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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환 / 남북교류협력지원협회 회장 | 입력 2019-05-15 오후 06:55:29 | 수정 2019-05-15 오후 06:55:29 | 관련기사 건
북미 하노이회담 결렬 이후 한미 간에 어렵게 합의를 이룬 대북 식량지원이 과연 비핵화협상 교착 타개의 마중물이 될 수 있을지 논란이 분분하다. ‘단거리 미사일 도발에 보상이나 하듯이 쌀 지원하는 것은 안 된다’는 반대의견도 만만치 않고, 심지어는 북한이 쌀 지원을 받을 것이냐를 두고도 전망이 갈린다. 북한의 대남매체 ‘메아리’가 “몇건의 인도주의 협력사업을 놓고 마치 북남관계의 큰 전진이나 이룩될 것처럼 호들갑을 피우는 것은 민심에 대한 기만이며 동족에 대한 예의와 도리도 없는 행위”(2019.5.12)라고 주장한 것이 이런 논란에 더욱 불을 지피고 있다.
예외없는 ‘쌀의 정치화’
대북 식량지원, 특히 쌀 지원 문제는 민간 차원의 인도적 지원과 성격이 다르다. 대북 쌀 지원은 정부 당국이 주체이고 규모 역시 일반 민간단체가 감당할 수준을 넘어선다. 김영삼정부부터 시작된 정부 직접지원 방식의 대북 쌀 지원은 물량으로는 1995년부터 2010년까지 총 265만 5천 톤, 금액으로는 1조 1천15억원 정도가 지원되었다.
상당 규모의 예산 편성이 필요하기에 그동안 정부 차원의 쌀 지원은 인도주의 일반원칙보다 핵문제와 국내정치 상황 등 정치적 조건에 민감하게 연동돼왔고, 그런 배경 때문에 대북지원단체 등 시민사회에서는 남북관계의 새로운 접근은 ‘쌀의 정치화’를 벗어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해오기도 했다. 그러나 북한의 핵 폭주와 군사적 긴장 증대, 국제 대북제재 확대가 가중되는 상황에서 쌀의 정치화를 벗어나는 새로운 접근은 사실상 봉쇄되어왔고, 이는 ‘촛불정부’인 문재인정부 들어서도 마찬가지였다. 하노이회담 결렬 이후 쌀 지원 카드를 꺼내든 것도 과정이 어떠했건 예외없는 ‘쌀의 정치화’라 할 수 있다.
“근본적인 문제들을 밀어놓고 ‘인도주의’니 하며 공허한 말치레와 생색내기”를 한다거나, “남조선 당국이 북남선언들을 철저히 이행하려는 입장과 자세부터 바로 가지지 않는다면 북남관계의 전진이나 평화번영의 그 어떤 결실도 기대할 수 없다”는 최근 북한의 거듭된 발언은 비핵화협상 및 남북관계 진전과 쌀 지원을 연계하고 있는 문재인정부에 대한 섭섭함과 원망의 직설적 표현이다. 조건부 식량지원에 대한 북한의 부정적 의사 표명이 분명한 이상, 적어도 현시점에서는 실제로 북한이 쌀 지원을 수용할지조차 불투명하다.
여전히 유용한 식량지원 카드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문재인정부가 미국과 국제사회로부터 대북 식량지원을 설득해낸 의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과거와 달리 북한의 핵능력이 게임체인저 수준에 달해 있고 엄밀한 국제 대북제재시스템이 작동하는 조건하에서 식량지원 카드의 확보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당장은 북한이 쌀 지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최대의 인도적 협력사업인 쌀 지원을 확보함으로써 남북관계 발전의 중요한 레버리지 하나를 확보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문재인정부가 지난해 남북정상회담 이후 적절한 시점에 북한에 ‘쌀을 지원’하고 대신 광산물과 같은 물자로 돌려받는 물물교환(구상무역) 방식의 단발성 식량지원을 추진했으면 어땠을까. 그런 일이 구체적으로 추진되었다면 현 교착국면을 비껴가거나 혹은 단축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방식은 과거에도 사례가 있고, 또 퍼주기 논란이나 제재위반 논란도 피해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2007년 남북은 8천만 달러 경공업 원자재 지원과 매년 3% 물자 상환에 합의해 남북관계가 단절되기 전인 2008년에 240만 달러 상당의 북한 단천산 아연괴를 상환받은 일이 있다). 물물교환 형태의 인도적 지원방식은 국제대북제제시스템의 작동과 대북정책을 둘러싼 국내정치 갈등 등을 고려할 때 지금도 여전히 시도할 만한 가치가 있다.
공공성을 앞세운 적극적 대응으로 전환해야
현재 북한의 태도로 보아 대북 식량지원을 비핵화 교착상황 타개와 직접 연동시키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런 조건에서 정부는 비핵화협상이나 남북관계 진전과 관련해서 더 새롭고 포괄적인 방식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그 첫 수순은 ‘쌀의 정치화’와 결별하는 것, 즉 식량지원과 인도적 협력을 비핵화협상과 분리하는 것이다. 식량지원 문제를 로우키(low-key)로 바꾸고 주체, 방식 등도 기존과 달라질 필요가 있다. 아울러 인도적 대북협력 사안에 관해서는 대북제재를 의식한 소극 대응에서 벗어나 인도주의와 공공성을 앞세운 적극 대응으로 전환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정부 중심 교류협력 기조를 민간 중심으로 과감히 전환하고, 여러 민간단체와 지자체들이 계획하고 있는 보건의료 및 공공인프라 관련 인도적 협력사업들을 적극 지원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민간의 대북 협력사업 추진에 필요한 대북제재 면제 지원에도 정부가 적극 나서야 한다.
