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김대중 전 대통령 국장 `전국민 애도`하의도 생가터 흙 뿌리며 `눈물로 작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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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김대중 전 대통령 국장 `전국민 애도`하의도 생가터 흙 뿌리며 `눈물로 작별`

한창식 기자  | 입력 2009-08-24  | 수정 2009-08-24  | 관련기사 건

한국 민주주의를 위해 평생을 바친 김대중 전 대통령이 국립현충원에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

 

 

김 전 대통령의 장례가 서거 엿새 만인 23일 오후 2시 경건하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국회의사당 앞마당에서 국장(國葬)으로 치러졌다.


영결식장에는 부인 이희호 여사 등 유가족과 이명박 대통령 내외, 김영삼, 전두환 전 대통령, 김형오 국회의장 등 헌법기관장, 미국·중국·일본 등 해외 조문단, 주한 외교사절, 각계 대표와 시민 등 역대 최대 규모인 2만 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됐다.

 


영결식은 국민의례와 묵념, 고인 약력보고에 이어 장의위원장인 한승수 국무총리의 조사와 박영숙 전 평민당 의원의 추도사 낭독 순으로 시종 엄숙한 가운데 진행됐다.


한승수 총리는 조사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님은 평생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와 민족화해를 실현하기 위해 헌신해 오셨다. 이러한 발자취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또 정치적 입장과 서로 반목해온 앙금을 모두 털어내고 국민 모두가 한 마음으로 통합의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고 했다.

 


박영숙 전 의원은 추도사에서 “대통령님의 서거는 우리에게 이별의 슬픔 보다는 우리 민족의 숙원과 사회의 고질적인 갈등을 풀어내는 화해와 통합의 바람과 함께 행동하는 양심이 되라는 마지막 메시지를 남겼다”며 이것은 우리에게 남긴 큰 선물이라고 했다.


영결식은 천주교, 불교, 개신교, 원불교 순으로 종교의식이 진행된 뒤 생전영상 상영과 헌화, 분향, 추모공연에 이어 3군 의장대의 조총 발사로 마무리됐다.

 


영결식을 마친 후 운구 행렬은 여의도 민주당사와 동교동 사저에 들른 뒤 광화문 세종로 네거리와 서울광장, 서울역을 거쳐 동작대교로 한강을 넘어 오후 4시50분께 국립 서울현충원에 도착했다.


이희호 여사는 서울광장에서 발표한 대국민 메시지를 통해 “남편이 평생 추구해 온 화해와 용서의 정신, 평화와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는 행동의 양심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한다. 또, 남편은 일생을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고통을 겪었고 남북 화해와 협력을 위해 노력해왔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의 장의 행렬이 통과하는 길에는 많은 시민들이 나와 고인의 생전 업적을 되새기며 명복을 빌었고, 유해는 현충원내 264㎡(80여평) 규모로 조성된 묘역에서 종교의식과 하관, 헌토 등의 순서를 거쳐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이어 30년 만이자 건국 후 첫 전직 대통령의 국장으로 안장됐다.

 

 

< 김대중 대통령은... >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24년 1월 농사를 짓는 아버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렇지만 그는 고향마을 ‘후광’을 평생 아호로 삼을 만큼 고향을 사랑했다. 수평선, 파도, 물새, 바람과 햇살은 그에게 꿈과 용기 그리고 예술적 영감을 불어넣었다.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치고 뭍으로 옮겼고, 목포 북교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5년제인 목포상업학교(현 전남제일고등학교)를 1943년에 졸업했다.


김대중은 곧바로 해운회사에 취직했다. 우리나라가 해방을 맞은 1945년에 그는 해운업계에 널리 알려진 성공한 사업가였다. 하지만 그는 정계에 뛰어들었다. 청년 김대중이 정치에 뛰어든 것은 6.25전쟁과 정치 파동을 겪으면서 올바른 정치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독재자로 군림하고, 친일파들이 다시 득세하자 부패한 정권과 싸울 것을 다짐했다. 1957년 김대중은 카톨릭 영세를 받는다. 영세명은 토마스 모어이다. 신앙은 그가 겪게 될 고난의 역정에서 의지가 되었고 화해와 용서와 사랑의 삶을 살게 했다.

 

정치는 그에게 숱한 좌절과 시련을 안겨주었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세 번 연속 떨어졌다. 그리고 1961년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에서 처음 민의원에 뽑혔지만 당선 3일 만에 5.16쿠데타가 일어났다. 쿠데타세력은 국회에 못질을 했다. 그는 의원선서조차 하지 못했다. 모든 것이 암울했지만 그때 평생 반려자이자 동지인 이희호 여사를 만난 것은 한줄기 빛이었다.


