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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인터넷뉴스 | 입력 2007-08-24 | 수정 2007-08-24 오후 5:01:37 | 관련기사 건
일체의 벼슬을 거절하고 오로지 도(道)만 닦고 학문에만 몰두하던 남명선생에게 단성현감이라는 벼슬이 내려집니다. 벼슬에 취임하지 않겠다면서 사직의 상소로 올린 「단성소」는 당시의 부패한 정부를 통쾌하게 비판한 글이어서 읽는 사람의 가슴을 후련하게 해주기에 충분했습니다.
그 뒤에 한말의 큰 학자이자 의병장이던 면암 최익현선생의 상소문을 읽으면서도 젊은 청년의 피가 끓었던 기억을 잊을 수 없습니다. 60년대 초, 한일협정반대운동에 앞장서던 무렵은 주로 그런 글을 읽은 여파였음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다산도 15세에 결혼하여 서울 생활이 시작되자 많은 신진학자들과 접촉하고 새로운 서울의 문물을 접했습니다. 그의 연보인 『사암연보』에 의하면 16세 조항에 “처음으로 성호선생의 유고(遺稿)를 보았다”(始見星湖先生遺稿)라고 기록하고는, “항상 아들이나 조카들에게 ‘나의 큰 꿈은 대부분 성호를 따르며 사숙(私淑)하던 중의 깨달음이었다’라고 말했다”(常語子侄 曰 余之大夢 多從星湖私淑中覺來)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실학의 대학자 반계 유형원의 학문을 계승하여 일세의 학자로 우뚝 솟은 성호의 유저를 읽고 나자, 자신도 성호와 같은 학자가 되겠다는 각오를 지니게 되었고, 요순시대를 복원하고픈 성호의 꿈을 이어받아 경세택민의 개혁사상을 지니게 되었으며, 요순이나 공자의 사상과 거리가 있는 성리학적 경학의 세계를 변혁시켜 새로운 경학세계를 열려는 꿈인 ‘대몽(大夢)’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학자는 선학(先學)을 제대로 만나야 합니다. 다산이 10대에 성호를 유저로 만났던 것은 바로 실학사상의 행운이자 우리 민족의 행운입니다. 다산사상은 누가 제대로 계승하여 실학의 열매를 맺을까요. 선학들이 그렇게 훌륭하건만 제대로 잇지 못하는 오늘의 세상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글쓴이 : 박석무
다산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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