대북 식량지원을 쌀의 정치화에서 해방하는 것은 비핵화 동력의 촉진과 시야(視野)의 전환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이는 한반도 대전환이 시작된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전후 상황을 되돌아보면 더욱 명료해진다. 핵문제에 대해 그토록 완고하던 북한이 평창올림픽에 참가하고 이후 일련의 전환적 움직임에 나선 첫 단추는 문재인 대통령의 ‘한국정부 승인 없이 한반도에서 전쟁 불가’라는 전쟁반대 선언과 ‘평창올림픽 기간 중 한미합동군사훈련 중단’이라는 군사긴장 완화조치였다. 매우 비판적 언사를 구사하며 문재인정부 초기상황을 관찰하던 북한은 이 두 사건을 계기로 ‘평창올림픽 참가 및 특사단 파견’을 결정했다.
‘한국적 해법’의 가능성
‘2018년의 추억’은 현재의 비핵화협상 교착 타개를 위해서는 식량지원을 넘어 안보 우려 해소를 우선시하는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운다. 새로운 접근법이 비현실적이라거나 ‘빅딜’만 고집하는 미국이 거부할 것이라는 지레짐작은 일종의 편견이다. 트럼프행정부가 주장하는 빅딜론 역시 한번에 모든 걸 끝내자는 주장이 아니고 단계적 실행 과정이 동반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는 우리 정부가 주장하는 ‘포괄적 합의와 단계적 실행’(comprehensive agreement and phased implementation)의 기본방침과 일치한다. 또 빅딜과 대북 강경론이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미국에서도 안보 우려 우선 해소를 강조하는 새로운 대안들이 나오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대표적으로 미국 외교협회 회장 리처드 하스(Richard Haass)의 주장을 들 수 있다. 그는 “완전하고 검증 가능한 비핵화가 즉시 이루어지기 어려운” 현실을 인정하는 단계적 접근을 제안한다. 초기단계에서는 북한이 핵실험,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 생산 동결 및 핵시설 신고, 국제기관의 검증을 수용하는 대신 미국은 한국전쟁 종식, 워싱턴-평양 연락사무소 개설 등 북한의 안보 우려를 우선 해소하고, 그다음에 북한의 핵무기와 시설 해체에 비례하는 경제제재 완화를 통해 완전 핵 폐기와 경제제재 완전 해제 및 북미관계 정상화를 도모하자는 주장이다.(Richard Haass, “Picking Up the Pieces After Hanoi”)
하스의 주장은 완전한 비핵화에 대한 그의 부정적 전망으로 인해 사실상 비핵화협상 초기 단계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고, 또 그 초기단계 실행과제도 북한 입장에서는 등가교환이 아니라고 주장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한국정부는 하스와 같이 안보 우려 우선 해소를 중시하는 접근법을 골격으로, 완전 비핵화 실행 단계를 좀더 구체화하는 압축적이고 포괄적인 2단계 비핵화 추진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 거기에 국제 대북제재와 무관한 금강산관광이나 개성공단 재개 등을 적절하게 결합하여 상호 이행조치의 등가성을 높인다면 더욱 실현 가능한 한국적 해법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금강산관광이나 개성공단은 국제 제재의 결과는 아니지만, 내용적으로는 벌크캐시(대량 현금) 유출 금지와 기계·전자·운송수단 반출 금지, 그리고 합작사업 금지 등의 여러 유엔 대북제재와 연동되어 있으며, 개성공단 문제는 북한의 주요 외화가득원인 노동력 고용제한 문제도 걸려 있다. 특히 개성공단 재개는 대북합작 및 북한 노동력 고용 등을 둘러싼 중국과 러시아의 국제 대북제재시스템 협조 문제와 바로 연동되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매우 민감할 수밖에 없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북한이 최근 개성공단 재개를 부쩍 강조하고 있으며, 이는 국제 대북제재시스템의 약화를 위한 북한식 포석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 정부는 금강산관광을 우선순위로 점차 개성공단 재개까지 포괄하는 신중한 프로세스를 제시할 필요가 있다.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면 ‘대북제재의 결과물도 아니고 미국 등이 북한에 새로 자원을 투입하는 것도 아닌, 또 북핵 논란 속에서도 국제사회의 동의하에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대표적 남북경협 사업이 제재 대상에서 예외임을 설득해내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다. 안보 우려 우선 해소와 남북경협의 특수성을 적극 활용하는 한국적 해법은 미국을 설득하고 북한을 움직이게 할 만한 충분한 동력을 지니고 있다. 거기에 정치의 굴레에서 벗어난 적정 방식의 대북 쌀 지원과 인도적 협력 확대는 한국적 해법의 성공 가능성을 더욱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이승환 / 남북교류협력지원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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