1963년 목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의 의정활동은 눈부셨다. 국회도서관을 가장 많이 찾는 의원이었고, 금융, 건설, 외교, 예산, 국방 등 다양한 상임위원회 활동을 펼치며 민주사회를 건설하고 통일로 가는 길을 거침없이 설파했다. 본회의 최장시간 발언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점차 국민들에게 철학과 소신을 갖고 비전을 제시하는 정치인으로 각인되기 시작했다. 그는 4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6.25전쟁 때 공산군에 붙잡혔다가 총살 작전에 목표교도소를 탈출했고(1950년), 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후보 지원 유세 차량를 타고가다 교통사고를 가장한 테러를 당했고(1971년), 일본 도쿄에서 중앙정보부원들에게 납치당해 바다에 던져지기 직전 극적으로 생환하였다(1973). 또 권력을 찬탈한 신군부세력의 군사재판정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1980년). 불온한 세력과 그들의 하수인들은 그를 끊임없이 협박하고 회유했다. 그렇지만 김대중은 불의에 꺾이지 않았고 타협하지 않았다. 독재에 정면으로 맞서 싸웠다.

 

민주화와 인권, 평화통일의 길을 선택한 그는 숱한 투옥, 망명, 연금을 당했다. 늘 죽음의 위험이 따라다녔지만 그는 이를 모두 이겨냈다. 사람들이 김대중이란 이름조차 제대로 부를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재야인사, 동교동, DJ로 불려야했다. 그의 호칭도 대통령 후보, 야당 총재, 국가반란의 수괴, 용공 분자 등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해외에서 김대중은 여러 차례 노벨평화상 후보에 올랐고, 안드레이 사하로프, 레흐 바웬사와 함께 세계 3대 인권수호자로 지구촌의 존경을 받았으며, ‘아시아의 넬슨 만델라’라는 이름을 얻었다. 김대중은 한국 민주화의 상징이었고, 한국의 민주화는 김대중과 함께 전진하였다.

 

연금과 투옥 등 상상할 수 없는 많은 박해가 가해졌지만 김대중은 그 시

들을 분노하거나 아파하면서 허비하지 않았다. 그는 감옥에서 역사, 철학, 경제, 문학서적 등 수백 권의 책을 정독했다. 그러면서 마음의 평정을 찾았다. 그가 읽은 책의 목록을 보면 깊고도 넓은 책읽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삶의 고비마다 그를 바르게 이끌었던 통찰력과 판단력은 옥중에서의 독서와 묵상을 통해 길러졌는지도 모른다.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절명의 위기에서도 그는 내일을 준비했다.

 

김대중은 여러 권의 책을 썼다. 80년 사형선고를 받고 가족에게 보낸 옥중서신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출판되었다. `대중경제론 `3단계통일론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등은 그의 깊은 사색과 탐구의 결과물이다.


13대, 14대 대통령선거에 낙선했지만 1997년 마침내 김대중은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되었다. 건국 이후 최초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는 쾌거였다. 그것은 민주화 세력의 승리요, 국민의 승리이기도 했다. 대통령 김대중은 취임하자 자신을 그토록 핍박했던 독재자와 군사 지도자들을 용서했다.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감옥에서 꺼내주었다. 용서가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줬다. 1980년 11월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후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글이 있다.

 

“진정으로 관대하고 강한 사람만이 용서와 사랑을 보여줄 수 있다. 항상 인내하고, 우리가 우리의 적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도록 항상 기도하자. 그래서 사랑하는 승자가 될 수 있도록 하자."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한국은 사상초유의 외환위기로 국가부도에 직면해 있었다. 고속성장의 온갖 부작용이 한국을 침몰시키고 있었다. 그는 열정적으로 일했다. 관치경제에 대수술을 단행했다. 자본을 끌어오기 위해 누구라도 맞았고 누구라도 찾아갔다. 금융, 기업, 노동, 공공 4대 분야에 일대 개혁을 단행했다. 그리고 2001년 8월, 예상보다 3년을 앞당겨 IMF차입금을 전액 상환했다. 굴욕적인 IMF체제를 벗어났다. 세계는 한국을 경제우등생, 모범국가로 불렀다.


대통령 김대중은 경제위기의 와중에서도 전국에 초고속통신망을 설치하고 범국민적 정보화 교육을 추진하여 한국을 세계 선두의IT강국으로 이끌었다. 민주화운동보상법, 의문사진상규명법, 국가인권위원회법 등 각종 민주화 입법을 추진하여 민주주의와 인권을 확고히 뿌리 내리게 했다.


한국은 이제 세계가 인정하는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 ‘생산적 복지’ 정책은 그의 저술 ‘대중경제론’의 경제철학을 반영한 것으로 한국의 복지 수준을 한 단계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0년 6월에는 분단 55년 만에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어냈다. 그의 햇볕정책은 남과 북의 미움을 녹여 한반도에 화해와 협력, 평화의 기운이 움트게 만들었다.

 

 

그해 12월 김대중은 한국인으로서 처음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한국과 미얀마, 동티모르 등 아시아의 민주화 인권을 신장시키고 남북화해정책을 펼친 공로가 수상 이유였다. 2003년 김대중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자연인으로 돌아왔다. 손자에게 옛날 얘기를 들려주는 할아버지로 돌아왔다. 그가 진정으로 불렀던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속으로 들어갔다. 돌아보면 참으로 먼 길을 헤쳐왔다. 험난한 산을 넘고 거대한 파도를 뚫고 왔다. 많은 것을 이루었지만 돌아보면 아쉬움도 많다. 그것들은 역사가 기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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