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생살이 86]
무기력이 사람 잡네!
내가 중앙당 당직자들을 시도 당 사무처장으로 순환 근무를 하자고 한 이유는 무엇보다 지역과 중앙당의 유기적 업무 협조 체제를 위함 이었다. 아울러 시도 당에는 위원장이 바뀌면 당직자도 모두 바뀌는 체제였다. 일종의 시도 당 위원장 사조직 같았다. 그래서 시도 당 위원장이 바뀌면 중앙당과 단절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으로 중앙당 국장들을 지역으로 내려 보내 향후 지방선거에 출마시켜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 개인적으로는 춘천에서 여의도로 출퇴근 하는 것을 정리도 하고 싶었고, 장차로 지역에서 정치를 하고 싶어서였다.
그렇게 해서 나는 얼떨결에 중앙당 당직을 사표 냈다. 1999년 10월쯤 월급쟁이가 돼 2003년 9월까지, 그리고 출마를 위해 청주로 가서 10월부터 2004년 5월까지 백수로 있다가 2004년 5월부터 2008년 9월까지 월급쟁이를 했다. 근 8년을 월급쟁이로 생활을 한 것이다. 중앙당 당직자로 말이다. 이 사이에 나는 정치인에서 월급쟁이로 전락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무런 준비도 없이 계획도 없이 당이 하는 짓거리가 맘에 안 든다고 성질부리면서 사표를 낸 것이다. 나는 김교흥 수석부총장을 원망했다. 자기가 나보고 충북 사무처장으로 가라고 해놓고 책임도 지지 못했으니 당연히 원망할 수밖에.....사람을 책임지지 못하는 사람은 성공하기 어렵다. 한 사람의 운명이 걸린 문제인데 함부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과는 가까이 안하는 것이 상책이라 하겠다.
내가 충북 사무처장으로 가지 못하는 것은 중앙당 입장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단지 시도당위원장이 반대하는 문제였다. 중앙당에서는 내려가라고 하고 시도 당에서는 받지 않고...핑퐁이다. 내가 핑퐁의 공이 돼 버린 것이다. 참 비참하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내려 보내고 나를 중앙당으로 발령을 내면 되는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소송을 할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내가 밥 먹던 곳인데 소송까지 한다는 것이 마음에 놓이지 않았다. 하지만 앞으로는 그렇게 안 할 것이다. 후회한다. 중앙당의 어떤 선배는 소송해서 이겼다. 지금도 당직자로 일하고 있다. 세상은 그런 것인 가보다.
며칠이 지나니까 앞이 막막했다. 다행이도 아내가 교사로 돈을 벌고 있으니까 그나마 위안이 됐다.
며칠이 지났을까 강원도당의 심기준 처장이 전화를 해왔다. 강원도당에 와서 잠시 있으라는 것이었다. 사실 기준이 형은 나와 같이 새천년민주당에 있다가 내가 열린우리당으로 갈 때는 함께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떤 사유인지는 모르지만 열린우리당으로 와서 강원도당에 근무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광재 의원하고 원주고 선후배 사이가 될 것이다. 이광재는 강원도 출신이기는 하지만 강원도에서 활동을 하지 않아서 지역에 좀 약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광재 입장에서는 자신을 잘 보호해 줄 사람이 필요 했을 것이다. 그것이 원주고 선배인 기준이 형이 필요한 이유였을 것이고 내가 강원도당 사무처장으로 가려고 할 때 나를 반대한 이유가 됐을 것이다.
나는 별 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냥 알았다고 했다. 중앙당 국장을 하던 사람이 단지 밥그릇 때문에 강원도당의 하위 당직을 맡는다는 것이 조금은 쪽 팔렸지만 나는 그냥 받았다. 기구표에도 없는 전략기획실장이라는 자리를 맡았다.
이때부터 나의 향후 계획은 개판이 돼 버린다. 계획이 없어지고 상황 논리만 남게 됐다. 강원도당에서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었다. 나에게 아무런 권한을 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크게 할 일도 없었다. 만약 할 일이 있다면 내가 출마를 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준비가 더 필요한 부분 이었다. 갑자기 긴장감이 확 떨어지니까 이거는 완전히 시계불알 같았다. 아침에 출근했다가 저녁에 퇴근하고 이런 무료한 시간이 반복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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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아프던 상현이가 고 1이다 |
[나의 인생살이 87]
노무현, 김대중 대통령이 서거 하시다
나올 때는 순서가 있지만 갈 때는 순서가 없다. 어쩌려고 이렇게 될까?
순식간에 두 분의 민주지도자를 잃었다.
2008년 이명박 정부의 미국소고기 수입에 저항해 시작된 촛불집회로 이명박 정권은 위기를 맞았다. 그 후 이명박 정권은 대 반격을 시작했다. 2009년이 됐다. 이명박 정권은 모든 것을 되돌리고 있었다. 민주정부 10년 동안의 모든 성과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화도 많이 났다. 미디어법이 날치기 통과됐다. 이놈들이 언론을 완전히 장악한 것이다.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수 있는가?
나는 춘천지역의 시민단체들과 함께 근 일주일 가까이 명동에서 미디어법 반대 서명운동을 했다. 정당에 있으면서 그것도 집권당에 있으면서 데모를 해본 적이 없다. 오히려 데모를 받았다. 그런데 야당이 됐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서명운동도 마찬가지였다. 2008년을 그렇게 재미없게 보내고 이제 조금씩 정신을 차리게 됐다. 나는 민주당이 좀 더 투쟁적이고 시민들과 함께 하는 야당이 돼야 된다고 생각했다.
이광재가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구속 되고 나서 강원도민들은 이명박 정부에 대해 정치보복이라고 반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나는 이것을 이명박 정권이 강원도의 자존심을 건드는 것이라고 홍보했다. 먹혀들어 갔다. 하지만 대법원에서는 이광재에게 정치자금법 위반을 선고했다. 그리고 이광재는 그 뒤에도 다른 건으로 돈을 받아서 지금도 재판 중에 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것 같다. 본인이 아니라고 하면 그만이지만 내가 그 사람의 속내를 보지 않은 이상 정치적 탄압으로 보던가 아니면 대법원의 판결을 믿던가 해야 하는데....나는 대법원의 판결을 믿기로 했다. 이광재는 부정한 돈을 수수한 옳지 못한 정치인이다. 나는 이런 사람들이 이제는 더 이상 정치권에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수사가 시작돼 아주 박살을 내고 있었다. 급기야는 노무현 대통령을 소환조사까지 했다. 물론 대통령을 지냈다고 하더라도 잘 못했으면 처벌 받아야 한다. 하지만 대통령 본인이 직접 한 것이 아니라면 정치적으로 다양한 고려가 있었어야 했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은 아무런 예의가 없었다. 면박 주는 꼴 이었다.
2009년 5월 23일! 토요일 이었다. 나는 새벽에 춘천 근교에 있는 조그만 저수지에 붕어를 잡기 위해 낚시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침에 집사람한테서 전화가 왔다. 노무현 대통령이 자살을 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올 것이 왔다고 생각이 들었다. 나의 직감으로 그 상황이 충분이 그려졌다. 왜 자살을 선택했는지가 말이다. 그리고 당장 무엇을 할 것인가가 그려졌다. 낚싯대를 접고 집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고 강원도당 사무실로 나갔다.
그리고 회의실에 빈소를 차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조문을 왔다. 나는 그들을 조용히 맞이했다. 한편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그렇게 죽음을 선택한 것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어쩌랴 운명인 걸~~~밤 낮으로 돌아가면서 당직자들이 조문을 받았다. 허무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내 몸의 절반이 무너진 느낌이라며 애통해 했다.
그리고 얼마 후 2009년 8월 18일!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셨던, 통일을 위해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던 민주주의의 사수를 위해 최후의 일각까지 독재자와 싸우라 시던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병환으로 서거 하셨다. 나는 전과 똑 같이 사무실에 빈소를 차렸다. 그리고 상주로써 조문객을 맞이했다.
순식간에 두 분의 전직 대통령을 잃었다. 이것이 무슨 운명이란 말인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서서히 당직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정당의 당직자로 정년퇴직 할 것도 아니고 해서 나는 나의 먹고 살거리를 찾았다. 그러던 9월 어느 날 서울에서 산채전문점 식당을 하는 매형이 전화를 해 왔다. 그리고는 강남 삼성동 코엑스 뒤에 좋은 가계가 있으니 할 생각이 있으면 당장 계약금을 가지고 올라오라고 했다.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카드로 돈을 인출 했다. 그리고 서울로 올라갔다. 바로 계약서를 썼다. 왜 그렇게 했는지.....하여튼 운명과 같았다. 뭔가에 홀린 듯 했다. 보증금 5천에 월 250만원(부가세별도) 그렇게 계약서를 썼다. 그리고 계약금으로 5백만 원을 넘겨줬다.
그날 저녁에 춘천으로 내려와 강원도당에 사표를 제출 했다. 중앙당 당직을 사표 낸지 근 1년 만에 강원도당 당직까지 사표를 냈다. 2008년 9월에 강원도당 전략기획실장으로 들어와 2009년 9월 사표를 제출 했다. 이제는 완전히 실무 당직을 정리 한 것이다. 월급쟁이를 청산한 것이다. 자영업자가 된 것이다.
내가 그렇게 빨리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두 분의 대통령의 상주를 했고 그리고 그것으로 내가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두 분이 대통령을 하실 때 월급쟁이 당직자를 했다. 그분들이 나를 먹여 살려 준 것이다. 물론 그 돈도 세금이니 국민들이 먹여 살려 준 것이다. 그러니 그분들이 떠날 때 마지막을 지켰으면 이제는 나도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아무 꺼리 낌 없이 월급쟁이 생활을 떠날 수 있었다. 정치권에서 완전히 멀어지려고 했다. 탈당도 고려했지만 너무 성급하다는 생각에 잠시 2,000원의 당비만 내고 있자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서울 강남의 삼성동 코엑스 뒤 먹자골목에서 식당 주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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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 운동권 동지들 |
[나의 인생살이 88]
식당 주인으로 다시 태어나다
아마도 나는 더 이상의 정당 실무당직자 생활이 싫었던 모양이다. 정치인으로 나서려고 했으나 어느 듯 오랜 실무당직자 생활로 나는 정치인이 아닌 생활 노동자가 된 것 같았다. 그리고 당직자 생활이 평생직장도 아니고 그렇다고 월급이 많은 것도 아니고 또한 무슨 기술을 배우는 것도 아니고.....이런 식으로 살다가는 나중에 브로커 밖에 할 것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빨리 그만 두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그만두려고 하니 무얼 해야 할지 막막했다.
요즘 정치하는 친구들을 가만히 보면 그 사람들은 정치 밖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없어 보인다. 정치를 그만두고 할 일이 있다면 나는 지금이라도 정치를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다. 정치가로써 살 것이 아니라면 ...생계형으로 정치하지 말라는 충고를 하고 싶은 것이다. 정치가란 비전을 제시하고 철학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배고파도 한 우물을 파야 한다. 그냥 민원이나 해결하고 적당히 본회의 장에서 찬성에나 손들고 하려면 정치를 그만 두라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정치인들은 당선을 위해 이당 저당 옮기고, 그리고 탈당했다가 다시 뭉치고....철학 없는 정당의 꼬락서니다.
