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자 여사 통영 방문(종합,동영상)'사랑하는 당신, 같이 왔으면 좋았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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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자 여사 통영 방문(종합,동영상)'사랑하는 당신, 같이 왔으면 좋았을걸'

고성 인터넷뉴스  | 입력 2007-09-15  | 수정 2007-09-15 오전 8:05:24  | 관련기사 건


 

세계적 현대음악 작곡 거장 고 윤이상(1917~1995) 선생의 부인 이수자(80) 여사가 남편의 고향인 통영을 찾아 바쁜일정을 보냈다.

 

40년만에 한국 땅을 밟은 이 여사는 딸 윤정(57)씨과 함께 14일 아침 사천공항에서 진의장통영시장과 통영국제음악제 관계자들의 영접을 받고 통영시청에 도착해 공무원과 시민들의 환영속에 통영의 체취를 찾았다.

 

이어 전혁림미술관을 찾아 윤이상 선생과 친구인 화가 전혁림(90) 선생을 만나 못다했던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오후 2시 미륵산 미래사(주지 여진)에서 열린 `윤이상 추모제`에 참석했다.

 

이수자여사는 미래사 법당 안에 모셔진 영정앞에 향을 피운 뒤 재배했으며  여진 스님의 반야심경 봉독에 두 손을 모은 채 염불을 따라했다. 여진 스님은 스님들의 염불 소리가 담긴 음악CD를 가슴에 품고 있다가 이 여사한테 전달했다.

 

또 이날 오후 5시 충무관광호텔에서 진의장 통영시장과 박진해 마산MBC 사장, 딸 윤정씨가 참석한 가운데 기자회견을 열고 통영 방문의 소감을 밝혔다.

 

"고향 방문은 개인보다는 윤이상 선생의 고향 방문이다. 남편의 넋을 갖고 40년만에 고향에 돌아왔다. 저는 통영이 처음이다. 1950년에 결혼했을 때는 전쟁이 일어나 통영도 방문하지 못했다. 수복한 뒤 선생은 유학 갔다. 그래서 저는 통영에 와보지 못했다.


그래서 낯선데, 전혀 낯설지 않다. 이는 윤이상 선생께서 항상 비진도며 한산도 등 통영의 아름다움을 이야기 했다.

 

통영 앞바다와 산천을 바라보며, 여러분들을 봤을 때 고향에 돌아왔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동안 통영에서 음악축제를 해도 소식만 들었지 와보지 못했다. 정부에서 명예를 회복한 만큼 앞으로 기회 있으면 와 볼 것이다. 그래서 고향으로 삼고 나와 자식들의 고향으로도 삼을 것이다"

 

이수자 여사와 딸 윤정씨는 오후 6시30분 통영시장이 마련한 만찬회를 끝으로 공식행사를 마쳤으며 15일 아침 사천공항을 통하여 서울로 떠난다.

 

 

▲ 14일 오전 8시30분 사천공항을 통해 통영방문길에 나선 이수자 여사가 꽃다발을 받아 들고  나오고 있다.

 

 

▲ 시청입구에서  진의장 시장을 비롯한 김용우 의장 일행의 영접을 받고 있다. 

 

 

▲ 시청광장에 모인 100여명의 시민들과 공무원들을 향해 꽃다발을 흔들며 화답

 

 

▲ 시장집무실에서  윤이상음악당 건립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는 이수자 여사

 

 

 

▲ 윤이상선생의 기념사업계획에 만족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이수자 여사

 

 

▲ 이용남 지역 전략사업단장으로 부터  윤이상관련 사업 전반에 대한 브리핑시간

 

 

▲ 전혁림 미술관을 찾아 방명록에 글 남기기

 

▲ 통영이 낳은 위대한 예술가 고 윤이상의 옛시절 친구이자 선배였던 전혁림선생이 건재하여 기쁩니다.연세에 관계없이 오래 사셔서 명작을 남기시기를 기원합니다.

 

▲ 전혁림- 살아 있으면 몇 살이죠?

 

이수자-살아 있었으면 91살이 되고 윤이상선생 살아있을때 찾아 뵈옵으며 얼마나 좋았겠냐, 청와대에 전화백의 작품이 있어서 감개가 무량했다.

50년에  결혼하고 전선생 부산으로 이사와 잠깐 같이 살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  전혁림-그때 신세 많이 졌다.
 

전형근- 윤이상 일대기 준비하고 있다. 선생의 100주년 기념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수자-그림이 선명하고 마음에 와닿는 좋은 그림이었다.

 

 

▲ 부산에서 잠시 함께 살았던 시절을 회상하며 재회의 기쁨을 나누다.

