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액권 도안 인물 신사임당, 김구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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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액권 도안 인물 신사임당, 김구 선정

고성 인터넷뉴스  | 입력 2007-11-05  | 수정 2007-11-05 오후 4:57:14  | 관련기사 건

독립애국지사 김구, 문화예술인 신사임당 고액화폐 인물

 

 

한국은행은 2009년 상반기 발행 예정인 고액권 도안인물로 10만원권에는 백범 김구, 5만원권에는 신사임당을 선정했다. 


백범 김구는 독립애국지사, 신사임당은 여성∙문화예술인으로서의 대표적인 상징성을 보유하고 있다.


전문 여론조사기관인 한국리서치에 의뢰, 만 19세 이상 전국 성인남녀 1,000명 대상(6. 29 ~ 7. 1), 사학, 문학∙철학, 미술 등 학계 인사와 사회단체 대표, 언론인 등 각계의 지도급 인사 150명(108명 응답)을 대상으로(6. 28 ~ 7. 9) 실시한 여론조사를 수렴, 화폐도안 자문위원회의 논의 그리고 정부와의 협의를 거쳐 결정하했다.


또한, 후보인물 10명을 일반국민들에게 공개하고 화폐 도안인물로서의 적합성과 역사적 공과 등에 대한 검증을 위해 국민의견 접수창구를 운영하여, 총 48,000여건의 접수 의견 중 후보인물들의 적절성이 부정될 만한 평가는 거의 없었으며 후보인물 10명 이외에 광개토왕, 단군 등의 인물에 대한 추천도 있었다.

 

 

인물의 주요 업적                   


김구(金九)

 

▲ 10만원 권에 쓰여질 김구 사진

는 백범(白凡)으로,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하여 일제 강점기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으로 활동하였으며 1949년 6월 26일 서거,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백범의 활동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의 법적 뿌리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관련성이다. 1919년 상하이로 망명한 백범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경무국장․내무총장․국무령 등을 거쳐 1940년 주석에 선출되어 분열된 독립노선을 통합하는 등 임정을 끝까지 지켰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해외에서 27년간이나 지속된 것은 백범의 노력 때문이다.

 

백범은 임정이 힘을 잃었을 때 항일단체인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조직하고 1932년 이봉창(李奉昌), 윤봉길(尹奉吉) 등의 의거를 지휘하여 임정의 위상을 드높이고 중국 정부의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을 끌어내었다. 


1941년에는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총사령부를 설치하여 일본에 대한 선전(宣戰)을 포고하고 무력투쟁을 지휘하는 한편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 등의 정당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의 토대를 강화하였다. 


백범은 1945년 해방 후 미군정으로부터 임시정부의 법통을 인정받지 못한 채 귀국했지만, 외세간섭 없는 통일조국 건설을 위해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하고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여 남북협상에 임하는 등 통일정부 수립에 진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에 앞서 백범은 동학 접주(1893~94)로 황해도 지역에서 동학농민운동에 선봉으로 참여했고, 그 후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의 집에 은거하면서 주자학자 고능선(高能善)의 훈도를 받고 남만주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부대에 합류하기도 했으며, 명성황후 시해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인을 살해한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고종의 특사로 집행이 유예된 후 탈옥하였으며, 한 때 마곡사에서 승려가 되기도 했고, 그 뒤 기독교에 입교했다. 아울러 1907년 안창호 등 애국지사들과 독립운동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新民會) 조직에 참가하였다가 1911년 안명근사건(安明根事件)으로 체포되어 징역 17년형을 언도받고 복역 중 감형으로 출옥하여 농촌계몽운동을 하기도 하는 등 오랫동안 애국계몽․국권수호․독립투쟁에 몸담았다.


백범이 집필한 자서전인 『백범일지(白凡逸志)』는 임시정부 및 독립운동사 연구의 귀중한 사료로 현재 보물 제1,245호로 지정되어 있고, 1947년 발표한 ‘나의 소원’은 완전독립국가 및 문화국가 건설을 위해 우리 민족이 세워야 할 철학에 관하여 백범의 이상을 밝힌 글로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수록되어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 5만원 권 지폐에 선정 신사임당
신사임당(申師任堂)

 

호는 사임당(師任堂)이고 이름은 인선(仁善)이며, 1504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조선시대 중기에 여류 문인 및 서화가로 활동하였으며, 1551년 세상을 떴다.


사임당은 여성에 대한 차별과 한계를 극복하고 시․글씨․그림에서 뛰어난 작품을 남겨 3절(三絶)이라 할 수 있는 인물로서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여류 예술가이다.

 


사임당은 조선 중기 회화의 한국적 특성을 나타내는 초충도(草蟲圖), 자리도(紫鯉圖), 산수도 등을 그린 것으로 전해진다. 모두 전칭작품(傳稱作品)으로 알려져 있지만 특히 초충도는 단순한 주제, 간결한 구도, 섬세한 표현, 산뜻한 색감 면에서 높이 평가된다. 사임당의 초서는 그윽하고 고상하고 정결하고 고요하다는 후학의 찬탄을 받았으며, 선 굵은 전서(篆書)는 거침없으면서도 섬세미를 드러낸다고 평가된다. 또 사임당은 시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을 표현한 ‘사친(思親)’,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이 현재까지 남아 있어 그 수준을 보여준다.


아울러 16세기에 새로운 사회세력으로 등장한 사림파 집안에서 태어난 사임당은 각별한 훈도를 받아 어려서부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고 자수와 바느질솜씨가 뛰어났으며, 남편 이원수(李元秀)를 격려하여 벼슬길로 나아가게 하고 항상 정도를 걷도록 내조하는 등 높은 덕과 인격을 쌓은 어진 아내의 소임을 다하였다.


또한 사임당은 사랑과 엄격한 교육으로 네 아들과 세 딸을 모두 훌륭하게 길러냈는데, 특히 아홉 번 과거에 일등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렸던 셋째 아들 이이(李珥)를 조선의 대학자로, 맏딸 매창(梅窓)과 넷째 아들 이우(李瑀)를 시․그림에 뛰어난 예술가로 성장시켜 영재교육에 남다른 성과를 보여주었다. <자료제공/한국은행 - 홍정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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