최근 486 세대들이 민주당 내에서 진보행동이란 블록을 만들어서 활동하다가 해산한 일이 있다. 나는 이들의 정치행보를 보면서 참으로 안타까워했다. 왜 저렇게 무능력할까? 이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눠지는데 하나는 새천년민주당 시절이나 열린우리당 시절 등 정당이 만들어질 때 선거를 앞두고 지도부에 의해 영입된 케이스와 정말로 지역에서 열심히 활동해서 공천 받고 당선된 사람들이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정치를 하는걸 보면 역시 활동 반경이 다르게 나타난다. 물론 둘 다 똑같은 면이 있다.
스스로 크려고 하기 보다는 어디에 기댄다는 것이다 이점이 이들이 나중에 실패한 원인이라 보면 되겠다. 솔직히 이들은 당내에서 소리 한번 질러보지 못하고 어느 듯 기득권자로 변해가고 있었다. 기득권이 있는 정당의 선배들에 기대어 하청정치를 하고 있었다. 결국은 망했다. 이것이 그들이 진보행동을 해산한 이유라고 보면 되겠다.
강원도당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나는 항상 떠날 생각을 했다. 그런데 드디어 기회가 생긴 것이다. 그래서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울로 향했다. 순식간에 내 가계가 생긴 것이다. 그것도 강남의 삼성동에......매형은 산채비빔밥 전문점 체인점의 오너였다. 그러니 금방 뚝딱해서 가계를 만들었다. 실내인테리어며 물건이 하루가 다르게 차여졌다. 나는 그 대신에 춘천에서 자금을 구해야 했다. 일단 보증금이 5천만 원이고 그리고 인테리어 비용 등 초기 준비자금 포함해 족히 1억은 있어야 했다.
당시 내가 가지고 있던 돈은 카드에서 뽑아서 계약금으로 지불한 5백만 원이 전부였다. 하는 수 없이 주변사람들 한데 돈을 빌렸다. 평소에 돈 거래가 없던 터라 믿고 빌려 주었다. 돈 거래는 신뢰가 기본인데 나는 그 동안 누구한테 돈을 빌려 본 일이 없고, 또한 새롭게 하는 일이 전망이 있다고 하니까 모두들 빌려 주었다. 집사람도 2천만 원을 빌려 주었다. 그렇게 해서 추석을 일주일 앞둔 시점에 계약금 지불한지 15일 만에 산내음이라는 상호의 산채비빔밥 전문점을 오픈 했다.
나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서울에서 식당보이 생활을 해본 적이 있다. 그리고 평소에도 누나네 가게에 가서 손님이 많을 때는 도와주기도 했고, 그리고 내 천성이 서비스업종과 잘 맞아서 일하는 데는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내가 주방 기술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걱정이었다. 나는 처음에는 내가 주방기술을 배워서 하려고 했다. 하지만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식당을 차려보니까 이거는 완전히 대기업이나 마찬가지였다.
가계 계약하고 보건교육 받고 구청에 가서 영업신고 하고 종업원 뽑고 세무관계 처리 하고 물건 출입고 정리해야지 매일 아침 야채구매 해야지 손님 맞아야지......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당장 잘 곳도 없었다. 그래서 주변에 고시원을 하나 얻어서 거기서 기거하기로 했다. 바로 밑에 동생인 광호를 불렀다. 같이 하자고...
가계는 손님이 많았다. 점심시간에는 줄을 서서 기다리기도 했다. 그런데 저녁장사가 잘되지 않았다. 안주가 부실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24시간을 하려고 했는데 밤 10시가 넘으니까 손님이 뚝 끊어졌다. 가계를 오픈 할 때와 상황이 너무도 다르게 흘러갔다.
우리나라의 자영업자 비율은 OECD 국가 중에 가장 높다. 그러다보니 경기가 조금만 안 좋으면 모두 망한다. 식당 같은 경우만 하더라도 개업하고 1년 생존율이 7~8%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니 얼마나 치열한가? 월급 받던 사람들이 퇴직하고 나와서 통닭집이나 호프집이나 분식집이나 등등의 조그만 자영업을 하면 거의가 1년 내에 망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식당만 전문적으로 해서 수십 년의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이제 사회에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초년병들이 프렌차이즈업자들의 감언이설에 속아 장사 잘되겠지 해서 보통 2~3억 투자해서 시작하면 딱 2년 안에 망한다는 것이 정설이니......그러니 이제부터라도 모두 각자의 기술을 배우는 것이 좋다고 하겠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돈을 벌려면 마부라도 해라 그러나 그 사람의 값어치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철학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공무원, 교사, 금융 쪽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50이 넘어서 사회에 나올 때 나는 꼭 3년 정도는 쉬고 그 사이에 사회를 잘 본 다음 기술을 습득해 뭘 하라고 충고하고 싶다.
가계는 그럭저럭 됐다. 하지만 규모가 작아서 도무지 수익이 나지 않았다. 열심히 팔면 가계 세, 월급, 물건 값 내고 나면 나한테 남는 것이 없었다. 손님이 없어서 망하는 경우도 있지만 가계는 잘되는데 가계세가 비싸든지 인건비가 많이 나간다든지 하면 결국은 매출대비 수입이 맞지 않아 흑자 도산하는 경우가 있는데 내가 꼭 그 꼴이었다.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이렇게 운영을 해야 하나? 아니면 가계를 팔아야 하나? 나는 재료비를 한 푼이라도 아껴 볼모양으로 춘천에서 재료를 사가기도 했다. 하지만 언 발에 오줌 누기에 불과했다.
가계세가 너무 비쌌다. 그리고 주방 일을 내가 하지 못하니까 재고정리도 잘 안되고, 하여튼 누수 되는 것이 엄청 많았다. 사실 나는 24시간 영업을 하면 내가 주방 일을 하려고 했다. 어떤 날은 주방장이 퇴근하면 나는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에서 안주를 만들기도 했다. 주방장보고 밤 장사 할 재료를 만들어 놓으라고 하면 됐다.
그런데 손님이 오지 않았다. 주 5일제가 시행되니 주말에는 직장인들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 점차로 가계는 어려워 졌다. 할 수 없이 주방에 있던 보조요원을 그만두게 했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내가 사람을 해고하다니......처음에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사정이 여차저차 하니 나를 돕는다는 차원에서 가계를 그만두어 달라고 했다. 아이고 마음이야......
모두가 퇴근한 가계에서 막걸리 한 잔 먹었다.
[나의 인생살이 89]
수술을 하다. 쓸개 빠진 놈!
가계가 특별히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자영업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나는 실감했다. 차라리 굴욕스럽더라도 그냥 당에 남아 있을 걸 하는 후회를 하기도 했다. 당장 벌어놓은 돈이 없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월말은 수시로 다가 왔다. 엄청 빠른 속도로 월급 주고, 물건 값 주고, 집세주고....나에게는 남는 것이 없었다. 장사해서 남 좋은 일시키고 있었다.
나는 자본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런데 나는 왜 자본을 우습게보고 있는가? 자본이 없으면 죽는다는 사실을 나는 대충 머리로 이해하고 있었다. 정치가 밥그릇의 상위개념이지만 밥그릇이 없는 정치는 성공할 수 없다. 모든 종교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체험하지 못하고 살았다. 그저 민주화 운동하고 세상이 좋아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나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다. 감옥가고, 남들이 당신이 해야 한다고 하면 그것을 대신해서 해야 했다. 그것이 나의 인생 이었다.
당직으로 월급 받고 있을 때도 나는 월급을 집사람한테 한 푼도 주지 않았다. 가끔 집사람과 애들 밥 사주는 걸로 대신 했다. 그리고 기분 좋으면 돈을 조금 주는 정도였다. 남들은 내가 집사람이 교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어서 그렇다고 하면서 부러운 눈치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생각 보다는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더 관심이 있었다. 이런 바보 같으니라구....
2009년 년 말이 다가오는데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나는 처음에는 소화불량인줄 알았다. 과거에도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배가 아프면 혼자서 차를 몰고 병원에 가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보통 아픈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한림대 병원의 응급실에 갔다. 아무렇지도 않다고 했다. 다시 강원대 병원으로 갔다. 가서 과거 열린정책연구원에 근무 할 때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담석이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그랬더니 아마도 담낭에 돌이 있어서 그럴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 길로 한림대 병원으로 다시 가서 검사를 했다. 그랬더니 담낭에 돌이 꽉 차 있다고 했다. 바로 수술해야 한단다.
우리 집사람은 여행을 좋아 한다. 교사인데 여행을 갔다 오면 수업시간에 학생들이 따분해 하면 여행 갔다 온 애기를 해주면 좋아 한다고 하면서 자주 해외여행을 간다. 그것도 배낭여행으로 자신이 직접 모든 스케줄을 잡는다. 딸아이와 여행 계획을 세우는 것을 보면서 저렇게 공부했으면 박사도 되겠네 했다. 집사람은 겨울방학에 가족여행으로 태국으로 여행가기로 했다. 물론 나도 같이 가기로 돼 있었다. 비행기표며 호텔비를 모두 지불한 이후였다. 그런데 나의 수술 날짜가 출국하는 날과 겹쳤다. 나는 할 수 없이 집사람과 아이들만이라도 갔다 오라고 했다.
나는 혼자서 수술실로 들어갔다. 얼마 후 나는 내가 수술실 복도에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회복이 된 것이다. 그리고 병실로 올라왔다. 엄청 허전하고 한편으로 집사람이 없는 것이 야속하기도 했다. 다시는 안 보내 준다!!! 일주일 후에 퇴원했다. 나는 생각했다. 상현이가 그동안 10번의 대 수술을 하고 난 기분이 바로 이런 것 이었구나.....상현이가 대견하게 생각됐다. 나는 참 무심한 사람이었구나 하는 생각에 상현이한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집사람도 두 번의 제왕절개로 아이를 낳았으니 같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나는 그들의 곁에 있었다.
나는 2008년 9월경에 강원도당 전략기획실장으로 일하면서 춘천에서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나의 고향은 삼척이지만 나는 춘천에서 강원사대부속고등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에 고교 친구들이 많았다. 그리고 사회운동을 했기 때문에 그런 친구들도 많았다. 친구들은 내가 춘천으로 살러 왔다고 반겨주었다. 그리고 술도 자주 먹었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앞으로 춘천이나 강원도를 의미 있게 바꿔보자고 말하고 모임을 만들려고 노력도 했다. 특히 우리 동기들이 많았다.
춘천시의원으로는 김혜혜, 이재수가 있었고 환식이, 정배, 택구, 혜선이 등은 정치권에 주로 있었고, 언론에는 병로도 있었다. 공무원들도 있었고 오덕이 같이 사업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는 번개팅 으로 막걸리를 자주 먹었는데 한번은 낮 시간에 막걸리를 먹으면서 친구들을 부르니까 한 20여명이 오기도 했다. 그때는 우리가 뭔가 의미 있는 집단이 돼 춘천과 강원도를 바꿔보자는 작은 결의가 있었던 거 같다. 또한 원주에는 진희나 선경이도 있었고 속초에는 후배인 한수나 연석이 동기 등이 있었다.
