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70년대 나의 여공일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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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70년대 나의 여공일기 (3)

조명자 / 자유기고가  | 입력 2017-02-28 오전 07:42:31  | 수정 2017-02-28 오전 07:42:31  | 관련기사 건

55f8ad96de571db_148781065949319705.jpg     **70년대 나의 여공일기 (3)

 

체불보너스 투쟁은 성공했으나 현장상황은 암울 그 자체였다 우선 노조를 태동시킨 2층 간부들이 와해됐다.

 

빼어난 미인에다가 폭이 넓은 플레어스커트를 즐겨 입어 모든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부분회장이 퇴사를 했고 회계감사 교육선전부장 등 노조간부 두 명이 사임을 했다.

 

그 배경에는 강성들이 버티는 3층과 상대적으로 온건한 2층 간부들을 분열시키려는 사측 공작이 결정타라고 생각된다. 총무과나 인사과 부장들이 몇몇 간부들이나 대의원들을 돌아가면서 만나 회식을 한다는 소문도 들렸고 일부 조합원들을 회유하고 협박하면서 노조탈퇴를 강요한다는 소문도 들렸으니 말이다.

 

소문을 증명이라도 하듯 2층 대의원들이 3층 노조간부들을 이 핑계 저 핑계로 피하는 눈치였고 갈수록 조합원 탈퇴가 늘었다. 반면에 3층 조합원 숫자는 눈에 띄게 늘어났는데 아무래도 노조 투쟁 덕으로 못 받을 뻔했던 보너스를 받게 됐다는 신뢰감이 노조가입을 이끈 동력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강성이고 조합원들과 가장 가까운 쟁의부장 김영숙은 분해서 펄펄 뛰었다. 은혜를 모르는 2층 것들에게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물었더니 향후 체불사태가 벌어지면 비조합원들 체불임금은 받아주지 말잔다. 홧김에 내지른 소리지만 고생을 제일 많이 한 영숙이 로서는 그럴 만도 했다.

 

배가 침몰할 것 같으면 쥐들이 먼저 도망간다고 했던가. 우리 회사는 상무, 생산이사 부장, 계장 등 주요보직자들이 모토롤라에서 스카웃한 서울공대 출신들이었다. 이중에서 상무가 먼저 사표를 내더니 다음엔 꽃미남 생산1부 이희준계장 그리고 이어 나랑 말이 제일 잘 통했던 생산2부 이태길이사가 조만간 회사를 떠날 것 같다면서 작별인사를 미리 하는 것이었다.

 

회사에 힘든 일이 많을 텐데 미쓰 조가 고생 많이 하겠네요. 있을 때 도움도 못주고 떠나게 돼 미안합니다...” 75년 봄 즈음이었다.

 

하긴 복도에서 인사부장과 마주쳤는데 인사도 안 받고 고개를 돌려 황당했던 적도 있고 한 번도 작업현장에 나타나지 않던 모기업 민중서관 회장님이 서너 번이나 현장을 찾아 긴장을 하기도 했다.

 

고민이 깊어졌다 그냥 일개 간부라면 몰라도 노조를 책임지는 분회장직무대행이라는 자리가 사정없이 나를 짓눌렀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난파선 뒷설거지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견딜 수 없었다.

 

조직을 실제로 관장하는 떠벌이 쟁의부장 영숙이, 새침하고 입바른 소리는 잘하지만 영숙이와 쿵짝이 잘 맞아 집행부 핵심이 된 조직부장 김현자..이 쌍두마차에게 무거운 짐을 넘기고 퇴장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근무를 하면서 집행부에 발을 빼는 건 불가능하고 방법은 퇴직 밖에 없었다. 정말로 비겁하지만 도망가고 싶었다. 어쩌다보니 발 들여놓게 된 노조, 노동자란 자각의식도 노조간부로서의 신념도 없는 분회장직무대행. 기본도 못 갖춘 내가 수백 명 조합원들을 무슨 수로 보호하겠는가? 추한 꼴 보이지 말고 알아서 접자.

 

병법을 읽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 아버지 주특기는 36계 줄행랑이다. 할아버지가 피땀 흘려 장만하신 화곡동 입구 천수답 논, 밭떼기를 사채업자에게 몰래 잡혀먹고 들통이 나면 일단 종적을 감춘다.

 

큰아들이 당신 인감 몰래 떼어 담보 잡히고 튀었는데 아들을 사기꾼으로 감방에 처넣을 수도 없고. 울며 겨자 먹기로 할아버지는 빚을 갚아주고 땅을 찾으셨다.

