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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인터넷뉴스 | 입력 2010-11-03 | 수정 2010-11-03 | 관련기사 건
지난여름 석 달을 유럽에서 보냈다. 어떤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기엔 턱없이 짧은 기간이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유럽의 이모저모를 느끼고자 애를 썼다. 몇 권의 책을 읽었고 유럽인, 거주동포, 여행객과도 이야기를 나눠봤다.
그런데 그중 체류 초기에 만난 몇몇 한국인 개인여행객의 유럽관광 소감은 약간 의외였다. 그들이 "우리나라가 제일 좋은 나라다"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듣는 순간에는 잘못 들었나 싶었다.
물론 이는 한국 떠나면 다 애국자 된다는 흔해빠진 모습일 수 있다. 가이드를 졸졸 따라다니는 게 아니라 혼자서 여러 달 여행하다 보면 너무 힘들어 고국이 그리워질 수도 있다. 새로운 곳은 낯선 곳이기도 하지 않은가.
또한 이들은 생활인이라기보다 여행자로서 유럽을 관찰한 데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몇달씩 해외여행을 즐길 정도면 한국에선 살 만한 처지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유럽국가의 배려 같은 덴 관심을 가지기 힘들다.
한국에는 없는 유럽사회의 불편
그러나 유럽 체류가 계속되면서 이들의 생각에 공감하는 부분이 늘어났다. 한국에는 없는 불편을 체험하게 된 것이다. 유럽 방문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전보다는 꽤 긴 기간이라서 이것저것 눈귀에 들어왔다.
우선 숙소에서 인터넷이 제대로 안되는 경우가 흔했다. 기차가 몇십분 연착하는 일도 예사였다. 택시는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식당에서 물 마시려면 유럽 슈퍼의 10배나 되는 1~2유로씩 내야 했다. 특히 공중화장실은 찾기가 어려웠고 0.5~1유로의 요금을 받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고장난 기차 화장실도 많았다.
그리고 유럽서 오래 산 사람들에 따르면 은행계좌 개설하려면 아주 복잡하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 전화나 인터넷 개설도 마찬가지다. 전자제품 A/S도 한참 기다려야 하고 못 고쳐도 돈 내야 한다.
일찍 문 닫는 가게가 많고 휴일엔 버스가 제대로 다니지 않는다. 집까지 물건을 배달해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지금은 많이 나아지긴 했다지만 유럽엔 써비스란 게 없다는 극단적인 표현도 들을 수 있었다.
익숙해지면 별것 아닐 수 있겠으나 한국과는 크게 대조적인 모습임에는 틀림없다. 인터넷 강국이고, 거의 스케줄대로 기차가 도착하고, 전철역에선 깨끗한 공짜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고, 전자제품 A/S 받으면 친절했는지 확인까지 하는 한국이 아닌가.
선진국 특히 복지선진국 유럽이 우리보다 모든 면에서 나은 게 아닌 셈이다. 이렇게 우리가 느끼는 불편 중에는 식당 물값처럼 문화가 다른 탓일 수도 있고, 기차 연착처럼 EU통합에 따른 급격한 교통량 증대와 같은 특수 사정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한국식 써비스를 기대할 수 없는 이유
하지만 아마도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인건비와 노동권의 차이가 아닌가 싶다. 1년에 여름 한달이 휴가기간이고 든든한 사회보장으로 노동자가 크게 기죽지 않는 유럽인지라 사장이 한국식의 써비스를 노동자에게 요구하기 힘든 상황인 것이다.
물론 선진국이라고 다 같지 않아서 일본의 써비스는 유럽과 크게 다르다. 요금이 비싸긴 하지만 써비스의 질은 한국보다 나은 편이다. 그런데 보통 일본은 복지사회 축에 들지 않는다. 노동중독사회란 이미지가 아직도 강하다. 또 유럽보다는 써비스가 나은 미국도 복지국가라 하기는 힘들다.
그리고 유럽 내에서도 차이가 있어서 이딸리아와 덴마크는 많이 다르다. 또한 국가가 개입할 수밖에 없는 교육과 의료 써비스는 유럽이 한국보다 앞선다. 그렇지만 이런 단서들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일부 분야에선 유럽보다 한국의 써비스가 편리하다는 사실을 부인하긴 힘들다.
결국 선진복지사회에선 노동자의 권리가 강화되는 대신에 소비자의 권리가 약화될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를 노동자와 소비자의 모순이라고 명명하면 어떨까 싶다.
노동자와 소비자의 모순
노동자와 소비자는 상당히 겹치기 때문에 이 모순은 노동자와 자본가의 모순보다 복잡하다. 그런데 노자(勞資)모순 이외의 다른 모순을 처리하는 방식이 노자모순 못지않게 선진복지사회로의 이행방식을 규정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노동자-노동자 모순이나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자본가-자본가 모순을 어떻게 처리할지 몰라 쩔쩔매고 있는 한국사회에선 노동자와 소비자 사이의 모순 처리도 난제 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다.
프랑스와는 달리 지하철이 파업하면 한국의 시민들은 크게 분노한다. 노조의 조직률과 단체협약 적용률이 낮고 대기업노조에 대한 불신이 큰 탓이리라. 하지만 한국의 소비자본주의가 과도하게 발전한 데도 원인이 있는 듯싶다.
