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과학을 저버린 저급 '공상소설'을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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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과학을 저버린 저급 '공상소설'을 읽다

고성인터넷뉴스  | 입력 2010-06-06  | 수정 2010-06-07 오후 1:19:54  | 관련기사 건

지난달 20일에 있었던 천안함사건 합동조사단의 발표와 뒤이은 24일의 대통령 담화를 보며 말하자면 또 한 번 허를 찔린 기분이 들었다. 기분이야 꼭 그랬지만 반복되는 일을 두고 번번이 `허를 찔린다`고 하기도 민망한 노릇이고 보면, 찌르는 쪽의 기술을 곱게 인정하거나 찔리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단호히 직시해야 하지 싶다. 아무래도 상식과 합리성에 대한 미련이 문제이다.

 

발표 이래로 많은 지면에서 조목조목 지적했으니만큼 여기서 다시 조사단 발표가 상식적 차원에서 설득하지 못한 점들과 그 때문에 합리적으로 제기되는 여러 의문들을 정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실 TOD 동영상, 버블제트, 잠수함과 어뢰의 성능과 무게와 그것들에 대한 감지기술 같은 것들은 나로선 죄다 이번에 난생처음으로 듣는 얘기들이었다. 그러니 이런 증거들에 대한 논란에 무슨 `과학적` 의견을 보탤 수 없다는 건 분명하다.

 

불확실성 앞에 무력해진 상식

 

하지만 이쪽저쪽 이야기를 비교하여 적어도 서로 반박하지 않는 전제를 끌어내고 그것에 비추어 어떤 것이 더 상식적이고 합리적인가를 따져볼 수는 있다. 그건 설사 아인슈타인 선생께서 환생하여 지켜보신다 한들 굴하지 않고 주장해야 할 `생각하는 인간` 혹은 `의심하는 주체`로서의 권리이다.

 

그러나 역시 생각하고 의심하는 것만으로는 따라가기가 쉽지 않은 것이 이즈음의 세상일인 듯하다. 누군가 무슨 증거를 숨겨두고 있는지 알 도리야 없었지만 적어도 이제껏 알려진 사실들을 갖고는 뭐라 확실한 결론을 제시할 수 없으리란 것, 그것이 천안함 발표에 앞선 예상이었다.

 

그러나 `1번`이라는 글자가 파랗게 도드라진 얌전한 어뢰 수거물과 얼굴에 튄 물방울 같은 것들이 새로운 증거가 되어 결론을 도출하는 과정을 보면서, 현재의 사태가 불확실성 따위를 간단히 초월하는 어떤 비약과 연루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실은 천안함 침몰 원인을 두고 여론조사 같은 게 나올 때부터 진작 알아보았어야 하는 일이다. 사실에 대한 불확실성을 돌파하는 방법으로 여론조사라니, 진정 `발상의 전환`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이미 잊혀진 느낌이지만 따지고 보면 불과 얼마 전, 무죄판결이 나든 말든 일단 기소하고 보자는 식의 법집행 또한 불확실성 앞에서 당당한 태도가 아니었던가. 두고두고 엄청난 영향을 미칠 토목공사를 벌이면서 최소한의 환경영향평가조차 변변히 하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이다.

 

초월과 비약으로 끌어낸 결론

 

더욱이 여기에 4대강 `살리기` 사업으로 이름 붙인 대목은 불확실성을 `승화`시켜 유토피아 담론으로 빚은 형국이다. 요컨대 그 앞에서 근거를 대라고 요구하는 행위가 오히려 민망할 지경이다. 계속해서 허를 찌를 수 있는 기술적 우위는 바로 이런 종류의 초월과 비약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허를 찔리는 사람의 어려움도 여기에 있다. 얼마만큼은 확실하고 또 얼마만큼은 불확실하다는 분별을 가볍게 묵살하는 상황에선 불확실성에 대한 꼼꼼한 문제제기가 의외로 무력해질 때가 많다.

 

무엇보다 이런 식의 비약에 익숙하지 않은 입장에서는 선명한 결론 앞에서 필경 저기에 무슨 근거가 있으려니 하는 심정이 되기가 십상이다. `설마 보기만큼 황당하지는 않겠지` 하는 마음에 어떻게든 허점을 메워주려는 욕구마저 들지 모른다.

