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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인터넷뉴스 | 입력 2009-09-26 오후 4:02:09 | 수정 2009-09-26 오후 4:02:09 | 관련기사 건
얼마 전 한윤형의 『뉴라이트 사용후기』를 읽었다. 뉴라이트와 그에 반대하는 민족주의진영 모두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으며 한국 근대사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상식적인 수준으로 조정하기를 요청하는 책이었다.
어찌 보면 아쉬울 정도로 온건하고 상식적인 이야기라서 좀 더 박력 있고 급진적인 주장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싶기도 했는데 사실 그런 박력 있는 주장으로 점철된 한국 근대사가 얼마나 괴상한지를 섬세하게 포착한 것이 이 책의 미덕 가운데 하나이다.
게다가 해방정국의 혼란 속에서 암살당한 쪽은 양극단의 이승만과 김정일이 아니라 중도에 가까운 여운형과 김구라는 점에서 지은이는 사실상 한국에서 가장 위험한 태도를 용기 있게 취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의 가장 흥미로운 점도 저자의 이런 태도와 관련이 있다. 앞서 썼듯이 저자는 뉴라이트와 민족주의진영 양측 모두를 비판한 끝에 상식적인 수준의(따라서 한국인들이 가장 납득하기 어려워하는) 결론을 도출시키는데 난 그게 88만원 세대라고 불리는 20대-80년대 생의 특성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드디어 뉴라이트와 민족주의진영 그 누구에게도 빚지지 않은, 그래서 그들 모두를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는 세대가 등장한 것이다.
새로운 세대의 출현
그런데 이 세대적 특성의 핵심은 이런 비판이 뉴라이트와 민족주의진영 모두를 쓸어버려야 한다는 무지막지한 결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될 수 없음을 이들은 이미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인식이 가능한 것은 이들에겐 과거가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 방식이 실패했음을 지겹도록 보았으며, 그것은 말 그대로 이미 과거라서 더 이상 이들을 억압하지 못한다. 즉 이들은 냉전이데올로기에도, 뜨거운 광장의 기억에도 사로잡혀 있지 않은 최초의 세대인 것이다.
이런 이 세대의 특징은 흔히 온건하고 냉소적이라고 평가되는데 사실 이것은 68혁명 이후에 태어나 자란 중산층 서구인들의 감수성과도 비슷하다.
물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들이 가진 이 감수성이 얼마나 서구적으로 세련되었나가 아니라 그런 감수성을 집단적으로, 권력과 부의 핵심에 위치하지 않고서도 획득할 수 있었다는 데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이들이 80,90년대의 고도성장기에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박정희세대와 386세대 자신감의 뿌리는
사실 이들의 전 세대인 박정희세대와 386세대가 가진 박력은 모든 것을 제 손으로 이루어냈다는 자신감에서 나온다. 결국 그들이 스스로 이루어내기 전에 주어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뜻이다. 이것은 그들의 박력과 자신감은 타고난 빈곤함을 극복하기 위한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지금의 20대가 그런 박력과 자신감을 가질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들은 다 주어진 채로 태어났다. 아마도 이게 윗세대의 근원적 빈곤함을 자극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나의 이 가설은 기성세대가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비판이, 너는 그렇게 다 주어진 채 태어났으면서 왜 빌빌거리면서 한 달에 88만원밖에 벌지 못하느냐는 식의 매우 저열한 비아냥에 머무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20대를 바라보는 못마땅한 시선의 자가당착
조금만 머리를 써보아도 이게 누워서 침 뱉기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젊은이들이 타고난 것이 결국 기성세대가 마련한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갖고 태어난, 유순하고 세련된, 권태로운 이 중산층의 아이들이 바로 촌스럽고 다혈질이며, 삶을 즐길 줄 모르는 그들이 그렇게도 손에 넣고 싶어 하던 모습이 아닌가.
한국의 부모들이 바라는 자식상이 뭔가. 어려움 없이 성장한, 고운 흰 손을 가진 부드러운 성격의, 미소가 아름다운 고학력자가 아닌가.
