였다. 참으로 거창했다. 언제부터인가 정권의 이름이 붙었다. 그 정권의 철학이 담긴 이름이다. 압축적으로 그 정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그런데,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이건 뭐야~~~
총학생회 출범식을 준비했다. 계속되는 회의, 회의, 회의......
각 단과대 학생회는 11개(?) 정도가 됐는데 거의가 비권 이었고, 우호적인 곳이 2곳, 그리고 한 곳은 우리와 함께 했다. 이거 오래되다 보니까 구체적 숫자가 나오면 자신이 없어진다. 너무 오래된 일이구나....아마도 몇 년 더 지나서 이 글을 썼다면 아마도 지금의 반의반도 못 기억할 거 같다.
총학생회 예산은 학우들이 내는 학생회비로 운영됐다. 한 학기에 5천원으로 일 년이면 1억이 됐다. 엄청난 돈이다. 구경도 못해본 돈이다. 이 돈으로 총학생회와 각 단과대학, 교지편집위 가 배분을 했다. 그래서 나와 총무부장, 그리고 각 단대 회장 이렇게 모여서 여관방에서 밤을 새워 예산전쟁을 했다.
각자 자신들이 사업을 해야 하니 예산을 많이 달라는 것이었다. 각자의 사업예산을 모두 합하니 3억이 넘었다. 나는 니들이 다 해라 하고 배짱을 튕겼다. 그랬더니 한 풀 꺾이기 시작했다. 총학은 우선 대동제 예산과 체육대회 예산, 그리고 각 부서마다 초청강연회나 전시회....등등의 행사를 해야 했기에 예산을 많이 확보해야 했다. 결론은 각 단대별로 학생 수에 따라, 배분하기로 했다. 싸워야할 이유가 없었다. 총학예산은 전체예산의 50% 이렇게 정리 됐다.
예산전쟁도 끝나고 이제는 본격적으로 각종 행사준비에 들어갔다. 그중에 제일 먼저 해야 하는 것이 출범식이었다. 당시 학생들이 우리 총학에 거는 기대는 대단했다. 6월 민주항쟁도 이기고, 앞으로 대선도 있고, 학내문제도 해결해야 하고 등등.....
밤 12시 정각 이었다. 내일이 발족식 이었다.
갑자기 우당탕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복면을 한 무리가 회의를 하고 있는 사무실에 난입했다. 야구방망이, 일본도, 쇠파이프....그야말로 폭력의 모든 것이 동원됐다. 우리는 죽는 줄 알았다. 다행히 이들은 사람을 해치지는 않았다. 사무실을 박살내고는 5분 만에 사라져 버렸다. 당선되는 날 난리를 치더니 시작하는 날 또 난리를 치는구나....
다음날 아침 우리는 이 장면을 학보사에 제보하고 사진을 교내에 붙었다. 학생들이 구름같이 모여 들었다. 총학발대식은 그 덕분에 성황리에 치러졌다. 나는 취임 연설을 통해 학내에 있는 깡패들과 전쟁을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규찰대를 모집했다. 그 뒤로 이 깡패들은 없어졌다.
[나의 인생살이 30]
뜻밖의 사건이 터졌다.
총학 발대식이 있던 날은 두 가지 사건이 동시에 터졌다. 우선 간밤에 깡패들이 난장 부린 것이요, 또 다른 하나는 앞서 시내에서 우리학교 학생이 공군중위와 드잡이 한 사건이 있었는데, 군 보안대에서 우리학교 학생을 교문에서 납치해 산으로 끌고 가 파묻어 버리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 학생은 당일로 경찰에 구속됐다.
두 가지 사건으로 그날 학교는 난리가 났다. 통제가 되지 않았다. 일부 강경파들이 구속학우 석방을 외치며 총학생회장이 나서서 해결하라고 했다. 구출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당연히 나섰다. 이때부터 충북대학교 역사상 가장 긴, 그리고 최대 인원이 참가한 투쟁이 시작됐다. 87년 6월 항쟁을 경험한 터라 봇물이 터진 것이다. 최대 7천명이 참가한 날도 있었다. 역시 준비되지 않은, 조직되지 않은 투쟁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이 학생이 석방되고 나서 나 다음에 총학생회장에 출마했는데 떨어졌다. 한 순간에 얻어진 명성으로는 절대로 대중을 감동시킬 수 없다. 또한 감사의 인사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몰랐을 것이다.
내가 지나오면서 느낀 건데....민주화 운동이나 시민사회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일종의 선민의식이 있는 거 같다. 쉽게 말해 내가 당신들을 위해 나를 버리고 일하고 있으니 당신들은 나에게 감사해야 한다. 뭐 이런 의식인거 같다. 나도 물론이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평소에 사람의 소중함에 대해 많은 말은 하지만 실천에는 옮기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을 가려서 사귄다. 자신들의 애기를 잘 들어주고 잘 따라올 사람을 사귄다. 수공업 적이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선거에 나오면 떨어진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다. 다양한 방법으로 다양하게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하게 접근해야 한다. 다양한 노력을 해야 한다. 물론 나도 그렇게 잘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난 어려서 부터 아르바이트를 통해 다양한 사회 경험이 있어서 학교에 갔을 때 잘 한 거 같다. 그래서 우리 학교 동기들 중에 가장 많은 후배 팀을 가지고 지도할 수 있었다. 물론 비밀조직이라 다는 모른다. 하지만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이 학생은 나중에 나와 노선을 달리하는 그룹에 속했다. 나와 같이 했던 그룹은 세가 약해서 나 다음에 후보를 내지 못했다.
어느덧 사건은 마무리 되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수업하랴, 민주화 투쟁하랴, 각종 행사하랴, 전대협 회의 다니랴....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판이었다. 수배상태라 항상 학생회관에서 잤다. 교내식당에서 밥 먹었다. 건강이 나빠졌다. 하지만 깡다구로 버텼다. 어느 날은 경찰이 덮칠 거라는 정보가 있어서 학교 산속 나무위에서 잠을 잔적도 있었다. 그리고 축제, 대동제가 시작 됐다. 줄다리기며, 고싸움이며, 마당놀이며.....그동안 보지 못했던 우리 민속놀이들이 대거 등장했다. 재야인사 초청강연도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한편 총학 선거 때 우리 명의로 뿌려진 “가자 북으로! 지상의 낙원으로! 기호2번 박영호 이광희 선거운동본부”라는 유인물은 당시 통일교 대학생 조직이었던 원리연구회 학생들이 뿌린 것으로 경찰조사 결과 밝혀졌다. 나도 조사를 받았다. 당시 서부경찰서 보안과장이 하는 말이 박영호가 선거에서 이길 것이 분명한데 왜 저런 유인물을 뿌렸겠나 했다. 나도 보안과장 말에 맞장구를 쳤다. 과장님 제가 짱구 입니까? 이 분하고는 그 뒤로도 오랫동안 인연이 됐다. 내가 첫 구류를 살 때 이양반이 정보과장 이었고, 그가 꾸민 조서로 나는 재판받고 구류를 살았다.
