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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인터넷뉴스 | 입력 2019-04-22 오전 11:31:18 | 수정 2019-04-22 오전 11:31:18 | 관련기사 건
3화. 3차례의 이주, 4세대의 삶(3) / 왜 한국어를 모르니? 라고 묻지 마세요
기록노동자 희정
(고려인 독립운동 기념비 건립 비용 모금을 위한 기획 연재입니다. 펀딩 사이트 <같이가치>에 공동 게재되고 있습니다.)
김치를 먹는다고 했다. 반가웠다. 고려인 식당에 가니 메뉴판에 그려진 음식들이 낯익다. 김치와 같은 절임류 야채무침도, 만두와 탕도 보인다. 옆 테이블을 보니 찌개에 보드카를 마시고 있다.
고려인 음식만 있는 게 아니다. 음식마다 국가별 이름이 붙었다. 중국 음식, 러시아 음식, 우즈베키스탄 음식 등. 우즈베키스탄 고기빵부터 중국식 향신료가 가미된 볶음요리까지 다양하다. 이 모든 것이 고려인들 식탁에 오른다.
우즈베키스탄 전통빵(리뾰쉬까)에 고려식 샐러드(카레이스키 살라트)를 곁들여 먹는 식이다. 쌀밥보다 자주 먹는 것이 기름볶음밥(쁠롭)이라 했다. 더운 날씨 탓에 기름을 많이 사용하는 우즈베키스탄 요리방식이 고려인 밥상에도 영향을 끼쳤다.
“냄새가 달라요.”
한 고려인은 타민족과 자신을 구분하는 기준을 ‘냄새’라 했다. 언어도 피부색도 아닌, 체취를 언급한다. 한국인에게 난다는 마늘 냄새 같은 것일까. 다른 민족들에게도 각각 다른 냄새가 난다고 했다. 먹는 음식 때문일 것이다. 몇 차례의 이주를 겪으며 학교와 언론, 출판을 잃어버리기를 거듭해 한국어를 할 줄 아는 고려인은 적다. 그에 비해 여전히 많은 가정이 한국식 음식을 먹는다.
문화 중 언어가 가장 빨리 변하고 음식이 가장 늦게 변한다고 했다. 집을 떠올리게 하는 음식문화는 마지막까지 남는다. 연해주부터 중앙아시아까지 터전을 옮기며 다민족 국가에서 지내온 고려인의 삶이 식탁에서 엿보인다. 상에 오르는 음식마저 정체성을 지키고 적응하고 변화하며 살아남았다.
북극성 농장에서 벼농사를 짓다
“연해주에서 (증조) 할아버지는 젊은 나이에도 어촌 마을을 책임지는 사람이었다.”
고려인 최 이야나씨는 통역을 통해 말을 전했다. 한국에 온 지 2년째라 말이 서툴다. 우즈베키스탄(공화국)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증조할아버지(최 세르게이)가 강제이주 때 열차에 실려 끌려간 곳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어부였어요. 기차가 아랄해에서 멈췄을 때 할아버지가 말했어요. 아랄해에는 어부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여기 내려도 죽고 기차에서도 죽는 거라면 물이 있는 곳에서 내리자고 마을 사람들을 설득했어요.”
우즈베키스탄에 정착했다. 연해주에서 한 것처럼 한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그 당시 대다수 고려인들은 농사를 지었다. 밥상에 여전히 오르는 쌀밥. 쌀은 고려인이 중앙아시아로 오게 된 이유 중 하나다.
광활한 미개척지를 농토로 경작해 집단화한다는 소련의 국가계획 하에 17만 명의 고려인이 옮겨졌다. 이들은 집단농장(콜호즈) 소속되어 땅을 일궜다. <북극성> <아방가르드> <볼셰비키> 같은 이름이 붙은 60여 개의 고려인 콜호즈가 생겨났다.
조그만 한국이라 할까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에만 130개 넘는 민족이 살지만, 고려인들로만 구성된 콜호즈에서는 자신들의 문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환갑을 갓 넘긴 최 멜리스씨는 어린 시절을 이리 기억했다.