 

그러나 정작 비약적 결론을 내린 당사자들은 이같은 지극히 협조적인 시도를 한사코 거부하며 갖고 있는 증거마저 뒤늦은 철통방어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런 태도를 보면 그들이 불확실성을 묵살하고 결론으로 비약한다기보다 비약하기 위해 불확실성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할 도리밖에 없다.

 

`천안함 스토리`, 저급 공상소설로 끝나려나

 

설득력이 떨어지는 주장이나 설명을 가리켜 흔히 `소설 쓴다`고 하는데 그런 표현을 들을 적마다 소설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못내 불만이 많았다. 소설, 적어도 잘 쓴 소설에서는 기법의 선택과는 별개로 사실성에 대한 진지한 관심과 탐구의 정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름 자체가 오해를 사기에 딱 좋은 `공상과학소설`에서도 `공상`은 어디까지나 사실 탐구에 근거한 `과학`에서 영감을 받아야 하며, 설령 과학적 합리를 거슬러 날뛰다가는 일반 소설보다 더 처절한 실패작이 된다.

 

합동조사단 발표와 대통령 담화를 포함하여 정부와 보수언론들이 내놓는 일련의 스토리들이 하나같이 이런 식이다. `과학`의 허울만 걸쳤을 뿐 객관적 근거를 무엇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하다보니 교전도 불사한다는 재난 장르와 꼭 그런 건 아니었다는 코미디 장르를 오락가락하는 저급 `공상`소설이 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이 분명하다 해서 번번이 허를 찔리는 이 반복적 굴욕에서 벗어날 방도가 쉽게 생기는 건 아니다. 그래도 우선은 최소한 비약 앞에서 주눅 들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해본다. 지금 펼쳐지는 광경은 중력을 어렵게 이겨낸 성취 같은 것이 아니라 불확실성의 질소를 채운 풍선의 가벼움일 뿐이다.

 

높이 날아오른 풍선도 시간이 지나면 터지기 마련이듯 천안함을 둘러싼 사실들은 결국 밝혀질 것이다. 언제가 되더라도, 설사 몇 번의 선거가 지나간 뒤라 해도 역사를 조금만 돌이켜보면 그것만큼은 분명하다.

 

진실 추구하며 주눅 들지 말기

 

주눅들지 말아야 할 일이 천안함 발표뿐이랴. 4대강이 오래도록 그렇고 최근의 전교조 교사 집단 파면과 해임 등 중징계 방침도 그러하다. 저 정도 비약이라면 무슨 숨겨진 근거가 있으려니 하는 소심한 생각을 벗어버리자. 저기에는 빤히 눈에 보이는 몰상식과 불합리, 그리고 `정치적` 이익에 대한 탐욕이 전부이다.

 

밝혀질 일은 반드시 밝혀지기 마련이겠지만 지금 이 순간 난무하는 저급 스토리들을 방치하는 것도 무책임한 일이다. 대부분의 시간을 어쩔 수 없는 독자로 보내야 하고 이따금 비평가 노릇을 해도 무력하기 십상인 우리들에게 드물게 찾아오는 `작가의 시간`이 다가왔다. 진실에 대한 열정과 시적 정의(poetic justice)로 충만한 스토리를 기대해본다.

<창비주간논평>

 

저자 소개

황정아 / 문학평론가, 이화여대 연구교수. 서울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2003년 동대학원에서 「D. H. Lawrence의 근대문명관과 아메리카」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이화여대 영문과 연구교수로 재직중이다.

 

역서로 『도둑맞은 세계화』 『쿠바의 헤밍웨이』 『이런 사랑』 『종속국가 일본』(공역) 『내게 진실의 전부를 주지 마세요』 등이 있으며, 최근 논문으로 「묻혀버린 질문: ‘윤리’에 관한 비평과 외국이론 수용의 문제」 「‘거울’의 마술과 역사 다시 쓰기: 쌀만 루쉬디의 『자정의 아이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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