[나의 인생살이 31]
김대중을 만나다.
87년 초가을쯤으로 기억한다. 김대중씨가 6월 항쟁의 결과물로 사면되고 전국에 연설을 다녔다. 청주에도 왔다. 청주교도소에 살았기 때문에 시국강연 첫 장소로 청주를 선택한 모양이다.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 들었다. 나도 구경 갔다. 연설을 참 잘했다. 현실 정치인의 연설은 듣기에 아주 편했다. 귀에 쏙쏙 들어왔다. 나중에 나도 연설을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아마도 그때의 영향이 있었지 않았나 생각한다.
취임 후 첫 행사로 대동제를 무사히 마쳤다. 정국은 바야흐로 대선국면으로 흘렀다. 우리는 ‘민주세력 대동단결로 민주정부 수립하자!’ 라는 구호로 노태우의 당선을 저지하고 민주세력이 단결해 민주정부 수립하자는 노선을 정했다. 구체적 후보전술은 논의가 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전대협에서는 후보단일화와 독자후보, 비판적지지 등의 내용을 놓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결국은 김대중 후보에 대해 비판적 지지를 하기로 결의를 했다.
지역마다 입장이 달랐고, 노선 따라 입장이 달랐다. 마산에 있는 경남대학에서는 총학생회가 김대중에 대해 비판적 지지를 선언하자 총학생회 사무실이 박살났다고 했다. 나도 정권교체를 위해서는 철학적 의식이 부족한 김영삼 후보 보다는 김대중 후보가 더 좋다고 판단했다. 총학 간부들과 회의를 통해 전대협의 방침을 받기로 했다. 그리고 이를 공청회에 붙었다. 반대하는 학우들도 있었지만 우리의 방침이 다수를 이루었다. 그래서 우리 총학에서는 김대중 후보 비판적 지지를 공식 선언했다. 충청대협에서도 김대중 후보 비판적 지지를 선언했다.
나중에 총학 사회부장을 하던 사익이 형이랑 감옥 가서 엄청 논쟁했다. 나는 비판적 지지입장에서 김대중 후보가 더 옳다고 했고, 사익이 형은 후보단일화 관점에서 100m를 뛰는데 누구를 앞에 뛰게 하면 단일화가 되겠냐고 했다. 엄밀히 따져서 비판적 지지도 후보단일화의 일종이었다. 후보단일화를 위해서 좀 더 진보적인 김대중 후보를 지지해서 결론적으로 김영삼 후보가 사퇴하게 하자는 논리였다. 대중들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영삼 후보는 성질이 나서 그대로 밀고나갔다. 두 후보 다 모두 자기가 이길 수 있다고 본 모양이다. 역시 선거는 후보가 중심이다. 아무리 뭐라 해도 후보가 사퇴하지 않으면 헛수고다. 질 수가 없었던 87년 대선은 이렇게 해서 패배 했다.
80년 이후 얼마나 많은 민중들이 죽었던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감옥가고, 고문당하고 했던가! 그렇게 만들었던 민주정부 수립의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나는 이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져야 하나? 역사의 죄인이다. 나중에 어차피 김영삼 후보가 사퇴하지 않을 것이라면 차라리 김대중 후보가 사퇴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그것도 가정의 법칙에 속한다. 쓸데없는 고민이다.
역시 정치는 오묘한 것이다. 아무리 그것이 좋다고 하더라도 대중들과 함께 하지 못하면 결국은 좋은 것이 망쳐진다. 전두환이가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구호를 내세웠는데 우리는 그 뒤로 정의사회 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이치가 같은 것이다. 싸움에서도 진다. 늦더라도 대중과 함께 가는 것이 맞다. 그래야 모두가 승리를 느낄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역사는 절대 후퇴하지 않는다. 대중은 자신의 승리 물을 절대 양보하지 않는다. 역사의 지도부로 나서고자 할 때는 그 역사에 책임을 져야 한다. 포기하면 안 된다. 죽어서도 안 된다. 하지만 고집부리면 안 된다. 그리고 책임질 부분이 있으면 스스로 져야 한다. 역사는 혼자서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지도부라고 표현 했다.
[나의 인생살이 32]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다.
본격적으로 대자보 논쟁이 벌어졌다. 총학 입장은 범민주세력 연합으로 정권교체를 하자는 것이었다. 여기에 반대하는 세력이 등장했다. 바로 얼마 전까지 동지로 지내던 선후배 들이었다. 내가 직접 학습시키던 후배들도 집단적으로 반기를 들었다. 독자후보를 내자는 주장 이었다.
어느 날 도서관 앞에서 나이가 나보다 많은 여자후배가 단식을 했다. “선배들은 단결하라!” 였다. 나는 눈물이 났다. 후배를 설득했다. 하지만 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우리는 공정선거감시인단을 조직했다. 한편으로 기말고사 연기를 학교 측에 요청했다. 나는 이를 위해 도서관 앞에서 단식을 했다. 한 열흘을 했다. 틀림없이 군사정권이 부정선거를 치룰 것이니 우리가 공정선거 감시를 하고 나서 시험을 보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집회를 열었다. 우리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삭발을 했다. 나와 부회장만 하기로 했는데 간부들이 같이 하겠다고 했다. 여학생부장, 차장 등 여성간부들도 머리를 깎았다. 참으로 숙연했다. 학교 측에서는 난감해 했다. 결국은 관철 됐다. 이것도 학생처장님의 덕분이다.
12월 12일 12.12 쿠데타 규탄 대회를 하고 시내로 나갔다. 기획부장이 주도 했는데 체포가 됐다. 나는 13일 있을 “김대중 후보 청주유세에 충청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명의로 된 김대중후보 비판적지지 연설을 해야 했기 때문에 학교에 있었다. 후배들이 무전기를 빼앗아 왔다. 듣고 있는데 무전기에서 ”유행렬 아웃“이라고 들려왔다. 그렇게 기획부장이 구속 됐다. 기구한 운명이다. 원래는 이 사람이 총학생회장 후보였는데 구속돼 내가 대타가 됐는데, 같이 일하다가 또 구속 됐다. 이 사람은 이후 총학생회장이 돼 또 구속 됐다. 학생운동 시절 3번의 감옥살이를 했다. 많지 않은 일일 것이다.
12월 12일 저녁.....우리는 학교 뒤 후배의 자취방에 숨었다. 체포되면 안 되기 때문이다. 12월 13일은 김대중 후보가 서울보라매 공원에서 총력 유세전을 펼치는 날이었다. 전대협 차원에서 총집결하기로 했다. 김대중 후보는 13일 아침 9시에 청주유세를 마치고 서울 유세를 하기로 일정이 잡혔다. 나는 아침 일찍 현장으로 나갔다. 나는 수배상태였다. 잘 숨어서 현장에 갔다.