우리가 의미 있게 모이기만 한다면 강원도를 바꾸는 힘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은 나의 착각 이었다. 각자가 살아온 과정이 다양한데 일방적으로 되지 않았다. 당연히 각자의 꿈이 달랐기 때문이다. 나중에 이들 중 몇 명은 민주통합당으로 춘천에서 국회의원 경선에서 붙기도 했다. 밥그릇 정리가 잘되지 않았으니 모임이 잘 될 리가 없었다.
수술을 하고 병실에서 누워있는데 정배가 왔다. 위로를 겸해서 왔는데 이 친구가 하는 말이 강원도 교육감 선거를 준비하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고 꼭 좀 도와달라고 했다. 나는 의례적인 말투로 지금 방원에 있는데 무슨 말이냐 알았다. 좋은 사람이면 도와주마했다. 나는 당직을 그만두었지 민주당 당원으로 있었다. 당원이면 당에서 나온 후보를 도와줘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니까.....
그런데 다음 날인가에는 정배가 강원도 교육감 예비후보로 등록한 사람을 직접 모시고 와서는 나를 만나게 했다. 나는 알았다고 했다. 그런데 이 후보는 환자복을 입고 있는 나를 자기 차에 태우고 나가서 잠깐 애기를 하지고 했다. 나는 지금 움직이지도 잘 못하고 그리고 현재 환자복장이니 나갈 수 없다고 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은 자기 외투를 나한테 입히고는 다짜고짜 차를 몰았다. 그리고는 시청 앞에 있는 커피숍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는 꼭 도와 달라고 했다. 역시 나는 알았다고 했다. 도와주겠다고 했다. 의례적인 것이었다. 사실 나는 당시에 서울 가계를 살려야 했기 때문에 퇴원하면 서울로 가서 가계를 경영해야 했다.
그런데 내가 퇴원하고 다시 정배가 찾아 왔다.
[나의 인생살이 90]
강원도교육감 선거 총책임자가 되다
2010년이 됐다. 수술을 하고 나니 허전했다. 쓸개 빠진 놈이 됐다. 담낭을 잘라 냈으니 몸이 좋을 리 없었다. 서울 가계는 동생한테 맡겼다. 네가 알아서 잘 꾸려나가라고 했다. 내가 있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나는 무언가 새로운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1월 중순 쯤 돼 정배가 다시 찾아와서 전교조 강원지부장 출신인데 현재 강원도 교육의원이고 이번에 교육감 선거에 나가는데 간선이 아니고 도민 직선이니 이런 선거를 해본 사람이 캠프에 한 사람도 없으니 나보고 꼭 도와달라고 했다. 나는 흔들렸다. 내가 청주에서 운동 할 때 전교조 합법화를 위해 노력한 것이 생각나기도 했다.
당시 강원도 교육감인 한장수씨는 3선에 도전하고 있었는데 이 사람은 아주 보수적인 사람으로 그동안 전교조 소속 선생님들을 많이 괴롭히기도 했다. 한편으로 집 사람이 교사이기도 하고....그렇다고 내가 돕는다고 보수색채가 강한 강원도에서 당선된다는 보장도 없고....나는 망설였다. 그래 뭘 도와주면 되니? 그랬더니 나보고 이번 선거 전체를 책임지고 해달라고 했다. 환장할 일이었다. 조직도 없고 또 당시에 강원도 교육감 선거에 소위 진보진영에서는 원주에서 역시 전교조와 교육의원 출신의 사람이 예비후보 등록을 했기 때문에 아주 난감한 상황이었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나는 결심했다. 그래 도와주자! 내가 강원도에 와서 뭔가 강원도를 바꿔 보려고 노력했으니 이번에 출전해보는 거다. 당선되면 좋은 일이지만 혹 낙선을 한다고 하더라도 조직은 남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다. 당시 춘천에는 나의 친구인 김혜혜 춘천시의원이 지역구 재선에 도전하고 있었다. 나는 이를 도와야 하기도 했고, 민주당 당원이니 춘천시장이나 강원도지사 선거에도 도와야 했다.
강원도지사에는 이광재 의원이 출마를 준비하고 있었다. 얼마 후 나는 사무실에 나가봤다. 갔더니 사람이라고는 속초에서 한청협 운동을 같이 했던 광조가 올라와서 고생하고 있었고 후보의 아들 친구가 운전하고 있었다. 정책은 전교조 쪽에서 준비하고 있으니 그것은 그쪽에서 알아서 할 일이고......나머지는 전교조 선생님들은 선거에 개입할 수 없으니 이거는 정말 환장할 일이었다. 회계 볼 사람 하나 없었다.
나는 우선 회계를 볼 사람을 구해 달라고 했다. 돈 문제이니 후보 측에서 내 놓으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보름이 지나도 사람을 내 놓지 못했다. 할 수 없이 나는 처제한테 부탁했다. 아무것도 몰라도 좋으니 어디 회사에서 경리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을 소개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순자 씨가 왔다. 순자씨는 정말로 이런 방면에는 문외한 이었다. 내가 처음부터 가르쳤다.
정배는 시민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자신은 내 놓고 나설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언론 공보 업무도 내가 해야 했다. 정배한테 일정한 부분을 부탁하고 나머지는 내가 했다. 그리고 후보는 밖으로 나가 명함만 열심히 뿌리라고 했다. 한번은 후보가 뿌려야 할 명함이 너무 후지다고 해서 아이디어를 내서 교육감 선거이니 칠판처럼 명함을 만들기로 하고 제작에 들어갔다. 반응이 좋았다.
문제는 후보 단일화였다. 전교조 출신의 두 사람인데 이 사람들은 서로 노선이 달랐다. 그래서 각자 나온 건데 둘이 나오면 이거는 현직 교육감한테 지는 것이 뻔 한 것이었다. 나는 원주의 이창복 선생님을 찾아갔다. 그리고 서재일 목사님과 함께 후보 단일화를 중재해 달라고 부탁 드렸다. 두 분의 노력으로 후보 단일화를 하기로 했다. 여론조사 기관을 두개 선정해서 합산하기로 했다. 우리가 이겼다. 당시만 해도 여론조사를 해보면 두 후보가 5% 내외로 비슷했다. 누가 이길지 알 수가 없었다.
후보 단일화는 선거운동이 시작되기 거의 일주일 전에 이루어 졌다. 후보 단일화가 이루어졌지만 우리 후보의 지지율은 7% 내외로 도무지 올라가지 않았다. 보수 측의 한장수 후보는 30%가 넘게 나오고 있었다. 나의 선거 전략은 일단 후보단일화로 선거운동 시작 전에 10%의 지지율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트위터를 만들었다. MBC박대용 기자가 취재를 해왔다. 젊은이들과 소통하는 교육감 후보라고 뉴스에 소개해 주었다. 일단 한건 한 것이다. 그 뒤로 선거사무실을 시내로 옮겼다. 이런 것이 하나하나 뉴스가 되기 시작했다. 얼추 10%에 육박하고 있었다. 그 뒤 나는 선거토론이 이루어지면 20%를 넘어서고 선거 일주일 전에 30%를 따라 잡으면 막판에 대 역전으로 약 7%가량 이길 것이라고 예측을 했다. 강원일보의 담당취재 기자가 얼마나 이길 거냐고 물어서 이렇게 대답했다.
한편으로 민주당 쪽 식구들을 내가 많이 알고 있으니 그쪽을 통해서도 지지세를 확장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선거전에 돌입하기 전에 강원도 18개 시군에 연락사무소를 꾸려야 했다. 그런데 조직이 하나도 없었다. 동시 지방선거이니 선거를 좀 아는 사람들은 전부 도지사, 시장군수, 도의원, 시의원 쪽으로 팔려간 상태였다. 더군다나 농사철이라 사람 구하기가 정말 어려웠다. 나는 내가 아는 인맥을 총동원 했다. 그렇게 해서 조직을 꾸려나갔다. 결국은 인제에서는 연락소장을 구하지 못해서 일반 가정집에 연락사무소를 차렸다. 그래야 선거운동차량을 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나는 출마한 후보들에게 공동으로 무상급식 공약을 추진하자고 제안하고 이를 성사시켰다. 네 명의 후보가 누가 당선되던 무상급식은 이루겠다는 공동 협약식을 주도해서 기자회견을 했다. 이렇게 해서 선거전을 우리에게 유리하게 리드하게 됐다. 후보 등록을 하는 시점에서 기호 추첨이 있었다. 우리 후보가 가 번을 뽑았다. 재수도 좋았다. 가 번을 뽑는 것은 시골에서는 당시 한나라당 쪽이 유리하니 연세 드신 유권자들이 찍을 가능성이 높았다. 강력한 상대의 후보는 라 번을 뽑았다. 추첨 현장에서 상대 후보가 라 번을 뽑을 때 광조가 앗싸를 외쳤다. 그만큼 기호 추첨이 중요 했다.
사무실에는 사무 볼 사람이 겨우 3명 있었다. 무소속이니 5개 시군에서 최소한 50명 이상씩 해서 500명의 추천도장을 받아야 했다. 나도 들고 나가서 도장을 받았다. 이걸 못 받으면 등록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추천서를 받아 들고는 밤중에 차를 몰았다. 강원도 최소한 5개 시군 이상에서 추천서를 받아야 하는데 이것을 전달해 줘야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평창을 돌아서 원주, 횡성, 화천, 철원까지 내 달렸다. 새벽에 집에 찾아가 추천서를 전해주고 다음날 14시까지 버스 편으로 보내달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후보 등록이 이루어지고 본격적인 선거전이 시작됐다.
선거과정에서 나는 강원도 18개 시군을 네 바퀴 정도 돌았다. 한번은 정배가 동행을 했다. 시군에서 어려운 와중에도 우리 후보의 당선을 위해 열심히 뛰는 선거운동원들이 정말로 고마웠다. 점차로 우리 후보의 지지도가 높아지니까 더욱 열성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나는 3일을 남겨두고 춘천시내에 유세차를 타고 선거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춘천이 밀릴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목이 다 쉬었다.
강릉에서는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원주는 압도적으로 유리하게 돌아갔다. 결국은 우리 후보가 정확히 7.3% 차이로 당선이 됐다. 강원도 18개 시군 중 15개 시군에서 이겼다. 3대 도시에서 모두 이겼다. 보수의 땅 강원도에서 진보교육감이 탄생한 것이다. 강원도지사에도 민주당의 이광재 후보가 당선 됐다. 전국에서 난리가 났다. 강원도가 물감자에서 돌감자가 됐다고 난리였다.
당선되고 다음날 후보한테서 전화가 왔다. 이제 비서실장이라고 불러도 되냐고 물었다. 나는 그것은 당선자님께서 판단해서 제안을 해주시면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내가 강원도 교육감 비서실장이 되는 줄 알았다. 언론이든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내가 그렇게 된 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일요일 점심을 후보와 나 그리고 정배 이렇게 부부 모임으로 먹기로 했다. 그 자리에서 최종 답이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말하는 것이 이상했다. 나는 직감적으로 이 사람들이 나를 버리는 구나 생각했다. 나보고 비서실장이고 불러도 되냐고 할 때는 언제고....화장실 갈 때랑 나올 때랑 이렇게 다를 수가 있는가? 나는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다. 인수위원회가 꾸려지는데 아무 말이 없었다. 전교조 선생들 하고 자기네들끼리 모든 것을 하고 있었다. 세상에 토사구팽도 유분수지.....화가 끝까지 치밀었다.