 

덕분에 농사를 지어도 남는 게 없었다. 봄이면 장리쌀을 얻어 끼니를 해결하고 가을 추수 때 이자 쳐 쌀 빚을 갚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사고뭉치인 큰아들 식솔인 며느리 손주들 먹여 살리는 것도 힘든데 손주들 학비를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할아버지는 울화를 술로 푸셨다. 하루 걸러큼씩 고주망태가 돼 집 앞 길바닥에서 고래고래 악을 쓰며 술주정을 하시던 할아버지, 동생들은 뒷곁으로 숨었고 엄마는 그런 할아버지를 원망했다.

 

흙투배기가 된 할아버지를 끌여들어오는 담당은 할머니였고 나는 가끔 할머니를 거들었다. 하루는 나혼자 할아버지를 모셔와야 하는데 하도 짜증이 나 누워 버둥대는 할아버지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한마디 던졌다.

 

할아버지 우리들 먹여 살리는 게 너무 화가 나 이러시는 거지요? 일어 나세요 내일 엄마와 동생들 데리고 나갈게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이놈의 자식이..." 외치며 할아버지가 용수철처럼 튀어 일어나셨다. 미워하면서 닮는다던가? 나도 무책임하고 비겁한 내 아버지처럼 나 몰라라 36계 줄행랑을 놓고 싶었다.

 

쟁의부장 영숙이와 조직부장 현자에게 의논할 게 있다고 만남을 청했다. 그리고 떠나고 싶으니 놓아달라고 사정을 했다. 청천벽력도 유분수지 두 친구들 낯 색이 일시에 변했다.

 

이유를 묻는 친구들에게 그냥 힘들고 지쳤다고 했다. 그랬더니 너 없으면 노조는 끝이라고 하면서 조합원을 봐서라도 그럴 수는 없다고, 조금 쉬게 해 줄테니 다시 힘을 합쳐 노조를 지키자고 애원을 했다.

 

아 그 순간 지겨움이라니...매달리는 동료들이 거머리 같아 끔찍했다. 난 집구석 문제 때문에도 살고 싶지 않단 말이야 제발 나 좀 내버려둬...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그 날도 행여나 도망갈세라 끈질기게 달라붙어 설득을 하던 두 친구가 집까지 찾아 왔는데 다림질 하던 옷가지를 집어던지면서 그만 나를 괴롭히라고 사정없이 신경질을 냈다.

 

충격과 모멸감을 느꼈던지 조직부장 현자가 울면서 뛰쳐나갔다. 미안함과 서러움에 나도 다리 뻗고 울어버렸는데 악착같은 영숙이는 노염도 안타고 나를 감싸 안았다.

 

미쓰조야 미안하다 그런데 니가 없으면 우리는 암것도 못해 니가 기둥이고 우리 보호자야 잘 알잖아?”

 

165cm도 넘는 키다리가 푼수처럼 헤헤거리며 라인을 누비고 생산부 중간관리자나 사무실 과장 부장에게도 스스럼없이 다가가 간드러진 목소리로 농담을 건네는, 영숙이는 가히 민성전자 명물이었다.

 

목동 쪽방촌에 살면서 삼남매 각각 생모가 달랐지만 가난, 난봉꾼 아버지 이 모든 악조건에도 개의치 않고 화장품외판원 엄마와 늘 씩씩하고 신나게 살고 있는 아주 별종이었다.

 

넉살좋고 성격 좋은데다가 인정까지 많아 어떤 때는 제 단골 미장원에 끌고가 퍼머도 해주고 때로는 화장품 샘플도 한보따리 안겨주고 어떤 때는 스카프나 속옷도 사주고 아무튼 손이 컸다. 그동안 받은 선물도 솔찮아 마음도 찝찝한데 포기를 모르는 찰거머리 같은 영숙이 한테 걸렸으니...그날 두 손 두발 다 들었다

 

우리 아버지는 대형 사고를 치고도 할아버지가 지칠 만큼 시간이 흐르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멀쩡한 얼굴로 슬그머니 돌아온다. 나는 비겁해도 우리 아버지처럼 낯은 두껍지 못해 수백 명 동료들은 죽든지 말든지 나만 살자고 발 뺄 만큼 철면피는 못됐다.

 

웬수가 따로 없다고 이를 갈았지만 차마 두 친구를 외면할 수 없어서 전쟁 포로처럼 내 자리로 돌아왔다.



 

조명자 / 자유기고가 gsinews@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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