나는 김대중 후보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덩치도 조그만 녀석이 머리를 빡빡 밀고 머리띠를 동여매고 결의에 찬 모습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본 모양이다. 앞의 사람들이 지지연설을 하는 동안 김대중 후보는 나에게 물었다. “자네는 지금 신분이 어떻게 되나?” “저는 지금 수배 상태 입니다. 오늘 오후에 보라매 유세에 전대협 차원에서 집결하기로 돼 있어 서울로 가야 합니다.” 한참을 생각하시더니 “그러면 내 차를 타게” 하는 거였다. 10월쯤인가 대구 두류공원에서 이인영 전대협 의장이 김대중 후보와 함께 영호남 화합을 촉구하는 집회를 하고 기자단 버스를 타고 나가다 체포돼 구속된 일이 있었다. 김대중 후보는 내가 그냥 나가면 틀림없이 체포돼 구속 될 것이라고 본 모양이다.
잠시 후 나의 연설 차례가 됐다. 나는 충청대협의 입장을 읽어 내려갔다. “안기부 철폐! 김대중!”"민주쟁취! 김대중!“ 이런 내용으로 김대중 후보에 대해 우리 충청대협은 비판적지지 한다는 내용 이었다.
나의 연설이 끝나고 김대중 후보의 연설이 시작 됐다.
나는 한참을 고민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가 현실 정치인의 차에 타면 되나! 학우들과 함께 포위망을 뚫고 서울로 올라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마도 내가 그때 김대중 후보의 차를 탔었다면 나의 인생은 또 다른 길로 갔을지도 모르겠다. 이 또한 가정법 이다.
나중에 어떤 분이 김대중 대통령 집에 가서 앨범을 봤는데 거기에 내사진이 있었다고 말해 주었다. 내가 체포되고 나서 시내는 싸움판으로 변했던 모양이다. 내가 연행됐다는 소식이 전해진 모양이다. 역사는 우연과 필연이 수시로 교차되면서 흘러간다. 가정의 오류도 그래서 범하는 것 같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다면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다. 얼마나 황당한 말인가? 역사는 현실에 있다. 평가에서 가장 황당한 말이 가정법 이다. 평가는 과학적으로 하고 결정한 일이 왜 틀렸는지? 왜 실현되지 않았는지를 논하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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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내와 함께했던 유럽 배낭여행 중 |
[나의 인생살이 33]
대선에서 졌다. 그해 감옥은 왜 그리 춥던지~~~
연설이 시작되자 뒤에서 누군가가 지금 중앙기자단 버스를 타고 포위망을 벗어나자고 했다. 그리고 그 버스로 서울까지 가지고 했다. 이 버스는 김대중 후보를 밀착취재하기 위해 중앙일간지 기자들이 타고 다니는 버스였다. 나는 순간적으로 안 된다고 생각했다. 김대중 후보가 연설을 마치고 군중들과 함께 움직이면서 포위망을 벗어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버스가 곧 출발하니 타자고 했다. 사회부장을 하던 사익이 형이랑 단 둘이서 버스를 탔다. 버스는 어느덧 시내를 벗어나 산남동을 지나 충북대 의대 쪽 고개를 넘고 있었다. 기자들이 ‘학생 수배야?’ 했다. 노래 한번 불러봐 했다. 하지만 아직은 안심할 수 없었다.
충북대 의대 쪽이 보이기 시작했다. 혹시나 문제가 되면 뛰어내려 학교로 도망가면 됐다. 기분이 이상했다. 버스가 섰다. 창문에 커튼을 치고 의자 뒤에 숨어있었기 때문에 바깥 상황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아뿔사~~~밖이 새까맣다. 경찰 4개 중대가 기자단 버스를 포위했다. 고립무원이었다. 학생들은 지금 무심천에 있다.
잠시 후 기자들과 경찰의 말싸움이 시작됐다. 얼마 후 경찰이 차에 올랐다. ‘이 차에 타고 있는 박영호는 전국지명수배자 입니다. 그러니 체포하겠습니다.’ 나는 버스에서 내렸다. 기자들의 플래쉬가 쉬지 않았다. 나는 뭐 대단한 영웅이 된 것 같았다. “12월 18일 저녁에 웃는 얼굴로 뵙겠습니다.” “ 우리가 이깁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사익이 형이랑 경찰호송차에 탔다. 나를 체포한 사람은 내가 대학 2학년 때 처음 청주 서부경찰서에 잡혀가서 첫 구류를 살 때 정보과장을 하던 그 사람이다. 당시 이 사람은 도경 대공분실장으로 일하고 있다고 알고 있었다. 서부경찰서로 향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 총학은 쑥대밭이 됐다. 전날 기획부장, 그리고 다음날 회장과 사회부장이 각각 체포된 것이다.
우리가 구속되고 나서 나머지 간부들은 학생들을 조직해 대선에서 공정선거 감사단 활동을 열심히 했단다. 석방되고 나서 정말 열심히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우리가 연행되고 선거도 지고.....학우들은 박영호 석방하라며 12월 31일까지 투쟁했단다. 대선이 끝나면 기말고사 치기로 하고 시험을 연기 했었는데 기말고사도 거부했단다. 그렇게 해서 그해 충북대 학생 2,500여명이 학사경고(확실하지는 않다.)를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이점에 대해서 역사적 책임감을 크게 느끼고 있다. 내가 그 뒤로 학생운동을 마치고 계속해서 청년운동, 재야운동을 했던 데에는 이러한 책임감이 컸음을 인정한다.
나는 자주 술자리에서 내가 이 운동을 하는 이유를 그렇게 말하곤 했다. 2013년에서야 내가 그 역사적 책임감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다행이다. 30여년의 역사와의 드잡이를 끝낼 수 있었다. 나는 왜 이 역사와의 드잡이를 이 시점에서 끝내려고 하는가? 다시 역사와 어떻게 만날 것인가? 이것이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책임감, 의무감에서 벗어나 다시 자연인으로 돌아가 처음 내가 역사를 만났을 때처럼 그렇게 다시 시작해 보고 싶다. 쉽지 않을 것이다.
연행됐는데 이번에는 때리지 않았다. 대접을 잘해 주었다. 박 회장 수고했어.....저녁에는 조사실에서 통닭도 시켜주었다. 쉽게 진술을 받아내려는 작전이었을 것이다. 다음날부터 조사가 시작됐다. 나는 사익이형한테 형은 아무것도 안했다고 하고 나가라고 했다. 나와 기획부장이 책임지면 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경찰들도 그렇게 하라고 했다. 어차피 누군가 책임지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익이 형은 고집을 부렸다. 자기도 했다고 진술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 세 명은 함께 구속 됐다. 유치장에 오래 있으면 학생들이 자꾸 면회 오고 시끄러우니까 4일 만에 우리는 검찰 송치가 됐고, 검찰 조사를 받고 바로 청주교도소에 입감 됐다.
경찰에서는 특별히 조사 받을 것도 없었다. 모두 인정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처음으로 교도소 생활을 했다. 별로 이상하지도 않았다. 1사 하층 13방에 입감 됐다. 저녁에 입감됐는데....미리 구속됐던 선배, 동료들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각자의 방에서 반갑다고 소리 질렀다.