나는 원래 선거가 끝나면 선거판을 떠나는 버릇이 있었다. 여태껏 수많은 선거가 있었지만 한 번도 선거 후에 후보 주변에서 얼쩡거려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선거 과정에서도 나는 내 일 하러 갈 것이니 당선되면 강원도 교육을 잘 이끌어 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자기들이 나보고 비서실장 이라고 불러도 되냐고 물어 놓고 나는 그렇게 되는 줄 알았는데 이제 와서 말이 달랐다.
그러던 와중에 원주에서 우리를 엄청 도왔던 사람이 나보고 저사람 아주 싸가지 없다며 극도의 불신을 나타냈다. 나는 말렸다. 얼마 후 속초에서 제일 먼저 올라와 선거를 도왔던 광조도 토사구팽이 된 모양이었다. 이놈은 기자회견을 하겠다고 하면서 울고불고 했다. 나는 모두 말렸다. 역사의 진전을 막을 수는 없었다. 불법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고 단지 서운함이 많아서 그랬을 것이다.
나는 다시는 이런 사람하고는 선거를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달라고 했나? 자기들이 같이 하자고 하고 비서실장이라고 불러도 되냐고 해 놓고.....사람을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만 해도 나는 자존심이 아주 높은 사람이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알고 보니 이들은 별도의 조직이 있었다. 선거가 끝나자마자 서울에서 자신들과 정치적 견해를 같이하는 사람을 불러왔다. 나는 그 사람이 얼마나 실력이 좋은 사람인지 모르지만 이런 식으로 선거후에 진용을 짜는 것에 환멸을 느낀다. 적어도 나하고 일정하게는 상의를 해야 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고 도운 측면도 있으니 나도 그들에게 무슨 할 말이 있어야 했다. 춘천사투리에 뽈당했다 는 말이 있다. 쉽게 말해서 병신 됐다는 표현이다. 당시에 많은 민주당 사람들은 나보고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 말에 더 상처를 입었다.
교육감 임기가 시작될 쯤 해서 상현이가 서울대 병원에서 수술을 했다. 열 번째 수술이다. 이번에는 대장을 모두 잘라내었다. 가슴이 아팠다. 평생 대장 없이 살아야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20여일 후에 퇴원시켜서 집으로 왔다. 승리 멘붕이라 했던가? 전화 한통 하지 않았다. 병원에 있을 때도.....참 기분 더러웠다.
그 뒤로 교육감 취임하고 몇 개월 후에 자기 사람들이 밥 먹는데 나를 불렀다. 적어도 나는 단 둘이 먹으면서 여타의 사정을 말할 줄 알았다. 아니었다. 그 뒤로 지금까지 전화 한통 없다. 사람은 감성의 동물인가? 나는 선거에서 만큼은 이성적으로 일했다고 생각한다. 끝나고 나면 누구나 감성적인 사람이 된다. 승리하고 그 와 함께 정책을 집행하고 그 과정에서 밥벌이도 하고....이것이 선거에 함께 하는 사람들의 보통의 마음일 것이다. 인지상정이다.
아무쪼록 정책을 잘 펴서 성공하시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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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청협 용띠 하나회 친구들 |
[나의 인생살이 91]
신문사 기획실장이 되다
2010년 6월 지방선거는 민주세력의 승리로 마쳐졌다. 서울시장을 비롯해 많은 광역단체장과 기초단체장, 시도의원, 기초의원 등 그리고 교육감 선거도 중요지역에서 모두 이겼다. 민주세력에게 희망이 생긴 것이다. 그 와중에 강원도에서도 도지사와 교육감 선거에서 이겼으니 강원도민들이 선거 혁명을 일으킨 것이다.
서울 가계에서 손을 놓은 지 6개월이 흘렀다. 나는 가계를 처분하기로 마음먹었다. 다시 시작한 다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선거한다고 뛰어다니면서 가계를 등한시 했으니 잘 될 리 만무했다. 단지 종업원들이 스스로 해서 월급 정도 가져가는 수준이었다.
어느 날 강원일보 교육담당 기자가 나를 만나자고 했다. 내가 교육감 선거를 돕고 있을 때 출입하던 기자였다. 강원일보에서 기획실장을 구하고 있는데 내가 일처리를 잘하고 사람도 많이 알고 하니 적격이라며 해 보자고 했다. 나는 거절했다. 이유는 강원일보가 보수적인 신문이어서 나 하고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후 다시 찾아왔다. 해 보자는 거였다. 나는 하는 일이 없으니 뭐라도 해야 했다. 생각이 흔들렸다.
어느 날 강원일보 사장한테서 전화가 왔다. 만나자고 했다. 사장실로 갔다. 당신이 일을 잘한다고 여러 군데서 추천이 들어오니 기획실장을 맡아서 사업을 해보라고 했다. 당시 나는 미국에 있는 동생하고 미디어 스트리밍 관련 사업을 하려고 준비 중에 있었다. 인터넷 방송국을 차려서 뭔가 하고 싶었다. 실제로 나는 인터넷 방송국을 차려서 심심할 때 집에서 생방송을 하고 있었다. 지금의 아프리카TV 같은 거였다. 그런데 문제는 사업 자금이 부족했다. 그래서 나는 강원일보에 이 사업을 하자고 제안할 참이었다.
2010년 9월 경 강원일보에 취직을 했다. 언론사 취직이라 민주당도 탈당을 했다. 잠시 직장 때문에 탈당한 것이다. 사업 부서였다. 그런데 마땅히 할 사업이 없었다. 나보고 찾아서 해 보라는 거였다. 아이템이 좋으면 회사에서 투자한다는 거였다. 그러나 그러한 사업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아이템이 좋으면 내가 하지....와중에 나는 적정한 사업을 하나 제안했다.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어느 날 사장님이 나에게 사업을 하나 주었다. 화천의 산천어축제가 잘되는데 거기 가는 사람들이 춘천 언저리에서 머무를 행사를 하자는 것이었다. 춘천의 우두동에 있는 온수지에다가 축제의 장을 만들자고 했다. 나는 솔직히 잘 안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해 겨울에는 엄청나게 구제역이 창궐해 결국에는 화천 산천어 축제가 개최되지 않았다. 당연히 손님이 없었다.
강율이가 아이들을 데리고 놀러오기도 했다. 하지만 망했다. 거기에 참여한 업체들도 모두 망했다. 납품한 사람들은 물건 값을 달라고 야단 이었다. 내가 책임자였으니 난감했다. 나는 회사에 납품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물건 값을 지불해 달라고 요구했다. 원만히 일이 되지 않았다. 그 사람들한테 미안했다.
결국 나는 그 행사가 잘되지 않은 것에 책임을 지고 사표를 냈다. 1월과 2월 약 2개월 동안 추운 곳에서 엄청 고생을 했다. 얼음판에는 눈이 오면 절대 안 된다. 그런데 삼일이 멀다하고 눈이 왔다. 눈 치우는데 엄청 고생을 했다. 고생은 고생대로하고 성과는 없고....1년 계약직이었는데 결국 6개월 만에 사표를 냈다. 돌아보면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책임진 일이 잘 안되면 어떤 형태로든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지방선거가 끝나고 친구 택구네 농장에 자주 갔다. 별로 할일이 없어서 택구네 농장에서 낚시를 하고 놀았다. 붕어도 잡고 향어도 잡고....그렇게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면서 저녁에는 같이 소주도 한잔 하면서 과거를 공유하고 미래를 대화로 나누었다.
그러던 8월 어느 날 10월에 있을 민주당 전국대의원대회에 손학규 전 대표가 민주당 대표 선거에 나간다고 춘천을 떠나니 함께 가서 밥이나 먹자고 했다. 당시 손학규씨는 춘천 거두리 에서 칩거하고 있었다. 택구는 손학규씨를 돕고 있었다. 택구가 한번만 가자고 했다. 사실 그전에도 택구는 나를 손 대표와 만나게 하려고 몇 번 말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거절 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별로 만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일 가니 꼭 한번만 만나자고 했다. 그래서 나갔다. 갔더니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손 대표가 술을 한잔 주었다. 사실 내가 손 대표와 술을 한잔 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구면이라면 노무현 대통령 서거 때 도당에서 상주노릇을 하고 있는데 손 대표가 당사를 방문 했다. 그 자리에서 내가 당시 도내의 분향소 상황을 브리핑 한 적이 있다. 그 이후로 처음 보는 자리다. 사람이 괜찮아 보였다. 그런데 잠시 후 전대협 동기인 인영이가 들어왔다. 최고위원 선거에 나가려고 손 대표와 무슨 할 말이 있었던 모양이다.
손학규씨가 민주당의 대표가 됐다. 이인영이 최고위원이 됐다.
나는 2010년 10월 서울 가계를 팔았다. 약 4천만 원 정도의 손해를 보았다. 초기 투자금이 1억이었는데....보증금 5천에 시설비로 천만 원을 받았으니 결국은 4천만 원을 손해 본 것이다. 권리금은 받지 못했다. 세상에 처음 사업이라는 것을 해보면서 결국은 수업료가 한 달에 4백만 원이 들어간 것이다. 잘 배웠다.
이광재 강원도지사가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당선 무효가 됐다. 강원도지사 보궐선거가 공고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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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청일보 사장 반대싸움 |
[나의 인생살이 92]
강원도지사 선거에 개입하다
2011년 2월 말, 강원일보 기획실장직을 사표내고 나는 다시 백수가 됐다. 뭐 이런 개 같은 인생이 다 있나? 주변에서는 나 보고 강원도 교육청에서 일하지 않으냐고 자꾸 물었다. 서울에 있는 사람들이 교육청에 사업꺼리가 있으니 누구를 소개해 달라고 엄청 부탁을 해 왔다. 나는 그냥 소개만 시켜주었다. 나는 그런 사업을 해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그런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별로 대화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느 날 택구하고 둘이 여러 가지 대화를 하게 됐다. 택구는 춘고 출신으로 연대를 중퇴하고 춘천에서 사업하고 있었다. 내가 춘천에 와서 택구를 만난 것은 환식이 소개로 만나게 된 것이다. 택구는 서면에서 자라농장을 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조그만 호수가 있었다. 호수에 향어 붕어 등 고기가 많았다. 교육감 선거가 끝나고 일명 팽 당하고 나서 할 일이 없어서 거기서 낚시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술도 같이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알고 보니 택구는 연대에서 학생운동 하다가 구속 됐고 그 후에 춘천민청을 만들어 활동하다가 연대를 중퇴하고 사업을 하는 친구였다. 그런데 이친구가 손학규씨를 돕고 있었다.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 대통령 경선 때 손학규 캠프에서 일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손학규 대표가 다음 대선에 나올 것이니 자기는 열심히 돕는다고 했다. 나는 그런가보다 했다.
