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을 말아먹는 요괴한 인간들

> 뉴스 > 칼럼&사설

정권을 말아먹는 요괴한 인간들

김흥순 자유기고가  | 입력 2016-11-02 오전 10:19:58  | 수정 2016-11-02 오전 10:19:58  | 관련기사 건

마리 앙투아네트 (Marie Antoinette)와 폴리냑 공작부인 욜랑드 마르틴 가브리엘 드 폴라스트롱(Yolande Martine Gabrielle de Polastron, duchesse de Polignac)


1.jpg

 

오늘은 프랑스를 멸망으로 이끌었다는 마리 앙투아네트 (Marie Antoinette)가 태어난 날이다. 그녀를 프랑스 혁명의 죽음으로 몰고 간 여자는 폴리냑 공작부인이다.

 

궁정에서 영향력이 미미했던 왕세손빈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접근하여 그녀의 비위를 맞추고 가깝게 지내면서 신뢰를 쌓았다. 그 뒤 루이 15세가 죽고 루이 16세가 즉위하면서 루이 15세의 총애를 배경으로 위세를 부리던 뒤바리 백작 부인이 축출되고 바스티유 감옥에 갇히면서 궁정의 실권을 장악한다.

 

폴리냑 백작 부인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아부를 하면서 그녀의 마음에 든 후에 마리 앙투아네트가 사랑한 프티 트리아농에 초대받는 몇 안 되는 왕비의 총신 중 한 명이 되었다.

 

폴리냑 백작 부인은 남편 폴리냑 백작과 함께 국왕 부부의 친구로 권세를 휘둘렀고, 폴리냑 가문에는 연금 및 하사금으로 연간 50만 리블, 이후에 70만 리블이라는 큰돈이 주어졌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폴리냑 백작 부인은 국왕 부부를 가장 먼저 버리고, 오스트리아로 망명했다.

 

오노레 미라보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폴리냑 가문에 대한 편애를 불쾌하게 생각하여 이런 말을 풍자를 남겼다.

 

다사스 가문은 나라를 구한 공으로 1000 에큐, 폴리냑 가문은 나라를 멸망시킨 공훈으로 100만 에큐! ”

 

미국 다큐 채널의 한 프로그램에서 여성의 성적 판타지를 조사했더니 미국 여성에게 가장 매혹적인 성적 판타지 대상은 누구였을까?

 

당혹스럽고, 솔직하고, 그럴듯한 결과가 나왔다.

 

3등은 UPS (페덱스와 유사한 우편택배회사로, 직원이 갈색 제복을 입은 젊고 근육질의 남자들이 대부분)이다. 2등은 소방대원, 1등은? 여자다.

 

성적 판타지를 느끼는 대상이 동성이었던 것이다. 물론 성적 판타지의 대상과 사랑의 대상이 일치한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랑의 완성이 영과 육의 결합이라면 무언가 심상치 않게 느껴지는 조사 결과다.

 

남자들은 여자끼리의 연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여자끼리의 우정과 사랑, 거기에는 남자에게는 없는 그 무엇이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한 여인을 진정으로 사랑했다. 그녀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 혹 자기로 인해 사랑하는 이가 처형될까봐 크게 두려움에 떨며 몹시 슬퍼했다. ‘페어웰, 마이 퀸(2012)’이라는 최근 영화에서 앙투아네트는 책을 읽어주는 시종에게 말한다.

 

혹시 한 여성에게 매료돼본 적이 없느냐? 그녀가 없으면 끔찍하게 괴로워서 눈을 감고, 그녀의 갸름한 얼굴과 보드라운 살결, 빛나는 눈을 상상하곤 하지.”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혁명으로 풍전등화의 운명에 놓인 상황 속에서도 그녀만을 생각하는 자기가 한심스럽다는 듯 푸념 어린 고백을 한다. 앙투아네트가 그토록 사랑한 여인은 도대체 누구일까? 가브리엘 폴리냑(1749~1793) 백작부인이다. 폴리냑 백작부인의 어떤 점이 마리 앙투아네트를 매료시켰던 것일까?

