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4·9총선에서 드러난 민심과 진보개혁진영의 향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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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4·9총선에서 드러난 민심과 진보개혁진영의 향배

고성 인터넷뉴스  | 입력 2008-04-16  | 수정 2008-04-16 오전 7:39:39  | 관련기사 건

총선이 1주일 전에 끝났다. 흙먼지가 가라앉은 전장에서 차분하게 주위를 둘러볼 수 있는 시점이다. 몇 가지 소박한 명제를 제시하면서, 그것에 근거하여 앞으로 진보개혁진영이 취해야 할 진로를 필자 개인의 단상 형식으로 정리하려 한다.


이번 총선은 깨끗하고 공정한 선거였다. 일부 일탈행위가 있었지만 국제적 기준으로 보아 선진 민주정치의 수준을 완전히 충족시킨 선거였다. `투개표 부정` 같은 말은 이제 더이상 한국정치의 단어장에서 발견되는 어휘가 아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듯 보여 우리가 흔히 간과하기 쉬운 점이다.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진행된 짐바브웨나 네팔 혹은 그전의 케냐 선거를 보라. 어찌 `그런` 나라들과 비교하는가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세계사적으로도 한국의 민주정치 발전은 모범적이다.


투명하고 효율적인 선거관리라는 점만 놓고 본다면 미국과 비교해도 하나 뒤질 게 없다. 깨끗한 선거를 치를 수 있는 정치적 역량은 절대로 만만한 업적이 아니다. 흔히 냉소자들은 민주정권이 보수정권과 다를 게 없다고 비아냥대곤 한다. 함부로 할 소리가 아니다.


끌로드와 웨스턴의 `인상파 색채` 정치이론을 보자. 인상파 그림들은 점묘로 이루어지므로 색세포 하나하나를 비교하면 엇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멀리서 보면 분명히 다른 그림들이 나온다. 정권의 색채도 마찬가지다. 미시적으로 보면 `그놈이 그놈`인 것 같아도 민주정권과 그렇지 않은 정권은 여름산과 겨울산 만큼이나 차이가 있다. 이런 믿음이 진보개혁진영의 자부심의 원천이 되어야 한다.       


투표율이 극히 저조했다. 선거정치에 대한 유권자의 냉담이 위험수위를 넘어섰고, 대의제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가 제기될 지경이 되었다. 이와 함께 지식계층을 포함해서 선거에 대한 전체 시민사회의 영향력이 낮아졌다. 전통적으로 한국정치를 견인해온 쌍두마차인 선거정치와 시민사회가 이제 무관심과 무기력의 상징으로 전락했다.


크게 보아,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추진하기 위해 정당정치를 확립해야 한다는 주장과 급진적인 운동정치를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지금까지 대립해왔다. 진실은 이 중간 어디쯤에 있다. 두 입장 모두 우리 현실을 적절히 반영하지 못한다.


실제 대중은 유권자로서 투표에 참여하고, `넷뿌리`(net root)로서 인터넷공간에서 정치참여를 하며, 시민단체에 후원 회비를 내고, 항의자로서 가두의 직접행동에 가담한다. 민주정치의 실천 경로와 양태가 다양해진 것이다. 이런 경향은 시민의 권리의식 고조, 모바일·인터넷 혁명, 지구화 추세로 인해 앞으로 더욱 심해질 것이다.


이러한 다면적 정치참여가 우리의 정확한 현실이다. 이런 경향을 정당정치로만 또는 운동정치로만 수렴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현대정치의 추세를 정확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투표율 저하가 반드시 정치적 무관심을 뜻하지는 않는다. 제도정치가 무시된다면 우리는 정치의 범위를 확장해서 상상해야 한다.


투표율이 낮으면 우리는 투표소 투표만이 아니라 인터넷 댓글과 1인시위도 일종의 투표행위라는 사실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시민들이 정치에 무관심하다고? 정치가 시민의 현실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이번 선거로 2006년 지방선거, 2007년 대선, 2008년 총선으로 이어진 진보개혁진영의 연속패배 3부작이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진보개혁진영 전체가 보수파에 패했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도 왼쪽이 더 몰락했다. 민주화세력과 진보정치세력이 동시에 퇴조한 것은 1987년 이래 최초의 일이다.


제일 뼈아픈 대목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어떤 노선이 `더 옳으냐`를 놓고 주로 논쟁해왔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사람들의 생각이나 사상은 논쟁을 통해 바뀌거나 설득되기 어렵다. 다른 한편, 진보와 개혁이 완전히 갈라서자는 주장 역시 현실성이 없다. 우리의 현실은 이론가들이 선호하듯 그렇게 이념적으로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앞으로도 상당기간 진보와 개혁은 `따로 또 같이` 갈 수밖에 없다. 합의도 어렵고 이혼도 어렵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차라리 투명하고 정직하고 일관성 있게 자신의 노선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의사소통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밀고 나갈 때 논리적으로 어떤 결과까지 감당해야 하는지 직시하고 그것을 공개적으로 인정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FTA 반대의 경우, 비민주적 절차와 심각한 부작용을 반대하는 것인지 대외무역 자체를 반대하는 것인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낼 필요가 있다. 만일 후자라면 우리 기업의 수출도 반대해야 하고, 무역에 의존하는 성장전략 자체도 반대해야 하며, 대안적인 경제체제를 주장하는 편이 논리적으로도 맞고 지적으로도 정직하다.


이런 구분 없는 단일대오식의 반대는 장기적으로 반대진영 전체의 영향력에 치명적인 해를 입힌다. 나는 어떤 노선이 `더 옳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주장의 일관성과 논리성의 수준을 높여야 생산적인 대화와 결론이 나올 수 있다는 말이다.


