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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인터넷뉴스 | 입력 2013-07-01 오후 06:23:30 | 수정 2013-07-01 오후 06:23:30 | 관련기사 2건
아래 글은 국민참여당 최고위원을 지낸 유성찬 씨가 지난 2009년에 썼던 칼럼으로 글에서 밝힌 작가의 심경이 6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때보다 더 절실하고 유효하다는 점과 거꾸로 흐르는 역사를 염려하며 기고한 글이다.
유성찬은 1964년 포항 흥해에서 태어나 고려대 사회환경시스템공학과를 졸업하고 서울 종로직업소년야간학교 교무주임(1985년), 포항민주청년회 회장(1992년), 한국민주청년단체협의회 중앙위원(1992년)을 거쳐 자치분권전국연대 사무처장(2004년) 국민참여당 최고위원(2011년) 경상북도 도지사 후보(2010년) - 국민참여당 2012년 4월 총선, 포항북구 야권단일후보를 지냈다.
▲ 유성찬 전 최고위원 |
1989 년 겨울, 포항
인간은 기억 속에서 살고 있다. 기억이 없다면 아련한 추억도, 지난 즐거움도, 아쉬움도 자기반성과 성찰도 없다. 너무 많은 기억용량은 혼란스러움을 가져오기도 하지만 기억 때문에 새로운 길을 찾아갈 수 있고, 미래의 삶의 방향도 재설정해 나아간다. 특히, 앞선 인생을 산 선배들의 기억을 듣고 그 교훈을 배우게 되면 우리의 인생 항로는 좀 더 옳은 길로 나아가게 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래서 역사를 배우게 되는 것이다.
나또한 그런 경험은 여럿 있다. 라디오도 없었던 1970년대의 어린 시절, 저녁을 먹고 난 뒤 잠이 들기 전까지 어머니의 오래된 이야기를 들으며 그 이야기 속 나만의 상상의 세계로 빠져들기도 했다.
어머니의 20년 전은 1950년대였다. 어머니의 6.25사변 이야기는 신기하고, 그런 전쟁이 있었다는 것이 끔찍하기도 했다. 그 당시 한국전쟁이 터졌고 경주의 안강전투가 대단히 치열했으며, 포항고등학교를 다니다가 학도병으로 나갔던 큰 외숙부님의 시신이라도 찾기 위해 외할머니께서 안강 들녘을 찾아 헤매셨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시대로 빠져드는 것이었다.
그 때 포항과 경주의 형산강을 대치 선으로 북쪽은 인민군이 남쪽은 국군이 진주했고, 외가 집이 커서 국군의 야전병원으로 사용됐으며, 그래서 어머니께서 간호부가 되고 싶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족의 소중함과 가족들의 대단함에 작은 감동을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기억은 생생했지만 내가 직접 겪어보지 못한 일들이라 상상의 나래를 펼 수밖에 없기도 했다.
시간은 화살처럼 빠르다고 했던가? 이제는 우리가 어른이 돼 자식을 키우면서 아이들에게, 아니면 후배들에게 그들이 겪어보지 못한 지난 사건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된다. 겪어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우리의 기억이 그들에게는 학습이고 인생의 과정인 셈이다.
내게 20년 전은 1989년 겨울이다.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년 전이다. 언제 나의 아이들에게 6월 항쟁이며, 청년기의 역사와 우리들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 해 줄 수 있을까? 솔직히 말 해 그런 이야기를 해 줄 자신이 없다. 창피스럽기도 하고 계면쩍기도 한 이야기들을 어떻게 해 줄 수 있을까? 그렇게 보면 회상의 기록이 교육과 학습에는 아주 좋은 도구인 것이다.
2009년을 보내는 지금, ‘크로포토킨의 자서전’을 읽고 있다. 모든 조직의 기초는 인격이며, 전제주의와 중앙집권체제 대신에 우체국의 협력시스템처럼 사회적 근간을 이루는 네트워크 방식의 공동체를 지향한, 19세기 러시아의 짜르 체제에 대항한 지리학자가 크로포토킨이다. 코로포토킨의 자서전이 출간된 때가 1899년, 그러니까 110년 전이다. 짜르가 권력으로 러시아 백성들을 총칼로, 시베리아 유배로 자유주의 지식인들을 억압할 때, 표토르 크로포토킨은 20세기의 시작을 1년 앞 둔 1899년에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내게 2009년은 무슨 생각의 흔적들이 남겨지게 될 것인가? 청년기에서 장년기로 넘어가는 이 시점에서 다시 세상을 뒤돌아보며, 앞으로 살아갈 날을 오늘 꼭 생각해보고 기억해 두고 싶다.
1999년에는 큰 아이가 세상에 나온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우리들의 뒤를 이어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하니 참으로 기분이 좋고 밝았다. 노동을 하며 아버지의 도리를 하는 것도 즐거웠다. 그때는 그렇게 1년이 후딱 지나갔었다.
1989년은 내 기억에 고향에서 살면서 가장 또렷이 남고,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 활동 했던 시기이다. 이 해는 프랑스 혁명 200주년이 되는 해였으므로 문고판의 프랑스 혁명사를 읽었다. 한국에서도 시민들의 힘으로 자유와 민주주의가 만개하기 시작하던 시절이라 전제군주 정치체제인 러시아를 변혁시킨 나르드니키, 러시아지식인, 어머니의 고리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를 쓴 니꼬라이 오스뜨로프스끼 등을 통해 무궁무진한 인생의 교훈들을 배웠던 시절이다.