 

앙투아네트는 폴리냑 부인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가 자길 흥분시켰다고 고백한다. 6살 연상의 백작부인은 쉽게 다룰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데다 무례하기조차 한 그녀의 행동이 앙투아네트는 묘하게 마음에 들었다. 궁전을 자기 집처럼 드나들고, 누구나 다 마음에 들고 싶어 하는 앙투아네트의 마음에 들려 애쓰지 않는다는 점 또한 높이 샀다.

 

난 그녀의 자유분방함이 너무 좋았어. 그렇지만 그녀는 지금 내 곁에 없어. 난 그녀의 포로가 됐어. 인정할 수밖에 없어.”

 

그녀 때문에 상심한 적이 많았던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혁명의 살생부 명단에서 그녀를 구원하기 위해 그녀에게 빨리 베르사유를 떠나라고 말한다. 그렇게 앙투아네트는 자신보다, 사랑하는 이의 안위를 먼저 걱정했다.

 

폴리냑 부인은 후작 가문에서 태어나 1767년에 폴리냑 백작(후에 공작)과 결혼했다. 폴리냑 가문은 대대로 부르봉 왕가를 섬겼고, 루이 14세와 루이 15세 시대의 대표적인 외교관 집안이었다.

 

한때 추기경을 배출하는 등 위세를 떨쳤지만 쿠데타 등 여러 사건에 연루돼 당시엔 가운이 쇠퇴하고 있었다. 폴리냑 백작 부부는 궁정에서 영향력이 미미했던 왕세손빈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접근해 가깝게 지내면서 신뢰를 쌓았다.

 

루이 15세가 죽고 앙투아네트의 남편인 루이 16세가 즉위하면서 폴리냑 부부는 일약 궁정의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렇게 권세를 휘두르던 폴리냑 백작부인은, 그러나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가장 먼저 국왕 부부를 버리고 오스트리아로 망명했다.

 

이 한편에서 폴리냑 부인과 같은 날 태어나 난도질당한 여인이 랑발 공작부인이다. 1770년에 오스트리아에서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에 시집 온 그 해에 랑발 공작부인이 프랑스 궁정에서 모시게 되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랑발 공작부인을 대단히 마음에 들어 해, 그녀를 궁녀장에 임명했다. 그러나 1776년 무렵부터 폴리냑 백작 부인에게 마리 앙투아네트의 총애가 넘어가면서, 랑발 공작부인의 궁녀장 지위도 폴리냑 백작 부인에게 빼앗겨 버렸다.

 

기이하게도, 랑발 공작부인은 폴리냑 백작 부인과 생일이 같았다.

얌전하고, 순수한 랑발 공작부인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총애를 받기 위해 아부를 하지 않았지만, 폴리냑 백작 부인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마음대로 금전을 갈취할 수 있는 여자였다. 그러나 다시 랑발 공작부인을 총애하여 궁전을 물러나 있었던 그녀를 다시 궁궐로 불러들였다.

 

1789, 프랑스 혁명이 발발했다.

폴리냑 백작 부인은 혁명이 일어나자 재빨리 오스트리아로 망명했다. 한편 랑발 공작부인은 1791년에는 국왕 루이 16세 일가에 대한 원조를 구하기 위해 영국으로 건너가 귀국 후 튈르리 궁전에 참석해 자신의 방을 왕당파와 국왕 일가와 연락소로 제공 했다.

 

1792810일 랑발 공작부인은 왕당파와로 왕비 마리 앙투와네트와 함께 탕플 탑에 투옥되었다. 819일에는 라호루스 감옥으로 옮겨졌다. 93, 혁명의 정당성을 인정하도록 강요당했으나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가 왕비의 친구이고 왕당파를 혐오하는 민중들에 의해 일어난 9월 학살때 죽임을 당했고, 그 시체는 난도질당했다.