박정희 개발독재체제에선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소비자도 억압받았다. 자본축적을 위해 일반시민은 물론 기업가의 소비까지도 규제대상이었다. 해외여행 억제, 통행금지, 호화주택 규제, 양담배 등 외제품 규제 등이 그런 경우다.
그런데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소비자유화가 갑자기 폭발했다. 그동안의 억압에 대한 반동으로 한국인의 소비문화는 자제력을 상실했다. 얼마 안되는 국민연금이지만 이것도 개인저축 동기를 약화시켰고 살인적인 자녀교육 경쟁도 소비를 부추겼다.
1988년 25%이던 가계순저축률이 지금은 3% 수준으로 OECD 국가 중 밑바닥권이다. 너도나도 명품을 찾고, 밤늦게까지 흥청거리고, 해외관광지 곳곳을 누비고 다닌다. 생활에 핍박을 받으면서까지 자식들 외국유학 보내는 사례도 드물지 않다.
이러한 소비의 양적 확대는 질적 발전을 수반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서유럽보다 편리한 소비문화를 창출한 셈이다. 이에 반해 노동자, 농민, 영세사업자, 장애인, 빈곤노인 같은 사회적 약자의 권리옹호는 지체되었다. 이게 다름아닌 압축적 불균등발전이다.
선진복지사회로 나아가려면 이러한 불균등을 바로잡아야 한다.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진전시키려면 소비자의 권리가 희생당할 수 있다. 예컨대 가게점원의 쉴 권리를 위해선 저녁 늦은 장보기가 어려워지고, 국내 농민을 위해 값싼 해외농산물 소비가 억제되어야 한다.
또한 재래상인을 보호하려면 기업형슈퍼(SSM) 이용이 힘들어지며, 휠체어 장애인들이 버스를 쉽게 이용하게 하려면 일반승객이 불편해지며, 많은 빈곤노인이 무료로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 지하철이 복잡해진다.
시대의 화두, 복지대세 한국
요즘 한국에선 복지가 대세다. 민주당이 중도 어쩌고 하는 걸 걷어치우고 진보와 복지를 내세웠고, 보수수구세력인 한나라당조차 `친서민`에 이어 `70% 복지`를 약속하고 나섰다. 대권 선두주자인 박근혜 의원이 복지문제에 관심을 가진 지는 꽤 되었다. 이른바 총체적 `좌클릭`이다.
한국사회의 발전단계에서 보면 이는 필연이다. 과거의 고성장시대엔 성장으로, 곧 전체적 상향이동으로 복지문제가 덮어졌다. 그러나 자본과 노동의 성숙으로 인해 중성장시대에 들어서면서 복지가 화두로 부상한 것이다.
게다가 정보화와 글로벌화로 양극화가 심해졌고 IMF사태 이후 구조조정의 칼끝이 항상 우리를 노리게끔 되었다. 이런 판이니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고 사회경제적 위험에 공동 대비하는 복지체제를 어찌 강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경기도 교육감의 무상급식 공약은 조·중·동의 십자포화 속에서도 국민적 지지를 획득했다. 나아가 지난 6·2 지방선거에서 진보교육감이 대거 당선되고 한나라당이 참패하면서 정치세력도 시대적 흐름에 눈을 뜬 셈이다.
그런데 복지는 공짜가 아니다. 복지지출을 늘리려면 4대강사업을 중단하거나 세금을 더 거둬야 한다. 그래서 한나라당 일각에서 부자감세 철회 주장이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한나라당의 정체성을 건드렸고 갈팡질팡하게끔 되었다.
우리는 준비가 되어 있나
한편 부자증세만으론 불충분하다. 일반시민도 복지강화의 부담을 공동으로 짊어져야 한다. 특히 진보를 주창하는 세력은 솔선수범해야 한다. 국민 1인당 평균 만원 정도 건강보험료를 더 내어 보장성을 대폭 확대하자는 `건강보험 하나로` 운동에 참여하길 미적거리는 일부 진보세력 같은 식의 행태를 취해선 안된다.
소수 상층에만 부과하는 `부유세` 대신 중산층도 부담하는 `복지세`가 명분에서 앞선다. 또한 대기업 정규직의 기득권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비정규직의 처우개선을 외치는 건 진정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복지는 그냥 낭비가 아니다. 한국의 유능한 인재들이 안정적인 대기업, 공무원, 의사, 법조인으로만 몰리는 건 고소득에 대한 열망과 더불어 미비한 사회보장제도 때문이다. 따라서 복지를 강화하면 혁신적 중소기업이나 기술계통 쪽으로도 인재가 골고루 분포되어 사회의 잠재력 성장력이 강화된다.
또한 복지가 충실해지면 사회적 갈등이 줄어들어 백성이 행복해진다. 복지병을 우려하는 이들이 많지만, 시장경쟁과 국가복지를 적절히 결합하면 역동적이면서도 세계 최고의 행복을 누리는 덴마크 같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
다만 그런 복지를 위해선 당분간 희생해야 할 부분이 생기기 마련이다. 소비문화의 조절, 세금부담의 증대, 기득권의 약화가 그런 것들이다. 선진복지사회를 지향한다면 복지가 공짜가 아님을 분명히하자. 동시에 그 복지가 행복한 미래에 대한 투자라는 점도 인식하자.<창비주간논평>
저자 소개
김기원(金基元)
한국방송통신대 경제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음. 저서 『경제학 포털』 『재벌개혁은 끝났는가』 『미군정기의 경제구조』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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