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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자 / 자유기고가 | 입력 2017-02-20 오후 06:58:04 | 수정 2017-02-20 오후 06:58:04 | 관련기사 건
보릿고개를 넘고 조국근대화를 이루고 선진국 문턱에 들어섰다던 우리가 오늘까지도 왜 이토록 곤고한 삶을 살게 되는지 여기 한 사람의 삶이 교과서처럼 보여주고 있어 그 분의 일기를 소개 할까합니다.
일기를 읽노라면 힘 없는 사람들의 처절했던 생존투쟁의 현장이 눈 앞에 선 해지면서 한 장면 장면에 가슴 졸이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동조하며 치 떨리는 분노에 주먹이 불끈 쥐어지게 됩니다. 어떤 소설이나 영화가 이럴까 싶습니다.
자유기고가, 조명자 님의 여공일기를 연재합니다.
*70년대 나의 여공일기(1)
전봇대에 붙여놓은 민성전자 모집공고를 보고 '노느니 용돈이나 벌자' 는 짧은 생각으로 입사를 한 것이 73년 봄쯤이었을 게다.
인문계 여고 취업반에 들어가 세달 남짓 부기 타자 주산을 배우고 2학기에 취업을 했으니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있나?
삼촌 빽으로 어찌저찌 명동성당 앞 어느 빌딩 수입 약을 취급하는 오퍼상에 취직은 했다만 영타도 제대로 못치는 여직원을 탐탁해 할리가 없었다. 그래서 6개월인가 8개월인가 버티다 알아서 그만뒀다.
키라도 컸으면 하다못해 고속버스 안내양이라도 할 텐데, 그 시절 스튜어디스 다음으로 인기 있던 직종이 고속버스 안내양 이었다.
아무튼 외모 실력 빽 뭐하나 내세울 것 없던지라 뭐하고 사나 고민이 태산이던 내 눈에 전봇대 모집광고가 띄었으니... 동네 정거장 앞에 산뜻한 3층 건물이라 공장이 아니라 무슨 오피스빌딩 같은 느낌도 맘에 든 것 중 하나이긴 했다.
오너는 그 옛날 사전편찬으로 가장 유명했던 민중서관이었다.
2층은 반도체 3층은 전자계산기를 만들어 전량 일본에 수출하는 곳이었는데 나는 3층 품질관리부에 배치됐다.
들어가 보니 반도체는 고졸 계산기 쪽은 주로 중졸 출신이 대세였다. 그래서 2층 애들은 은연중 3층 애들을 깔보는 기색이 역력했다.
같은 고졸출신으로 보자니 지들끼리 몰려다니며 3층 애들을 공순이 취급하는 2층 것들이 같잖기 짝이 없었지만 사무실 여직원은 2층 애들 중에서만 뽑았으니 뻐길만도 했다.
월급에 차별이 있었는지는 기억이 없다 내 일급이 8시간 330원, 교통비 1000원, 식사제공, 보너스400% 아무튼 한 달 월급은 만 원 조금 넘었다.
물론 생산직은 3교대 근무라 야근수당이 붙어 더 많았지만 품질관리부는 주간근무만 하니까 추가수당도 없었다.
인문계를 나와 대학을 못 간 것이 한이 된 나로선 자존심 빼고 남는 것이 없었는데 거들먹거리는 2층 것들이라니...
신통하게도 3년 내내 상위권을 지켜 선생님도 당연히 진학반을 갈 거라고 생각하셨는데 3학년 올라 갈 때 나는 취업반을 택했다.
고등학교 내내 아버지가 빚을 지고 도망을 다녀 등록금을 제 때 내 본 적이 없었다. 이러니 대학을 꿈꿀 수가 있겠는가.
한 반에 60명 10개 반에 석차순대로 2개 반은 우수반으로 특별지도를, 취업반 2개는 취업준비를 나머지는 보통 문과반으로 구성했는데 나는 우수반으로 갈 수 있었다.
취업반을 고집하는 내게 2년제 교대라도 가라고 간곡히 설득하며 안타까워하시던 담임선생님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시절은 신학기 초 선생님들이 가정방문을 다니셨다 3학년 담임이 가정선생님이셨는데 1시간 버스타고 오는 우리 집까지 가정방문을 오셨다.
큰집에서 커피 잔과 커피를 얻어와 차를 타서 선생님 앞에 드리고 밖으로 나왔다 엄마랑 무슨 말씀을 나누시는지 한참동안 우리 집에 머무셨던 걸로 기억된다.
그런데 몇 년 전 기억 총총한 엄마가 무슨 말끝에 그 옛날 고 3 담임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그 선생이 니가 정말 똑똑하다고, 꼭 대학을 보냈으면 좋겠다고 아깝다고 사정을 하는거야. 그래서 할 수가 없다고 돈 버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보내느냐고 했지...