학생처장님이 면회를 오셨다. 책도 넣어 주셨다. 옷도 한복으로 사 주셨다. 채근담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나는 기독교를 믿었지만 감옥에서는 불교서적도 읽었다. 무슨 말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두 번은 읽었다. 사회과학 서적에서 보지 못했던 역사의 경험과 이치를 알게 됐다. 소설도 읽었다. 친구들한테 영어책도 넣어 달라고 했다. 사익이 형이 15방 엔가에 입감됐다. 당시 교도소 생활은 좀 편했다. 점심 먹을 때는 같이 먹으면서 토론도 했다. 사익이 형이 비판적 지지에 대해 나에게 따졌다. 많은 부분에 공감했다.
어머님이 면회를 오셨다. 담담해 하셨다. 우시지도 않았다. 예수님의 길이니 당당히 가라고 했다. 지금은 어머님이 치매가 진행 중이다. 곱게 늙으신 어머니는 올해 78세 인데, 평소에는 집에서 아침밥 할 때도 한복을 입으셨다. 깔끔하신 분이다. 김치도 너무 잘하신다. 원칙적인 분이다. 목사님이 똑바로 하지 않으면 싸우기도 했다. 아마도 내가 어머니의 성품을 닮았나 보다.
거기서 깡패도 봤고, 오래전 파르티잔으로 활동하다 전향해 살다가 어떤 아주머니를 살해해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도 만났다. 소년수도 만났고, 사기꾼도 만났다. 세상은 그렇게 엉켜서 사는가 보다. 내가 입감되고 다음날 나는 나의 옆방에 박종철 열사를 죽게 한 사람이 입감돼 있는 것을 알았다. 만나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얼마지 않아 보안감호소로 보내졌다고 했다. 만나서 많은 대화를 하고 싶었는데 다음날 보안감호소로 보냈단다......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의 김현장, 서울대 총학생회장 김민석 등 당시에 유명한 사람들이 교도소 7사에 기결수로 많이 있었다. 나는 감기약을 타러 가면서 한번 가서 이분들과 인사를 나눈 적이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수감됐던 병사도 가 보았다.
재판이 시작됐다. 당시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정기호 변호사가 변호해 주었다. 무료로 해 주셨다. 나는 변호사에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그냥 내가 왜 이 운동을 하는지 당당하게 판사님한테 말하고 싶었다. 인정신문이 끝나고 사실심리도 끝나고 최후 진술을 했다. 당시에 어떤 사람들은 판사와 싸우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판사에게 나의 진실을 알리고자 했다. 내가 왜 이렇게 민주화운동에 나서게 됐는지를 소상히 밝혔다. 아마도 이 글 초반에 나오는 그런 얘기를 했던 거 같다. 눈물이 나오려고 했지만 참았다. 당당해야 했다.
2월 초에 선고공판이 열렸고 나와 사익이형은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언도받고 석방됐다. 기획부장인 행렬이 형은 그전에 구속된 일이 있어서 1심에서 찍혔다. 우리는 노태우가 당선되고 취임을 하면 특별사면이 있을 것이고, 그러니 항소하지 말고 기다려 보자고 했다. 결국 노태우는 특별사면 시켜 주지 않았다. 1년을 살게 됐다. 나중에 춘천교도소에서 만기출소 했다. 우리가 총학생회 임기를 마치고 같이 활동했던 동지들과 춘천교도소에서 그를 맞이했다.
[나의 인생살이 34]
잘 못했으면 실천으로 극복해야 한다.
감옥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1988년 4월 총선이 새로운 쟁점이 됐다. 내가 감옥에서 나오고 나서 나는 전대협 2기 준비회의에도 나갔다. 우리학교가 3학년 2학기에서 임기가 시작해 4학년 1학기까지 임기 였으니까.....그래서 나는 전대협 에서도 보기 드물게 전대협 1,2기를 동시에 경험한 사람이다. 오영식(현 국회의원)의장과 함께 전대협 2기를 시작했다.
한편 전대협 1기는 의장이 다섯 명이나 직무대행 체제를 가질 만큼이나 지도부가 많이 구속됐다. 우리 충청대협도 충남대 윤재영 의장이 구속되고 내가 대행체제를 하기도 했다.
2월에 석방됐는데 어느 날 총선을 앞두고 당시 김영삼의 통일민주당과 김대중의 평화민주당, 이재호... 열사 아버님이 이끌던 한겨레민주당의 통합문제가 화두가 됐다. 나도 공감했다. 비판적 지지를 해서 야권통합의 실패로 대선에서 졌다는 자괴감에 나는 총선에서라도 야권이 통합해서 하나로 나간다면 당시 민정당을 이길 것이라 생각했고, 이것이 내가 지난 대선에서 잘못한 것을 조금이나마 반성한다는 의미를 부여하기로 했다.
2월 하순에 우리는 충북대, 교원대, 서원대 그리고 대구지역의 학생들 등으로 구성된 야권통합을 촉구하는 전대협 학생들이라는 가칭으로 서울로 올라갔다. 서소문 공원에서 집회를 했는데 전국에서 모인 학생들은 기껏해야 500명이 안됐다. 이 싸움은 연세대 총학생회장을 하다가 이한열 열사 장례를 치렀던 우상호가 주동이 됐다. 우상호는 미국잡지에 인터뷰를 했는데 국가원수 모독죄로 구속됐다가 석방 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였다. 우상호에 적용된 국가원수 모독죄는 아마 1호일 것이다.
우리는 서소문 공원에서 집회를 마치고 당일 마포에 있는 가든호텔에서 야권3당이 통합 협상회의 하는 장소로 이동했다. 거리행진을 하는데 많은 시민들이 호응해 주었다. 그런데 우리가 신촌 4거리 조금 못 갔는데 경찰이 막았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연행을 시도 했다. 나는 얼른 피했다. 맨 앞줄에서 학생대열을 지도했으니까 충분히 잡힐 수 있었지만 겨우내 감옥에서 단련한 체력덕분에 잡히지 않았다.
한바탕 우당탕탕 한 후에 다시 모였다. 우상호가 없었다. 체포됐단다. 또 구속 됐다. 참 재수 없는 사람이다. 우상호는 당시 몸이 매우 허약했다. 우리가 88년 겨울에 전대협 1기끼리 계룡산 동학사 앞에 있는 식당에서 계모임으로 ‘계룡산악회’를 구성하려고 모였을 때 많은 사람은 우상호는 배낭 메고 올라가야 한다. 그래야 자손을 볼 수 있다고 놀리기까지 했으니까....