 

"나는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부끄러운 죽음이 아니다. 부끄러운 죽음이란 오직 범죄자에게만 내려지는 것이다"- 1755112일 태어난 혁명기의 불행한 여인 마리 앙투아네트. 그날 밤 기요틴이 콩시에르즈리에서 카루젤 광장으로 옮겨졌다. 813일부터는 루이 16세가 프랑스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공포가 다스린다는 사실을 프랑스에 알리기 위해서였다.

 

국민의 손에 의해 단두대 앞으로 끌려 나가 목숨을 잃은 비극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그녀는 베르사이유의 장미도 아니고, 왕권주의의 위대한 성녀도 아니었고, 혁명의 매춘부도 아니었다.

 

특별히 선을 베풀 힘도 악을 행할 의지도 없는 그저 평범한 여인일 뿐이었다. 어찌 보면 비극의 주인공이 되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인물이다.

 

때로는 평범하고 나약한 인물이 엄청난 운명의 수렁에 빠져들었을 때, 또한 무시무시한 개인적 책임을 져야만 할 때에도 비극은 발생한다. 이런 형태의 비극이 보다 통절한 비극이다.

 

화려한 삶의 주인공에서 감옥으로 곤두박질치는 평범한 여인 마리 앙투아네트의 비극이야말로 역사라는 위대한 창조주가 보여준 한 편의 드라마다.

 

프랑스 혁명 당시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평가는 극도로 부정적이었다. 최근의 연구들에 따르면, 당대 퍼져 있던 그녀에 대한 평판의 대부분이 과장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왕정 시대 프랑스의 왕비로서는 특별히 부적합한 행동이 없었다는 평가가 주류를 잇고 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당시 왕비들은 거의 정치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치적 능력을 이유로 마리 앙투아네트를 폄하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보고 있다.

 

실제 그녀는 상냥하고 동정심이 많은 편이었고, 그저 궁 밖의 세상을 전혀 몰랐던 평범한 왕족일 뿐인데 생활고에 시달렸던 시민들과 혁명 세력에 의해 비방 당했다고도 한다.

 

실제로 혁명 이후 친국왕파와 접촉하여 탈출을 시도했던 것은 루이 16세가 아닌 마리 앙투아네트 쪽이었다. '빵이 없다면 과자를 먹으세요"라는 말도 원래는 거리에서 굶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 신하에게 "저 아이들에게 브리오 슈를 주세요"였다.

 

루이16세가 활을 쏘다 실수로 농민을 맞추었는데 그 사람을 직접 치료한 사람이 마리 앙투와네트였다. 게다가 그녀는 평민들의 생활에 관심이 많아서 직접 자기가 젖소의 젖을 짜보기도 했다.

 

실제 그녀가 쓴 돈은 다른 왕들에 1/10밖에 안 되는 돈이었고 화려한 드레스보다는 소박한 흰옷을 즐겨 입었다. 아들인 루이 17세와 성적관계를 맺었다는 것도 사실은 혁명단에게 세뇌된 루이17세가 한 거짓말이었고 그 당시 루이17세는 마약까지 먹었다.

 

중간적인 성격에 유난히 영리하지도 유난히 어리석지도 않으며, 불도 얼음도 아니고, 특별히 선을 베풀 힘도 없을뿐더러 악을 행할 의사 또한 없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여인일 뿐이었다. 마성을 과시할 소양도 없고 영웅적인 행위를 이룰 의지도 없으며, 따라서 비극의 대상이 되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인물이다.

 

김흥순 자유기고가 gsinews@empas.com

ⓒ 고성인터넷뉴스 www.gsinews.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네티즌 의견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작성자 :
  • 비밀번호 :

칼럼&사설전체목록

[기고] 진정한 도시재생은 무엇일까?

최근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