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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인터넷뉴스 | 입력 2007-02-23 | 수정 2007-02-23 오전 8:21:59 | 관련기사 건
담이 아예 없거나 있어도 미숙련 삽살개 정도면 충분히 훌쩍 뛰어넘을 수 있을 수준의 나지막한 울타리가 전부다.
그에 비해 우리의 것들은 어떠했던가? 유럽과는 판이하다.
시멘트로 험상궂은 장벽을 쌓아올리고도 안심이 되지 않아, 날카로운 유리조각들을 담 끝에 촘촘히 박아놓고, 또 그 위에 철조망을 이중삼중으로 둘러쳐 마치 토치카처럼 보이던 주택들이 특히 우리 도시에서는 흔히 눈에 띄었다. 뿐만 아니라 거기다가 왕왕 ‘맹견주의’라는 엉터리 경고판까지 터억 하니 걸어놓기 일쑤였다. 가히 완벽한 안보체제 구축이라 할 만 하였다.
겉은 요란 속은 허술
우리는 범람하는 군사문화 속에서 우리의 정신까지 이렇게 완전 무장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렇게 요새 같아 보이는 담벼락도 일단 뛰어넘기만 하면 안방까지의 진입은 식은 죽 먹기 식이었다는 사실이다. 창문고리나 현관출입문의 개폐장치가 어이없을 정도로 허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럽은 정반대다.
부질없는 그 담을 보고 안방의 보석함이 내 손안에 있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고 낙관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천만의 말씀이다. 대개 하루 종일 열려 있기 일쑤고 허술하기 짝이 없는 울타리를 통과한다 하더라도, 그 이상의 진출은 거의 불가능하다.
“가정은 城이다” 라는 영국의 격언이 있긴 하지만, 안채는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성채처럼 버티고 있다. 완벽에 가까운 자물쇠 장치와 물 한 방울 새어들지 않을 정도의 빈틈없는 창틀이 맹위를 떨치기 때문이다. 요컨대 형식은 어수룩하게 보이지만 내용은 튼실하다.
그러나 우리는 정반대다. 겉은 맹수처럼 어마어마해 보이지만 속은 새우처럼 물러 터져 있다. 이것이 바로 한국적 형식주의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이 우리 사회현실의 흐름 곳곳에도 폐수처럼 의연히 녹아들어 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겉으로는 당당히 활개치는 듯하나, 속으로는 연신 곪아터지고 있는 일들이 어디 한둘인가. 가령 성수대교나 삼풍백화점 같은 것들이 겉모습이 허술해서 무너져 내렸던가? 겉으로만 본다면, 삼풍백화점은 파리 한 복판에 갖다 놓아도 경탄을 자아낼 만한 멋들어진 외관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속절없이 붕괴되었다. 그런데 이웃 일본은 과연 어떨까? 예컨대 100여 년 전에 일제가 세운 한강대교는 아직도 끄떡없다. 그럼에도 <일본은 없다>라는 책을 베스트셀러로 만드는 위인은 바로 우리 국민이다. 그리고 그 책의 저자는 지금 한나라당에서 한참 잘 나가고 있다.
“뚝배기보다 장맛이 좋다”던 우리 민족이었다. 요컨대 보잘 것 없는 겉모양보다는 훌륭한 내용을 뒤쫓던 게 바로 우리의 전통 아니었는가. 하지만 지금은 안에 든 것보다는 그릇이나 포장에 더욱 신경 쓰는 형편으로 뒤바뀌어버렸으니, 어쩌다가 이런 곱던 마음가짐이 행방불명되어 버렸을까?
우리 현실은 지금 ‘장맛보다는 뚝배기’라는 한국적 형식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안에 든 장은 엉터리로 남겨둔 채 뚝배기만 근사하게 꾸며놓고 부질없이 희희낙락하면서 샴페인을 일찍 터뜨린 적도 있지 않았던가.
IMF의 된서리를 맞아 끙끙거리기도 했고, 아직도 그 후유증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꾸밈보다 진실을
결국 우리는 사회적 모순을 자초한 셈이었다.
한편에서는 1인당 국민 총소득 2만 달러 시대가 멀지 않았다는 장밋빛 무지개가 그려지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계층의 양극화, 빈곤층의 확산 등으로 인해 신음 소리만 높아져간다.
무엇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고용보호 수준, 임금, 기업 복지의 격차로 야기되는 노동시장의 양극화 현상이 심각하다.
정규직을 100으로 했을 때, 비정규직의 월 임금 총액은 2000년 52.3, 2003년 49.7로 격차가 벌어졌다. 물론 비정규직 노동자는 사회보험을 가장 먼저 받아야 할 대상이지만, 실제로는 비정규직 노동자는 정규직에 비해 1/4 수준밖에 받지 못한다.
또한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범람으로 인해 고소득 및 저소득 일자리 창출은 증가한 반면, 중간 소득 일자리는 현저하게 감소했다. 이러한 계층의 양극화는 결국 중산층의 해체를 불러오고, 이 중산층의 해체로 말미암아 한국 민주주의의 안정성이 크게 손상당하고, 급기야는 민주주의의 양극화가 초래되리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빛 좋은 개살구’, 이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도로 표지판이 아닐까.
노자 선생도 “진실된 말은 꾸밈이 없고, 꾸밈이 있는 말엔 진실이 없다”고 가르쳤다. 우리 사회는 언제까지나 진실이 아니라 꾸밈에만 매달려 있어야 하는 것일까.
우리 민족은 지금 이러한 형식주의를 극복함으로써 걸림돌을 디딤돌로 만들어나가야 할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글쓴이 / 박호성
· 서강대 사회과학대 학장 겸 공공정책대학원 원장
(정외과 교수)
· 한겨레신문 객원 논설위원
· 학술단체협의회 대표간사
· 미국 Berkely 대학 및 캐나다 뱅쿠버 대학(UBC)
객원교수
· 저서 :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와 전망>,
<우리 시대의 상식론>, <21세기 한국의 시대정신>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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