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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식 기자 | 입력 2007-04-27 | 수정 2007-04-27 | 관련기사 건
대통령 후보가 되려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지, 흠을 거짓말로 감추고 있지 않은지, 무능력을 숨기고 있지 않은지, 국가관은 바른지 검증해야 할 것이다.
나는 내 식으로 정치인을 검증하는 잣대를 하나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공유할 사람이 많이 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1997년 12월 김대중 씨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처음 국민 앞에 나와 기자회견을 할 때 한 외신기자가 영어로 무언가 물었다. 이를 중계하던 기자가 영어를 할 줄 아는 김대중 씨라 직접 답할 것이라고 추측했지만 김대중 씨는 직접 대답을 하지 않고 통역을 찾았다.
한국말로 질문의 내용을 통역하게 하여 모든 국민이 듣게 하고 자신도 한국말로 답변함으로써 당선자로서 공인 의식을 보여 준 것인데, 그 태도는 당시 금융 위기로 의기소침해 있던 국민을 배려하고 국민의 자존심을 세워 주는 데 매우 의미 있게 보였다.
언어 기본권을 훼손하는 정치인과 오만한 영어 사용자
그런데 요즘, 사회의 영어 수요에 편승하여, 모든 국민이 영어를 유창하게 잘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구실로, 여기저기에 영어 마을을 만들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특정 지역을 영어 공용 지역으로 만들겠다고 나서는 정치인들이 등장하고 있다. 대선 주자들 중에서도 자기가 대통령이 되면 영어를 공용어로 삼는 정책을 시행하겠다고 공언한 사람이 있을 정도다.
특정 대학이 영어로 강의하는 제도를 두는 것이나, 특정 지역이 영어 수요를 흡수하기 위하여 영어 마을을 만들어 운영하겠다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의 경쟁력 확보 방안으로 수긍할 만한 여지가 있다. 그러나 일반 대학이나 자치 단체를 영어 공용 지역으로 만들려 하는 것은 일반 국민들의 언어 기본권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일이다. 한국에서는 한국어로 행복한 삶을 즐길 자유가 한국인에게 주어져 있고, 국가와 정부는 이를 보장해야 할 무한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논밭을 팔아서 공부시켜 주니 먹물이 어설프게 들어간 자식은 제 부모를 무식하다고 천대하던 시절이 있었다. 저 공부 잘해서 성공했으면 됐지 제 부모 무식한 것을 나무랄 이유가 없겠는데, 모자란 자식은 그걸 깨닫지 못해서 집안을 어지럽히고 만다. 그런데 요즘은 비싼 돈 들여 영어를 좀 하게 해 주니 한국어를 우습게 여기는 공무원, 회사원, 언론인이 여기저기서 생겨난다.
우리 사회 도처에 영어 천둥벌거숭이들이 날뛰기 시작했다. 영어를 좀 안다고 되지 않는 영어를 만들어 행정 서류에 써 먹고, 책이나 기고문에 써 먹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써 먹는다. 되지 않은 영어가 많이 섞여 있으니 이런 사람들의 글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보통이다. 아래와 같이 글을 쓰고 말하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날 패션쇼에서 김 디자이너는 고정되지 않은 다양한 실루엣으로 쉬크하면서 모던한 감성의 의상들을 선보였다.” 독자들은 이 말을 이해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직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있다. 영어를 알면 한국어에 더욱 겸손해져야 한다.
한국어가 국가 발전의 바탕이다
여야가 극한으로 대치하여 국회가 열리지 않음으로서 산적한 민생 법안이 낮잠을 자거나 폐기된 일이 해마다 반복되었는데, 그 원인이 대개 국회의원이나 정부 관료의 비본질적인 말(욕설이나 무책임한 말 등)에 있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정치인 한 사람의 말 한두 마디 때문에 우리 사회는 수십억 아니 수백억 원의 비용을 부담하게 되고, 행정이 엉망이 되며, 엉뚱하게 계층이나 집단 간의 불화와 알력이라는 달갑잖은 부산물을 얻게 되기도 한다.
바르지 않은 문장이나 불필요하게 어려운 단어 때문에 지식이 쉽게 전달되지 않는다면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데 들이는 시간과 비용이 사회적으로 그만큼 더 많이 든다. 바르지 않은 공문서나 이해하기 어려운 행정 지시 때문에 국민들이 어려움을 겪는다면 행정 효율이 떨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국가와 국민이 더 많은 노력과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생산과 유통 등 기업 활동의 모든 부문에서 이런 시간과 비용이 누적된다면 어떻겠는가? 한국어가 국가 발전의 바탕이라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한국어가 세계인의 언어로 바뀌고 있다. 올해부터 정부는 외국인들이 한국어를 쉽게 배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여러 나라에 세종 학당을 세워 운영하기 시작했다. 한국어를 배우려는 외국인이 꾸준히 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이 토플이나 토익 시험을 치르는 것처럼 외국인도 한국에 오기 위해서 한국어 능력 인증 시험을 치르고 있다.
일부 한국인은 외국에 가서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생활하기도 한다. 이런 추세는 앞으로 더욱 확대될 것이다. 안으로 국민들의 언어 기본권을 지키고 밖으로 외국인을 위해서 한국어를 가르칠 수 있도록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이제 정치인에게 물어보자. “당신은 우리에게 한국어만으로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언어 기본권을 보장하겠는가?” 여기에 덧붙여 한 가지만 더 물어보자. “당신은 우리가 세계인들에게 한국어를 보급할 수 있도록 어떤 정책을 준비할 셈인가?” 이 두 물음에 적극적으로 대답하지 못하는 정치인이라면 ‘문화 한국’을 이끌어 갈 자격이 없다고 판단해도 좋을 것이다.
글쓴이 / 남영신
· 서울대 법대 졸업
· 국어문화운동 회장
· 국어단체연합 국어상담소장
· 저서: <남영신의 한국어 용법 핸드북><4주간의 국어 여행><국어 한무릎공부><문장 비평><국어 천년의 실패와 성공> 등
<영광함평 인터넷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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