그때부터 내가 현장 지도부가 됐다. 마포 가든 호텔에는 3당 협상대표가 모였다. 김영삼 쪽에서는 최형우가 나왔고, 김대중 쪽에서는 확실히 기억나지 않는다. 한겨레민주당 쪽에서는 이재호 열사의 아버님이 나왔다. 우리는 협상하는 호텔을 점거했다. 일부는 호텔 방 앞에서 못나오게 했다. 그 자리에서 협상을 끝내고 통합해 4월 총선에 나가라는 뜻이었다. 방송에서는 9시 뉴스에 생방송으로 나가고 있었다. ‘소위 야권통합을 위한 전대협 학생들’이 점거하고 있다는 그런 멘트가 지금도 생각난다.
얼마를 있다 보니까 협상이 정리돼 각자의 대표에게 승낙을 얻으러 가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이를 믿었다. 그리고 밤 11시에 서대문에 있는 스위스 그랜드호텔 000호실에서 보자고 했다. 순진한 우리였다. 이재호 열사의 아버님은 전권을 가지고 나와서 우리와 함께 그랜드호텔로 갔다. 방이 어리어리했다. 특급호텔의 방을 처음 본 것이다. 얼마 전까지 감방에 있다가 특급호텔 방을 보니까 너무 좋았다. 호텔에 있는 비누가 탐나서 가지고 나왔다.
하지만 양당 협상대표는 오지 않았다. 협상은 깨졌다. 우리는 그날 홍대에 가서 잠을 잤다. 그리고 다음날 쓸쓸한 모습으로 청주로 내려왔다. 이날의 협상결렬로 야권은 각자 총선에 나갔고 90년 1월 김영삼과 김종필은 노태우 꼬붕이 됐다. 민주세력이라고 일컫던 반쪽이 투항해 저쪽으로 갔다. 역사는 또 그렇게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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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님 아버님이 함께 |
[나의 인생살이 35]
누나가 결혼하였다.
집행유예로 감옥에서 나왔다. 방학이라 학교는 조용했다. 겨울이라 엄청 춥기도 했다. 감옥 생활은 그냥 그랬다. 우선 다양한 방면의 책도 읽었고, 그 동안 망가졌던 몸도 추스렸다. 체력단련을 위해 운동도 열심히 했다. 감옥에는 방을 검사하는 일이 3일에 한 번씩 있는데.....영화 7번방의 선물을 보면 나온다......왜 하느냐 하면 감옥에는 워낙 다양한 방면의 선수들이 많기 때문에 3일을 검방하지 않으면 헬기 만들어서 도망가기 때문이란다. 목욕을 가면 온몸이 화투장인 사람도 있고, 용, 호랑이.....나는 그렇게 예쁜 그림이 우리의 몸에 그려진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내 옆방에 인천 송도호텔 조직폭력배 나이트클럽 살인사건(검사가 개입된 당시로서는 엄청 큰 사건임)의 주모자가 있었다. 여러 가지 애기를 해주었다. 그중에 정치깡패 했던 이야기도 해 주었다. 어느 날 사형수가 들어 왔는데 그 사람이 법무부에 소원을 쓰려고 하다가 걸려서 징벌방에 갔다고 했다. 당시 청주교도소에는 기결수도 있었고 미결수도 있었는데 기결수들의 방은 너무 멀어서 들리지 않았고, 미결수는 3개동이 있었는데 소리 지르면 잘 들렸다. 그래서 교도소가 잘못된 행정을 한다고 생각돼 미결수끼리 통방해 농성을 하기로 했다.
보안과장 면담을 하자고 하니까 안 됐다. 그래서 드디어 우리는 각자 방안에 들어가 철로 된 방문을 차면서 구호를 외치기로 했다. ‘교정교화 교도소에 인권말살 웬말이냐!’ 얼마나 철문을 찼던지 발이 아팠다. 앞에 있던 교도관이 신발을 신고 차라고 했다. 덜 아팠다. 보안과장이 왔다. 꼭 떠들어야 옵니까? 우리의 요구를 말했다. 들어 주었다. 그 뒤로 우리는 교도소에서 대장이 됐다. 깡패들도 우리를 인정해 주었다. 추억으로 생각한다.
출감하니 아무것도 없었다. 집도 없고...또다시 총학 사무실에서 잤다. 봄이 오고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등 여러 가지 행사가 있었다. 88년 봄에 누나가 시집을 갔다. 강원도 평창에서 큰 산채전문 식당을 하는 집으로 갔다. 나에게 총학 선거 때 선거자금으로 10만원 준 바로 그 사람과 결혼 한 것이다. 누나는 그 뒤로 많은 고생을 했다. 나 때문에 대학을 포기하고, 대구의 어느 봉제공장에 취직해 도망 나오고, 아버지 밥해주러 초등학교 6학년 때 엄마 품에서 떠나야 했던 나의 누님이 이제 시집을 가신다. 누나! 행복해야 돼!!!
지금은 매형이 서울에서 식당을 크게 하신다. 파주 통일동산에 산내음 이라는 식당을 하고, 이를 브랜드화 해서 서울에서 체인점 사업을 하신다. 한 10개 정도 냈다. 누나는 지금은 강남 대치동 롯데백화점 뒤 먹자골목에서 역시 산내음 체인점을 운영하신다. 가끔 찾아가 본다. 언제나 반갑게 먹을 것을 수북이 준다. 나의 하나 밖에 없는 누님이시다.
2009년 9월쯤 나도 강남 삼성동에 산내음 이라는 식당 체인점을 냈었다. 많은 수업료를 지불하고 내가 운영하던 산내음 삼성동 지점을 다른 사람에게 팔았다. 흑자이기는 했으나 가계규모가 적어서 돈이 되지 않았다. 나중에 계산해보니 돈 번 사람은 따로 있었다. 돈 번 사람은 우선 건물주가 임대료로 제일 많이 벌었다. 다음은 납품업자, 주방장, 홀 서빙.....주인인 나는 결국은 손해 봤다. 1억 투자해서 3천만 원 까먹고 1년 만에 팔았다. 세상을 배웠는데 수업료가 좀 비싸구나....
다시 일상적인 학교생활이 진행됐다.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서 여러 가지 유화조치를 취해서 별로 할 일이 없었다. 노태우 정권의 탄생에는 우리의 실수가 많은 보탬이 됐기 때문이다. 죄인 된 심정이었다. 학우들은 나 때문에 엄청 많이 학사경고를 받았단다.
큰 싸움에서 패배하면 대중들은 엄청난 시련에 빠진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되지만 다음의 싸움에는 함부로 나서지 않는다. 대중들의 싸움이 쓰나미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피와 땀이 있었는가? 우리는 이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 노력으로 승리를 눈앞에 두었는데 그렇게 패배하고 나면 정말로 싸움을 이끌었던 사람들은 역사의 죄인이 되는 것이다. 나는 역사의 죄인이 됐던 것이다. 학우들은 ‘니는 잘 했지만 결국은 졌다’며 위로를 해 주었지만 그 들이 갖는 실망감은 다시 조직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기에 충분했다.
4학년이 됐다. 학생회장 임기가 반이 지나갔다.