자본주의, 경쟁체제, 입시제도, 한미관계, 북한 인권 등 여러 이슈에서 이런 원칙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복합적`이니 `다층적`이니 하는 상투구 뒤에 숨지 말고 우리 모두가 `커밍아웃`해야 할 시점에 도달했다.


또한 진보개혁진영과 시민사회 내에서 건강한 `지지적 비판자`들이 더 많이 나와야 한다. 우리에겐 진정한 `등에`들이 부족하다. 모든 진보개혁진영이 `계급장` 떼고 솔직하게 생각의 변화, 경험의 교훈, 현실의 한계를 털어놓고 비판 앞에 노출되어야 한다.


내가 연구년을 보냈던 연구소의 동료 중에 시카고대학 어느 학과 출신이 있었다. 그 학과의 학풍을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쎄미나장의 분위기가 살벌하다. 노벨상 수상자부터 대학원생까지 모두 자기가 가장 최근에 쓴 논문만큼만 대우받는다." 진보개혁진영이 진짜 살아나려면 이런 원칙을 실천해야 하지 않을까? "과거는 묻지도 말고 내세우지도 말자, 누구나 `지금` 말하는 내용으로만 평가받자." 이렇게 치고 나갈 수는 없는 것일까?


이번 총선을 계기로 1987년 이래 좌우를 막론하고 암묵적 합의였던 근대적·공적 정치발전 기획이라는 대전제가 상당히 약해졌다. 세 가지 결과가 나왔다.


첫째, 탈근대적 정치기획이 유권자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예컨대, 성적 소수자가 출마한 것은 상징적 의미가 큰 정치변화였다.


둘째, 전근대적 정치의 유령이 기승을 부렸다. 지역정치는 여전히 강고했고, `주군`을 섬기기 위해 이기고 돌아와 `간신배`를 처단하겠다는 식의 봉건적 정치수사가 거리낌 없이 유포되었다. 유권자들은 현 대통령의 `형님정치`, 옛 대통령의 `따님정치` 등 혈연정치를 기꺼이 수용했다.


셋째, 공적 영역의 `시민권` 정치원칙이 힘을 잃고, 사적 영역의 `욕망권`이 투표행위의 주요 판단기준이 되었다. 유권자들은 뉴타운 건설이라는 공약에 `묻지 마` 식의 지지를 보냈다.


진보개혁진영이 최소한의 공통분모로서 합의할 수 있는 지점은 `공공성`이다. 한국의 유권자들은 민주화 진전 이후에 보수파의 집권을 경험해본 적이 없다. 우리 모두가 민주정치를 배우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보수파의 신자유주의적 개혁과 `실용주의`가 밑천을 드러낼 때쯤이면, `공공성`을 끊임없이 외쳐온 진보개혁세력을 유권자들이 다시 평가해줄 날이 반드시 오기 마련이다. 미국이 그랬고 영국이 그랬다. 임금노동자의 욕망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자신의 계급성과 상반되는 욕망을 가지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공공성에 기반해서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비용이 훨씬 적게 든다는 사실을 조만간 깨닫게 될 것이다.


또 하나의 화두는 `자발성`이다. 진보개혁진영은 뭐를 하든 `함께` 해야 한다는 입장과 `연대`를 같은 뜻으로 쓰곤 한다. 최근 시민사회단체의 지도자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내가 정부보조금 제도에 대해 시민사회 스스로가 가이드라인을 만들면 좋겠다고 말하자, 이분들이 원칙적으로 찬동하면서도 현실적으로 모든 단체들이 합의하는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게 어렵다고 대답했다. 나는 고충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우리 시민사회가 어떤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외국 같으면 어떻게 했을까? 문제의식을 가진 개인들 또는 단체들이 한둘 모여 일단 가이드라인 초안을 만들어 온라인상에서 발표할 것이다. 그리고 이 취지에 찬동하는 다른 단체들이 그 초안에 건설적인 비판을 하면서 갖가지 수정안을 내놓을 것이다.


참여한 단체들이 어느 시점에서 가이드라인을 완성한 후 여기에 찬동하는 단체들은 자기 단체 로고 옆에 크리스털 마크를 붙이는 식으로 그것을 실천하고 보급할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가이드라인은 순수하게 자발적이고 아무런 공식 구속력이 없지만, 참여 단체들의 도덕적 포부와 지향을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이 된다. 이런 움직임이 확산되고 세를 형성해가는 것이 진정한 연대이고, 이런 식의 자발적 연대만이 우리를 살릴 수 있다.


결론적으로, 진보개혁진영의 앞날에 왕도는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강요에 의해서이긴 하나, 정말 오랜만에 내부개혁을 할 수 있는 계기와 시간을 부여받았다는 점이다. 하늘이 내린 기회라 여기고 선용해야만 할 것이다.


민주주의를 이 땅에 실현한 세력이라는 자부심을 잃지 말되, 뼛속 깊이 쇄신하여 우리 공동체에 희망을 주는 세력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나는 진보개혁진영만이 그러한 시대적 소임을 감당할 수 있다는 믿음을 오늘도 내일도 놓지 않으려 한다.

 

저자 소개

 

조효제 /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런던정경대학 사회정책학 박사. 현 성공회대 NGO대학원 교수. 저서로 『인권의 문법』(2007)이 있으며, 편ㆍ역서로 『직접행동』(2007) 『세계인권사상사』(2005) 『전지구적 변환』(2002) 『NGO의 시대: 지구시민사회를 향하여』(2000) 『앰네스티 정책편람』(1992) 『인권이란 무엇인가』(1988) 『사형제도의 이론과 실제』(198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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