“우리밖에 없어서, 조그만 한국이라고 할까. 마을(콜호즈)을 우리나라라고 생각했어요. 어려서 학교 다닐 때 러시아말 하는 고려인 학생이 있으면 두들겨 팼거든요. ‘너희가 고려 밥을 먹으면서 러시아 방귀를 뀌냐’ 이러면서.”
그보다 윗세대인 47년생 김 레오니드씨는 자신은 ‘조선말을 해서 한국어를 못한다’고 했다. 레오니드씨가 말하는 조선말이란, 고려인들이 쓰던 언어로 옛 함경도 쪽 방언에 가깝다. 현재 남한에서 쓰는 말과 다르다고 했다. 그 말조차 많이 잊었다. 그래도 띄엄띄엄 한국어로 소통이 가능하다.
“우리는 삽을 강촤라 했지. 삽이라 안 했지. 사과라 안 하고 능금이라 했어. 강촤가 중국말이었지. 다 섞였어.”
레오니드씨는 반평생을 보낸 콜호즈 마을 기억을 더듬었다. 목화솜을 기름에 적셔 만든 등불과 부뚜막. 온돌로 방을 데우고 볏짚으로 지붕을 덮었다. 예전 시골 풍경만 같다.
“예전에는 사립문 안 잠그고 갔어. 담장 없었어. 잘 사는 사람 생기고 도둑이 생겨났어요. 남의 물건 가지고 오는 버릇 조선사람에게는 없었어.”
고려인의 밥상처럼
레오니드씨가 자란 곳은 김병화 농장이다. 앞서 언급된 ‘북극성 농장’이 후에 ‘김병화 농장’으로 명칭을 바꾼다. 집단농장 대표였던 김병화를 기념해 붙인 이름이다. 김병화는 두 차례나 소련 당국으로부터 ‘노동영웅’ 칭호를 받은 인물이다.
압도적인 수확량 때문인데, 김병화 외에도 북극성 농장은 25명의 고려인 노동영웅을 배출한다. 이 일은 자부심으로 남아, 한국에 온 고려인들마저 선조의 끈기・근면・영민함을 이야기할 적마다 김병화를 불러온다.
죽음의 열차가 고려인을 실어 척박한 땅에 부려놓고 갔지만 살아남았다. 생존을 넘어 복원하기 시작했다. 강제이주 1년 후, 카자흐스탄에는 이미 87개의 고려인 학교가 문을 연다. 신문사와 출판사를 다세 세운다. 고려극장이 문을 연다. 1932년 블라디보스톡에서 ‘원동변강조선’이라는 이름을 달고 창립한 극장이다. 고려인들과 함께 중앙아시아로 왔다. 카자흐스탄으로 이주당한 홍범도 장군이 수위로 생의 마지막을 보냈다는 극장이기도 하다. 1942년 ‘의병들’이라는 작품을 초연하는데 후에 ‘홍범도’로 개칭해 공연을 이어간다.
고려인들은 마치 그네들의 밥상처럼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고 변화했다. 동시에 연해주에 두고 온 것들을 복원시키려 했다. 그렇게 역사를 이어갔다.
사라지는 콜호즈와 고려말
1956년,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에 묶어둔 거주이전 제한 조치가 풀린다. 이때부터 학업 등을 이유로 러시아 본토로 떠나는 고려인이 급증한다. 70년대가 되자 중앙아시아에서 농사 짓는 고려인 인구는 크게 감소한다. 전체 농업 비율이 줄어든 이유도 있으나, 강제이주 세대들이 온몸으로 쌓아올린 결과이기도 했다. 고등교육을 받은 다음 세대가 콜호즈에 머물지 않고, 다른 직업을 택해 도시로 떠난 것이다.
콜호즈와 함께 고려인 공동체도 조금씩 사라져갔다. 80년대 생인 최 이야나씨는 자신이 학교에 들어갔을 때 이야기를 해준다. 이야나씨의 가족은 할아버지(최 세르게이)가 세웠다는 우즈베키스탄 어촌을 떠나 도시로 갔다. 그곳엔 고려인이 별로 없었다.
“학교 처음 갔을 때, 어머니가 교실에 한국인이 있니? 라고 물었어요. 한국인이 뭔데? 물으니까. 머리도 우리처럼 까맣고 눈도 까맣고. 다른 민족에도 머리 까만 애들 있어서 다 세었어요. 엄마가 그게 아니라고. 성이 박, 김, 이렇게 된 사람이 있느냐. 그런 사람이 한국인이다 설명해주셨어요.”