사실 나는 손학규씨가 한나라당 출신이라 별로 좋아 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과거에 민주화 운동을 했고 이제 한나라당을 탈당했으니 뭐 그 정도로 여겼다. 민주당에서 대표까지 했으니 이제 별로 거부감은 없는 상태였다. 택구하고 그렇게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이광재가 불법정치자금 수수로 대법원에서 도지사직 박탈형을 선고 받아 4월에 강원도지사 보궐선거를 해야 하는데 후보가 마땅찮았다. 이광재 전 지사는 나름대로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들을 추천하고 있었다. 나는 별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택구하고 둘이서 최문순 의원을 출마하게 하면 어떠냐고 대화를 하고 있었다. 괜찮아 보였다. 언론에서는 최문순 의원에 대해서 보도 하고 있었다.
최문순 의원은 춘천 출신으로 춘천고 강원대를 거쳐 MBC 사장을 거치고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이 사람하고는 일면식이 없었다. 나는 당시 천정배 의원 보좌관을 하고 있던 동규 형한테 전화를 해서 최문순 의원이 출마를 하면 열심히 도울 테니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어느 날 동규형이 약속이 됐으니 서울로 내려오라고 했다. 택구랑 둘이서 국회의원 회관에 가서 최문순 의원을 만나서 도와드릴 테니 출마해보라고 하자고 하고 서울로 갔다. 의원회관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가니까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보좌관을 만나서 우리의 생각을 전달하고 춘천으로 왔다.
그런데 어느 날 최문순 의원이 의원직을 버리고 강원도지사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며칠 있다 보니까 전화가 왔다. 만나자고 했다. 갔더니 나와 허영이 그리고 심기준 도당 사무처장이 있었다. 당시 민주당에서는 조일현 후보가 경선을 준비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최문순 의원이 단독후보로 가는 줄 알았는데 조일현 후보가 등록하는 바람에 경선을 하게됐다. 그 자리에서 일단은 경선을 이겨야 하니 허영이는 후보를 모시고 수행을 하고 나는 경선본부 실무 총괄을 맡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강원도지사 보궐선거에 뛰어들었다.
조일현 후보는 나의 고등학교 선배였다. 하지만 나와는 별로 인연이 없었다. 조일현 후보는 내가 국회에서 근무할 때 김한길 의원이 원내대표 할 때 원내 수석부대표를 했다. 그 뿐이었다. 그리고 조일현 후보는 나와 정치적으로 별로 연이 없었다. 정치적 성장배경도 달랐다. 하지만 마음에 걸렸다. 주변의 고교 선후배들이 조일현 후보를 돕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은 불편했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사람이 승리해야 했기 때문에 나는 최문순 후보를 위해 열심히 뛰었다.
최문순 후보는 그동안 강원도에서 별로 한 것이 없었고 당시 한나라당 후보가 역시 춘천고 출신의 같은 MBC사장 출신의 엄기영 이었기 때문에 승리가 보장되지 않았다. 다만 당시 강원도민들은 이광재 전 지사가 낙마한 것이 이명박 정권의 탄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엄기영 후보 역시 강원도에서 별로 한 것이 없어서 해 볼만 한 선거이기는 했다.
한편 손학규 대표는 분당 보궐선거에 출마한다고 했다. 강원도에는 손학규 대표의 지지자들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손학규 대표를 돕기 위해서 분당으로 가려고 했다. 나는 강원도의 손학규 지지자들이 분당으로 가는 것을 막아야 했다. 전력 손실이 있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나는 택구를 설득했다. 택구는 당시 손학규 대표의 특보 역할을 하고 있었다. 택구가 동의 했다. 택구는 강원도에서의 변화와 보궐선거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역시 강원도 사람이다. 손 대표는 분당에서 당선 됐다.
내가 경선본부의 총괄본부장을 맡았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떨어진 한명숙 캠프의 팀들이 내려왔다. 별로 호감은 가지 않았다. 지역에서는 실무를 담당할 사람들이 없어서 이들이 실무를 했다. 이들이 강원도 도지사 선거를 도우러 내려온 것은 고마운 일이다. 지역의 사람들은 별로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역에서는 실무인력이 부족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적정하게 인력을 배치했다. 근태나 찬중이, 김혜혜 춘천시의원, 여성민우회 대표출신의 김정애 등을 적정한 곳으로 배치했다.
그런데 최문순 후보는 내가 보기에는 한편으로는 강단지면서도 어떤 일을 하는 데는 분명한 결정을 주지 않았다. 네네네네....이렇게만 했다. 처음 일을 같이 해보는 사람이라서 마음을 읽기가 쉽지 않았다. 개 발에 땀 났다.
갑자기 치프게 되는 당내 경선에서 최문순 후보쪽 이 꼭 유리한 것은 아니었다. 경선을 위해 유세도 했다. 사람동원도 해야 했다. 그런데 사람 동원이 쉽지 않았다. 중앙당에서는 경선의 흥행을 위해 수도권 당원들을 동원하기도 했다. 웃기는 쑈가 진행되고 있었다. 유세현장에는 강원도민 보다 타 지역의 사람들이 더 많았다. 단지 경선을 위한 행사에 지나지 않았다. 강릉에서도 춘천에서도 그렇게 서울 등 타지 사람들이 동원됐다.
경선을 준비하면서 참으로 힘들었다. 조일현 후보는 재선 국회의원으로 나름대로 조직도 있었고 유세에 동원해 선거운동을 할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최문순 후보 측은 그럴 사람들이 없었다. 선거운동원을 만들어 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때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일부의 사람들은 후보 주변에서 빙빙 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 후보랑 회의를 하는 자리에서 내가 잘 모르는 사람인데 나를 사심이 있는 사람으로 비판을 했다. 나는 황당했다. 나는 기분이 나빴다. 그 사람은 민주당에서도 활동하던 사람이 아니고 뭐하던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여튼 나는 기분이 엄청 상했다. 그날 후보가 있는 자리에서 나는 이렇게 인신공격이 이루어지는 선거는 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진심으로 돕고자 했는데 왜 그렇게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중에 그 사람은 최문순 후보가 당선 되고 강원도청에 취직하려고 엄청 애쓰고 다녔다.
다음 날 후보가 전화해 왔다. 사무실에 나와서 일을 해 달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마음이 떴다. 내가 사심이 있는 사람으로 공격 당 하면서 자존심이 상했다. 안 그래도 교육감 선거에서 당했는데 또 그렇게 되는 것이 싫었다. 앞서 말했지만 나는 선거를 도와주면서 한 번도 그 선거후에 무얼 해 보아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인선은 당선자의 몫이고 그 사람이 선택할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병희 교육감한테 화가 난 것도 내가 비서실장을 하겠다고 선거를 도운 것도 아니고....당선되고 다음 날 자기가 나보고 비서실장이라고 불러도 되냐고 물어서 그렇게 해도 된다고 했는데 내가 무슨 자리를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그 중에 어떤 사람은 내가 월급을 받았기 때문에 안 된다고 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선거 사무장으로 당연히 받을 법적 선거사무원 비용을 받았는데....그 돈으로 내가 살림을 한 것도 아니고 선거하면서 사람들 만나면서 실비로 썼는데....하여튼 나는 이런 집단들 하고는 절대 일 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나는 중앙당에 있을 때도 한 번도 누구한테 나의 자리를 요구하거나 부탁한 적이 없었다. 이미 앞서 나의 인생살이에서 다 써 놓았다.
나는 더 이상 그 일을 하기 싫었다. 그래서 경선이 끝나면 본 선거 때는 중앙당이 조직을 이끌어 가는 것이 맞다 고 보았다. 그래서 당시 중앙당 수석사무부총장을 하고 있던 이철우 수석한테 말해 놓았다. 이철우 수석은 나하고 전대협 동기로 마음 놓고 사실을 애기 할 수 있는 사이였다. 싸울 일도 아니었다. 춘천에서 선거 캠프에 들어간 사람들은 내가 배치해준 곳에서 묵묵히 일하고 있었다. 어찌됐던 경선에서는 우리가 이겼다. 그리고 본 선거에서도 최문순 후보가 당선 됐다. 보람된 일을 한 것 같다.
한 가지 더 하자면 선거후에 내가 보기에 열심히 도운 사람은 한 사람도 도청에 그 어떤 자리에도 취직 되지 않았다. 다만 허영이가 비서실장이 됐다. 최문순 의원시절의 보좌진들이 도청에 밥벌이로 들어갔고, 최문순과 가까운 사람인 충남 출신의 어떤 이는 자기 경력관리로, 차기 총선에서 충남지역에 출마하려고 강원도 출신도 아닌데 선거 공로로 정무부지사가 됐다. 선거가 끝나면 그렇게 하는 것이다. 자기들끼리 논공행상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사람들이라면 나는 가까이 가지 말 것을 권한다. 괜히 마음의 상처만 받는다.
나는 가만히 나를 보니까 나에게 책임을 맡기고 믿어주면 엄청 잘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일은 잘 못하는 습관이 있는 거 같았다. 아마도 그건 내가 어렸을 때부터 자수성가형으로 자랐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선거과정에서는 최문순 후보가 계속 밀렸다. 그러던 어느 날 최문순 후보가 나에게 캠프를 정리해달라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잘 다독거려서 선거를 치러야 했다.
서울서 온 친구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던 거 같다. 지역의 사람들과 충돌도 있었다. 하지만 선거는 그렇게 흘러갔다. 그런데 강릉에서 엄기영 후보 측의 선거운동원들이 불법으로 전화방을 설치한 것이 들통이 났다.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선거결과 최문순 후보가 당선됐다. 내가 볼 때 아마도 그 사건이 없었으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여튼 하늘이 도우사 강원도민들은 다시 민주당을 선택했다.
강원도 도지사의 내력을 보니까 김대중 정부 이후로는 모든 도지사가 야당 출신이었다. 그래서인가? 강원도는 발전이 더디다. 꼭 그것 때문은 아닐 것이다. 강원도는 우리나라 인구의 3%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니 정치권에서 신경을 별로 쓰지 않는다. 어쩌면 야당을 계속 뽑아서 집권당을 괴롭히는 것이 좋을 것 같기도 하다. 강원도는 땅덩어리가 넓어서 전국선거를 하고 지도에 색깔을 칠하면 1/3을 차지한다. 보기에는 좋다.
그러니 강원도여~~~영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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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북대 잔디밭 |
[나의 인생살이 93]
그래! 이제는 내가 다시 하는 거야!!!
2011년 4월 강원도지사 보궐선거가 끝났다. 나는 그동안 참으로 여러 군데 선거를 도와주었다. 처음으로 도와준 선거는 2000년 총선 때 당에서 파견 나가 새천년민주당 송파을 김성순씨 를 도왔다. 당선 됐다. 이후 여러 가지 선거에 파견 나갔다. 당선되기도 하고 낙선하기도 했다. 기억에 남는 것은 동대문의 허인회 선배의 보궐선거와 옥주의 화성갑 총선 이었다.
나는 후보를 도울 때 모든 일을 내 일처럼 한다. 승패는 유권자의 몫이다. 열심히 하면 되는 것이다. 전략과 전술을 잘 짜고 함께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잘 읽고 결정적으로 후보의 장점을 팩트 있게 유권자에게 전달한다면 그가 아무리 연고가 없다고 하더라도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유권자가 적은 선거일수록 선거가 어렵다. 유권자가 5만 명 이상인 경우에는 전략과 전술을 잘 짜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계획을 잘 세우더라도 민심이 버리면 천하 없는 사람도 진다. 민심은 수시로 변한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에 온 국민이 나서서 애도 했건만 다음 선거에서는 박살난다. 그러니 민심가지고 장난치는 놈들은 망한다.