 

 

 

▲ 미래사 주지 여진 스님이 반야심경을 봉독하자 이수자 여사는 두 손을 모은 채 염불을 따라했다. `추모제`가 끝난 뒤 이 여사는 여진 스님을 향해 절을 했다.

 

 

▲ 같이 오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으로 남는다.

 

▲  미래사에서 열린 `윤이상 추모제`에 참석해 두 손을 모아 합장하고 있다. 

    자주 들러 당신과 대화 하리라.

 

▲고 윤이상 선생의 영정을 향해 선 이 여사는  독백을 했다.

 

"고 윤이상 영가시여. 사랑하는 당신이시여. 그렇게 오고 싶어 하던 고향에 제가 왔습니다. 당신과 함께 왔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고향에 오지 못한 한을 푸십시오. 저는 당신을 대신해서 고향의 정을 느낍니다. 하늘 높이 승천하리라 빕니다. 내 인생이 다해 당신 곁으로 갈 때까지 평화롭게 계시길…."

 

▲ 내인생이 다 하는 날 우리 다시 만납시다.

 

  
▲ 이수자 여사는 딸 윤정씨와 진의장 통영시장, 박진해 마산문화방송 사장이 참석한 가운데 14일 오후 충무관광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 <기자회견>

 

-윤이상 선생에 대한 명예회복이 되었다고 보시는지? -<경남신문 신정철 기자>

"일단 정치적인 면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국정원 과거사위원회가 진상규명을 하고 정부에서 사과를 했다. 지금 정치사항으로 봐서는 대단히 힘든 일이라 판단했다. 윤이상 선생은 어디까지나 예술가이니까 예술적인 면에서 회복되기를 기대한다."

 

- 음악제와 국제콩쿠르 등에 있어 `윤이상`이란 명칭 사용을 허용할 것인지?-

 

"통영에서 `윤이상 축제`를 한다고 해서 처음에는 반가웠다. 그런데 그 뒤 이름이 `통영국제음악제`가 되었더라. 그 다음에는 콩쿠르가 나왔다.

 

 콩쿠르를 하면서 지정곡이 윤이상 선생의 곡이어야 한다. 윤이상이란 이름을 붙여 놓고 베토벤이나 모자르트 곡을 해서 수상하고 연주된다면 가슴 아프다. 그래서 때가 안됐다고 생각해서 거절했다. 윤이상 선생의 곡은 거대하고 방대하다. 연주하는 곡은 소곡들이다.

 

 그래서 콩쿠르에 이름에 달지 못하도록 했다. 이해해 달라. 하지만 통영은 윤이상 선생의 고향이기에 통영시가 국제적으로 이름을 내고, 문화적으로 발전을 보게되면 때가 올 것이라 생각한다.

 

 

- 윤이상 선생의 유해를 고국으로 모시고 올 의향은?-<울산매일 백삼기 기자>

 

"선생은 고향에서 돌아가시고 싶었다. 친구인 고 김용익 선생이 윤이상 선생의 동기로 미국에 살다가 돌아가신 뒤 통영에 모셔다가 바다가 바라보는 언덕에 파도소리 들으며 묻혔다. 부인으로부터 그런 내용의 편지를 받고 윤이상 선생은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정말 돌아오고 싶었다. 불행한 사건 때문에 돌아오지 못하고 감기지 않는 눈을 감았다. 당시 명예가 회복되었다면 유골을 당당하게 가지고 왔을 것이다. 베를린에 묻힐 당시 베를린정부에서는 `앞으로 이동하지 못한다`고 했다. 당시 방법이 없어 사인했다. 항상 희망하고 꿈꾸고 있다. 언젠가는 고향 땅에 와서 파도 소리 묻히기를 기대한다. 그것은 누구의 힘으로도 될 수 없고, 정부 대 정부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 본다."

 

- 윤이상 선생이 남긴 악보 중에 가족만을 위한 미공개 작품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그 작품을 통영에서 처음으로 발표 의향은?- <통영인터넷뉴스 허덕용 기자>

 

"(딸 윤정씨 대답) 미공개작품은 하나가 있다. 현악4중주 2번이다. 1번부터 6번까지 썼는데, 2번만 공개가 안됐다.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시기 전에 친필로 악보 위에 글을 썼다. 이것은 다만 가족들을 위한 곡이라고 했다. 보관해 있으면서 공개하지 말라고 하셨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지 12년이 되었다. 2번이 빠졌으니까 얼마 있다가 출판을 먼저 하고 공개하고 싶다. 연주하는 것은 통영에서 하고 싶다."

 

 

▲ 통영찾은 이수자 여사의 모습

 

 

통영 허덕용 기자(tyinews@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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