등록금 상습 체납생으로 어지간히 선생님들 성가시게 했는데 편애라고 할 만큼 나를 예뻐해 주시던 2, 3학년 담임선생님들 어쩌면 평생을 관통한 내 자존감은 선생님 사랑으로 굳혀졌는지도 모르겠다.
공장은 제대로 된 직장을 잡기 전까지 정거장으로 생각했던 내게 돌발변수가 생겼다 생산현장에서 남자라곤 대리 계장 과장 등 중간관리자 몇에 라인 담당 기사 수리기사 정도고 전부가 여자였는데 문제는 이 남자들이 생산직 여자들을 아주 갖고 논다는 것이었다.
음담패설을 해도 슬쩍슬쩍 만지고 건드려도 뭔 은혜를 입은 듯 헤죽헤죽 웃는 애들도 꼴 보기 싫었지만 남자랍시고 꼴값 떠는 화상들은 더 참을 수 없었다.
날 잡아 그중에 제일 지저분한 생산2과 과장을 골랐다 나를 건드려야 얘기가 쉬운데 이것들이 인물보고 건드리는지 내 곁엔 얼씬도 않으니 마침 건너편 18살짜리 충청도 아이를 울리는 걸 건수로 과장을 불러냈다.
앞으로 과장님이 그따위 행동을 하거나 기사들 못된 짓을 방조하거나 하면 바로 민중서관 회장님께 직보하겠다.
학생들 사전 편찬하는 회사에서 이런 지저분한 직원들을 내버려두는 것은 사회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유식한 단어까지 써가며 협박을 했더니 과장 안색이 단박에 달라졌다 미쓰 조가 오해한 거라고, 친근함을 표시한 게 그렇게 보였는가보다고 나름 변명은 했는데 한 달 훈가? 여지없이 보복이 날라왔다. 품질관리부에서 생산라인 키보드 납땜담당으로 강등된 것.
그래도 비참하진 않았다 어차피 길게 다닐 생각이 없었는데 뭘 그리고 품질관리보다 단순작업인 납땜이 너무 재미있어 8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때부터 틈틈이 빽이 없어도 인물이 없어도 가능한 직업, 5급 공무원(지금의 9급)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평소실력에 일반상식 책만 보고 시험장에 갔는데 세상에 남녀노소(내 눈에 삼십대 이상은 노인이다) 성균관대 시험장이 인산인해였다 .
당연히 떨어졌다. 예나 지금이나 공무원시험이 입시처럼 치열하게 공부해야 된다는 것을 모르고 제일 하급인 5급이니까 뭐 어떻게 되겠지 하는 단순무식이 부른 참극이었다.
어쨋든 5급 시험에 낙방한 충격은 뭐라 말할 수 없었다. 좌절과 절망, 이런 실력으로 뭐를 할 수 있을까 모든 것에 자신감을 잃었다.
그렇게 헤매던 어느 날 낯 선 여자가 나를 찾아왔다 얼마 전 결성된 노조 분회장인데 나보고 3층 부녀부장을 맡아달란다.
그래서 나는 여기 오래 있을 생각 없다고 완곡히 사양했더니 적임자가 마땅하지 않으니 있을 동안만이라도 해달라고 강권해 못이기는 척 그러마고 했다.
사실 2층 주도로 노조가 생겼다는 소문은 들었어도 전혀 관심이 없던 터였다 그런데 믿었던 취직시험도 떨어지고 막막하던 차에 그래 노조간부 권한으로 생산직 막 대하는 관리자 버릇 고쳐놓겠다 이런 객기가 순간 발동한 것이다.
금속노조 영등포지역지부 민성전자분회 금속연맹 산하에 천 명 이상은 지부로, 천 명 미만은 분회 자격이 주어진다. 그리고 지역별로 분회를 관장하는 곳이 지역지부다 예컨대 같은 반도체 콘트롤데이타 시그니틱스 모토롤라 등은 천 명 이상이라 지부였다.
70년대는 민주노조가 활발하게 태동하던 시대였다 섬유노조로는 원풍모방 반도상사 동일방직 등이 유명했고 가발의 yh, 금속의 기아자동차 대한전선 등이 기억에 남는다. 게다가 영등포산업선교회, 인천산업선교회 등이 노동자의식화교육을 시켜 노동자들의 의식수준이 어느 때보다 높을 때였다.
그런데 우리 사업장은 마치 전도사업을 하듯 영등포지역지부 조직부 간부들이 우리 회사 앞에 와서 제법 똑똑해 뵈는 몇 사람 붙잡고 노조를 만들어라 꼬셔 결성이 됐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의식화하고는 애초부터 상관이 없었다.