나는 특별히 하는 일이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들 상현이가 중3 인데 아파서 매일 학교에서 오전수업만 하고 조퇴를 했다. 나는 상현이를 데리고 등하교 하는 것이 유일한 일이었다. 물론 집에 데리고 오면 밥 해주고 돌봐야 했다. 아직은 감수성이 예민하니 내가 잘 돌봐야 했다.
어느 날 상현이가 나에게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상현이는 아빠 왜 나만 아파요? 나는 상현이를 꼭 껴안았다. 그리고 상현아 세상에 사람들은 모두 아프단다. 보이게 아픈 사람도 있고 안보이게 아픈 사람도 있고 그러니 걱정마라 그리고 네 수술은 네가 하고 싶을 때 하자 아빠는 항상 네 편이다. 이렇게 위로해줬다. 속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2011년 6월 어느 날 태백의 동점초등학교 친구인 해순이 하고 창이가 춘천에 놀러왔다. 정말로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이다. 이 친구들은 그래도 내가 그동안 해온 일에 대해서 격려해주는 친구들이었다. 춘천의 몇 군데를 구경하고 춘천역 부근의 닭갈비집에서 소주 한잔 겸 해서 식사를 했다. 나는 당시 나의 처지에 대해 원망 섞인 말투로 말을 했다. 그랬더니 그 자리에서 친구가 하는 말이 영호야 너는 너가 잘하는 일을 할 때 가장 멋있더라 며 나를 위로 겸 격려했다.
친구들은 그날 기차타고 서울로 갔다. 친구들이 떠나고 갑자기 울컥했다.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이 너무 싫어졌다. 내년에 있을 총선에 나가서 나의 정치적 꿈을 펼쳐보고 싶었다. 나는 그길로 고교선배인 광휘선배 한테 전화를 했다. 그리고 만났다. 광휘 형은 손학규 대표를 지지하고 있었다. 광휘선배는 고등학교 선배로 강대 철학과에서 강의하고 있었다. 호프집에서 만났다. 나는 다짜고짜 내년 총선에 출마할 것이라고 했다. 속이 시원했다. 얼마를 떠들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한풀이를 했다.
얼마 후 나는 택구를 만났다. 나는 택구한테 네가 손학규 대표를 돕기 위해서는 내년 총선에 나가서 당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중앙당의 생리를 잘 알기 때문에 택구한테 그렇게 말해 주었다. 그리고 내가 나가고 싶은데 나보다는 네가 더 좋은 조건에 있으니 네가 나가면 내가 도우마 했다.
사실 택구는 그동안 여러 차례 손학규 대표로 부터 정치하라는 권유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우선적으로 택구가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우선 집사람한테 동의를 구하고 두 번째는 범죄기록부 확인해보라고 했다. 인생 살다보면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손 대표한테 허락을 맡아라 그것은 나중에 공천경쟁을 할 때 손대표가 챙겨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터키 갔다 올 때까지 결정을 해라 그렇게 말하고 나는 터키로 가족여행을 떠났다.
여름방학이 돼 우리 가족은 터키로 2주 동안 여행을 갔다. 집사람은 여행을 무척 좋아 한다. 터키는 너무 좋았다. 딸내미도 여행을 좋아 한다. 대출 받아서 간다. 딸내미는 중3 졸업하고 혼자서 홍콩에 배낭여행 갈 정도로 서울 가는 거 보다는 외국에 나가는 걸 좋아 한다. 지난 겨울방학 때는 동생을 데리고 태국으로 여행을 간다. 멋지다. 그렇게 놀아라~~~아빠는 허리가 휜다.
속이 망가질 데로 망가진 상태에서 가족과 함께 한 터키 여행은 정말로 힐링캠프였다. 이스탄블에서 욜루데니즈, 셀축, 이즈미르 등 여러 곳을 다녔다. 요즘 언론에 나는 탁심 공원에도 가봤다. 이슬람 문화도 보고 기독교 문화도 보았다. 과거 종교와 정치가 일치 됐을 때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볼 수 있었다. 그나저나 하여튼 마음이 편했다.
우리가족은 여행을 자주 다닌다. 제일 먼저는 2000년에 제주여행을 갔다 철헌이 형이 자신의 티코를 내 주었다. 그리고 펜션도 알아봐 주었다. 그리고 일본 교토, 온천 등으로 두 번 갔고, 중국과 터키, 태국까지 가족여행을 갔다. 여행사 없이 이 모든 것은 집사람이 하는 것이다. 너무 좋아 한다. 작년에는 결혼 20주년 기념을 두 해나 앞당겨 유럽여행을 둘이서 갔다 왔다. 핀란드, 스페인, 포르투칼, 이태리로 3주간 다녔다. 세상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됐다. 돈은 벌면 된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때까지 택구는 결심을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러면 내가 나갈 테니 네가 도우라고 했다. 하지만 나보다는 네가 조건이 좋다고 했다. 얼마 후 택구는 집사람한테 허락을 맡았다고 했다. 아마도 택구가 안 나갔으면 내가 나갔을 것이다. 어려웠겠지만 나는 해냈을 것이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2012년 4월에 있을 총선을 준비했다. 나는 택구를 진심으로 도왔다. 그때쯤 해서 나는 차기의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손학규 대표가 적격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2011년 11월 민주당 탈당파인 이해찬 전 총리와 백만민란 이라는 조직을 만들은 문성근씨 그리고 남윤인순, 김기식 등 시민단체 출신들이 만든 내가 꿈꾸는 나라 등은 페이퍼 정당인 시민통합당을 만들었다. 민주당은 시민통합당과 한국노총 등과 함께 12월 16일 민주통합당을 만들었다. 그야 말로 범 민주세력이 통합해서 다가오는 총선과 대선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2012년 4월 총선에서 승리해야 했다.
굳이 한마디 하자면 나는 당시 시민통합당에 대해 별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과거 민주당을 탈당했던 사람들이 다시 조직을 만들어서 세력 나눠 먹기식으로 합당을 요구했다. 참 양아치 같은 짓이다. 내가 볼 때는 여태껏 통합과 분열을 자행 한 사람들을 다 그 사람들이었다. 실력이 딸리면 나가고 밖에 나가서 민주당을 씹어서 힘을 뺀 다음에 다시 세력을 규합해 먹자고 덤비고.....문성근씨는 민주당의 전당대회를 앞두고 자신과 의견이 다르다고 또 탈당했다.
하지만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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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북대 민주동우회 도종환 시인 등 |
[나의 인생살이 94]
민주주의자 김근태가 서거하다
2011면 12월 30일! 민주주의자 김근태 선생님이 서거하셨다. 민주당이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해 더 많은 민주세력과 통합을 했는데 그래서 총선에서 이기고 대선에서 이기고 그렇게 해서 민주주의가 꽃피우고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성큼 다가오게 하고 고문이 없고 패자부활이 가능하고 화해와 용서가 넘쳐 인간다운 삶이 가능한 그런 사회를 만들려고 한참 준비하고 있는데 이 땅의 민주주의자 김근태 선생님이 서거하신 것이다. 애통하고 비통하도다.
나는 이글 앞에서 [나의 인생살이 41] 이미 김근태 선배와의 인연을 말한 바 있다. 내가 김근태 선배를 처음 뵌 것은 89년 초 쯤 인가 청주에서 김근태 초청강연이 있었을 때였다. 나는 그렇게 조리 있게 말 잘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나도 당시에는 말께나 한다고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매력적이었다. 그렇게 만나기 시작한 인연은 전민련과 전국연합을 거치면서도 계속됐고, 한청협 모임 때는 당연히 초청됐다. 그리고 당에 와서도 뵈었다.
나는 2004년 총선출마를 하려고 할 때 김근태 선배님의 지역구 사무실에 가서 당시 당의 공천과정에 대해 흥분한 적도 있다. 김근태 선배님은 당시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를 맡고 계셔서 중앙상임위원(현 최고위원)으로 활동 하고 있었다. 공천과 관련해 내 문제가 중앙위원회에서 투표로 결정될 때 김근태 선배는 기립투표를 제안해서 제일 먼저 기립하기도 했다. 그리고 2011년 8월 고 이범영 의장 묘소에서는 힘든 몸을 이끌고 인재근 형수님(현 국회의원)과 함께 이범영 기념사업회 회장 자격으로 참가해 주시기도 했다.
당시 김근태 선배님은 나보고 영호는 내년에 총선 안 나가니? 나는 기회가 오면 나가겠습니다고 했다. 항상 진지하고 위기를 말씀하시던 선배님이 그렇게 민주정부 재탈환을 1년여 앞두고 2012를 점령하라! 는 명령을 남기고 홀연히 우리의 곁을 떠나신 것이다. 나는 서울대 병원 영안실에 조문했고 강원도당에 빈소를 차리고 거기서도 상주노릇을 했다. 그리고 장례일 에는 한청협 동지들이 운구를 하기도 했다. 나는 나 대신 손학규의 친구인 김근태를 손학규를 대신해서 택구가 운구하도록 해 주었다. 택구도 한청협 동지다.
나는 정치를 하는 과정에서 김근태 선배의 계보를 하지는 않았다. 나는 어느 계보에도 속하지 않았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나를 당연히 김근태의 계보로 알고 있다. 그것은 그만큼 나의 인생살이가 김근태 선배님의 족적을 따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김근태 선배님은 우리를 떠나 문익환 목사님이 계신, 청년운동 후배 이범영이 있는 모란공원으로 가셨다. 참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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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학생회 사무실이 있던 학생회관 |
[나의 인생살이 95]
다 이긴다고 하던 총선을 졌다
2012년 1월 15일 한명숙 전총리가 민주통합당 대표로 선출 됐다.
택구는 후평로터리에 사무실을 만들었다. 예비후보로 제일 먼저 등록하고 열심히 거리 인사를 했다. 일단은 인지도를 높여야 했다. 당시 춘천에서는 안봉진, 황환식, 유정배, 길기수, 허영, 변지량 등 7명의 예비후보가 등록해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우선 당에서는 사전심사를 해 2~3명으로 후보를 줄이고 다시 이들을 대상으로 국민 참여 경선을 치른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출마자 면면을 보니 우선 정배와 기수는 나하고 고등학교 동창이었고, 허영이는 운동진영의 후배고 환식이는 전대협 후배이자 친구고.....5명이 나하고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다. 할 수 없는 노릇이다. 환식이와 택구는 고등학교 동창이다. 기구한 운명의 만남들 이었다.
어느 날 환식이가 나를 만나자고 했다. 택구가 출마한 것이 나 때문 이라면서 나에게 항의했다. 나는 이런 항의를 받는 것 자체가 기분 나빴다. 자기가 뭔데 출마하는 사람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그것은 네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 택구의 판단이라고 말 해줬다. 참 이상한 친구다. 난 그동안 환식이보고 잘 해서 꼭 출마하라고 했다. 그렇게 말 할 때는 내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래 놓고 택구가 출마하는 것에 대해 나에게 항의를 한다? 할 일이 아니다. 택구는 택구의 인생을 산 것이다. 그것이 정답이다.