이야나씨는 한국에 온 후 한국어를 배웠다. 그녀가 태어나기 전인 1970년에 소련 교과과정에서 한국어 교육이 제외된다. 배울 기회도 없었지만, 당시 젊은 세대에게 한국어는 매력적이지 않았다.
보다 나은 교육을 받아 러시아 사회에서 안정적인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 다음 세대의 목표였다. 한국과 교류도 없던 시절이다. 이들에게 한국어는 실리가 되지 못했다. 그런 까닭에 최근 조사에 따르면, 중앙아시아 고려인 중 34%가 한국어를 전혀 알지 못한다.(2016년 재외동포재단).
한국에 온 이들은 ‘왜 한국말을 하지 못 하는가’ 질문 받는다.
한국어 배운 적 없어요?
생존을 위해 러시아 국경을 넘었다. 30년을 정착해 산 연해주는 러시아 한인들의 고향이 되고 항일운동의 거점이 됐다. 그러나 1937년 강제이주로 그곳을 떠나야 했다. 17개의 언론사, 380여개의 고려인 학교를 두고 왔다. 사범대학을 만들고 정치조직을 형성하고 민족자치구를 요구하며 차곡차곡 쌓아온, 다르게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같이 버려두고 왔다.
중앙아시아에 와서 땅만 보고 살았다. 노동영웅이라는 칭호는 고려인들의 자부심이자 동시에 극심한 노동을 말해준다. 그러나 다음 세대는 다르게 살 기회가 있다고 믿었다. 이들에게 다르게 살 기회란 소련 사회로 편입하는 것으로 이해됐다. 능숙한 러시아어와 높은 교육열이 이를 말해준다.
“한국어 배운 적 없어요?” “한국어 배울 생각해본 적 없어요?” 한국은 고려인들에게 쉽게 질문한다. 같은 민족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의 역사를 듣는 일을 거듭할수록 질문이 조심스러워진다. 삶이 도돌이표처럼 무너짐과 복원을 반복해온 이들에게 정체성과 문화, 전통은 쉽게 질문되기도 답해지기도 어렵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양한 시공간에서 자신의 문화를 수정, 갱신, 포기”하며 “변화하고 유동적인 삶의 전략을 만들어”낸다. 한반도에서 평생을 살아온 우리 또한 그러하다. (김현미 연세대 문화인류학 교수, <예민 난민 위기를 통해 본 인종화와 신인종주의>)
잡초 같은 삶이 한국에 오다
고려인의 중앙아시아 정착 과정은 ‘역경을 딛고’ ‘고난을 이겨냈다’고 할 만하다.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작가 김 블라지미르는 저서에서 이런 말을 했다. (블라지미르 김. [러시아 한인 강제 이주사 경당. 2000)
“고려인들은 잡초와 같아 베어버리면 살아나고 베어버리면 다시 살아난다.”
강인하다. 그런데 우리가 강인한 역사에서 정작 배울 것은 누구도 베어지는 잡초 같은 삶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고려인들이 세대를 거쳐 만들어낸 생존 전략과 그 역사에 대한 존중이 없다면, 문제가 시작된다. 이들이 한국에 왔기 때문이다.
1992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소련)이 해체하고, 이들의 거주지는 소비에트 공화국에서 독립국가연합으로 변모했다. 2007년, 한국 정부는 고려인들에게 방문 취업 비자를 허용한다. 또 다른 이주가 시작된 것이다.
‘고려인 독립운동 기념비’ 건립 비용 모금을 위한 기획연재는 펀딩사이트 <같이가치>에 공동 게재되고 있습니다. 고려인 독립운동 기념비는 연해주 등지에서 이뤄진 고려인의 항일항쟁 역사를 대한민국 땅에 적어내리는 기록입니다. 낯선 땅에서 굴하지 않고 삶을 지켜낸 이들, 더 나아가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웠던 그러나 이름 없이 잊힐 수밖에 없던 수많은 이들을 기억하는 작업에 함께해주시길 바랍니다. 고려인 독립운동 기념비 건립 5만 명의 건립자가 되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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