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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인터넷뉴스 | 입력 2010-12-09 | 수정 2010-12-09 | 관련기사 건
호메로스의 《오디쎄이아》 12장에는 유명한 쎄이렌의 이야기가 나온다. 자신이 통과할 뱃길 길목에 두 쎄이렌이 기다리고 있음을 안 오디쎄우스는 밀랍을 손으로 이겨 뱃사람들의 귀를 막고, 자신의 손과 발을 돛대에 묶게 한다. 쎄이렌의 노랫소리에 유혹되지 않기 위해서다.
마침내 쎄이렌의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뱃사람들은 더 열심히 노를 젓는다. 오디쎄우스가 유혹에 넘어가려 하자 일행인 에우릴로코스와 페리메데스가 그를 더욱 세게 밧줄로 묶어서 일행은 결국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신화에서 힌트를 얻어 국제관계학에서 이른바 `결박 이론`이 나왔다. 자신의 손발을 묶어버림으로써 온건한 협상의 퇴로를 스스로 차단한다는 뜻이다.
전쟁의 발발도 `결박 이론`으로 해석 가능하다. 무력충돌은 언제나 무력의 사용 가능성을 전제로 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상대방이 계속 어깃장을 놓으면 우리 쪽에서 무력을 사용할 것이라는 암시를 해도 상대가 그것을 진짜로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그저 협박용 발언이거나 강경한 수사에 불과하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이때 우리 쪽에선 우리 의도가 그저 공허한 언사가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 더욱 강경한 메씨지를 발표하거나 구체적인 조치를 취하기도 한다. 1차 걸프전 당시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에 대한 자신의 결전 의지가 확실함을 보여주기 위해 수차례 공개적으로 쿠웨이트 해방을 단언했고 실제로 50만 이상의 미군병력을 걸프지역에 배치했다.
강경대응 선언에 뒤따르는 정치적 효과
이렇게 스스로 손발을 묶어버리는 행위엔 두 가지 효과가 따른다. 우선 상대방에 대해 우리 쪽의 말이 허언이 아니라 진정한 의도가 있음을 새삼 인식시킬 수 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행동이 자기 쪽에 대해서도 구속력을 갖게 된다는 점이다.
그렇게까지 호언장담해놓고 막상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을 경우 받게 될 공신력의 추락은 충돌 자체보다 더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이른바 `청중 비용`이다. 국제적으로든 국내에 있어서든 자기가 한 말을 실제로 실천하지 않을 때 받게 될 타격을 뜻한다. 그러니 잠재적 `청중 비용`이 커질수록 공언이 공언으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급격히 늘어난다.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상황은 이 같은 전쟁 이론이 아주 잘 적용되는 것처럼 보인다. 연평도사태에 대해 대통령은 "북의 도발에는 반드시 응분의 댓가를 치르게 할 것"이라고 하면서 "결단코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천명했다. 신임 국방장관은 북의 추가공격이 있다면 "항공기를 동원해 폭격할 것"이라는 구체적인 방법까지 제시했다.
대통령의 발언이 정치적 결박이었다면 장관의 발언은 군사적 결박이라고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다. 현재 국내의 분위기를 고려할 때 추가 공격이 있을 경우 공언해온 대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엄청난 `청중 비용`을 치러야 할 판이다. 다시 말해 군사 정면충돌의 위험이 연평도사태 이전보다 더 높아진 셈이다. 항공기로 폭격하면 북은 북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니 이는 거의 자동적인 확전을 뜻할 수도 있다.
무력충돌의 가능성 냉정히 인식해야
국제적으로 볼 때 한반도를 둘러싼 시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 있는 것 같다. 우선 본격적인 전면전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시각이다. 중국과 미국이 전쟁을 원치 않는다, 동북아시아에 몰려 있는 국제경제적 이해관계상 전쟁이 발생할 수 없는 구조다, 북한에는 전면전을 수행할 수 있는 물자·에너지·역량이 없다, 전쟁 시 상상할 수 없는 피해가 예상 된다 (그러니 전쟁을 상상할 수 없다) 등등의 이유가 제시된다.
다른 하나는 남북간 긴장을 단순한 외교적 갈등 정도로 보는 것은 비현실적이며 적어도 제한된 국지전 정도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는 시각이다. 이런 시각은 `제한된` 무력충돌이 일어나고 `제한된` 피해 (예컨대 수 백 명의 사망자?)만 발생하더라도 그것의 충격파는 엄청날 것이라고 본다. 네 사람이 죽어도 온 나라가 발칵 뒤집어지는데 수 백 명이 죽는다면 어떤 상황이 조성될까?
