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나라 전체 충격봉하마을 진혼곡 속 전국서 문상 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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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나라 전체 충격봉하마을 진혼곡 속 전국서 문상 행렬

고성인터넷뉴스  | 입력 2009-05-24  | 수정 2009-05-24 오후 12:01:44  | 관련기사 건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 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 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3일 오전 5시10분께 사저 안에 있는 컴퓨터에 유서를 남겼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3일 오전 6시 40분경 비서관 1명과 등산을 하던 중 산 아래 언덕에 떨어져 병원으로 긴급 이송됐으나 서거했다.

 

노 전 대통령은 당시 머리 부분을 크게 다쳐 오전 7시 5분께 인근 김해 세영병원으로 옮겨진 뒤 양산 부산대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숨졌다

 

노 전 대통령이 실족을 통한 자살을 기도하여 검찰의 수사로 인한 심리적 압박과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640만달러를 받은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이미지 실추와 낙담, 억울함이 복합적으로 겹친 결과로 보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이 서거소식에 국민들은 큰 충격에 휩싸였으며 정치권은 물론 검찰에 대한 시선도 곱지만 않다. 네티즌은 이번 노 전대통령의 사망은 `사회적 타살`이라고 지적한 뒤 최근 검찰 수사 등에 큰 불만을 제기했다.

 

또 어떤 네티즌은 "짧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서민적이고 소외된 이들을 돌보는데 애썼으며 권력을 국민을 향해 휘두르지 않은 유일한 대통령으로 기억하겠습니다"는 추모의 글이 올라왔다.

 

행정부, 정치권, 경제계, 문화계, 학계, 시민단체, 네티즌 등 각계각층은 갑작스런 서거 소식을 믿을 수 없다는 반응과 함께 비통한 심정을 드러내면서 애도의 마음을 전했다.

 

각 정당과 경제단체, 종교계 등은 공식 논평을 잇따라 발표해 애도의 뜻을 표했으며, 네티즌과 시민들 그리고 고향인 김해 봉화마을 사람들도 절절한 추모의 정을 드러냈다.

 

 이명박 대통령은 "참으로 믿기 어렵다. 애석하고 비통한 일"이라고 애도의 뜻을 표했다.

 

이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에서 한.EU정상회담 도중 서거 사실을 보고받고 유가족들에게 깊은 애도의 뜻을 전하면서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에 어긋남이 없도록 정중하게 모시라"고 지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서거 소식이 전해진 인터넷 포털사이트에는 추모와 슬픔을 표하는 글들이 잇따라 올라오고 있다. 다음 아고라에는 이날 오전 노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서명란이 개설돼 모두 1만3천여명에 달하는 네티즌이 헌화했다.

 

포털사이트에 게시된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추모대회를 열자`는 글을 보고 오후 4시께부터 대한문 앞으로 모여든 시민들은 임시 분향소를 설치해 추모행사를 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의 고향인 경남 김해 봉하마을은 침통한 분위기 속에 충격에 휩싸였다.

 

23일 오전 10시께 마을회관에서 마을 공동 스피커를 통해 진혼곡을 내보내기 시작하자 사저 주변에 몰린 주민들은 슬픔을 감추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혔다.

 

평소 이념 갈등이 있었던 시민단체나 학계도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한 마음으로 애도의 뜻을 전했다.

 

보수단체인 자유청년연대 최용호 대표는 "매우 안타까운 일이고 깊이 애도한다"고 했으며, 뉴라이트전국연합 최진학 정책실장도 "고인의 죽음에 비통한 심정을 누를 수 없다"며 추모의 뜻을 전했다.

 

서거한 노무현 전 대통령은 1946년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에서 태어나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했고, 이후 독학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짧은 판사생활 뒤 부산에서 세무전문 변호사로 활동하던 중 부산지역 민주화 투쟁인 부림사건 변론을 맡으면서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다.

 

특히 1987년 대우조선 노동자가 시위 도중 사망한 사건땐 제3자개입 혐의로 검찰에 구속되기도 했지만 이듬해인 1988년 13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으며 그해 국회 5공청문회에서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1990년 3당 합당 때는 `역사적 반역`이라며 합류를 거부했다가 1992년 총선 실패, 1995년 부산시장 낙선, 1996년 서울 종로의 패배 등 정치적 시련을 겪기도 했다. 이때 붙은 별명이 ‘바보 노무현’

 

김대중 정권 출범 이후 해양수산부장관을 역임한 뒤 새천년민주당 대선 후보로 나섰고, 지난 2002년 12월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재임 기간 중에도 그의 정치 역정은 순탄하지 않았으며 지난 2004년 국회의 탄핵소추안 가결로 대통령 직무가 한 동안 정지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퇴인 후에는 고향인 봉화마을 내려가 조용히 지냈으나 박연차 뇌물 게이트가 터지면서 검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는 불행이 이어졌으며 노 전 대통령의 가장 큰 자산이었던 도덕성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특히 인생행로를 함께 걸은 진보진영 정치인들과 젊은 386들이 대거 사법처리됐고 특히 부인과 아들이 검찰 조사를 받아 대통령 가족이 검찰에 소환되는 불명예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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