학교도 조용하고....어느 봄날부터 학교는 불량식품 추방 차원에서 학교에 들어와 도넛이나 떡을 파시는 아주머니들을 쫓아내기 시작했다. 경비아저씨들과 아주머니들과의 숨 막히는 전쟁이 시작됐다. 나는 이 사실을 알고 학교당국에 중단을 요구했다. 아저씨들이 무슨 죄가 있으며, 아주머니들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또한 돈 없는 배고픈 학우들이 조금 사먹는데 그걸 못 사먹게 한다? 어린애들도 아니고......
학교에서는 나의 요구를 받아 주었다. 아주머니들이 무척 좋아라 했다. 나중에 졸업하고 학교에 갔을 때 아주머니들이 나를 알아보고 달려와 도넛과 떡을 주셨다. 지금도 계신지 궁금하다. 또한 학교 식당의 아주머니들의 고용 문제에 대해 신경 썼다. 노조가 만들어 졌다. 점심 먹으러 가면 국을 한 국자 더 주신다. 감사했다. 모두 모두 건강히 잘 계시기를 기도해 본다.
5월에 다시 차기 총학생회장 선거가 있었다.
당시 충북대학교에는 학생운동 그룹이 두 개로 갈라졌다. 87년 7월쯤인가 [나의 인생살이 25]편에 나오는 상당산성 모임 이후로 그렇게 갈라졌다. 더군다나 대선에서 졌으니 그 논쟁이 얼마나 심했겠는가? 우리 그룹은 후보를 내지 않기로 했다. 다른 그룹에서는 [나의 인생살이 30]편에 나오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석방돼 출마를 했다. 그리고 비권의 학생들이 출마를 했다. 몇 팀인지 생각나지 않는다. 그만큼 멘붕 상태에서 치러졌기 때문이다.
선거에서 소위 운동권이 지고 비권이 당선됐다. 나는 더더욱 죄인 된 심정이었다. 비록 나가 속한 그룹의 사람은 아니어도 나와 1,2 학년 때같이 투쟁하던 동지였다. 역사와 민족을 생각하고 민중을 생각하는 그룹의 친구가 당선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떨어 졌다. 내가 잘못해서 결국은 다음 총학생회장이 비권으로 넘어갔다는 생각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나는 노무현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을 생각해 본다. 진정으로 역사를 책임지는 것은 어떤 것인가? 정권재창출이 올바른 것인가? 아니면 정권을 빼앗기더라도 정권교체가 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 단편적인 판단은 아니겠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곰곰이 생각해 볼 문제이다. 유시민 전 장관은 정권교체가 되는 시스템을 택했던 거 같다. 정권이 저쪽으로 넘어가고 다시 한 번 이길 기회를 놓쳤다. 전쟁이 눈앞에 왔다는 뉴스에 밤잠을 설친다.
[나의 인생살이 36]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비권 총학생회가 출범하면서 나는 일찍 사무실을 비워줬다. 이들은 나에게 전대협의 활동도 하면서 열심히 민주화 운동도 하겠다고 했다. 그러더니 우리 그룹의 후배들을 일정정도 학생회 간부로 쓰기도 했다. 일종의 연정인 셈이다. 그나마 조금은 위로가 됐다.
3학년 2학기 성적은 그야말로 쌍권총에 DDD였다. 내가 다니던 법학과는 졸업학점이 150학점 이었다. 그래서 제때 졸업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졸업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5월 달 총학선거가 끝났다. 우리는 마무리를 잘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5월 쯤 이었다. 서울대 총학생회장 선거에 나온 김중기 후보가 남북학생회담을 공약으로 내걸면서 정국은 일대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나는 깊이 생각했다. 비록 대선도, 총학선거도 졌지만 대중들의 피어오르는 민주화 열기를 한데모아 더 멀리 나아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김중기 학생의 제안은 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데 충분했다.
김중기의 기본 구상은 자신을 단장으로 전국을 6개 권역으로 나누어 각 권역별로 두 명의 회담대표를 선정해 총 13으로 구성하고, 회담은 88년 6월 10일 판문점에서 하자는 것이었다. 전대협에서 이 문제가 논의 됐다. 서울대 총학생회장 후보의 제안이 어느덧 전대협 차원의 일로 됐다.
88년이 되면서 전대협은 더욱 강고해졌다. 나는 2기에도 각 지구대협 의장들이 참여하는 중앙상임위원이 됐다. 초기 6개 권역별로 구성됐던 지역조직이 17개의 지역조직으로 확대 재편됐다. 그래서 충청대협으로 돼있던 조직을 충북, 충남, 대전으로 나누어 조직하고 이를 다시 충청대협으로 하는 그야말로 구국의 강철대오가 돼가고 있었다. 4월인가에 충북지역의 5개 대학의 총학생회장들이 모여 충북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를 만들었다. 내가 초대의장이 됐다. 이제 충북지역에서도 전국 어디에 내 놓아도 손색이 없는 민주화 운동의 요체인 학생대표 조직이 건설된 것이다.
나는 충청지역을 대표하는 회담대표가 됐다. 또 다른 한명은 대전 한남대학의 정순영 학우였다. 나중에 안 일인데 강원지역 대표였던 이광희는 나의 고등학교 후배였다. 당시 강대 부학생회장이었다. 학교에 대자보를 붙였다. 김중기 학생의 남북학생회담 제안서였다. 난리가 났다. 제안서는 ‘사랑하는 김일성 종합대학 학우 여러분!’ 이런 식으로 시작됐다. 문제는 사랑하는 김일성 종합대학 학우 여러분 이라는 표현이 이적표현물 이라는 것이었다. 사실 나도 처음에는 뜨끔했다.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공개적으로 쓴다는 것이 두려웠다. 바로 수배가 떨어졌다. 대학 다니면서 구류, 수배, 구속, 수배....
방학을 앞두고 있어서 학우들한테 인사도 못했다. 경찰 쪽과 보안대 쪽에서 워낙 세게 나왔다. 교내에 있어도 체포하러 온다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에 경찰 특공대가 들어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래서 급하게 학생회관 뒤편에 있던 나무위로 올라가 숨었다. 거기서 잠이 들었다. 타잔도 아니고......안 떨어지고 잠을 잔 것을 보면 내가 어릴 적 타잔을 열심히 본 덕을 본 것 같다. 간단하게 내가 남북학생회담 대표로 나가게 됐다는 인사말을 대자보로 알리고 서울로 갔다. 여기서 다시 체포되면 나는 구속될 것이다. 그것도 올 초에 집행유예로 석방됐으니 외상값도 치러야 하고, 누범이니 가중처벌에다가.....꼴에 법대라고 형량계산까지 했다. 처음에는 집시법과 대선법 이었는데 이번에는 집시법에 국가보안법이 추가되니 족히 3년은 살 것 같았다. 아이고......하지만 나는 우리 민족의 통일에 관한 문제인데 하나도 두려움이 없었다. 분단이 우리에게 주는 고통을 생각하면 하루 속히 통일이 오기를 바랐다.