우리로서는 자연히 첫 번째 시각에 귀가 솔깃해질 수밖에 없다. 오랫동안 남북 대치상황에서 체득한 심리적인 부인(否認)기제를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 시각도 모른 척할 순 없다.
얼마 전 발레리아노와 마린이라는 국제전문가들이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전쟁으로 가는 길목에는 다섯 가지 선행조건이 있다고 한다. ①분쟁 당사자들의 한쪽 또는 양쪽에 정치·군사 동맹관계가 형성되어 있는가 ②상호간 군비를 증강하고 있는가 ③영토를 둘러싼 갈등이 있는가 ④상호갈등의 역사가 있는가 ⑤한쪽 또는 양쪽에 강경파들이 득세하고 있는가.
경험적으로 보아 이 가운데 세 가지 조건만 충족되면 전쟁 가능성은 아주 높아진다고 한다. 이 논리를 한반도에 대입해보면 어떨까? 무력충돌의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제한전만 일어나더라도 전쟁은 전쟁이다. 그리고 20세기의 위대한 영적 지도자 토마스 머튼이 지적하듯 제한전이 제한전으로 끝난다는 보장도 없다(《머튼의 평화론》). 현대전에 있어 일단 충돌이 발생하면 그것이 깔끔하게 마무리될 것이라는 희망은 환상에 불과하다.
적이 내게 가한 만큼만 정당하게 보복한다는 전쟁론, 즉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제 불가능한 시대가 됐다. 백보를 양보해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단 1퍼센트만 된다 하더라도, 전쟁이라는 현상의 성격상 그 1퍼센트를 방지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야 사리에 맞다. 99퍼센트에 의존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북한의 위태로운 도박과 기대심리
전쟁 발발의 `결박 이론` 외에도 우리가 잘 아는 `벼랑 끝 이론`이 있다.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키기 위해 위태위태한 도박을 벌인다는 위기협상 전략을 말한다. 그런데 `벼랑 끝`이라는 이미지는 한번 낭떠러지로 떨어지면 끝이라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이 이론을 창안한 토머스 셸링에 따르면 `벼랑 끝`보다는 `진창의 가파른 길`이라는 비유가 더 정확하다고 한다. 한발 한발 더욱더 위험한 비탈길로 발을 내딛는다는 뜻이다.
이런 식으로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아직까지는 괜찮겠지 하는 불확실한 요행을 바라는 기대심리가 담겨 있다고 한다. 그러니 벼랑 끝 전술은 한번으로 끝나는 행동이 아닐 수 있다. 북한의 행위도 이런 경우에 속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게다가 추가공격까지 공언하고 있으니 더욱 위태로운 도박을 약속한 거나 다름없다.
요약하자면 현재 북한은 질퍽거리는 비탈길로 치닫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위험한 불장난이 아닐 수 없다. 한편 남한은 스스로 손발을 묶는 결의를 과시하고 있는 듯한데 이 또한 미숙하고 감정적인 대응이라 할 수 있다. 북한이 군사도발을 통해 어떤 양보를 얻어내고자 했다면 그 목표는 더욱더 멀어질 수밖에 없고, 남한이 정당한 보복 운운하면서 군사적으로 상황을 제압하겠다고 하면 그 목표 역시 역풍을 맞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
대화와 협상 말고 과연 다른 방법 있을까
고전적인 전쟁이론이 한반도에서 이렇게 전형적인 모습으로 발현되고 있는 것이 우리의 비극이다. 아주 원론적인 말 같지만 이 시대에 정상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이 우리의 실존에 얼마나 중핵적인 자리를 차지하는지 엄중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현 국면에서는 양쪽 모두 대화와 협상 테이블로 나오는 길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본다. 공존이든 번영이든 통일이든 일단 전쟁 가능성의 불길을 끈 다음에야 생각할 수 있는 일 아닌가? <창비주간논평>
저자 소개
조효제(趙孝濟) 런던정경대학 사회정책학 박사. 현 성공회대 NGO대학원 교수. 저서로 『인권의 문법』(2007)이 있으며, 편ㆍ역서로 『직접행동』(2007) 『세계인권사상사』(2005) 『전지구적 변환』(2002) 『NGO의 시대: 지구시민사회를 향하여』(2000) 『앰네스티 정책편람』(1992) 『인권이란 무엇인가』(1988) 『사형제도의 이론과 실제』(198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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