지금은 여러 직업을 가진 친구들이지만 함께 러시아에 대해 학습을 하며 지역에서 대중 속으로 들어가 실천하자고 약속을 했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혈기왕성한 열정적인 청년기였으므로,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모든 노력을 경주하려는 자세가 충만했다. 전교조가 9월에 창립됐지만 불법으로 간주되고 교사들이 대량 해직된 해였다. 우리는 몇몇 친구들이 모여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의지로 학습을 하며 우리의 정신세계와 미래를 개척하고자 노력했다.
당시에 친구들과 함께 읽었던 글이 ‘러시아의 밤’이라는 책이었다. 이 책은 ‘베라 피그넬’이라는 ‘나로드니키(브나로드 운동을 실천하기 위해 농촌으로 들어간 사회적 사상가들)’의 자서전이다. 손에 꼭 들어가는 문고판이어서 읽기가 참 편한 책이었다.
베라 피그넬은 1852년 6월 24일 러시아의 카잔 현(縣)의 귀족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니콜라이 피그넬은 임업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삼림(森林)감독관으로 봉직했으며, 형제는 6명이었다. 부친이나 모친 모두 근면하고 성실한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베라 피그넬은 러시아 짜르의 전제정치와의 싸움이 가장 격렬하던 시기인 1870년대에 사회변혁운동에 참가해 활동하다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후에 감형돼 ‘러시아의 바스티유’라고 불리는 정치범을 수용하는 네바 강가의 요새감옥에서 22년의 세월을 보냈다.
피그넬은 숙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숙부인 크프리야노프는 종교적 사회적 신분적인 편견을 갖지 않았고 민주주의자로서의 보통국민교육과 노동에 의한 생활의 중요성 부인의 평등권 검소한 생활양식을 주장했다. 그녀는 숙부에게서 여학생시절에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功利主義)를 배웠다.
그리고 진실한 것과 바람직스러운 것, 해야만 하는 것이 삼위일체의 진리로 실행에 옮겨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대학에 들어가 의학을 공부해 병과 빈곤, 무지와 싸우는 지식을 갖고 시골로 돌아오고자 했다고 한다. "민중 속으로" 라는 슬로건을 가진 전형적인 나르드니키 주의자들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피그넬은 감옥에서 자신의 삶을 회상하면서 유년 시대나 청년 시대에 그리스도를 이상으로 여기고 그의 생애를 헌신적인 사랑의 모범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심어진 그리스도교 사상이나 사상 때문에 고행하며 인간이 시련을 당할 때 자신의 사랑에 대한 힘과 정신이 얼마나 강한지를 시험해 볼 수 있다고 의식했다. 기독교의 힘은 이렇게 강한 것일까?
150여 년 전의 러시아의 이야기이지만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예수의 고행과 사상을 모범이라고 생각하는 정신세계는 그 이후에도 계속된다. 많은 사회운동가들이 기독교에서 시작돼 목숨을 건 사회운동가로 발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가?
그 당시는 군사정권이 유지되던 1989년이었기에 100년 전의 러시아를 생각하면서 두렵기도 했지만 짜르체제의 러시아가 무너졌듯이 언젠가는 한국의 군사정권이 무너질 것이라고 확신을 하고 있었다. 아니 확신을 하지 않았더라도 싸워야 한다는 삶의 의지가 있었다. 삶의 방식이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세월이 많이 흘러 그 때의 친구들은 직업을 다양하게 가지게 됐고, 당시의 의지와 상관없이 살고 있지만, 그 때 우리는 그랬다. 베라 피그넬의 의지를 따라 배워야 한다고...
나는 시대가 바뀌고 낡은 사상이나 그것이 시대적 산물로서의 이상이었음을 인정한다. 더불어 변화된 시대와 인간이성의 힘으로 올바른 사회제도와 정신이나 철학이 변화하지 않을 수 없다고 믿고 있다. 어느 시대이든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사랑과 배려심에 기초한 사회적 변화에 대한 갈망과 그 노력은 인정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또한 고전적으로 배웠던 변증법에 근거해서 생각을 해봐도 한 시대의 시대정신은 그 시대를 풍미하는 대중들의 정신세계를 대변하는 것이기에 넘치지 않고 비겁하지 않은 방법으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으며 시대적 산물로서 언제나 정당하다고 믿고 있다.
2009년에 다시 크로포토킨을 읽는 것은 19세기의 러시아의 역사를 읽으면서 그러한 방식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함은 아니다. 나이가 들어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사람의 정신세계와 인생역정을 알고자 함이며, 자신을 돌이켜 보는 잔잔한 여운을 읽고 싶었다. 테러가 주요 활동방식이었던 무정부주의자가 아니라, 세상과 사회가 경쟁으로 치달으며 진화됐다는 것보다, 상호부조에 의해서 더욱 세상이 아름다워지고, 사회가 좋은 방향으로 발전된다는 학설은 2009년을 보내는 내게 더욱 가깝게 느껴진다.
크로포토킨은 1842년에 태어나 1921년에 죽었으니 79세를 살았다. 그리고 자신의 자서전을 57세에 썼다. 훗날 나도 내 삶을 회상하면서 기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2009년을 보내면서 그렇게 생각해본다.
글쓴이 : 유성찬 1964년 포항 출신, 고려대 사회환경시스템공학과 졸업, 서울 종로직업소년야간학교 교무주임(1985년), 포항민주청년회 회장(1992년), 한국민주청년단체협의회 중앙위원(1992년), 자치분권전국연대 사무처장(2004년), 개혁국민정당 경북도추진위원회 추진위원장(2002년~2003년), 국민참여당 경북도당 위원장(2010년~2011년), 국민참여당 최고위원(2011년) 경상북도 도지사 후보(2010년), 국민참여당 2012년 4월 총선, 포항북구 야권단일후보
저서로는 나는 사람이 좋다(2001년), 생각의 흔적(2003년), 서울만 수도면 지방은 하수도냐(2010년), 내가 꿈꾸는 나라 (2012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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