연세대학에 겨우 들어갔다. 연대 총학사무실에서 집단적으로 인터뷰를 했다. 당시 전국 대학에 6.10 남북학생회담 13인 대표자들의 사진이 실린 포스터가 나붙었다. 우리의 얼굴이 만방에 알려진 것이다. 경찰이 굳이 수배전단을 붙이지 않아도 됐다. 나는 북한 학생들을 만나면 제일먼저 무슨 말을 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우리 학생들이 의기투합해 통일의 길을 앞당기자! 뭐 이런 정도의 말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거 같다.
6월 5일쯤에 연대에 도착했는데 행사는 10일이고, 어디 숨을 때도 없었다. 아는 사람도 없고....그런데 누가 찾아 왔다.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연대의대 다니는 3학년 때 같은 반을 했던 친구다. 나는 그 친구의 의대 기숙사에 며칠 숨어 있었다. 친구야 고맙다.
드디어 6월 10일이 됐다. 전국에서 2만 명 이상의 학생들이 모였다. 외신을 비롯한 언론이 엄청 모였다. 그야말로 엄청난 행사였다. 통일의 물결이 한반도를 휘감았다. 역사의 현장에 있는 기분은 참으로 묘했다. 하지만 우리는 가지 못했다. 노태우 정권은 사력을 다해 막았다. 우리 학생대표들은 8.15일 다시 회담 추진을 선포하고 일단 행사를 정리하기로 했다. 수배된 몸으로 어떻게 어떻게 해서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방학이라 학교에는 몇몇 도서관 다니는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조용했다. 매미 우는 소리만 요란할 뿐 이었다.
[나의 인생살이 37]
뭘 하지?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이제 임기도 마쳤고, 마지막으로 졸업준비위원장으로 앨범 제작을 해야 했다. 각 단과대학 회장들과 합심해서 잘하기로 했다. 지루한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공부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몸이 자유롭지 못하니 갑갑했다. 이때쯤 해서 노태우정권은 1988년 7.7 선언을 했다. 소위 북방정책을 펴겠다고 했다. 우리의 통일운동 노력이 일정하게 반영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8.15 2차 남북학생회담 대표로 또 나가야 하나? 아니면 다른 일을 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다. 나는 우선 학교에 남아서 충북대 학생운동 조직의 재건을 위해 노력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우리 그룹이 세가 취약하니 후배들과 조직을 확장하는데 열심히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충북대협 대표자 회의 때 우리 학교의 사정을 말하고 2차 학생회담 대표를 한국교원대학교의 부회장에게 넘겼다. 기꺼이 본인이 나서겠다고 했다. 교원대는 나하고 여러 가지로 인연이 깊은 학교다. 좋은 후배들이 많다.
전대협 에서는 통일선봉대를 만들어 전국에 통일대장정을 나섰다. 우리 학교에서도 수십 명의 학생들이 나갔다. 그러던 8월 초 어느 날 교원대학교 총학에서 통일선봉대 교육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수배 상태로 교원대학교에 갔다. 오전 강의를 마치고 점심 먹으러 교원대 앞 미원이라는 동네의 어느 분식집에 들어갔다. 경찰이 쫙 깔린 사실을 몰랐다. 아니 철저하지 못했다.
밥을 먹는데 서부경찰서 아는 형사들이 들이 닥쳤다. 나는 순간적으로 식당 뒷문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문이 잠겼다. 형사들이 나의 허리춤을 잡았다. 나는 조용히 갈 테니 놓으라고 했다. 창피하게 하지 말자고 했다. 형사들이 나를 놓아 주었다. 식당 앞문을 나오자마자 들입다 뛰었다. 식당에서 교원대 정문까지는 족히 1Km는 됐다. 8월 초이니 얼마나 더웠겠나......얼마를 뛰었는데 경찰이 차를 타고 쫒아왔다. 나는 논두렁으로 뛰었다. 뒤에서 나이 먹은 정보과 형사들이 따라오면서 외친다. ‘영호야 서!’ 나는 속으로 ‘미쳤냐?’ 하면서 죽을힘을 다해 정문을 향해 뛰었다. 정문이 보였다. 그 순간 논두렁에서 미끄러졌다. 논에 확 자빠진 것이다.
막걸리를 한잔해서 인지 곧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논에 누웠는데 경찰이 나의 배 위로 넘어졌다. 그렇게 편안할 수 없었다. 논물이 따뜻했는데 엄청 시원하게 느껴졌다.
체포돼 서부경찰서로 갔다. 온 몸이 흙투성이였다. 목욕을 했다. 그리고 한잠 잤다.
내가 잡히고 나서 교원대 후배들은 교원대 학생과에서 내가 온 사실을 경찰에 일렀다고 생각하고 학생과를 박살냈다. 이후 이들은 징계를 먹었다. 나는 이 후배들이 나중에 교직에 나가지 못 할까봐 염려했다. 나 때문에 엄청난 피해가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이 친구들은 공부를 잘해서 모두 발령이 났다. 그 친구들의 친구 중에 친구들이 데모하면 옆에서 물 떠다주고 돌 깨주고 하는 학생이 지금의 마누라가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다시 유치장에 입감돼 조사를 받았다. 남북학생회담 대표로 나간 이유에 대해 집중적으로 캐물었다. 나는 진솔하게 얘기 했다. 분단 때문에 우리 민족이 고통당하고 있다. 전쟁을 없애기 위해서는 평화통일을 해야 한다. 헌법에도 평화통일을 해야 한다고 했다. 뭐 등등 나의 소신을 장황하게 설명했다. 이틀째 또 조사가 시작됐다. 똑 같은 소리를 반복한다. 이제 한번만 조사를 더 받으면 구속영장이 발부되고 나는 구치소로 또 가야 한다.
3일째 아침이 됐는데 형사들이 불렀다. 허리띠를 내주었다. 그리고는 정보과장실로 데리고 가는 것이었다. 기분이 묘 했다. 정보과장이 하는 말이 내보내 주는데, 서울 집회에는 가지 말라고 했다. 이미 내가 잡히고 나서 충북지역 통일선봉대가 떠나고 없었다. 경찰에서는 형사 두 명을 나에게 붙여서 내보냈다. 왜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7.7 선언이후 6.10 남북학생회담 수배자들에 대해 수배해제 조치가 내려 졌다는 것이다. 이게 웬 떡인가?
나는 그날로 형사 두 명의 호위를 받으며 대전으로 갔다. 내가 서울로 갈까봐 나를 보호한다는 차원에서 그런다고 했다. 대전에 가면서 내가 형사들한테 말했다. ‘나는 수배도 아니고, 체포된 것도 아니고...현행범도 아니고 당신들이 나를 잡을 근거가 없다. 그러니 오늘 저녁 여기서 자고 내일부터는 내 맘대로 움직일 테니 따라오지 마라. 다만 약속은 지킨다. 그러니 당신들도 휴가라고 생각하고 가라’ 고 했다. 다음날부터 서로 자유의 몸이 됐다.