그런데 이제 와서 왜 너희들의 뺨은 그렇게 희고 통통하냐고, 왜 못 먹고 못 입은 애들처럼 굴지 못하느냐고 화를 내는 것은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맨손으로 부를 이룬 한강의 기적의 주인공들, 혹은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피 흘린 투사들이 원한 것은 풍요롭고 평화로운 나라가 아니었나?
그런 나라에서 이런 식의 좀 맥 빠진 것처럼 보이는 애들이 등장하는 건 당연하다. 아니, 그게 싫었다면 계속해서 경제규모를 세계 제245위 정도로 유지를 하셨어야지……
IMF 이후 되돌아온 생존의 공포
적을 싹 쓸어내고 새 판을 짜고야 말겠다는 구세대의 철이 덜 든 논리를 조목조목 비판하는 저자의 태도는 이렇게, 세상은 조금 변했고 이제 약간 다른 아이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난 지금 이 새로운 세대의 우월성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이제 우리들도 네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식의 공포가 내재화된, 모두를 적으로 몰아 까부시는 투사가 아니라, 좀 덜 짐승적인 그러니까 좀 더 문명화된 상식인들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IMF사태를 기점으로 이 사회는 이런 한가한 아이들을 탄생시킬 수 있었던 여유로움을 잃어버렸다. 정치적·미학적 세련됨은 좋은 부모를 가진 엄친아와 엄친딸들이 재빨리 회수해갔고, 아이들은 공고를 때려치우고 밴드에서 기타를 치던 남자애가 아니라 수년간의 연예기획사 연습생 생활에서 성공적으로 살아남은 연습벌레를 보며 꿈을 키운다.
그러니까 살아남기 위해서는 부잣집에서 태어나거나 혹은 무릎 연골이 닳도록 춤을 추어 사장님의 눈에 들어야 한다는 걸 이 아이들은 배우고 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상식과 논리를 말하는 이 책이 사람들 사이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건 당연해 보인다.
지금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전쟁이지 이해가 아니다. 공포는 성공적으로 되돌아왔고 생존경쟁에 지친 사람들은 저마다의 대처방식--우울증 혹은 분열증--으로 삶을 견디고 있다.
소모적인 세대 논쟁보다 새로운 삶의 가치를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이 내는 목소리는 한층 절실해진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딛고 선 이 세계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좀 더 나은 삶을 향한 새로운 상상력을 발명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소모적인 세대 논쟁으로 시간을 흘려보내는 사이 우리들이 애써 만들어낸 새로운 가능성은 사라져가는 중이다. 그게 정말로 사라져버린다면 우리가 정말로 여기까지 온 이유, 우리가 필사적으로 가난을 벗어나야 했던 이유, 그것을 위해 온 삶을 희생해야 했던 이유, 그 이유도 함께 영영 잊고 말 것이다.
난 그 이유가 인간다운 삶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난 여전히 너무 순진한 건지도 모르겠다. 나의 엄마 아빠 할아버지 할머니를 과대평가한 건지도 모르겠다. 사실 다들 바란 것은 지갑에 돈이 가득 든 육식동물이 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정정하겠다. 적어도 나는 우리가 여기까지 온 건 인간다운 삶,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바로 이 문장이다. 남을 짓밟지 않고도 내 존재의 존엄을 지킬 수 있다. 이 새로운 세대가 새롭다면 그 새로움은 바로 이 문장을 통해서 표현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문장이 주는 효과-감동 때문이 아니다. 이 감동적인 문장을 사실로 만들기 위해 이들이 발명해야 할 새로운 비전 때문이다. 그리고 이 새로움을 드러내는 하나의 탁월한 징후로서 나는 이 책을 지지한다.
저자 소개
김사과 / 소설가
1984년 서울에서 태어났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사창작과에 재학 중이다. 2005년 단편 「영이」로 제8회 창비 신인소설상을 수상했다. 장편소설로 『미나』가 있다. 2007년 문예진흥기금을 수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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