한편으로 나는 전국의 사람들과 손학규 대표의 대선 경선 조직을 짜기로 했다. 새로운미래를여는국민참여운동본부(새미본)를 만들기로 했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과 힘을 합쳐 여의도에서 준비위원회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 조직은 잘되지 않았다. 아마도 손학규 대표를 지지하는 여러 단체의 사람들이 모두 모이다 보니까 초반에 조율이 잘되지 않아서 였을 것이다. 한편으로 여기에 있던 몇 사람은 총선 후보 경선에서 손학규 대표의 힘을 빌리고자 형식적으로 참여한 사람들도 있었다. 조직에 사심이 끼면 안 된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들이 경선과정에서 지고는 그것을 손학규 대표가 챙겨주지 못해서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별도 동의되지 않았다.
민주당의 총선 공천과정은 개판이었다. 과거와 똑 같은 짓이 반복 됐다. 내가 2004년 열린우리당 시절에 본 것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다. 계보와 계파가 판을 쳤다. 그것까지야 있을 수 있다고 치자. 문제는 그것을 넘어서 공천과정에 경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전략공천이나 단수공천을 남발하고 있었다. 어떤 지역은 본 선거 일주일도 남겨두지 않고 공천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니 뭐가 되겠는가? 승복할 수 있게 해줘야 하는데 승복할 수 없게 만들었다. 마음을 모아도 될까 말까 한 상황에서 모두가 힘 빠지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오히려 새누리당이 공천을 훨씬 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모두가 승리할 수 있는 총선을 망쳤다고 한다. 이유가 공천 잘못이었다. 택구는 예비경선에 통과해 본 경선에 출전했지만 투표에서 졌다. 예비경선에서는 택구, 안봉진, 황환식 이렇게 세 명이 처음에 통과했다. 그런데 일부의 낙천자들이 재심을 요구했다. 그 과정에서 변지량 후보는 중앙당에서 단식을 하고 탈당을 했다. 중앙당은 재심과정을 질질 끌었다. 그러다가 허영이를 포함시키는 것으로 해서 결국은 네 명을 경선에 붙었다. 이 또한 원칙이 없는 짓이었다. 경선에 네 명을 붙인 것은 중앙당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꼼수였다.
이러한 과정에 후보들이나 지지자들은 이미 지치고 그리고 서로를 불신하기도 했다. 그러니 본 선거가 될 때에는 이미 김이 빠진 상태였다. 이러한 상태를 만든 것이 중앙당이다. 한명숙 대표 체제인 것이다. 처음에 결정을 잘했어야 했다. 경선에서는 안봉진 후보가 이겨서 본선 벽보를 붙였다. 본선에서 낙선했다. 나는 택구한테 적극적으로 도와주라고 조언했다. 앞으로 손학규 대표의 대선 경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총선 후 안봉진은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던 거 같다.
며칠이 흘렀는데 원주에서 전화가 왔다. 진희였다. 진희는 나와 한청협 동지다. 94년 내가 일본 갔다 오다가 범민족대회 관련 혐의로 김포공항에서 청주경찰서 형사들한테 잡혀서 감옥 갔을 때 진희도 범민족대회 때문에 원주교도소에 수감된 적이 있었다. 일종의 나와는 공범관계인 것이다. 그리고 진희는 오랫동안 원주에서 재야 시민운동을 해왔고 그리고 한지문화제를 원주의 대표적인 축제로 만든 사람이다. 나는 진희가 반드시 국회의원이 되도록 돕고 싶었다.
진희는 원주갑 후보 경선에서 이겨서 벽보를 붙이게 됐다. 이창복 선생님도 전화를 주셨다. 나보고 와서 도와주라고 했다. 나는 기꺼이 응했다. 진희를 당선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졌다. 나의 노력이 부족해서였을 것이다. 민주당은 강원도 전역에서 모두 졌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강원도의 공천과정에 이광재 전지사가 개입했다는 말을 들었다. 아니라고 말 할 것이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나는 들었다. 참 나쁜 사람이다. 자신의 이해를 앞세운 공천이라고 본다, 비판받아 마땅하다.
대선에 빨간불이 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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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학생회 간부들 |
[나의 인생살이 96]
486이여 이제 하청 정치를 그만 두라!!!
총선에서 민주통합당이 박살이 났다. 총 300명(지 246, 비 54)중 새누리당 152(지 127, 비 25), 민주통합당 127(106, 21), 통합진보당 13(7, 6), 자유선진당 5(3, 2) 무 3.....
과반수가 넘을 것이란 언론의 예상이 있었는데 보기 좋게 기대를 저 벼렸다. 그것이 민주통합당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평가는 역시 공천 잘못 이었다. 특히 강원도는 4석까지 가능하다는 진단이 있었으나 9석 가운데 단 한 석도 얻지 못했다. 지도가 빨갛게 물들었다. 강원도의 색깔이 빨간색의 절반을 채워주었다. 예쁘게......
총선이 끝나고 486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일기 시작했다. 열린우리당 때 20여명 가까이 당선돼 각자의 길을 가던 사람들이 18대 때는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다 떨어졌다. 그런데 이번 19대 총선에서는 꽤 많은 사람들이 당선 됐다. 지난 4년 동안 열심히 반성하면서 뛰었나 보다. 그래도 우리 사회의 청춘들 중에 나는 486들을 믿는다. 역사도 알고, 양심도 있고, 결기도 있고....물론 아닌 놈들도 있다. 그 놈들은 예외로 한다.
그런데 다시 부정적 평가가 일기 시작한 것이다. 역시 패권주의가 문제였다. 본인들은 아니라 할지 몰라도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486이 친노와 짜고 패권적인 작태를 벌이고 있다고 본 것이다. 또 다른 하청정치를 한다고 본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한명숙 대표 체제는 출범한 지 6개월여 만에 물러가게 됐다. 그리고 다시 최고위원 선거가 시작 됐다.
이해찬 전 총리와 김한길 의원 중 누가 당 대표가 되느냐가 흥미를 끌고 있었다. 소위 친노와 반노의 싸움으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우상호가 최고위원으로 출마를 한 것이다. 나는 언론에서 기사를 읽고 그날로 배낭에 팬티 두 장과 런닝셔츠를 챙기고 서울로 갔다. 서울시 의원을 하고 있는 원철이가 선거 실무책임을 맡아 일하고 있었다.
내가 사무실에 나타나니 반가워했다. 우상호는 나보다는 나이가 두 살이 많다. 그러나 나와 전대협 1기 동기이고, 88년 2월 야권통합운동 같이 하다가 연대 앞에서 불법 시위 주도 혐의로 경찰이 체포하러 달려 들 때 나는 도망가고 우상호는 잡혀서 다시 감옥 가는 그런 인연 있고, 그 뒤로도 우리는 20년 이상 매년 모임을 하고 있는 사이다. 나는 상호형이 하청정치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돕고 싶었다. 비록 486이 어쩌고저쩌고 해도 나에게는 애정이 있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상호 형은 중앙당에서 대변인을 오래해서 대중적 인지도는 상당히 높았다. 하지만 조직이 없었다. 당내 진보행동이라는 486 의원들과 유인태, 원혜영 의원 등이 이제는 후배들이 나서야 한다고 밀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발로 뛰는 것은 아니었다.
한편으로 대선을 앞두고 있어서 각 대선주자들이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있는 사람들을 최고위원으로 밀고 있었다. 한청협 동지인 광주의 3선인 강기정 의원은 정세균 전 대표 쪽에서, 역시 경기도의 3선인 조정식 의원은 손학규 전 대표 쪽에서 지원하고 있었다. 상호 형은 하청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 나는 정치적으로 독립된 주체라는 의미에서 애비 없는 자식들이라고 우리를 명명했다. 왜 정치적 선배들이 없겠는가? 우리들의 정치적 어버이는 민중이요, 문익환 목사님이요,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이요, 훌륭한 정치동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 소위 민주당 내의 486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살려서 일하기보다는 당내 유력주자들의 대리인이거나 실무를 담당하면서 크고 있었다. 그런데 대중들은 이를 좋게 보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는 그래도 6월 항쟁을 거치면서 대중들의 지도자들 이었는데 정치권에 들어가 자기 목소리를 내지 않고 실무나 하는 것이 못 마땅했을 것이다.
한편으로 486 정치인들은 자신들이 잘난 척 한다는 소리를 듣기 싫었을지도 모른다. 이들은 돈도 별로 없고, 아직 대중적 기반도 약하고 당내에서 잘 못해 차기 총선에서 공천을 못 받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을 것이고.....그렇게 저렇게 유망한 젊은 정치인들이 주눅들어가고 있었다.
이런 데는 사람을 키우지 않는 우리 정치권의 특성도 기여 한다. 한번 보스가 되면 주구장창 해먹으려 하는 그런 정치적 풍토가 없어져야 한다. 나는 이런 모습들이 너무 싫었다. 그런데 우상호가 그런 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돕고 싶었다. 한청협 동지인 만희형과 완기형 한데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이미 자발적으로 돕고 있던 용석이형, 남섭이형, 안석이형, 수희, 영철이 등과 함께 열심히 도왔다. 서대문 팀들인 영석이, 희용이, 경환이 등과 석기, 상호 등 국회 보좌진들이 함께 뛰었다. 정말로 열심히들 했다.
상호 형은 처음에는 자신 있어 했다. 하지만 중반에 접어들면서 우상호 배제전략이 나오기 시작했다. 정치적 독립선언에 유력정치세력들이 긴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으로 대중들은 486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19대 총선의 공천권은 친노와 486이 좌지우지 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한명숙 대표에 이인영 최고위원, 임종석 사무총장, 우상호 전략홍보본부장......본인들이 아니라고 하면 실제로 힘이 없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바보....
이들이 실제로 공천권을 휘둘렀다고 대중들은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공천신청하고 경선 한 번 붙어보지 못하고 추풍낙엽이 됐는데 누가 486을 좋아 하겠는가? 경험이 있는 나는 이들 낙엽들의 심정을 너무도 잘 안다. 낙엽이 된 486들은 다시 486을 씹을 수밖에 없고, 간신히 경선에 붙은 사람들은 486 때문에 경선에 붙은 것이 아니라 다른 유력정치인들 때문에 경선에 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이놈의 486들은 줘도 욕먹고 안 줘도 욕먹고....
이것은 486들이 지난 10년 이상의 정치과정에서 그들이 만든 그들의 업보였다. 정치권의 486 주류들은 대선이 패배로 끝나고 지난 3월 그들의 협의체였던 진보행동이라는 그룹을 해체했다. 잘했다고 본다. 이제는 새로운 실력으로 다시 살아 나가야 한다. 기득권이 돼버린 자신들의 위치를 어떻게 할 것인지는 그들이 판단할 문제이다.