알고 보니 2층 반도체 라인의 분회장은 마침 내 고교 3년 선배였다. 그녀는 조합원이고 관리자고 좌중을 압도하는 포스가 장난이 아니었다. 거침없이 당당해 오만해 뵈기까지 한 인물이라 그 앞에선 누구나 한 수 접을 정도였으니까 신생노조의 위상에 여간 보탬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분회장이 빡셀수록 내 태도도 만만치 않았는가 보다 같은 학교 후배라고 한 번도 쉽게 대하지 않고 꼭 너나 하지 않고 미쓰조라 불렀다.
몇 달 후 임시총회에서 3층 부분회장으로 선출됐다. 3층에서 부분회장 조직부장 쟁의부장 요직 삼총사가 탄생한 것이다. 2층이 이렇게 흐물흐물 했던 것은 대충 다니다 결혼하지 우리가 공순이가? 하는 거만한 자의식이 노조에 관심도 참여도 적게 만든 탓인 것 같다.
반도체 계산기 수출이 호황일 때는 전직원이 천 명이 넘을 때도 있었다. 단체협약체결, 임금인상, 보너스 인상을 요구하며 치열하게 사측과 힘겨루기를 할 때 노조에 상근을 하며 결혼도 했던 분회장의 변심이 슬금슬금 보이기 시작했다.
절대 권력을 가진 분회장이니만큼 회사가 가만 놔둘 리가 없었을 게다. 사측의 요구를 적당히 들어주고 행색이 점점 윤택해지고 보나마나 사측의 회유에 넘어간 게 틀림없었다. 대의원이나 간부나 서슬 퍼런 분회장 앞에 감히 덤벼들 수 없었다.
임금인상 요구안을 반 토막 낸 협상안에 싸인을 한 분회장을 더 이상 봐줄수가 없겠다고 3층 삼총사가 결의를 할 즈음 분회장과 회사 측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았다. 어떤 껀수를 잡아서라도 우리 셋을 와해시키려는 조짐이 보이는 것이었다.
인사부장은 노골적으로 조 머시기는 괴기영화에 나오는 악마 같다고 나를 마녀취급 한다는 소문도 들렸다.
그런데 그때쯤 우리 머리도 분회장이 쉽게 건들 수 없도록 굵어져있었다. 외부 노동교육, 셋 다 5박6일 크리스챤아카데미 노동교육도 이수했겠다. 나는 부분회장이라고 서강대 산업문제연구소에서 하는 3개월 과정 노동자교육도 받았겠다. 타 노조 간부들과의 인간관계 노동자의식 등 이미 내적 외적 수준이 높아져있던 때였으니 어용간부와 맞서는데 일정부분 자신이 생겼던 것이다.
아마 우리 분회장 문제를 아카데미 교육에서 만난 원풍모방 방용석지부장에게 상담을 했었나보다. 방지부장이 묘책을 알려줬다.
교육수료생들이 전부 모이는 연례모임에서 발언기회를 줄 테니까 폭로를 하라는 것이다 거기엔 강원룡 목사님을 비롯한 노동계 인사들이 참석하니까 상당한 파장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 분회장도 수료생으로 참석하니까 너무 좋은 기회였다 폭로는 말을 너무 잘 해 별명이 '떠벌이'인 조직부장이 맡기로 했다.
그런데 1박2일 수련회 각 노조 사례발표 때 사회자인 방지부장이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는데도 조직부장이 분위기에 얼었는지 일어서질 않았다. 발표하실 분 없으십니까? 없으면 마무리로 들어갈 텐데 머릿속이 하얘졌다. 말 할 준비고 뭐고 총알같이 일어섰다.
지금도 첫마디는 기억난다. 나는 분회장을 안 해봐서 그 자리가 얼마나 힘들고 막중한 자린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 분회장님은 조합원과 최고 장자리를 다 거쳤으니 누구보다 조합원심정을 잘 알거 아니냐? 요지인즉 천여 명 조합원의 목숨 줄인 단체협상을 어떻게 니 맘대로 사측과 공모하느냐 이말이다...
장내가 일시에 찬물 끼얹듯 조용해졌다 왜 안 그렇겠는가. 내로라하는 노동계 인사들과 노조간부들 앞에 자기 회사 노조분회장을 앉혀놓고 어용간부인 것을 폭로 했으니...
공개망신을 당한 분회장은 질린 얼굴로 황급히 자리를 뜨고 강원룡 목사님이 따로 우리를 불러 상세한 현장소식을 들었다. 그때 산업사회분과 간사로 활동했던 분이 이대총장을 역임했던 신인령 선생님 그리고 서울대정치학과 교수로 정년퇴임하신 김세균 교수이시다.
조명자 / 자유기고가 gsinews@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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