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70년대 나의 여공일기(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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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70년대 나의 여공일기(4)

조명자 / 자유기고가  | 입력 2017-03-20 오후 12:47:36  | 수정 2017-03-20 오후 12:47:36  | 관련기사 건

519d0904b932658_148823542931867682.jpg* 70년대 나의 여공일기(4)

 

지금은 힘들지만 버티면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있었다면 아무리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져도 야멸차게 떼어 낼 텐데 돌아가는 꼴을 보니 보너스는커녕 월급이나 제때 나올까 할 만큼 회사가 위태로워 보였다.

 

어려서부터 나는 왜 "사람도리"라는 거추장스러운 명분에 그리도 약했을까? 뻔히 보이는 시궁창에 친구들 처박고 차마 돌아설 수가 없었다.

 

노조대표고 투쟁이고 나발이고 앞장서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는데 떠밀리듯 코가 꿰어 옴짝달싹 할 수가 없게 됐으니~

 

단체협약과 임금인상 협상 시즌이 돌아왔으나 사측은 내 배 째라하는 식으로 협상에 응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오히려 우리 세 사람 활동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상근을 안 주는 대신 필요하면 작업시간이라도 조합원을 만날 수 있게 하는 재량권을 주더니 근무시간 내 조합 활동은 일체 금지하겠다는 최후통첩을 했다. 그리곤 가장 왕성한 활동가인 쟁의부장 영숙이를 남자들 몇 명이 있는 출하반으로 전격 부서이동을 시켜버렸다.

 

본격적으로 노조탄압이 시작됐는데 우리 셋 머리로는 도무지 타결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지난 번 농성사건으로 상급노조 영등포지역 지부장에게는 완전히 찍혀 우리랑 상종도 않으니 도움을 요청할 수 없고. 의지할 데라곤 같은 노조 쪽으론 원풍모방 방용석지부장 그리고 최영희 언니 밖에 없었다.

 

물론 방지부장 권유로 영등포산선 모임에 참석해 조지송목사님 인명진목사와 인사도 나누었고 같은 금속노조 콘트롤데이타 이영순지부장 유옥순부지부장 등과도 적당히 어울렸지만 뭐랄까? 동지 보다는 무슨 조무래기 보듯 하는 시선에 자존심이 상해 가까이 하질 않았다.

 

그때도 부드럽고 선비 같은 조지송목사님은 우리들에게 말 한마디라도 다정하게 건네셨지만 인목사는 목사라기보다 연맹 간부나 노무부장에 어울리는, 권위적이고도 거친 인상이었다 하긴 그런 점 때문에 공장 사장들도 인목사한테는 한 수 접고 들어갔다니까 그 시대에 핍박받는 노동자들한테 아주 큰 힘이 되었을 게다.

 

아무튼 회사상황이나 노조 내부 결속력이나 어느 것 하나 만만하질 않아 세게 붙을 수는 없고 우리도 최후통첩 공문을 보냈다 "김영숙쟁의부장을 원위치로 복귀시켜라 노사협의에 즉각 응하라" 만약 응하지 않을 경우 노동위원회에 부당노동행위로 고발할 것이며 단체행동도 불사할 것이다

 

그러면서 퇴근 후에 노조에 적극적인 대의원이나 조합원을 순서대로 불러 우리 집 옥상으로 데려갔다 말하자면 결속을 다지기 위한 소모임을 한 것이었는데 돈이 없어 다방이나 음식점을 갈 수는 없고 회사에서 5분 거리 우리 집이 안성맞춤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우리 여섯 식구 대가족이 들끓는 집에 말만한 가시내들이 떼거지로 몰려와 빈대떡을 부치고 라면을 끓여대고 부산을 떨면서 옥상을 점령했으니 그래도 식구 누구 하나 그렇게 엄하신 할아버지조차 한 번도 싫은 소리를 하지 않으셨다.

 

내가 자식을 키워놓고 보니 아무리 못된 길로 빠지지 않을 거란 믿음이 있는 자식이라 해도 과년한 딸자식이 떼로 몰려다니며 회사 측과 싸울 모의를 하고 걸핏하면 외박을 하고 노동운동인지 뭔지 나중에는 형사가 찾아다니고 어디로 튀었는지 종적도 몰라 애를 태우게 하는 애물단지 딸자식을 한 번도 타내지 않고 응원을 해 줄 수 있었을까?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아버지 내 동생들 하다못해 고모 삼촌까지 온 가족의 무한신뢰와 사랑을 받고 있는 나는 다른 복은 없지만 "사랑받는" 천복은 넘칠 만큼 타고났음이 틀림없는 것 같다.

 

단체협약 협상은 진행됐지만 임금인상 협상은 요지부동이었다. 몇 가지 후생복지 부분은 타결됐지만 인상은커녕 임금동결 입장에서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는 사측은 완고했다.

 

임금동결 대신 쟁의부장 원직복귀가 타협안으로 제시하면서 뒷구멍으로 본격적으로 나를 잡을 계책을 세운 게 드러났다. 지난 번 파업 때 나를 잡아가 머리끄뎅이를 쥐고 흔들던 강서경찰서 정보계장이 가끔 와 차도 사주고 농담 따먹기도 하면서 친한 척 하더니 어느 날 나를 따로 불러 의논할 게 있으니 다른 간부에겐 비밀로 하고 혼자만 나왔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만났더니 회사가 언제 망할지 위태위태한 상태다 희망 없는 공장에서 고생만 하다 끝날 미쓰조가 안타까워 자기가 방안을 생각해냈다. 말인즉슨 조흥은행인가 제일은행인가 하여튼 지점장한테 내 자리를 마련하라고 했으니까 이참에 퇴직하고 은행원으로 가라~뭐 이런 회유였다.

 

에구 머리 굴려보니까 돈 몇 푼에 나가떨어지진 않을 것 같고 지 스스로 똑똑하다고 악을 쓰는 년이니까 사무직이면 뿅 가겠지? 적당한 견적이 나왔나보다.

 

그 자리에서 "죄송한데 나는 수학이 50점 이하라 숫자만 보면 머리가 하얘져 은행은 취직은 해도 금방 잘릴 것 같다. 어쨌든 마음 써주셔서 정말 감사하다" 예의상 인사부터 했다.

그리고 혹시 나중에 노사분규 나더라도 많이 밀어달라고 너스레까지 떠니까 아주 쓴 오이 씹은 얼굴로 막장까진 가지 말라는 협박성 발언으로 경고를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데데하게 정보과 계장에게 잘난 척은 했지만 한동안 머리가 어지러웠다. , 그럴 수만 있다면 깔끔한 은행창구 앞에 착착착 돈세는 은행원이 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양심이란 놈이 그때처럼 떼버리고 싶을 만큼 거추장스럽기는 또 처음이었다.

 

 

조명자 / 자유기고가 gsinews@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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