나는 만희형과 완기형을 초반전이 열리는 울산, 부산으로 급파했다. 사실 형들이 할 일을 아니었는데 할 수 없었다. 만희 형과 완기 형 은 정말로 열심히 뛰었다. 만희 형은 술도 안 먹고 뛰었단다. 초반에 우리가 울산에서 3등을 했다. 이변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우리를 견제 할 수밖에.....더군다나 우리가 정치적 독립선언을 했으니 대선 캠프 쪽에서는 1인 1표 2인 연기명 투표방식에서 자기네 후보 한 표 찍고 다른 한 표는 꼴지 할 사람에게 던지거나 아니면 아예 1등 할 후보에게 투표하는 그런 전략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결론은 우상호가 6등으로 간신히 최고위원이 됐다. 1등은 이해찬 전 총리가 해서 대표가 됐다. 과정에 어떤 의원이 민주당에는 싸가지 없는 놈과 양아치가 있는데 그래도 싸가지 없는 놈이 났다고 하는 말을 해서 이 말이 유행이 됐다. 참으로 비참한 말이다. 자학이다. 민주당에는 긍정적인 사람은 하나도 없다. 하~~~~~할 수 없다.
우리는 정치에 있어서는 양아치보다는 싸가지 없는 놈이 났다고 보고 그놈에게 나머지 한 표를 주자고 했다. 싸가지가 없는 것은 그래도 정치적 신조는 있다는 뜻인데.....내가 보기에는 그 놈이나 그 놈이나.....자고로 정치인은 싸가지고 있고 지조도 있고....무엇보다 겸손하고 대중과 함께 어울리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된다.
당시 양아치로 명명된 사람은 그때 2등 했다. 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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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 유럽 배낭여행 중 |
[나의 인생살이 97]
대선에서 지다.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떠나다
다들 이길 국회의원 선거라고 했다. 하지만 공천 장난으로 새누리당이 과반을 차지했다. 한나라당은 총선에서 이기려고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능력 있는 인재들을 영입했다. 공천 잡음이 민주당 보다 덜했다. 그러니 상대적으로 민주당 쪽이 더 욕먹게 돼 있었다.
총선실패의 책임을 지고 한명숙 대표가 물러났다. 6월 9일 이해찬 대표가 선출됐다. 전대협 동기인 우상호 의원이 최고위원에 출마해 당선됐다.
새로운 지도부가 선출되고 본격적인 대선 경선레이스가 펼쳐졌다. 나는 손학규 후보가 그나마 가장 괜찮다고 보고 조직을 해서 밀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나와 함께 하려고 했던 사람들과 상의를 해 더 이상 지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만희 형이 김두관을 지지하자고 춘천에 내려왔다. 나는 안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만희형은 나랑 같이 가고 싶다고 했다. 내가 안가면 자신도 안가겠다고 했다. 나는 기왕에 도우려면 김두관 후보를 만나보자고 했다. 7월 말쯤 우리는 대전에서 김두관 후보를 만났다. 그리고 열심히 도와주기로 했다. 하지만 열심히 돕지 못했다. 여러 가지로 마음이 흔쾌하지 않았다. 그리고 7월 말쯤에는 집사람과 결혼 기념 여행을 가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여름방학이 돼 나는 집사람과 결혼 20주년 기념을 2년 앞당겨 유럽여행을 3주간 다녀왔다. 폴란드, 스페인, 포르투갈, 이태리 이렇게 다녔다. 정말 멋졌다. 여행사 없이 집사람이 짠 배낭여행 코스를 둘이는 재미있게 다녔다. 나는 짐꾼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즐기고 있었다. 스페인 마드리드에 내렸을 때 나는 탄복했다. 아~~~~유럽이 이런 곳이구나~~~나는 사람들한테 유럽여행을 꼭 해보라고 권유하고 싶다.
어느 날 스페인에서 있었던 일이다. 집사람과 나는 영어는 잘 못한다. 하지만 먹고 다닐 만큼의 영어는 한다. 안되면 몸으로라도 한다. 그것이 살길이기 때문이다. 기차표를 사서 플랫포옴으로 나갔다. 출발하려는 기차들이 여러 대 대기하고 있었다. 그 순간 갑자기 화장실이 가고 싶어졌다. 나는 집사람보고 대기 중인 기차에 타서 자리라도 잡으라고 했다. 아직도 출발시간이 약 20분 이상이 남았다. 집사람은 기차에 오르고 나는 화장실에 가고.....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나오니까 갑자기 기차가 가고 있었다. 아뿔싸~~~~
집사람이 다른 기차를 탄 것이다. 환장할 일이다. 기차표는 집사람이 가지고 있고 나는 지갑을 가지고 있고.....갑자기 바디랭귀지가 발동했다. 안내원한테 말했다. 헤이~~마이 와이프 트레인 고~~~오케이? 그랬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위아 고잉 투 더 0000.....그랬더니 안내원이 뭐라고 막 떠든다. 하여튼 잠시 기다리면 당신 와이프가 돌아 올 것이다. 이런 뜻이었다. 오케이 하고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10후에 집사람은 돌아 왔다. 어찌 됐냐고 물었더니 갑자기 기차가 떠나서 당황해 하니까 옆에 있던 사람이 다음 역에서 내려서 돌아가라고 했단다. 뭐 해외여행에서 이정도의 에피소드는 다 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만났다. 그 뒤로는 우리는 화장실 갈 때도 문 앞에서 꼭 기다린다.
유럽여행을 갔다 오니 각각의 캠프는 잘 돌아가고 있었다. 유럽에서 기사를 통해 김근태 선배와 함께 정치진로를 고민하던 민평련이 투표를 했는데 손학규 후보가 1등을 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실 내가 처음으로 손학규 후보를 도와야 한다고 할 때 많은 사람들은 박영호가 좀 거시기 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손학규 후보를 지지 하지 않고 중간에 김두관 후보를 돕기로 했지만 열심히 돕지 못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결국은 문재인 후보가 경선에서 승리했다.
대선캠프가 짜여졌다. 나는 민주켐프 동행2본부 부단장을 맡았다. 강기정 최고위원이 본부장을 하고 있었다. 직능단체와 특별위원회를 관할하는 일을 했다. 동행 2본부 발대식에서는 내가 사회를 보기도 했다. 특별위원장 임명을 할 때는 내가 심사를 했다. 나 스스로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는 없으나 열심히는 했다고 생각한다. 이해찬 대표가 당을 잘못 이끌어 중도에 물러났다. 그리고 대선 캠프는 혼란에 빠졌다.
대선에서는 박근혜가 이겼다.
역설적이게도 나는 속이 시원했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어찌됐건 나는 1999년 10월쯤 정당에 입당해 세 번의 대선을 경험한 것이다. 87년과 92년에는 학생과 재야시절에 있으면서 대선을 도왔다. 사실 나는 이번 대선에 임하면서 그리 건강한 생각을 가지지 못했다. 정권을 바꿔서 무얼 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직장이 생기겠지 하는 안일한 사고가 더 많았다.
그래도 과거에는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은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밝게 해주는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는데 이번 대선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다만 이명박 정권의 연장이 싫어서, 박근혜가 싫어서 정도였다. 그러니 뭐가 되겠는가? 나는 솔직히 민주진영의 후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비전도 없고.....정치를 어떻게 하겠다는 자기 소신도 없고.....왜 나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김대중, 노무현 이런 분들은 그래도 무얼 하겠다는 것이 확실했는데.....
그렇게 자꾸 미련을 갖고 하루하루를 살았다. 정치권의 시간은 2년 단위로 지나간다. 지방선거와 총선이 2년 주기로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선은 5년 단위로 흘러간다. 기타의 선거에는 뛰지 않고 대선만 뛰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시간이 5년 단위로 흘러가는 것이다. 직업적으로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열심히 해서 승리하면 뭔가 있겠지 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굳이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면 그도 맞다.
대선을 두 번을 지면 10년의 세월이 흐른다. 재수해본 사람은 삼수를 한다. 될 것 같거든....마찬가지다. 정치가 마약이라고 하는 이유는 조금만 하면 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한테 인정받고 월급도 솔찬고......그렇게 해서 정치권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나는 많이 봤고 나 또한 그런 속물중의 한 사람이었다. 언제 부터인가 그렇게 변했다. 상황논리가 앞서기 시작했다. 그랬기 때문에 이번 대선에서 진 것에 속이 시원했다는 것이다. 만약 이겼다면 또 어떤 밥그릇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기웃거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솔직한 심정이었다.
나는 이제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그만두었다. 그렇게 작심을 하고 몇 차례 공개발언을 했다. 그리고 정치에 대해서도 이제는 자연인으로 나의 의견을 말하기로 했다. 그동안에는 그래도 민주화 운동을 해온 사람으로서의 과거 관성을 지키려고 노력했는데 그러다 보니까 정확한 정치적 입장을 내 놓을 수가 없었다. FTA 문제나 북한문제, 그리고 노동문제, 경제문제, 환경문제 등등 모든 문제에 대해서 새롭게 정립해 나의 입장을 내 놓고 싶었다. 그리고 시원하게 말하고 싶었다.
나는 그렇게 할 것이다
이제 나는 자연인이다. 다만 정당의 당원이다. 하지만 이것에 얽매이지는 않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한 30년을 정치와 관련된 일을 하면서 살아왔다. 선거 때가 되면 모든 것을 팽개치고 도와주고....이제는 이런 거 안 해도 될 것 같다. 그냥 평범한 유권자가 돼 투표하고 싶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바라는 세상이 있기 때문에 그 세상을 위해 나는 또 소리 칠 것이다. 그리고 달려 나갈 것이다. 꼭 선거가 아니어도 된다.
지금까지 나의 인생살이 49년을 정리해 보았다. 물론 더 많은 이야기가 있겠지만 그래도 이정도 했으면 골간은 다 한 거 같다. 잘살아 왔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다만 메마른 땅에서 너무 오래 있으면서 초심을 많이 잃어버리고 속물적 인간으로 변화해 가는 것이 후회스럽다. 486 정치인들에 대한 국민들의 비판은 나에게 있어서는 맞다고 자인한다. 죄송하고 송구할 따름이다. 이제 다시 초심으로 돌아간다고 누가 믿겠는가마는 그것은 역시 나의 몫이다.
이제는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가 중요하다. 과거는 미래의 거울이다. 하지만 과거가 미래 일 수는 없다. 이제부터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것을 5막에서 써보려고 한다. 쉽지 않을 것이다. 짧은 지식으로 함부로 할 말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말 하련다.
지식이 아니라 마음으로.......
5막은 앞으로도 진행형이다. 이 글이 어떻게 마무리 될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관심과 격려를 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나도 한 시름 놓는다, 처음 시작한 날로 보니까 약 4개월이 흘렀다. 나에게도 감사한다. 과정에 내 글 때문에 또 다른 사람이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분들께 송구함을 전한다.
이제 나는 또다시 떠난다. 이방인이 된 느낌이다. 하지만 나는 이 세상의 주류로 살 것이다. 세상의 흐름을 주도하는 그런 삶을 살 것이다. 이방인 이라는 것이 나에게는 더 좋다, 자연인이기에 주류가 되는 것이다. 물 흐르듯이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 진정한 주류라고 생각한다.
자! 이제 미지의 세계로 떠난다. 여러분들과 대화 하면서 먼 길을 떠나려 합니다. 함께 가시죠!
꼭 잡으세요....어지럽습니다.
5막 1장 98편에서 이어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