그리고는 다음날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갈 데가 없었다. 방학인데다가 동료들은 모두 통일선봉대로 나갔고.....나는 후배를 한명 불렸다. 그리고는 학생처장님을 찾아갔다. ‘선생님, 연행됐다가 나왔습니다. 여차저차 해서 이제 좀 쉬려고 합니다. 죄송하지만 용돈 좀 주세요’ 염치는 없었지만 나에게 돈이 한 푼도 없어서 선생님께 요청을 드렸다. 처장님은 흔쾌히 용돈을 주셨다. 편히 쉬다 오라고 했다. 그날로 나는 후배와 충남 대천 해수욕장으로 갔다. 민박을 하나 얻어서 실컷 잠자고 놀았다. 내가 대학에 들어와 처음으로 누려보는 나만의 자유였다.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편할 수 없었다. 놀고먹고 자고......미안한 감이 한편으로 있었지만 그냥 쉬고 싶었다. 먼 길을 그렇게 달려 왔다.
대천해수욕장에서 쉬고 있었다. 5일째 쯤 지났는데 TV에서 충남지역 학생들이 통일선봉대를 구성해 통일대장정으로 대천에 온다는 뉴스가 나왔다. 가슴이 떨렸다. 나는 후배와 다시 서울로 향했다. 연대는 봉쇄됐고 고대로 갔다. 겨우 겨우 담벼락을 넘어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연대로 갔다. 2차 남북학생회담도 정부의 봉쇄로 무산됐다. 그리고는 시간이 흐른다.
[나의 인생살이 38]
전대협 탈퇴사건이 터지다. 대학을 졸업하다.
88년 9월이 돼 4학년 2학기 개강이 됐다. 임기도 끝났고 지긋지긋하던 전두환 군사독재도 끝났고....역시 물태우였다. 평상시 학교생활로 되돌아갔다. 동생은 고3이 됐는데 어디에 있는지 만날 수가 없었다. 막내 동생이 나 때문에 무척 고생을 했다. 경찰이 나의 소재를 알려고 동생을 엄청 괴롭힌 모양이다.
11월쯤 인가? 군대 면제 통보가 왔다. 민주화운동 관련 수감이력 때문이란다. 기분이 묘했다. 육사 가서 좋은 군인이 되겠다고 마음먹으면서 중학교 마치고 춘천으로 유학 가던 일을 생각해보면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에 무척 아쉬웠다. 사실 내가 대학 1, 2 학년 때는 전방입소 훈련도 했다. 나는 철원 6사단으로 갔었는데 철책선을 봤다. 공수훈련도 받았고, 막타워도 뛰어 내린 적이 있다. 나는 체질적으로 군대가 맞는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기숙사 생활, 대학에서의 운동권 조직생활, 감옥생활 등등을 보면 내가 군대 갔으면 잘 했을 것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대학생을 군대조직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비판도 많이 했다. 민족군대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용병이 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졸업을 해야 하는데 성적이 좋지 않았다. 한 학기를 더 다녀야 했다. 법학과는 졸업학점이 150학점이다. 일반학과 보다 10학점이 많았다.
89년 5학년 1학기 개강을 했다. 5월 쯤인가? 나 다음에 당선된 충북대학교 총학생회장과 총대의원회의장이 전국 최초로 전대협을 탈퇴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나는 깜짝 놀랐다. 이 사람은 지난 여름방학동안 8.15 남북학생회담 행사를 위해 연세대에도 갔었던 사람이고, 우리 후배들이 총학에 간부로 있기도 하고.....나름 열심히 하겠다고 했는데....이게 어찌 된 일인가? 총학생회장과 총대의원회의장이 동시에 성명을 낸 것이다.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바로 학생총회가 소집됐다.
충북대학교가 살아 난 것이다. 비록 내 다음의 총학생회가 운동권이 당선 되지는 않았지만 학생들의 마음은 살아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 이름을 따서 ‘쌍철용’ 이라고 불렀다. 학생총회에서는 총학생회장 탄핵안이 통과 됐다. 아마도 당시에 전대협 와해를 위해 안기부에서 공작을 했을 것으로 추측해 본다.
89년 8월! 여름에 졸업을 했다. 내가 졸업하던 날 많은 사람들이 축하해 주었다. 매형이 와서 밥을 샀다. 꽤 많은 동료, 후배들이 초청됐다. 유명한 갈비집에서 먹었다. 아마도 대학 들어가서 처음으로 맛있게 먹었던 거 같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몸이 자유의 몸이 됐다. 수배도 없다. 경찰이 쫒아 다니지도 않는다.
너무 편했다.
우리 민족충대 19대 총학생회 간부들은 정말 좋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끝나고 ‘일구회’라는 계모임을 만들었다. 지금은 자주 모이지 않지만 각자의 생활에 열중이다. 치킨집 사장도 있고, 채팅으로 만난 경찰과 결혼한 사람도 있고, 학원을 경영하는 사람도 있고, 도의원도 있고, 기획사 사장도 있고, 백수도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모두 모두 사랑한다. 우리는 임기를 마치고 MT를 가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엄청 울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나를 호위하던 역도선수 출신으로 150Kg 나가는 체육부장. 차장도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울었다.
그렇게 그날 밤은 지나갔다.
그렇게 나의 학창시절은 저물어 갔다.
85년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친구 세 명이 강원도에서 청주로 대학 때문에 처음 와서 혼자 덜렁 합격하고, 그렇게 시작된 나의 대학생활은 참으로 파란만장 했다고 본다. 나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이렇게 하려고 대학 간 건 아닌데 어쩌다 이렇게 됐다. 5.18 광주민중항쟁을 기억한다. 민족의 태양이라던 박정희가 친일파 출신이요 좌익출신이요 전향자요 쿠데타의 주역이요 독재자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전두환이 독재하면서 민주주의를 말살하는 것을 보았다. 세상이 눈에 보였다. 역사가 보이기 시작했다.
평범한 한 사람이 어떻게 해서 운동권이 되고 민족과 민중을 알게 되며, 통일과 민주주의를 위해 어떤 일을 했는가를 되돌아보게 된다. 많은 실수도 있었고, 많이 울었다. 함께 해준 개신골 1만2천 학우들께 감사드린다. 충북대협 학우들께 감사드린다. 충청대협 학우들께 감사드린다. 전대협 학우들께 감사드린다. 충북대학교 교수님들과 교직원 모두께 감사드린다.
이렇게 해서 나의 인생살이 2막 [15편부터 38편까지]이 끝나게 됐다.
앞으로 전개될 3막에서는 학교 졸업 후 청주에서의 재야운동 이야기, 청년운동 이야기, 전국단체로 진출한 이야기, 결혼한 이야기 등을 써나 갈 것이다. 4막에서는 정치권에 들어가서 겪은 애기를 써나갈 것이고 마지막으로 5막에서는 지난 대선의 패배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써보고자 한다.
많은 관심과 조언 당부 드린다.
39편 이어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